소설리스트

당신이 잠든 사이에-94화 (94/96)
  • 외전 8화.

    차에 오르자마자 노트북과 태블릿을 꺼낸 설우가 사내 인트라넷을 열어 자료창을 겹겹이 띄웠다.

    “꼬맹이, 포도젤리 챙겨 왔어?”

    “캐리어에.”

    빼곡히 채워진 일정한 폰트를 읽는 눈에 피로가 가득했다. 대충 빌린 렌터카 차체가 흔들릴 때마다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바쁜데 굳이 뭐 하러 와? 연이 잘 있다니까. 바람이라도 날까 봐? 뭐, 한서준이랑 친해 보이긴 하더라.”

    장난기 많은 이든이 불난 집에 기름을 떠다 부었다. 순간 스마트펜을 떨어뜨린 설우가 사납게 눈을 치켜떴다.

    “스킨십은 별로 없던데. 어깨동무 정도? 아주 건전했어.”

    “입 닫아라.”

    “크흠, 리조트로 갈 거지?”

    “응.”

    다시 서류를 훑으려 했지만, 도무지 집중이 되질 않았다. 결국 한숨과 함께 노트북을 닫았다.

    “계속 붙어서 찍어?”

    “따로 찍는 게 더 많아. 구경하는 거 재밌더라, 꼬맹이 진짜 프로야. 집에서랑은 딴판. 물론 쉬는 시간엔 영락없는 우리집 막둥이지, 어찌나 젤리를 찾아대는지.”

    “보는 것도 곤욕이겠는데.”

    헛짓하지 말고 룸으로 올라갈까.

    질투에 대한 깊은 고찰의 결과, 참을 수도 없고 숨길 수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아내의 일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능력 있는 남편을 연기해야 하는데.

    한서준과 연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면, 질투에 눈이 멀어 제주도까지 쫓아온 못난 남편임을 들킬 것만 같았다.

    연이 보고 싶은 마음과는 별개로 진지한 고민이 이어졌다. 찌질한 감정을 컨트롤할 자신이 없었다.

    호텔 건물로 들어가 짐을 두고 나온 설우는 커다란 포도가 그려진 젤리 봉지를 들고 촬영장을 찾았다.

    실내 촬영은 설우가 협찬한 파라다이스 리조트의 독채 빌라에서 이루어졌다.

    조명과 의상, 스텝들이 전부 들어와 있어도 전혀 비좁아 보이지 않을 만큼 넓은 평수를 자랑했다.

    “잠깐 쉬는 시간인가 봐.”

    이든이 이리저리 눈을 굴렸다. 설우를 데리러 나갈 때와는 사뭇 다른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연은 없었다.

    “어? 차설우 사장님?”

    먼저 다가온 건 한민준 대표였다.

    “한 대표도 같이 온 겁니까?”

    “예, 촬영 끝나면 서준이랑 좀 쉬다 가려고요. 이번 촬영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브랜드에서 서준이랑 연이 씨를 함께 원했거든요. 차 사장님께서 반대하셨으면 살짝 곤란할 뻔했습니다.”

    “연이가 원하는 건 들어주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연의 납치 사건과 병증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민준이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민준의 근처에 있던 스텝들이 호기심 어린 얼굴로 설우를 흘깃거렸다.

    우리나라 원탑으로 꼽히는 재벌을 화보 촬영장에서 마주친다는 게 신기했다.

    “아, 연이 씨는 마스터룸에 있습니다. 10분 정도 쉬었다가 다시 시작할 거예요.”

    “네, 그럼.”

    설우는 곧장 민준이 가리킨 방을 찾아 사라졌다.

    “젤리 가지고 오셨네.”

    “맞죠? 저거 선우연 씨가 촬영 때 먹는 젤리죠?”

    연과 여러 번 촬영했던 잡지 에디터가 호들갑을 떨었다. 서늘한 인상과 귀여운 젤리 봉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응.”

    “와, 진짜 연애 결혼인가 보다.”

    “가짜 연애 결혼은 뭔데?”

    “뭐…. 재벌가엔 비일비재하잖아요, 그런 거.”

    당연한 물음에 조 실장이 어깨를 들썩였다.

    “심각한 애처가야. 그러고 보니까 조 실장 샬롯 룩북 촬영 때 있었잖아.”

    “네, 아직도 신기하다니까요. 안수정이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 사람 일은 모른다더니, 착한 사람 괴롭혀서 벌 받았나 봐.”

    “벌 받은 거 맞지. 그거 저 양반 짓이거든.”

    “저 양반이 무슨…. 정말요? 이번에 터진 거 전부?”

    “전부.”

    검지를 세워 입술 앞에 세웠던 민준이 이어서 목을 그었다. 경악할만한 진실을 들은 조 실장은 눈만 끔뻑일 뿐이었다.

    “야, 꼬맹.”

    메이크업 수정을 받다가 고개를 돌린 연이 이든의 뒤를 따라 들어오는 설우를 보고 환하게 미소 지었다.

    “오빠!”

    “잘 있었어?”

    “네.”

    “잠은?”

    “혼자서도 잘 잤어요. 젤리 주세요.”

    촬영 틈틈이 꼭 먹어줘야 하는 포도젤리였다. 설우만큼 반가운 젤리를 뜯어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볼을 씰룩이며 총총 다가간 연이 내내 기다렸던 품에 폭, 안겼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홀로 누운 잠자리가 편했을 리 없었다.

    “보고 싶었어요.”

    “나? 아니면 젤리?”

    “당연히 오빠죠. 날 어떻게 보고!”

    격한 부정과 함께 주먹을 불끈 쥔 연은 금세 멀어져 젤리를 털어 넣었다. 말과 행동이 정반대였다.

    “불편한 건 없어?”

    “네. 이리 와요, 오빠. 내가 스텝들 소개해 줄게요.”

    설우의 팔을 잡고 달라붙은 연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남편을 자랑했다.

    스텝들이 반색하며 설우를 맞으니 덩달아 기분이 들떴다.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설우의 볼에 슬쩍 입을 맞춰주고 떠나간 연이 먼저 자리를 잡은 서준과 등을 대고 앉았다.

    뒤통수에서 허리 끝까지, 빠짐없이 밀착된 자세를 보기 힘든 설우가 잠시 눈가를 문질렀다.

    “테스트컷 먼저 갈게요.”

    셔터가 여러 번 눌리고, 이어진 모니터로 사진을 확인한 작가가 만족스럽게 촬영을 이어갔다.

    “좋아요, 좋아. 둘 다 고개 뒤로 조금만 젖히고. 약간 부드럽게, 그렇지!”

    “서준 씨 어깨에 기댈게요. 어, 지금 좋아요.”

    “어때, 잘하지?”

    어느새 다가온 이든이 설우의 옆에 섰다. 말로만 들었을 뿐 굳이 찾아다니지 않던 촬영장이었다.

    “응, 진작 와볼 걸 그랬네.”

    한 대표가 왜 욕심을 내는지 알 것 같았다.

    본인의 일을 즐기는 연은 펠리체 안에서보다 훨씬 생기가 넘쳐 보였다.

    편안한 분위기를 유지하기 위해서인지, 서준과 연은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며 웃었다.

    “다 컸어, 우리 꼬맹이.”

    “그러게. 내가 오지 않았어도 혼자 잘했겠네.”

    질투도 물론 났지만, 그보다 더 크게 와닿은 건 상실감이었다.

    “예쁘게 잘 살 수 있어서 다행이야.”

    진심으로 기뻐하는 이든에게 쉽사리 동조하지 못했다. 그러기엔 불순한 마음이 제법 많았다.

    “…다행이지.”

    복합적인 감정이 느껴지니 저도 모르게 입매가 굳어졌다. 혀끝에 맴도는 입맛이 씁쓸했다.

    촬영이 끝나고 파라다이스 리조트의 루프탑에서 파티가 이루어졌다. 설우의 선물이었다.

    이름있는 셰프들이 직접 나와 오픈키친으로 음식을 준비하는 모습은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화려했다.

    테이블마다 깔린 값비싼 와인과 샴페인은 끝없이 채워졌고 취기가 오르자 하나둘 온수풀로 뛰어들었다.

    옥상 아래로 펼쳐진 제주 앞바다의 뷰까지 완벽했다.

    스텝들과 어울려 무알콜 샴페인을 마시던 연은 뒤늦게 루프탑으로 나온 설우가 인사를 마치자마자 그를 끌고 룸으로 내려왔다.

    “왜, 그만 놀 거야?”

    “오빠랑 놀 거예요. 촬영할 때부터 표정 안 좋은 거 다 봤어요.”

    “알아줘서 고맙네.”

    갑갑한 재킷과 넥타이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오빠, 만세할까요?”

    심기가 불편한 설우의 앞으로 쪼르르 다가간 연이 슬슬 눈치를 살폈다.

    다리를 꼬고 앉아 소파 등받이에 기대 마음을 가다듬던 설우가 눈을 치켜떴다.

    “버릇을 한참 잘못 들였지.”

    이게 어디서 자꾸 몸으로 때우려 들어?

    “촬영 허락받을 때도 그렇고, 사회생활 좀 배웠다고 영악해져서는.”

    “오빠가 좋아하는 걸 주려는 거죠. 화났어요?”

    “아니, 나잇값 못하는 질투.”

    “한서준 씨한테 아무 감정 없어요. 난 오빠만 사랑하는걸요.”

    “공사도 구분할 줄 모르냐고 윽박질렀던 직원들한테 사과해야겠어.”

    “왜요?”

    “나도 못 하고 있으니까. 만세 해.”

    연이 기다렸다는 듯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렸다.

    당연히 벗길 줄 알았는데.

    얇은 손목을 엑스자로 모아 잡은 설우가 한 걸음씩 가까워졌다. 벽까지 밀려나 등을 붙인 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빠?”

    “물어.”

    통이 큰 연의 티셔츠를 걷어 올린 설우가 옷자락을 입에 물려주었다.

    금안이 당황스럽게 굴러갔다.

    짓궂은 미소와 함께 드러난 속옷을 끌어 내린 설우는 하얀 살덩이를 잡아 입에 넣었다.

    “아, 으읏…!”

    “잘 물고 있어.”

    타액에 뒤섞인 살결이 더운 입속으로 빨려 들어가자 발가락이 모조리 굽어들었다.

    설우는 필요 이상으로 진득한 전희를 불어넣었다.

    집요한 자극을 이기지 못하고 헐떡이던 연이 끝내 울먹거렸다. 밝은 형광등 아래 벌겋게 물들어 움찔거리는 몸이 부끄러웠다.

    내가 마신 건 분명 무알콜이라고 했는데.

    눈앞이 빙글빙글 도는 게 꼭 취한 것만 같았다.

    “내일 촬영 몇 시야.”

    능숙하게 손가락을 굴리며 고개를 든 설우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눈시울을 붉힌 채 앙앙거리는 얼굴은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았다.

    대답하기 위해 침을 꼴딱꼴딱 넘기던 연이 다리 사이를 비집는 손에 놀라 숨을 들이켰다.

    점막에 달라붙은 이질적인 천이 흠뻑 젖어 흐물거렸다.

    이상하리만큼 예민한 몸이 멋대로 들썩였다.

    “오, 오빠. 나, 나….”

    “마저 벗겨줄까?”

    부스스한 백금발이 위아래로 찰랑였다. 정직한 욕정이 담긴 시선을 마음껏 감상한 설우가 착실하게 물고 있던 옷자락을 빼주었다.

    “연아.”

    “네.”

    “그동안 네가 날 얼마나 괴롭힌 줄 알아?”

    “…네, 알아요.”

    “원하는 게 있을 때마다 달려들어서 어떻게 했지?”

    “오빠는 젤리가 아닌데, 오빠 몸을 젤리처럼 막, 그랬어요.”

    귀여운 대답에 웃음이 터졌다. 순수악 그 자체였다.

    “나는 영악한 다람쥐입니다, 해 봐.”

    “나는 영악한 다람쥐입니다.”

    “좋아. 촬영하는 시간 빼곤 나랑 여기서 계속 뒹구는 거야.”

    맨살을 완전히 드러낸 연을 안아 소파에 내려놓은 설우가 단정하게 채워진 셔츠 단추를 풀었다.

    “앞으론 입으로 그런 거 하지 말까요?”

    “아니, 해. 안 하면 혼나.”

    “….”

    너른 품속에 갇힌 연이 머리색과 같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해도 지랄, 안 해도 지랄.’

    이든의 나쁜 말이 떠오른 건 아주 잠깐이었다.

    “그리고 연아.”

    “네.”

    “고마워, 잘 버티고 곁에 있어 줘서. 이렇게 예쁘게 잘 살아줘서.”

    오늘 너무 잘하더라, 그래서 조금 슬펐어.

    “다 오빠 덕분…!”

    설우가 본격적으로 움직인 후엔 아무런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뜨거운 살덩이가 퍼즐처럼 들어맞았다. 서로 다른 촉감이 부딪혀 후덥지근한 열기를 품었다.

    이물감이 사라진 살결이 주는 감각은 생각보다 더욱 황홀했다.

    “사랑해.”

    소파 위에서, 바닥에서 그리고 허공에서. 무자비한 포식자는 작은 몸을 놓아주지 않았다.

    촬영하고, 먹고, 자는 시간을 빼면 한시도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