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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잠든 사이에-68화 (68/96)
  • 68화.

    ‘오늘은 일어날 거지? 기다리고 있을게.’

    귀를 머금고 속삭이는 것처럼.

    다정한 음색이 머릿속을 윙윙 울리자 설우를 찾듯 손을 움직이던 연이 눈을 떴다.

    차 회장의 서슬 퍼런 고함을 듣던 게 기억의 마지막이었다.

    익숙한 향과 익숙한 침대, 설우의 방이었다.

    혼자 있음을 증명하듯 방안은 지나치게 고요했다.

    “아?”

    서둘러 침대에서 내려가려다 다리가 풀린 연이 철퍼덕, 바닥으로 엎어졌다.

    어지러워.

    세상이 빙빙 도는 현기증에 그대로 다시 눈을 감았다.

    젖은 솜이불처럼 무거운 몸엔 힘이 느껴지지 않았다.

    “연아!”

    마침 방으로 들어온 첸이 러그 위를 뒹구는 연을 재빨리 일으켰다.

    “첸. 오빠는요?”

    목소리마저 형편없이 갈라졌다.

    자는 건 아주 익숙한 일인데. 묘한 이질감이 들었다.

    “출근했어.”

    “아아, 나 여기 언제 왔어요? 오빠랑 할아버지가 많이 싸웠는데, 아무 일 없죠?”

    “5일째야.”

    “네?”

    “너 한남동에서 잠든 거. 오늘로 5일째야.”

    “세상에.”

    5일 만에 감정이 담긴 눈동자가 좌우로 요동쳤다.

    당황스럽고 두려운 마음보다 설우가 먼저였다.

    “오빠 많이 힘들어해요?”

    자의가 아니었다.

    이든의 사고 직후 이틀을 잤을 땐 눈앞에 닥친 상황과 돌아온 기억을 회피하고 싶은 바람이 있었다면 이번엔 그렇지 않았다.

    차 회장이 두려웠지만 버티고 이겨내리라 다짐했었다.

    “설우 괜찮아, 씩씩해.”

    애태우는 사람을 두고 이렇게 오래 자면 안 되는 거잖아.

    “설우 오빠 불쌍해서 어떡해요, 첸.”

    커다란 눈에서 후두둑, 눈물이 쏟아지기 무섭게 첸이 연을 안아주었다.

    네가 더 가엽다는 말이 입안을 굴렀다.

    목말라요, 배고파요, 화장실 가고 싶어요. 넋 나간 환자처럼 초점 없는 눈으로 하루에 세 마디가 전부인 넌.

    살을 찌우기 무섭게 다시 야위는 넌.

    “깨서 놀라면 정말 괜찮다고 전해달래. 너 운다고 설우한테 이를 거야.”

    “아, 아니. 나 안 울어요, 첸. 너무 오래 잤더니 눈이 아파서 그래요. 오빠한테 말하지 마세요.”

    황급히 눈물을 닦은 연이 첸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자, 설우한테 전화해. 회의 중이긴 한데 네 전화는 받을 거야. 너 루돌프 같아.”

    입술을 앙다물고 울음을 참는 연에게 휴대 전화를 건네준 첸이 금세 빨개진 코를 눌렀다.

    “끝날 때 할게요.”

    “아니면 회의 끝나기 전에 회사로 갈까? 서프라이즈.”

    “서프라이즈?”

    “깜짝 선물. 내가 도시락 싸줄 테니까 기다렸다가 설우 회의 끝나면 같이 먹어.”

    “첸은요?”

    “데려다만 줄게. 내가 없어야 효과가 좋지. 준비하고 나와, 빨간 리본 달아줄게.”

    정말 해도 되는 건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는 연을 부추긴 첸은 곧장 김밥 재료를 꺼내 놓았다.

    설우만큼이나 그늘져있던 입가에 5일 만에 미소가 피어난 첸은 능숙한 손길로 김밥을 말기 시작했다.

    연에겐 괜찮다고 했지만 3일이 지나자 설우는 극도로 불안해했다.

    겨우 두, 세 시간 쪽잠을 자고 밥은 제대로 넘기지도 못하면서 고집스럽게 출근을 했다.

    혼자 어디 처박혀 우는 건지. 눈이 발간 채로 돌아다니던 친구가 좋아할 생각을 하니 벌써 가슴속이 뜨거웠다.

    “아, 이든.”

    죽상을 한 채 병원에 간 이든에게도 짧은 문자를 보낸 첸은 연이 들고 갈 도시락을 싸기 위해 손을 바쁘게 움직였다.

    지잉, 자동문이 열리자 비서실을 지키던 여비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녕하십니까, 이사님. 오셨어요, 사모님.”

    정체불명의 여자에서 어느새 사모님이 되어버린 연에게 꾸벅, 고개를 숙인 비서가 연이 내민 도시락과 커피를 받아 들었다.

    “첸이 비서님들 것까지 만들었어요. 맛있게 드세요. 엄청 맛있을 거예요.”

    “예? 이사님께서요?”

    연의 목에 달린 거대한 리본을 황망하게 보던 여비서가 얼떨떨한 얼굴로 되물었다.

    “만들다 보니 너무 많아서 가져왔어요. 비서실 직원들이랑 나눠 먹어요. 차 사장 회의 몇 시까지죠?”

    “아, 11시면 끝나실 거예요.”

    “보다시피 서프라이즈니까 보고는 하지 말아요.”

    “네, 알겠습니다.”

    빨간 리본을 가리킨 첸이 업무용 미소를 짓자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이는 여비서의 얼굴에 홍조가 피었다.

    “들어가, 연아.”

    “네, 이따 봐요!”

    화사한 미소로 첸에게 인사한 연은 곧장 집무실로 들어갔다.

    탁.

    주인 없는 집무실을 둘러보며 숨을 곳을 찾던 연은 차 회장을 피해 숨었던 책상 밑에 자리를 잡았다.

    도시락을 옆에 고이 모셔두고 남는 시간을 보내기 위해 여전히 어색한 휴대 전화를 꺼내 쥐었다.

    몇 번 써본 적 없는 검색창을 누른 연이 이런저런 검색어를 입력했다.

    <속상한 남편 달래주는 법>

    <남편한테 이벤트>

    <아내가 아파서 힘들어하는 남편>

    마지막 검색어를 입력했다 지우며 괜스레 찡한 코를 문지른 연이 이벤트 연관 검색어로 나온 첫날밤 이벤트를 눌러 보았다.

    그리고 다시 연관 검색어로 나온 첫날 밤 속옷.

    “첫날밤에 입는 속옷이 따로 있단 말이야? 헙!”

    액정을 가득 채운 야한 속옷들을 보고 놀라 입을 막은 연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새로운 세상을 구경했다.

    <이런 이벤트가 워낙 흔하니 우리 예랑이도 기대한다고 함.>

    예랑이는 또 뭐람.

    “예, 랑, 이, 아 예비 신랑.”

    오빠는 내가 못할 걸 알았으니까 기대도 안 했겠지.

    못 해준 것만 생각이 나니 시무룩해진 연이 여러 종류의 란제리들을 구경했다.

    상상도 못 해 본 것들이 수두룩한 가운데 하얀색 망사로 이루어진 슬립이 눈에 들어왔다.

    “어, 이거 내 옷장에 있는 거 같아.”

    처음 설우와 쇼핑했던 날 보지도 않고 전부 사들였던 홈웨어 중에 스치듯 본 적이 있었다.

    어디 위에 걸쳐 입는 건가 싶어 건들지도 않았었는데.

    좋아, 두 번째 선물은 너다.

    “회의 끝나셨어요?”

    “쉴 거니까 보고는 오후에 하세요.”

    “네, 사장님.

    만족스러운 미소가 스멀스멀 피어오를 때쯤 먼발치에서 설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늘 다정한 속삭임만 들으니 착 가라앉은 저음은 오랜만이었다.

    떨려, 너무 떨린다.

    오빠가 싫어하면 어떡하지? 아니, 너무 놀라면 어떡해?

    문이 열리고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거세게 뛰는 심장이 존재감을 과시했다.

    구김 없이 빳빳한 슬랙스가 눈에 들어오고,

    “하아.”

    착잡한 한숨이 지나간다.

    지친 몸을 앉히고 잠시 눈을 감았던 설우가 톡톡, 톡톡, 제 정강이를 두드리는 주먹에 놀라 허리를 기울여 책상 밑을 확인했다.

    “짠! 선물 왔어요.”

    순간 헛것이 보이나 싶어 눈을 비벼 봤지만 빨간 리본을 단 연은 계속 그 자리에서 웃고 있었다.

    “…….”

    “선물은 빨리 풀어 봐야 해요.”

    연이 쭉, 목을 내밀자 설우가 털썩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오빠 선물이야?”

    “네, 하나밖에 없는 선물입니다아. 일어나자마자 바로 왔어요. 오래 자서 미안해요.”

    “진짜….”

    “놀랐어요?”

    “진짜 너무 좋다.”

    웃는 법을 잊은 듯 딱딱하게 굳었던 입매가 거짓말처럼 높게 치솟았다.

    “우리 오빠 웃는 거 너무 예쁘다.”

    함박웃음을 짓는 설우를 따라 해사하게 웃은 연이 책상 밑에서 기어 나왔다.

    “왜 이렇게 오래 잤어,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잖아.”

    얼마나 좋은지. 설우의 볼이 연과 닮은 복숭앗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잠든 얼굴은 질리도록 봤지만, 생기 넘치는 연을 보는 것과는 달랐다. 그러니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을 수밖에.

    “많이 속상했죠? 자꾸 오빠 마음 아프게 해서 큰일이에요.”

    “전혀. 생각지 못한 선물을 받아서 속상했던 건 다 잊었어.”

    “그럼 다행이고요.”

    죽을 것처럼 힘들었는데. 눈앞에 웃고 있는 널 보니 거짓말처럼 모든 게 잊혔다.

    “이리 와, 내 예쁜 다람쥐.”

    “리본 풀어줄 거예요?”

    바닥에 앉은 설우의 위로 냉큼 안긴 연이 고개를 좌우로 까딱거렸다.

    “아니, 종일 내 선물해.”

    “좋아요! 이건 첫 번째 선물이고요, 두 번째도 있고 세 번째도 있어요.”

    “나 오늘 생일이야?”

    “음, 생일 말고. 오늘은 오빠 위로받는 날.”

    “위로받는 날?”

    “힘들었던 5일만큼 행복한 하루를 선물할게요.”

    “이미 행복해.”

    자는 동안 제대로 먹지 못해 야윈 연을 품속 깊이 끌어안은 설우가 그녀의 어깨로 얼굴을 묻었다.

    이대로 영원히 시간이 멈춘다고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내가 많이 사랑해요. 스트레스받아서 오래 잔 거 절대 아니에요.”

    “그래, 나도 많이 사랑해.”

    “첸이 맛있는 거 많이 싸줬어요. 같이 먹어요.”

    “다른 거 먹고 싶은 건 없어? 폭식해도 되고 빨리 먹어도 되니까 다 먹어.”

    배고픔을 느끼고 일어나도 하루 한 끼도 채 먹지 않았기에 뭐든 먹이고 싶었다.

    “짜장면!”

    “좋아. 또?”

    “스테이크요.”

    “그것도 좋아.”

    “그럼 우리 이제 바닥에서 일어날까요?”

    “하하하! 그래, 안아줄게.”

    혼자 일어나겠다고 할 시간도 없이 두꺼운 팔이 연을 안아 들었다.

    “5일 동안 뭐 했어요?”

    “너 일어나기만 기다렸지.”

    “아! 그 말 나한테 했죠? 오빠 목소리가 들리는 거 같았어요.”

    “아침마다 했어.”

    “오늘은 안 잘게요.”

    “진짜?”

    “진짜!”

    “약속.”

    “네, 약속.”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임을 알지만, 주문을 걸듯 서로 새끼손가락을 걸어 보았다.

    즐거운 웃음을 터뜨린 연이 소파에 앉아 첸이 싸준 3단 도시락을 차례로 내려 김밥 하나를 설우에게 내밀었다.

    주인의 기분에 따라 가라앉았던 집무실에 오랜만에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아쉬워 볼멘소리를 하는 첸과 이든을 뒤로 한 채 한남동으로 돌아온 연이 설우 몰래 챙겨온 망사 슬립을 꺼내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같이 씻자는 설우를 밀어내고 먼저 샤워를 마친 연은 한참 동안 골머리를 썩었다.

    속옷을 벗고 입어야겠지? 아니, 입고 입는 건가.

    직접 착용한 사진은 보지 못했기에 쉽사리 결정할 수가 없었다.

    “으, 이러다 오빠 나오겠네.”

    물소리가 끊길까 봐 발을 동동 구르던 연이 드디어 결심한 듯 가운을 벗었다.

    하얀 속옷 위에 걸쳐 입고 거울을 보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풀어 놓은 빨간 리본까지 다시 목에 거니 제법 괜찮은 차림이었다.

    부끄러우면서도 마음에 쏙 드는 이유가 뭘까.

    들뜬 기분으로 총총, 걸어 나온 연이 욕실 앞에서 설우를 기다렸다.

    바닥을 때리는 물소리가 멎고 얼마 지나지 않아 허리에 배드타월을 두른 설우가 젖은 머리를 털며 욕실을 나왔다.

    “?”

    “짠! 두 번째 선물도 나예요.”

    설우의 손에 들려있던 수건이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물기가 남은 상체는 물론 핏대 선 목까지 열감이 차올랐다.

    “미친다, 진짜.”

    “첫날밤 이벤트라는데 난 못 해줬어요. 어때요?”

    “어떻긴 뭘 어때, 환장하게 좋지. 잡아먹힐 준비는 됐고?”

    “완전. 원하는 만큼 가능해요.”

    하체를 가린 수건부터 풀어낸 설우는 지체 없이 달려들었다.

    여린 살을 탐하는 손길이 평소보다 거칠고 사나웠다.

    초반에 당당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어진 연이 그만하자고 매달려 봤지만 설우는 멈추지 않았다.

    덕분에 두 번째 선물을 조금 후회하게 된 연이었다.

    길었던 관계가 끝나니 금세 자정에 가까워진 시간이었다.

    약속처럼 정말 잠들지 않은 연은 설우의 팔을 베고 누워 길쭉한 손가락을 조물거렸다.

    “세 번째 선물은 뭐야?”

    “오빠 잠들 때까지 지켜봐 주기. 세 번째 선물까지 줄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네가 먼저 자야지.”

    “5일 내내 제대로 못 잤을 거 알아요. 오늘은 편히 자요. 낮잠 안 잔다는 약속도 지켰으니까 자면서 움직이지도 않을게요.”

    “정말 선물 같은 하루네.”

    피로가 가득한 눈이 곱게 휘었다.

    앞으로 남은 날들이 오늘과 같을 수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아넘길 텐데.

    “나는 꼭 나을 거예요, 오빠.”

    “당연하지.”

    “오빠가 매일 예쁘게 웃을 수 있게 열심히 버틸게요.”

    천사 같은 널 데려가면 그건 신이 아니라 악마일 거야.

    “고마워.”

    “오빠를 다치게 하는 거 빼고 다른 건 하나도 무섭지 않아요.”

    영영 눈을 뜨지 못하는 것도 두렵지 않았다. 죽는 게 두렵다면 혼자 남아 슬퍼할 설우 때문이었다.

    “다치게 해도 괜찮아.”

    “그건 정말 싫어요. 이제 눈 감아요, 오빠.”

    “정말 재워주게?”

    “그럼요, 토닥토닥해줄게요.”

    매일 잡는 손가락을 놓은 연이 설우의 넓은 등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금방 잠들겠는데.”

    “잘 자요, 내일 아침에 봐요.”

    연이 등을 토닥인 지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고른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설우가 먼저 잠든 건 처음이었다.

    평온한 얼굴을 한참 뜯어보던 연은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았다.

    내일 아침 함께 눈을 뜨길 바랐고, 지친 그에게 오늘 하루가 큰 위로가 되었길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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