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죽음을 바칠 시간-103화 (103/123)

103. 젖어든 솜

“라울, 라울?”

에릭이 떠난 뒤 홀로 윈터 저택을 둘러보던 일리안은 자신이 내내 찾고 있던 이가 나오지 않자 얼굴을 찌푸렸다. 타피아와 디노, 심지어는 에릭마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건만 라울은 머리카락도 보이지 않았다.

타피아는 이미 일리안을 위해 요리를 하러 떠난 뒤였다. 마침 현관을 통해 건물로 들어오고 있는 디노가 보였다. 일리안이 제법 다급한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마침 잘 왔다. 디노, 라울은?”

“예?”

“라울 말이야, 라울. 왜 내 눈에는 보이질 않냐.”

혹시 디노와 함께 정원에 있던 것인가 싶던 일리안이 고개를 빼꼼 내밀어 그의 뒤를 살폈지만 조그만 아이의 머리는 보이지도 않았다.

“저… 헤이븐 님. 라울 님이 말입니다.”

“어, 왜? 말해. 지금 어디 있는데?”

디노는 어딘지 자꾸만 망설이는 태도로 대답하기를 머뭇거렸다. 결국 참다못한 일리안이 그를 재촉하려 했을 때였다.

“헤이븐 님을… 안 보고 싶다 하십니다.”

“뭐?”

“그러니까, 조금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헤이븐 님이 보기 싫대요.

디노의 말에 일리안이 작게 입을 벌렸다. 디노는 그녀가 그런 반응일 줄 알았다는 듯 눈을 피했다.

라울이 일리안을 보고 싶지 않아 했던 적은 없었다. 이전 생에서 아이와 단둘이 지낼 때에도 일이 조금 바빠 아이를 홀로 두는 경우가 있어도 그녀가 돌아오면 활짝 웃던 아이였다.

늘 퇴근 뒤 지친 일리안에게 뒤뚱뒤뚱 달려왔는데, 대체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일리안의 입매가 묘하게 떨리었다.

“보기… 싫다고?”

“예, 죄, 죄송합니다.”

“아니, 디노가 죄송할 일은 아니지. 그래서 라울은? 지금 어디 있다고?”

윈터 저택을 하루 종일 찾아도 보이지 않던 아이였으니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라도 있을까 싶었다. 부엌이나 욕실같이 일리안이 찾지 않을 법한.

음, 하고 입을 다신 디노가 이어서 입을 열었다.

“헤이븐 님 방에 계십니다.”

* * *

내 꼴도 보기 싫다고 한 녀석이 대체 제 방에는 왜 있는 건지.

물론 라울이 꼴도 보기 싫다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섭섭했던 일리안은 다소 성난 걸음으로 쿵쿵 복도를 걸어갔다.

라울을 찾으면 엉덩이를……. 아니, 고 자그만 아이가 때릴 곳이 어디 있단 말인가? 엉덩이도 때리지 못할 테니 결국 안아주고 말 테지만 그래도 서운한 것은 서운한 것이었다.

마차를 타고 오는 길에 장난감 가게에 잠깐 멈춰 선 일리안은 3차 지원군에 참가해 받은 돈으로 아이가 좋아할 법한 곰 인형을 사 온 참이었다. 아이를 찾느라 잠시 내려두었던 곰 인형이 일리안의 손아귀에 꽉 잡혀 있었다.

제 방 앞 복도에 선 일리안이 들어가기 전 문을 두드렸다. 제 방이니 문을 두드릴 필요도 없었지만 안에 있을 라울에게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똑, 똑.

안쪽에선 들려오는 소리가 없었다. 라울에게 줄 곰 인형을 고쳐 안은 일리안이 말했다.

“들어간다, 라울.”

자신이 보기 싫다고 한 라울에게 섭섭한 것이 반, 그리고 아이가 보고 싶은 마음이 반이었다.

3차 지원군으로 들어갈 때만 해도 얼마 남지 않은 토벌 일정에 잠깐이면 된다고 생각했었다. 이렇게도 오래 떨어져 있을 줄은 일리안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달칵.

문을 열고 들어선 일리안의 눈에 익숙한 침대가 보였다. 물론 그녀가 보고자 한 것은 침대가 아니었다. 그러나 아무리 눈을 돌려도 보이는 것은 없었다.

의아한 얼굴로 방에 들어간 일리안이 먼저 침대로 걸어갔다. 혹시 이불 속에서 아직 자고 있는 것인가 싶은 탓이었다. 물론 이불은 평평하게 펴져 있었다.

그러다 문득 일리안의 눈에 무언가가 보였다.

제 발 옆, 침대 아래에 무언가가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눈만 내려 그것을 자세히 살펴보니 라울의 파란색 잠옷이었다.

그러자 슬슬 보지 못했던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베개 위에는 라울의 금색 머리카락들이 몇 개 빠져 붙어 있었고, 이불 위로 라울이 가장 좋아하는 토끼 인형도 귀를 빼꼼 내밀고 있었다.

일리안은 부러 모른 척 휘파람을 불며 중얼거렸다.

“라울이 어디 있지. 집 안을 다 뒤져도 없던데.”

“…….”

“자알 숨어라, 라울. 들키면…….”

휘파람을 불자 침대 아래에 삐죽 튀어나와 있던 파란색 잠옷이 눈에 띄게 움찔거렸다. 그것을 보고 푹 웃은 일리안은 침대 앞에 쪼그려 앉았다.

“엉덩이 맞는다?”

침대 아래에는 조그만 엉덩이 하나가 실룩이고 있었다. 일리안의 목소리가 제 옆에서 들렸다는 걸 알았는지, 아이가 고개를 뒤로 돌렸다.

라울의 푸른 눈과 씩 웃고 있는 일리안의 눈이 마주쳤다. 일리안이 아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리 와, 라울. 왜 거기 들어가 있는 거야?”

제 위치가 들켰다는 걸 안 라울의 눈이 순간 그렁그렁해졌다. 당황한 일리안은 손가락을 꿈지럭대며 아이를 달래주려 했지만, 라울은 그녀의 손을 무시하고 천천히 기어서 침대 밑을 빠져나왔다.

침대 아래를 나온 라울의 머리카락에 회색 먼지 하나가 붙어 있었다. 그것을 떼어주려 일리안이 손을 뻗자 라울이 한 걸음 물러섰다.

“……라울? 왜 그래?”

라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일리안을 올려다보며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자신에게 손대지 말라는 뜻이었다.

일리안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었다. 당황한 그녀는 제 손에 쥐어져 있던 곰 인형을 살며시 건네었다.

곰 인형이 부들, 떨었다.

“이거……. 선물인데. 어? 내가 그거 사러 다녀온 거거든…….”

내밀어진 곰 인형을 라울이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아 들었다. 곰 인형의 허리를 양손으로 붙잡고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그때였다. 라울은 제 손에 쥐어져 있던 곰 인형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어찌나 세게 던졌는지 곰 인형이 바닥을 데구루루 굴러 문 앞까지 흘러갔다. 버려진 곰 인형의 얼굴이 구겨져 있었다.

“라울!”

그것을 멍하니 지켜보던 일리안이 놀라 라울을 큰 소리로 불렀다.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던 아이였다. 일리안은 라울에게 한 번도 예의범절을 강요하거나 대단한 가정 교육을 시켜준 적이 없었지만, 혼자서 줄줄 새는 발음으로 예의 있는 인사를 하던 게 라울이었다.

지나가던 어른이 라울에게 귀엽다며 사탕을 쥐여주면 라울은 늘 고맙워요, 하고 고개를 꾸벅 숙이곤 했다. 그래서 라울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 주면 조용히 뽀뽀를 남기는 게 당연한 습관이었다.

그녀에게 칭찬받는 것을 좋아하던 라울이었으니, 일리안에게 반항적으로 군 적은 당연히 없었다. 일리안은 순간 아직 다섯 살인 아이가 벌써 사춘기가 온 것인가 싶어 머리가 아찔해졌다.

“너, 왜…….”

아이를 나무라야 했다. 그러나 라울이 이런 식으로 잘못한 적은 거의 없었고, 때문에 당황한 일리안은 말을 더듬었다.

그사이 방 안으로 디노가 들어왔다. 노크와 함께였다.

“저, 헤이븐 님, 라울 님.”

디노가 한 발짝 방 안에 입성했을 때였다. 가만히 서 있던 라울이 조르르 달려가 디노의 품에 안겨들었다.

“라울, 너!”

“헤, 헤이븐 님. 잠시만요.”

품에 안긴 라울은 디노의 가슴팍에 머리를 딱 붙이고 떼어내지 않았다. 라울의 얼굴을 볼 수 없게 되자 곤란해진 일리안이 그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졸지에 두 모자 사이에 껴 곤란해진 디노가 땀을 흘렸다. 일리안은 라울의 얼굴을 보기 위해 고개를 들이밀었지만 그때마다 라울은 머리를 이리저리 돌려댔다. 그녀가 볼 수 있는 것은 라울의 동그란 뒤통수밖에 없었다.

“라울 님, 괜찮으세요? 방에 데려다 드릴까요?”

무어라 말하려는 일리안을 진정시킨 것은 디노였다. 라울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에게 눈짓으로 허락을 구한 디노가 방을 빠져나갔다.

혼자 남은 일리안이 허탈한 얼굴로 닫히는 문을 바라보아야만 했다.

* * *

“디노, 라울이 왜 그러는 거야? 내가 이제 싫대?”

디노가 라울의 방의 문을 닫고 나오자마자 바짝 다가선 일리안이 간절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전 애인이라도 되는 마냥 바라보는 일리안의 눈을 슬쩍 피한 디노가 겨우 입을 열었다.

“그게……. 아직 헤이븐 님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셨을 때, 공작성에 잠시 다녀왔었습니다.”

“라울이? 내가 누워 있을 때?”

“예. 그 전까지 헤이븐 님이 보고 싶다고 밥도 안 먹고 눈물만 뚝뚝 흘리시지 뭡니까.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에릭 경이 데려갔는데……. 돌아오신 뒤로부터는 헤이븐 님을 안 찾으셨습니다. 울지도 않으셨고요.”

일리안이 오른손에 힘을 꽉 주었다. 손에 잡혀 있던 곰 인형의 얼굴이 짓눌려 못 생기게 구겨졌다. 라울에게 버려져 침실 바닥을 굴렀던 그 곰 인형이었다.

“그런데요, 대신 돌아오신 뒤부터는 헤이븐 님의 침실에서 주무셨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다행이라고 생각했죠. 헤이븐 님의 방에선 특유의 향기가 나니까, 그런 식으로라도 그리움을 견디시나 해서요.”

“그런데 대체 왜 내가 보고 싶지 않다는 거야.”

“그건 저희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매번 헤이븐 님의 넓은 침대에서 베개를 끌어안고 냄새를 맡으셨어요. 가끔 헤이븐 님의 옷장에서 마음대로 옷을 꺼내와 껴안고 주무시기도 하고요.”

아침에 라울을 깨우러 가면 그녀의 겉옷을 두르고 자는 아이의 모습에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 기억을 떠올린 디노가 씁쓸히 중얼거렸다.

“보기 싫은 게 아니실 겁니다. 섭섭하신 거겠죠.”

이윽고 디노는 자리를 떠났다.

라울의 방 앞에서 들어가지 못하고 망설이던 일리안은 제 손에 쥐어진 곰 인형을 한번 바라보았다. 아직도 라울이 곰 인형을 바닥에 내던진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러다 결국 일리안은 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전과는 달리 노크는 하지 않은 채였다.

“라울.”

라울은 제 방 침대에 가만히 앉아 토끼 인형을 마주 보고 있었다. 그녀의 기억 속에도 남아 있는 물건이었다. 아마도, 일리안 하인리히로서 준 인형일 터였다.

다가간 일리안이 라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침대에 앉은 라울보다 눈높이가 낮아 아이를 올려다보았다.

아이는 이제 토끼 인형에서 눈을 떼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미안해.”

라울의 눈동자가 축축해졌다.

“나, 아무 데도 안 가.”

라울은 엉엉 울었다. 일리안의 목을 감싸 안은 아이가 저답지 않게 소리 내어 목청껏 울기 시작했다. 일리안은 가만히 아이의 등을 토닥였다.

토끼 인형이 침대 위로 나동그라졌다.

“곰 인녕, 필요 없서요. 헤입븐, 아프지 마요. 죽지 마요. 아프지 마요.”

“이제 안 아파. 약속할게, 라울.”

“일니안은 아파서 갔어요. 이제 못 봐요. 헤입븐, 아프지 마요…….”

라울은 자꾸만 했던 말을 반복했다. 말을 자주 하지 않지만 누구보다 말을 잘하는 아이인데, 어떤 아이보다 똑똑하고 영리한 아이인데…….

일리안이 잡고 있던 곰 인형은 다시 바닥으로 떨어졌다. 벌써 2번이나 버려진 인형의 가슴팍에는 멍이 들었다. 곰 인형은 문득 울고 싶어졌다.

라울이 울자 일리안의 심장도 아래로 떨어졌다. 그녀의 가슴팍에도 멍이 들었다. 라울의 눈물이 심장을 두드려 멍을 남기는 것 같았다.

곰 인형이 일리안을 대신해 울었다. 인형의 솜이 축축하게 젖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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