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죽음을 바칠 시간-102화 (102/123)

102. 너를 좋아했던 순간의 나를 좋아했다

일리안과 율리어스가 지하실을 나왔을 때에는 이미 동이 트고 있었다.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오는 계단의 마지막 층계를 밟고 선 일리안이 갑작스러운 햇빛에 팔을 들어 눈을 가렸다.

그러자 일리안의 허리로 손이 감겨왔다. 얼떨결에 율리어스의 품에 안긴 일리안은 다시금 땅에 발이 닿지 않았다.

“……율리어스?”

지하실에서는 그녀가 걸어 다녀도 아무렇지 않게 바라보던 율리어스였다. 그런 주제에 지상에선 한 발짝도 닿게 할 수 없다는 듯 일리안을 안아 들었다.

그가 일리안이 편하도록 자세를 바꾸는 사이,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던 일리안은 다소 황당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 말이다.”

“예.”

“침대에선 내가 안지 말라고 하면 손도 못 대던 녀석이, 왜 밖에서는 의사를 묻지도 않아.”

결국 일리안의 오금에 팔을 받치고 다른 손으로 지지하는 자세를 선택한 율리어스는 그 질문에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가 일리안을 안아 드느라 그녀의 눈높이가 높아진 탓이었다.

“발을 다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카펫 위에서 대체 어떻게 발을 다친다고.”

일리안이 조용히 툴툴댔지만 율리어스는 내려주지 않았다. 그녀도 결국 포기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일리안이 율리어스의 목을 팔로 둘러 안았다. 물론 떨어질까 그런 것이었지만, 율리어스는 갑작스레 걸음을 멈춰 세웠다.

“유리, 무슨 일이야.”

“안지… 마십시오.”

“뭐?”

율리어스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그리곤 고개를 들어 그녀의 눈을 마주했다.

“안지 마세요.”

“대체 왜… 너, 설마.”

일리안이 조그만 손을 내려 율리어스의 가슴팍에 가져다 대었다. 그러자 인간의 속도라고는 할 수 없을 만큼 거세게 뛰어대고 있는 심장이 느껴졌다.

뭐가 이렇게 솔직해?

율리어스는 아무리 달려도 땀 한 방울 흘리지 못했다. 그 탓에 심장이 거세게 뛰어댈 일은 거의 전무했으니, 그의 입장에서는 이다지도 뛰어대는 심장이 어색하고 아프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을 터였다.

율리어스의 가슴팍에 손을 얹고 허탈한 웃음을 짓던 일리안이 문득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리고는 고작해야 목에 둘렀던 팔을 올려 그의 머리를 꽉 끌어안았다.

그가 움찔, 몸을 떨었다.

“율리어스.”

“……예.”

“자꾸 이러면, 다음에는 정말 못 안아준다.”

그 말에 율리어스가 벌컥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일리안의 턱과 그의 정수리가 쿵 부딪쳤다.

“어윽!”

“다음도… 있습니까?”

“뭐? 야, 인마. 너 지금 내가 턱을… 아으.”

율리어스의 머리에서 손을 떼어낸 일리안이 제 턱을 매만졌다. 율리어스가 한 팔을 들어 그녀의 턱 주변으로 제 손을 가져다 대었다. 주변을 밝히는 흰빛은 분명 힐링 마법이었다.

“다음에도 안아주냐고 물었습니다.”

그녀의 턱을 치료해 주면 대답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율리어스는 숨이라도 쉬듯 가볍게 힐링 마법을 행하며 대답을 재촉했다.

그가 마법을 시전하자마자 놀랍게도 조금 부었던 턱이 가라앉았다. 아픔마저 사라지는 기분에 제 턱을 묘한 얼굴로 쓰다듬던 일리안이 그를 내려다보았다.

“안아줬으면 좋겠냐?”

“예.”

고민할 것도 없다는 듯 즉각 대답이 나왔다. 흐음, 하고 잠시 고민하던 일리안이 율리어스의 귓가에 속삭였다.

말을 마친 그녀는 율리어스의 등을 툭툭 두드리며 움직일 것을 강요했다. 꼭 제가 탄 말을 움직이는 것 같기도 했다.

어쩔 수 없이 걸음을 뗀 율리어스는 그녀가 속닥인 말을 다시금 곱씹었다.

‘아플 정도로 심장이 뛰지 않으면, 다음에도.’

* * *

아침 해가 일리안의 머리 위를 비추었다.

마차 앞에 선 일리안이 그것을 타려다 말고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엔 율리어스가 가만히 선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율리어스의 뒤에는 펜서가 고개를 숙이고 시립해 있는 채였다.

“펜서 집사장님이 그러던데, 일이 많이 밀렸다더라.”

“많이는 아닐 겁니다.”

“그리고 리트릭은 네가 나 때문에 제법 고생을 했다던데.”

일리안은 방금 전 잠시 마주친 리트릭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그는 막 출근을 하려던 참이었는지 눈 밑이 까맣게 죽은 얼굴로 그녀를 마주했다.

“헤이븐, 아픈 곳은 없어?”

“멀쩡한데. 아니, 멀쩡하다 못해 너무 건강해서 탈인 것 같다. 배가 고파.”

“당연히 그래야지. 너한테 들어간 약값이 얼마며, 들어간 마나는…….”

“마나?”

그러자 놀란 리트릭이 말을 하다말고 제 혀를 씹었다. 결국 피가 나는 혀를 내밀고 얼굴을 찡그리긴 했지만, 조금 새는 발음으로 말을 이어갔다.

“율리어스 님이 너한테 마나를 쏟아붓고, 잠만 자고… 아으, 아파. 보기에도 좀 마르셨지 않냐. 널 일어나게 하려고 별짓을 다 하셨어.“

일리안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다 시간이 다 된 리트릭이 먼저 가보겠다며 일리안의 어깨를 툭툭 치고 사라졌다.

옷을 갈아입느라 방으로 가던 사이 있었던 일을 떠올린 일리안이 율리어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율리어스의 얼굴이 몹시도 야위어 있었다.

볼이 움푹 팰 정도로 마른 모습은 이 시대의 일리안 하인리히가 죽었음을 알았을 때와 비견해도 부족하지 않았다. 분명 공작성의 시종들은 요 며칠간 엄청난 식사량을 준비하느라 바빴다는데, 대체 그 음식들은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일리안이 율리어스에게 다가갔다. 그의 앞에 선 일리안은 메마른 볼 위로 손가락을 올렸다.

“……일리안?”

율리어스가 다른 이에겐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 읊조렸다. 일리안은 제법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에 짧게 웃었다.

그리곤 율리어스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약하게 두드렸다.

“밥 잘 챙겨 먹고 다녀라.”

일리안을 향해 고개를 숙인 율리어스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은 무감했지만, 눈에는 희미한 웃음기가 담겨 있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던 일리안은 다시금 물러섰다.

일리안은 더 이상 돌아보지 않고 마차에 올라탔다. 그녀가 마차에 올라탄 것을 안 마부가 출발 신호를 외치자, 말들이 울어대었다.

그때였다. 마차의 창문이 벌컥 열렸다.

창문 밖으로 팔을 내민 일리안이 가만히 서 있던 율리어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다녀올게, 유리.”

마차는 이내 빠른 속도로 나아갔다. 율리어스는 그녀를 태운 마차가 사라질 때까지 그것을 지켜보았다.

마찬가지로 그와 함께 서서 일리안을 배웅하던 펜서는 마차가 사라지자 그제야 율리어스에게 다가갔다. 날씨가 아직 제법 추워 제 주인을 안으로 모시기 위해서였다.

그러다 펜서는 자리에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율리어스가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 * *

마차의 문틀을 잡고 한 발짝 움직인 일리안은 오늘따라 유난히 내리쬐는 햇빛에 눈을 찌푸렸다. 드디어 겨울이 가고 봄이 오려는 모양이었다.

눈이 부셔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하던 일리안이 천천히 계단 아래로 내려가려 했을 때였다. 누군가 일리안을 와락 끌어안았다. 순간적으로 몸이 휘청거린 일리안이 상대의 어깨를 붙잡았다.

“헤이븐 님, 헤이븐 님…….”

“타피아?”

“조금 더 일찍 말씀해 주지 그러셨어요! 저와 디노가 공작성까지 마중을 나갔을 텐데…….”

눈이 부셔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하던 일리안은 문득 타피아의 얼굴과 맞닿은 제 옷자락이 젖어드는 감각에 미안한 얼굴이 되었다. 결국 그녀는 손을 들어 타피아의 머리카락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미안해, 걱정시켜서.”

“제가 옆에서 보살펴 드려야 했는데…….”

“알아, 알아. 분명 리트릭이나 에릭이 공작성에서 치료를 받는 게 낫다고 했겠지. 네가 오면 번거로워질지도 모른다고 했을 거고. 둘 다 타피아 네가 힘들까 봐 그랬을 거야. 알지?”

일리안은 보지 않아도 모든 사실을 안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제야 일리안으로부터 몸을 떼어낸 타피아가 젖어든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제… 괜찮으신 거예요?”

“리트릭한테도 말했는데, 너무 건강해서 탈일 정도야. 배가 고프거든. 그래서 말인데 타피아. 오랜만에 맛있는 식사 한번 부탁해도 될까? 사라 주방장님 솜씨도 엄청나긴 하지만, 그래도 타피아가 해주는 고기 스튜 같은 맛은 안 나더라고.”

그제야 타피아가 젖어든 눈으로 웃었다. 능청스럽게 농담을 하며 상대방이 듣기 좋도록 배려하는 그녀의 말솜씨를 들으니 이제야 돌아온 게 실감이 나는 것 같았다.

햇빛에 눈이 부셨던 일리안은 슬슬 눈이 익숙해져 타피아의 뒤에 있던 디노가 보였다. 디노는 양동이 하나를 껴안은 채 이미 코를 훌쩍이고 있었다. 그런 디노에게 일리안이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마차와 이어진 계단에 한참을 서 있던 일리안이 겨우 한 걸음 다시 내디뎠다. 그런 그녀의 앞으로 문득 손 하나가 내밀어졌다.

“고생했다, 헤이븐.”

에릭이 웃는 낯으로 그곳에 있었다. 마주 웃은 일리안이 에릭의 팔목을 잡고 마차의 계단을 내려왔다.

계단을 내려온 일리안이 달라진 것 하나 없는 윈터 저택을 슬슬 둘러보며 말했다. 지나가는 어조였다.

“기사 관둔다던 놈이 여긴 왜 있냐.”

“……오자마자 그 얘기냐? 그래도 기사의 맹세까지 했는데, 서운하다.”

“난 가는 놈 안 잡아.”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가는 일리안의 뒤를 에릭이 따라갔다. 윈터 저택을 둘러보는 그녀가 제법 바빠 보여 에릭의 걸음 또한 빨라졌다.

“관두려고 했는데, 맹세를 한 상대가 있어야지. 사직서도 상사한테 직접 던지고 가야 제맛이거든.”

“허? 이놈 봐라. 내가 못 해준 것처럼 말한다. 신입치고는 연봉도 제법 챙겨줬지, 추가 수당 따박따박 챙겨줘, 일 잘하면 인센티브도 줘. 너 퇴직금 받기 싫냐?”

“얼마 못 했는데 퇴직금도 줘? 생각보다 좋은 직장이었잖아. 나 이러면 아쉬워진다.”

일리안과 에릭은 실실 웃으며 서로 농담을 주고받았다. 그러다 문득 일리안의 뒤를 따라가던 에릭이 그녀의 앞으로 돌아왔다.

그가 앞길을 막자 어쩔 수 없이 멈춰 선 그녀가 왜 그러냐는 듯 그를 올려다보았다.

“자, 맹세의 주인도 오셨고.”

에릭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 언젠가 갑작스레 찾아와 일리안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을 때와 같았다. 꼭 그때처럼 웃음기 없는 얼굴이었다.

“기사 에릭 밀튼이 청하겠습니다, 헤이븐 윈터 남작 각하. 이제… 기사를 관두고 싶습니다.”

그 말을 내뱉던 에릭은 문득 자신이 어째서 기사가 되고 싶어 했는지를 떠올렸다. 아주 예전, 그녀가 지나가듯 뱉은 말이었다.

“내가 아니라 리트릭만?”

“넌 기사가 아니니까.”

그녀의 말에 오기가 생겨 기사가 되기로 결심했었다. 물론 오기로 시작했던 기사 생활은 제법 몸에도 맞았지만, 피 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그에게 즐겁기만 한 생활은 아니었다.

그녀 때문에 기사가 되었고, 그만두는 것 또한 마찬가지였다. 일리안의 앞에서 고개를 숙인 에릭은 씁쓸히 웃었다. 그녀에게는 보이지 않는 웃음이었다.

“에릭 밀튼 경.”

“예.”

“자네가… 하고 싶은 걸 하며 살도록.”

가만히 고개 숙인 그를 내려다보던 일리안은, 이내 걸음을 옮겨 그를 지나쳐 갔다. 이제 더 이상 그를 기사와 주인으로서 만날 일은 없을 터였다.

무릎을 꿇은 채 가만히 있던 에릭도 곧 자리에서 일어섰다. 에릭과 일리안은 둘 모두 뒤돌아보지 않았다.

아쉬움도, 슬픔도 없었다. 자신은 그녀를 좋아했고, 그녀를 좋아했던 그 모든 순간의 자신 또한 좋아했다.

일리안의 말이 옳았다. 이제는 하고 싶은 걸 하며 살아야 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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