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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459화 (459/488)
  • 459화

    왜 여태 제 앞에 나타나지 않은 건지, 조금 전의 말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2차 전쟁이 터지던 날, 조카의 자식들이 황궁에 있다는 걸 알면서도 제 목숨 하나만 챙겨 달아난 것이다. 그것도 어쩌면 자신의 양녀가 되었을지 모르는 황녀를.

    “폐하께서 건국하실 때, 제게 편지를 보내 폐하를 지지하도록 설득한 분이기도 합니다.”

    뒤에서 지켜보던 조르단 공작이 심각한 분위기로 흘러가는 게 걱정됐던 건지 재빨리 피에르를 변호하며 나섰다. 이엘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손을 뒤로 뻗어 하트에게서 총을 건네받았다. 그러곤 피에르를 향해 그 총을 내밀었다.

    “론 후작가는 총기류를 만들었던 가문이라, 제국 내의 상단을 독점하기도 했었지. 아마 그대도 어려서부터 총을 잡았을 것 같은데.”

    “예, 그렇습니다.”

    피에르는 황제가 내려 주는 총을 무겁게 받아 들었다. 1르뷔 제국이 몰락하면서 총을 비롯한 검과 같은 무기를 손에 쥔 적이 없었다. 그런 건 떠돌이 생활을 하는 피에르에게 큰 사치였다. 긴 막대기 하나면 그에겐 충분했다. 특히 작살처럼 끝이 뾰족하다면 모든 공격을 막아 낼 수 있다.

    “조부님.”

    이엘의 목소리에 피에르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호칭이 달라졌음을 느낀 동맹군은 긴장을 늦추고 조금 더 누그러진 자세로 피에르를 쳐다봤다. 노인의 얼굴엔 당혹이 물들어 있었다.

    “어찌 저를 그렇게 부르십니까. 제가 이겨 낼 수 없는 호칭입니다. 저는 론 가문에서도 축출당했고, 심지어 가문을 버린 채 도망쳐 살아남았습니다. 감당할 수 없습니다, 폐하.”

    “제 부친이 되실 뻔한 분이십니다.”

    “하오나……,”

    “그 얘긴 제 어머니께서 가장 신뢰하셨다는 의미기도 하죠. 제겐 당신이 조부님이십니다.”

    “…….”

    “그러니 조부님. 지난 회포는 조금 뒤에 풀고, 지금은 저와 제국을 위해 싸워 주실 수 있으십니까?”

    “가문의…… 영광입니다. 지난 일에 대한 잘못을 이번 기회에 바로잡겠습니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폐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목숨을 바치는 건 안 됩니다. 여기에 조부님의 보살핌이 필요한 사람이 또 있으니까요.”

    이엘이 싱긋 웃으며 말하자, 줄곧 무리 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이온이 모습을 드러냈다. 피에르는 황제를 꼭 닮은 그 소년이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본 듯했다.

    그는 죽었다고 생각했던 조카의 자식들이 모두 살아 있었다는 사실에 감격한 건지 한참이나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이엘의 손을 청해, 그 손등에 이마를 대고 맹세했다.

    “반드시 승리하여 돌아오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조부님. 저는 사정이 있어 선두에서 무리를 이끌지 못합니다. 기사단장들과 함께 앞서서 이끌어 주십시오. 조부님이라면 구귀족들도 따를 테니까요.”

    “예, 폐하.”

    일어선 피에르에게 다가와 갑옷을 입혀 주었다. 그사이 피에르는 총과 검, 그리고 자신이 자주 사용하는 날카로운 창살을 몇 개 챙겼다. 그런 그의 앞에 하얀 털의 거대한 늑대가 자세를 낮춘 채 다가왔다. 그는 노아의 충실한 부관 중 하나인 알폰스였다.

    “타십시오. 제가 경을 호위하겠습니다.”

    알폰스가 이엘이나 노아의 명령 없이 저가 먼저 인간을 등에 태운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 사실이 어지간히 놀라웠던 건지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늑대들이 전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수군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알폰스는 황제의 조부로 인정받은 노인을 공손히 대우하는 것에만 집중했다.

    알폰스의 등에 올라탄 피에르는 이엘을 향해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고는 기사단과 함께 전장을 향해 달려 나갔다.

    “이엘. 조부님께 맡겨도 괜찮을까?”

    걱정이 밀려든 이온의 물음에 이엘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것에 의심을 더하고 경계를 늦추지 않는 그 어머니께서 자신을 맡기려던 분이시다. 문무에 모두 출중한 가문이 아니고서야 그러실 리 없지. 그러니 그건 걱정할 필요가 없고.

    “이온. 네 몸은 어때? 괜찮다는 말 말고, 어떤 상황인지 정확히 말해 줘야 해. 그게 이곳 상황을 뜻하는 거니까.”

    “아직 심장이 따끔거려. 근데 전보다는 괜찮아졌어. 성력이…… 많이 약해진 거지?”

    “응. 그리고 더 약해지겠지.”

    오드가 떠나면서 성전기사단에게 미약하게 남아 있던 성력도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 성전기사단의 성력은 인간들이 숨어 있는 요새를 지키는 결계에 쏟아붓는 중이었다. 지금 제도는 보완이 가장 취약한 상태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와중에 마지막 전투가 벌어질 저곳 평야. 이제 곧 피로 물들겠지. 원치 않은 전쟁이 많은 생명을 앗아 가면서 피는 번지고 퍼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결국 이곳도 과거 1제국의 제도처럼 더러워진다. 로빈의 소모라를 닮아 가겠지.

    “괜찮아, 이온. 나만 믿어. 널 빼앗기지 않을 테니까.”

    “이엘. 전에도 말했지만 나 때문에 너의 것을 희생해서는 안 돼.”

    “…….”

    “나보다는, 오랜 시간 네 곁을 지켜 주었던 사람들을 더 소중히 생각해. 그들은 너를 필요로 하잖아. 포기하면 안 돼.”

    이온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제 쌍둥이를 꼭 끌어안고 토닥거려 주었다. 이온의 어깨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마치 십여 년 전, 땅에서 막 나와 세상 물정 모르고 전쟁을 두려워만 하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 닮았다.

    지금의 이엘은 그때가 기억나지 않을 만큼 많이 달라졌지만, 그녀는 이온만큼은 그 순수함을 지켜 주고 싶었다.

    “그래. 걱정 마.”

    이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졌다. 계속 하늘을 점하고 있던 밀로가 능력을 사용한 것이다. 쏟아지는 벼락 속에 우렁찬 고함 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왔다.

    *

    “봐주지 말고 전부 죽여.”

    로빈이 얼굴에 튄 피를 닦아 내며 뱀들에게 소리쳤다. 그의 명령을 받은 뱀들이 은신으로 몸을 숨기며 사라졌다. 보호석을 전부 빼앗았으니 뱀들의 은신을 벗기는 건 어려울 것이다. 로빈은 들고 있던 검으로 쓰러진 남자의 목을 벴다.

    지금쯤 제도에선 큰 전투가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로빈은 그곳에 합류하지 않고 올리세스의 꼬리에 남아 내부에서 터뜨려 갈 예정이었다. 특히나 이쪽에서 포필렌에 이용당한 이종족들이 제도로 향하지 못하도록 하는 게 그의 역할이었다.

    “2차 전쟁 때보다 더 많이 죽인 것 같은데.”

    올리세스의 손에 끌려온 오드가 포레스트에게 포필렌 해독제를 건넸고, 포레스트는 옛 주인이었던 로빈에게 그 해독제를 은밀하게 전했다.

    하지만 해독제가 모든 사람에게 효과가 있는 건 아니었다. 해독제가 먹히지 않는 자들은 로빈의 손에서 처리해야 했다. 이미 그들은 정신까지 포필렌에 물들었기 때문에 영영 돌아올 수 없을 것이다.

    온갖 더러운 건 내가 맡겠다고 했지만, 이건 좀 심한데. 로빈은 손수건으로 검에 묻은 피를 닦아 내며 초토화가 된 주변을 둘러보았다. 살아 있는 자들 같지 않다. 마치 죽은 시체를 억지로 살려 낸 것처럼 할 줄 아는 건 달려들어 공격하는 것뿐이었다. 입 밖으로 내뱉는 소리는 전부 의미를 상실한 괴성이었다.

    로빈이 답지 않게 대화를 시도했지만 죄다 실패했다. 대화가 통하질 않는다.

    “로빈 님. 사체를 태울까요?”

    “아니. 그러면 눈치채서 안 돼. 흙을 뒤엎어서 전부 땅에 파묻어라. 비가 오더라도 사체가 드러나지 않게 깊숙하게 파묻어야 돼. 혹여나 돌림병이 생기지 않도록 바로 처리해.”

    “예.”

    로빈은 산처럼 쌓인 사체들을 감흥 없이 바라보다가 코를 막으며 돌아섰다. 제 종족도 악취가 난다며 천대받았는데 이쪽은 그런 차원이 아니군. 로빈의 시선이 제도가 있는 쪽을 향했다.

    “이쪽은 제게 맡겨 주십시오. 더 이상 그쪽으로 흘러들어 가지 못하게 단단히 막아 놓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우리의 소망이 안전하기를. 로빈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며 신께 기도하고 있었다.

    *

    로빈의 예고대로 올리세스의 반란군은 인간들이 숨어 있는 제도의 북쪽 끝을 공습했다. 그러나 만반의 준비를 해 둔 제도군은 그들의 공격을 막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사실 전력으로만 비교해 보자면 이엘의 동맹군이 반란군을 충분히 제압하고도 남았다. 단번에는 아니더라도 몇 차례의 공격으로 반란군을 밀어내고 또 밀어낼 수 있었다.

    그런데도 굳이 지지부진한 척 밀고 당기며 위태로운 형세를 유지하고 있는 건 다 이엘의 출산과 ‘목소리’의 개입을 조절하기 위해서였다.

    올리세스가 ‘그’를 불러내는 타이밍과 그녀의 출산이 비슷해야 모두가 산다. 그리고 그 과정을 원만히 진행하기 위해선 또 한 가지가 필수였다.

    ― 폐하! 성공했어요! 깨어났다구요!

    스완이 성공했다. 드레인의 영역에 들어가서도 테런스 포르의 두 딸을 깨우지 못했던 그 백조가 기어이 제 몫을 다했다. 사실 소녀들을 깨우는 것 자체는 어려운 게 아니었지만 그 이후에 몸에 퍼질 맹독에 대한 대비가 문제였기에 일이 계속 밀렸다.

    인식표는 몸에 심어져 있을 땐 괜찮지만 제거하는 순간부터 독이 퍼져 나간다. 의도적으로 제거할 수 없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제거하더라도 몇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죽어 버리도록.

    인식표는 인간 여자와 이종족의 암컷에게만 심는 특수한 장치였다. 위치를 파악할 수 있고 개체수를 측정할 수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약한 그들을 보호한다는 게 본래 주목적이었지만 언제부턴가 잘못돼 버렸다. 인식표는 보호의 목적을 상실했고, 감시와 삭제의 도구로 전락했다.

    1차 전쟁과 2차 전쟁 때, 수많은 암컷들과 인간 여자들이 죽었던 건 대부분 인식표 때문이었다. 인식표를 제거하는 순간, 독이 퍼져 죽는다는 걸 아무도 몰랐기 때문에.

    놀랍게도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연구원들끼리는 알음알음 전해졌을지 몰라도, 일반 사람들은 전혀 몰랐을 것이다.

    태어나면 인식표를 심는 게 당연했고, 비록 위치가 연구소에 노출되긴 했어도 그로 인해 피해 받는 건 없었으니까. 몇십 년에 걸쳐 혹은 몇백 년에 걸쳐 그런 식으로 길들여져 왔기에 이상함을 느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건 황녀인 이엘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도 노아와 로빈이 하는 얘기를 듣고서야 인식표의 독성을 알게 됐다. 두 사람이 얘기하기 전까지도 이엘은 인식표가 이상하다는 생각 자체를 하질 못했다. 그만큼 인식표는 신체의 일부처럼 자연스러운 것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스완은 테런스의 두 딸을 쉽게 깨울 수 없었다. 두 아이들은 이미 이쪽 세상에서 인식표가 제거된 상태로 드레인의 영역에 들어갔다. 독이 퍼졌는지 아니면 퍼지기 직전이었는지, 그걸 아무도 알지 못했다.

    아무리 드레인의 영역이 바깥세상의 시간과 다르게 흘러간다고 해도 일단 몸 안에 독이 남아 있으면 고통이 따를 터였다.

    하지만 해결 방법은 예상하지 못했던 곳에서 발견했다. 테런스 포르의 제자였던 리노 윌터가 알아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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