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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458화 (458/488)
  • 458화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곳에서 겨우 숨만 붙여 살던 리노에게, 어느 날 형인 올리세스가 찾아왔다. 그리고 그는 리노에게서 들어서는 안 될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모두가 미쳐 버린 리노의 이야기를 들어 주지 않았지만, 가장 들어서는 안 될 사람은 리노의 이야기를 들어 준 셈이다.

    형인 올리세스는 어린 시절부터 몸이 약했다. 그로 인해 가주 승계권을 두고 가문 내에서 세력이 나눠질 조짐이 보일 때, 눈치가 빨랐던 리노는 연구소에 들어가는 것으로 아버지와 형의 두려움을 불식시켰다.

    그런데도 올리세스는 죽음을 두려워했고 작은 고통도 참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시한부 인생이라는 걸, 아주 어린 시절부터 배우며 자랐던 것이다.

    그러니 선황이 ‘그’와 했던 계약이 얼마나 탐이 났겠는가. 올리세스가 환장하여 달려들 수밖에 없는 주제였다.

    그 빌미를 제공한 건 리노 자신이었다. 리노는 정신이 깨어난 이후부터 죄책감에 시달려 왔다. 그러니 형의 잘못된 모습을 그냥 두고 볼 수 없다. 자신이 망친 이곳을 수복할 수 있게 책임을 져야 한다.

    “리노. 괜찮아. 지나간 일에 연연하지 말고, 우리 앞을 보자.”

    마치 제 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것처럼 지친 이온의 목소리가 일깨우듯 들려왔다. 리노는 이온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몇 안 되는 재규어들이 빠른 속도로 풀숲을 내달려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바람을 등에 업고 그 방향대로 풀숲을 달린 덕에 창공에 있을 매에게 들키지는 않았다. 재규어의 영지에서 이곳까지 오는 길이 험난했던 것에 비하면 제도의 경계를 지나치는 건 쉬운 편이었다.

    하지만 이카르는 방심하지 않았다. 경계를 넘어서면서부터 자신의 온 정신을 이온에게만 집중했다.

    “괜찮나?”

    “네. 괜찮아요.”

    “정 힘들면……,”

    “제게 약해지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

    “어차피 전 죽지 않아요. 누군가 이엘을 괴롭히기 위해 날 살려 낸 거라면, 이엘과 제 고통이 끝나기 전까진 우린 죽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괜찮아요. 죽지 않을 정도의 고통은 참을 수 있어요.”

    숨을 헐떡이며 간절히 부탁하는 이온의 말에 이카르도 이를 악물었다. 그러곤 무작정 황궁을 향해 달렸다. 이온은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이카르의 털을 움켜쥐며 버티고 또 버텼다.

    도중에 성전을 지나칠 땐 정말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지만, 이온과 이카르의 예상대로 죽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이전에 왔을 때보다 제도가 많이 혼탁해진 탓에 아픔이 덜했다.

    “이온!”

    망루에서 대기하던 위병으로부터 재규어가 제도에 왔음을 알게 된 이엘이 성 밖으로 뛰쳐나오며 아르세니온의 이름을 불렀다.

    이온은 꺼져 가는 숨을 간신히 내뱉으며 반쯤 감긴 눈을 떠 늑대의 등에 올라탄 이엘을 바라보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눈물이 왈칵 치솟았다. 제 소중한 누이를 다시 못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해 왔던 탓인 듯했다.

    “……이엘.”

    “이온. 정신이 들어? 괜찮아?”

    “응. 괜찮아.”

    “이카르 백.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온다는 전언도 없이.”

    “죄송합니다, 폐하. 사안이 좀 급했습니다. 허가 없이 영지를 이탈한 죗값은 달게 받겠사오니, 우선 황자를 황궁 안에 데려가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래. 그렇게 하자.”

    말을 마친 이엘이 손을 뻗어 이카르의 털을 잡고 노아의 등에서 이카르의 등으로 옮겨 탔다. 그러곤 쓰러져 가는 이온의 뒤에 자리를 잡아 팔로 그를 감싸 단단히 지지했다.

    이카르는 이엘의 상태를 고려하여 천천히 출발했지만, 그녀가 안정기에 접어들었다는 노아의 조언에 따라 속도를 점차 높였다.

    무사히 황궁에 들어와 이온을 침실에 눕혔다. 이엘은 손을 뻗어 이온의 심장 위에 조심스레 얹었다. 다행히 일정한 박자로 뛰는 심장 소리에 안도하며 이온의 침대에서 멀어질 수 있었다. 이엘을 힐끔 보던 노아는 이카르를 구석으로 데려와 조용히 추궁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왜 영지를 벗어나서 위험하게 여기까지 왔나. 황자가 저렇게 아픈데.”

    “달리 방법이 없었어. 황자의 상태가 많이 안 좋아. 몽유병도 심해지고 있고.”

    “몽유병?”

    “하마터면 ‘그놈’의 목소리에 이끌려 다른 차원으로 끌려갈 뻔했어. 매일 감시를 붙여 놨는데도 소용없었다고.”

    몽유병까지 앓고 있다니. 노아는 미간을 찌푸린 채 이온을 쳐다봤다. 그러곤 침대 근처에 서서 팔짱을 낀 채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엘에게 시선을 옮겼다. 불룩하게 나온 배를 지탱하기 위해 손으로 제 허리를 붙잡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오늘따라 더욱 안쓰러웠다.

    “황자의 기억이 다 돌아왔어.”

    “그랬군. 폐하 역시 옛 기억들이 어렴풋하게 다 떠오른 모양이다.”

    “그래. 이제 폐하와 황자의 이야기는 두 사람이 풀게 하고. 그보다 지금 여기 상황은 어떻지? 듣자 하니 이교도로 인해 한차례 소동이 있었다던데.”

    이카르의 말에 노아가 피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러곤 그간 있었던 이야기를 간략하게 설명했다.

    들으면 들을수록 놀랍고 충격적이었다. 이종족, 그것도 가장 신앙심이 좋다고 알려진 늑대들 중에 변절자가 나올 줄이야. 이카르는 미간을 좁힌 상태로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젠 이종족이라고 마냥 안심할 수 없겠네. 포필렌에 이교도까지. 인간과 다를 게 없군.”

    “그건 곧 인간과 이종족이 같다는 의미입니다.”

    돌연 뒤에서 들린 낮은 음성에 이카르와 노아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두 사람을 향해 가볍게 목례한 이는 다름 아닌 성전기사단장 사피라 호르난이었다. 그게 무슨 의미냐는 듯 쳐다보는 이카르의 시선에 사피라는 예전에 오드에게서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설명했다.

    “과거엔 인간과 이종족 사이에 분별이 있었습니다. 신의 축복을 받은 자들과 그렇지 못한 자들.”

    “…….”

    “하지만 인간이 신을 떠났고 종국에는 신께서 인간을 버리셨습니다.”

    “그 얘기는 인간도 신의 축복을 빼앗겼기에 우리와 비슷해졌다는 말인가?”

    “반대입니다.”

    “…….”

    “오드 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모두의 생각과 달리, 신께선 인간을 버리신 적이 없다고요.”

    “그럼…….”

    “이종족도 신께서 만드신 종족입니다. 축복의 형태가 달랐을 뿐, 외면한 적도 버린 적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닮아 가고 있다. 인간과 이종족이, 서로 닮아 가고 있다. 둘 사이에 있던 두꺼운 벽이 점점 허물어져 가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애초에 그 벽을 세우고 두껍게 만들었던 건 인간들이었다. 그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인간도 이종족도 모두 신의 자식이니까요. 그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고, 저희 성전기사단에게 늘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만 남기곤 사피라는 다시 자신이 있어야 할 곳으로 사라졌다. 이카르는 멍청하게 두 눈을 깜빡거리다가 헛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인간과 이종족이 같다니, 그게 말이 돼? 근데 왜 기분이…… 씁쓸하고 허탈하지.”

    “우리는 인간을 질투했으니까.”

    노아의 말이 정답이다. 인간이 갖고 있는 권력과 지위를 부러워한 게 아니라, 신의 축복을 받은 그들이 부러웠다. 어쩌면 2차 전쟁의 이유에는 부러움과 질투도 포함됐을지 모른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다 부질없는 행동이었다.

    “더 이상 종족을 나눠서 바라보는 건 아무 의미가 없다. ‘그’는 이곳에 있는 모든 종족이 힘을 합쳐도 이길 수 없는 존재이니까. 지금은 올리세스와 그의 무리가 적으로 보이겠지만, 결국 우리가 맞서야 하는 건 보이지 않는 ‘목소리’가 될 것이다.”

    노아의 말에 이카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리며 침실 안으로 들어왔다. 로빈과 접선하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웠던 르네였다. 그는 눈짓으로 노아와 이카르에게 인사하곤 곧장 이엘의 앞에 로빈의 편지를 전했다. 이엘은 이온에게서 시선을 떼고 편지를 빠른 속도로 읽어 내려갔다.

    그러곤 전장이 있는 곳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인질을 교환하기로 한 이후로 계속해서 휴전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어쩐지 오늘따라 더 고요하게 느껴진다. 마치 폭풍의 눈에 위치하는 것처럼. 이엘은 다시 시선을 돌려 자신을 바라보는 동맹군에게 향했다.

    “올리세스가 약속한 협정을 어길 모양이구나.”

    “예?”

    “내일 새벽, 제도민들이 은신하고 있는 동굴에 그들의 급습이 예정되어 있다. 올리세스의 영지와 그쪽에서 벌어지는 일은 로빈이 해가 지면 곧장 처리하기로 했어. 그러니 우리는 이곳을 빈틈없이 틀어막아야 한다.”

    “예.”

    “이게 ‘그’를 만나기 전, 우리의 마지막 전쟁이 되겠구나.”

    물리적인 전쟁은 이게 마지막이 되겠지만, 여기서 살아남는다고 해도 전쟁이 끝나는 건 아닐 것이다. 더 지독한 전쟁을 치러야 한다. 하지만 할 수 있다면 여기서 올리세스의 기세를 완전히 꺾어 놔야 하기에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전쟁이 될 터였다.

    이엘은 다시 고요한 전장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글자 그대로 폭풍 전야였다.

    *

    전력을 분산했다. 이엘의 동맹군은 일부 하이에나들을 제외하곤 전부 제도에 집결시켰고, 신귀족과 구귀족은 연합군이 되어 각 영지에서 서로를 지원하기로 했다.

    새롭게 동맹군으로 합류하게 될 곰과 같은 이종족들은 인간들의 영지에 찾아가 그들과 합류하는 것으로 계획을 세웠다.

    그러던 와중에 독수리와 함께 떠났다가 도중에 세잔티노로 인간들을 대피시키러 떠났던 조르단 공작이 돌아왔다. 그의 곁에는 처음 보는 노인도 함께였다.

    “너무 늦게 인사드려 죄송합니다. 폐하, 저는…… 과거 론 후작가의 방계 중 하나인 피에르 론이라고 합니다.”

    “폐하께서 찾으셨던 외척 가문의 방계입니다.”

    조르단의 덧붙인 설명에 이엘은 총을 점검하다가 말고 고개를 돌렸다. 노인은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한껏 움츠리고 서 있었다. 이엘은 들고 있던 총을 하트에게 건네고는 낮은 계단을 내려와 그의 앞에 섰다.

    “그대와 나의 관계가 어찌 되는 것이지?”

    “폐하의 어머니셨던 선황후께서 저의 조카님이셨습니다.”

    “…….”

    “……그리고 선황후께서 폐하의 입양을 원하셨던 가문이, 저의 가문입니다.”

    “…….”

    “부끄럽게도 폐하를 지켜 드리지 못했습니다.”

    어머니가 나를 보내려 했던 가문의 가주가 이 사람이었구나. 이엘은 입을 앙다문 채 많이 늙은 노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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