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3화
“앤디 경이 떠났습니다.”
“어디로.”
“아스타로를 잡으러 간다고 했습니다.”
“그래?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네.”
“괜찮습니까? 앤디 경의 부재는 전력에 큰 문제일 텐데요.”
“앤디도 휴식을 줘야지. 그동안 너무 일에 몰두했잖아.”
“그래서 일부러 그렇게 화내셨습니까?”
“화난 건 맞아. 곧장 보고했으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테니까. 근데 상황이 그렇게 심각한 건 아니다. 이따 저녁에 폐하께서 회의를 열자고 하셨으니 그때 잘 해결하면 이 정도 소란은 금세 잠재울 수 있어. 앤디에게 책임을 전가할 일도 아니고.”
“쉬셔야 할 분은 각하십니다. 눈 아래가 거뭇거뭇하신데요.”
“불면증이 도져서 그래.”
이엘이 거처를 별관으로 옮긴 뒤부터 노아는 그녀의 침실에서 함께 생활했다. 특히 이엘이 새벽에 자주 잠을 설쳤기 때문에 어느 순간부터 노아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곤 했다.
‘평소보다 통증이 심해지는 때가 있을 텐데 그 기간은 특별히 조심하셔야 합니다, 각하. 그 시기의 새끼 둔은 모체의 영양분을 모두 잡아먹기 때문에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의 통증은 해산할 때의 고통과 맞먹을 정도로 강합니다. 그러니 주의 깊게 살피셔야 합니다.’
과거에 둔을 새끼로 둔 적이 있는 우논과 둔 두 마리를 영지에서 데려왔다. 그들은 이엘의 상태를 한참 지켜보다가 노아에게 몇 가지 충고를 했는데, 그중 이엘과 노아의 신경을 쓰이게 한 것이 그 통증 부분이었다.
‘호흡이 가빠지거나 수면 중에 숨이 멈추실 수도 있습니다. 그 시기만 잘 지나면 그 뒤로는 안정기이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이엘과 아이의 목숨이 ‘그’에게 달렸기 때문에 두 사람 모두 생명에 문제가 생기면 안 된다. 이전과 달리 지금은 테오도로도 그녀의 배 속에서 자라는 중이었다. 게다가 이온 역시 살아났고.
거래의 대가로 받은 이온의 생존. 그리고 거래의 대가로 줘야만 하는 이엘과 테오도로의 목숨. 즉, 이온의 목숨은 이미 받은 상태이기 때문에 언제든 이엘과 테오도로의 목숨이 ‘목소리’의 손에 넘어갈 수 있다는 소리다.
게다가 지금 이엘은 ‘그’와의 모든 연결 고리를 끊는 중이었다. ‘그’는 늘 이엘이 목숨을 위협당할 만한 상황이 되면 그녀를 자신의 공간에 숨겨 주었다. 그건 ‘목소리’가 이엘을 지켜 준다는 의미일 뿐 아니라 이엘의 목숨이 온전히 ‘그’의 손에 달렸다는 뜻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그’의 공간에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영혼은 더러워지고 좀먹힌다는 사실을 로빈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 뒤로 이엘은 끊어 내는 중이었다. ‘그’와의 만남을 끊어 내고, 아무리 위급한 상황이어도 ‘그’의 공간을 찾지 않았다.
그러나 출산의 고통과 맞먹을 정도의 고통이라면 무의식 속에서 이엘이 ‘그’를 불러 그 공간 안으로 들어갈지 모른다. 고통은 이성을 마비시킬 테니까. 그러니 더욱더 주의를 기울이고 기울여야 했다.
“둔은 정말 신기한 계급이죠.”
그의 마음을 헤아린 건지 알폰스가 어깨를 으쓱이며 분위기를 환기시키려 운을 뗐다.
“인간과 이종족 사이에서 태어나는 특별한 계급이고, 자신의 선택에 의해 종족이 결정되는 유일한 계급이니까요.”
“그러게. 유일하게 선택을 할 수 있군.”
“제 아주 오래된 친구가 인간 여자와 사랑에 빠진 적이 있습니다. 너무 오래돼서 지금은 이름조차 기억이 안 나는 친구지만요.”
“…….”
“딸을 낳았는데 그 애는 결국 인간을 택했다고 들었습니다. 제 친구가 어미를 따라 살라고 했다더군요. 그땐 이종족이 한참 학대당하던 때였으니까요. 사실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죠.”
우논이 영원히 살 수 있는 유일한 계급이라면, 둔은 자신의 종족을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계급이었다. 그러나 모든 둔들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대부분은 주어진 환경에 맞춰 선택해야만 하는 입장이었다.
인간들은 인간의 삶을 선택한 둔을 같은 종족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이종족만큼 학대당한 건 아니지만 둔 역시 비슷한 취급을 받긴 했다.
반면 이종족은 둔을 2계급으로 명확히 지칭했으며 3계급인 테르보다 더 괜찮은 자리를 주었다. 때문에 아무리 학대당하는 입장이더라도 동족의 울타리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이종족으로서의 삶을 택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그걸 고려하면 알폰스의 친구와 같은 경우는 굉장히 드문 쪽에 속하는 편이다.
“딸이었다면 차라리 이종족으로서 사는 게 나았을 텐데. 인간을 택한 둔은 능력이 사라져서 더 불편할 거고.”
“아무래도 늑대의 습성을 닮지 않길 바랐던 거겠죠.”
“…….”
“늑대는 태어나 단 하나의 반려를 곁에 맞이하는 습성이 있으니까요. 그건 다른 이의 시선에서 보면 로맨틱한 관계이지만 당사자가 되면 꽤 끔찍한 습성이죠. 제 친구가 아내였던 인간 여자가 죽고 나서 그 뒤를 따라 죽었던 것처럼.”
늑대에게 반려를 잃은 슬픔은 인간으로 치면 자식을 잃은 슬픔과 비슷했다. 인간의 삶을 선택한 둔은 늑대로서의 습성이 많이 희석되기 때문에 그런 감정은 덜할 것이다. 어쩌면 아비로서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충고는 아니었을까 싶다.
“태어나실 황손께선 이런 습성은 염두에 두지 않고 원하시는 종족을 택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럴 것이다. 더 이상 인간으로서의 둔은 차별받지 않고, 이종족으로서의 둔도 학대당하지 않는 세상이니까.”
“그럼 둔에게 가장 이상적인 환경에서 태어나는 첫 둔이겠군요.”
알폰스의 말이 좋았다. ‘둔’이라는 계급은 이리저리 치이는 계급이었고 어딜 가도 차별당하는 계급이었다. 그러나 이제야 비로소 둔도 눈치 보지 않아도 되는 시대가 되었다. 노아는 자신의 아이가 그 첫 문을 여는 존재가 될 거라 확신하며 입가에 호를 그렸다.
*
“천직이구만.”
아스타로의 목을 뜯어 가겠다는 일념으로 인간 마을에 도착한 앤디는 제 눈앞에서 펼쳐지는 황당한 모습에 혀를 찼다.
포레스트가 노래를 부르며 웃을 때마다 모여든 사람들은 모두가 넋을 놓고 그를 선망하며 좇았다. 저건 홀렸다고밖에 표현할 말이 없다. 뱀이 작정하고 유혹하니 도망갈 방도가 없는 것이다. 아주 신났구만, 신났어.
한편 그를 그곳으로 안내해 준 슈프는 눈치를 보며 변명하듯 말을 붙였다.
“포레스트가 진짜로 이교도가 된 건 아니에요! 폐하께서 시키시는 대로 연기하고 있는 거예요! 오해하지 마세요.”
“슈프.”
“네?”
“왜 네가 로날드 친구인 줄 알겠다.”
“네? 무슨 의미예요?”
예전에 로날드도 제 앞에서 피시와 스완을 변호했던 적이 있다. 정작 동족은 앤디인데, 그 앤디 앞에서 피시와 스완을 보호하는 로날드의 모습이 어찌나 황당하던지.
‘로날드. 넌 언젠가부터 우리 1기사단보다 저 백조랑 남작님이랑 더 자주 붙어 있는 것 같다?’
‘동맹족끼리 내 편, 네 편이 어디 있어요. 가만 보면 앤디 님도 참 편협해요.’
그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쪼그만 테르 놈이 자신을 동맹족도 배척하는 아주 몰인정한 놈으로 취급했다. 누가 친구 아니랄까 봐, 슈프 저놈은 한술 더 떠서 동맹족도 아닌 뱀에게 인정을 베풀고 있다. 앤디는 혀를 쯧쯧 차며 고개를 흔들었다.
“왜. 내가 놈을 이교도 취급 해서 이 자리에서 바로 목을 비틀어 버릴까 봐?”
“네…….”
“너도 저놈이랑 친구가 됐냐? 종족을 뛰어넘는 우정, 뭐 그런 거?”
“네? 아뇨. 친구 아니에요! 저는 감시자예요! 폐하께서 감시하라고 하셔서, 그래서…… 그래서 그냥 지켜보는 건데요?”
“네 친구 로날드가 좀 더 용기 있네. 그냥 솔직하게 말해도 돼. 어차피 내가 목을 뜯어 버릴 건 저 인간인 척 행세하는 뱀이 아니라 그 뒤에 있는 뱀 같은 인간 놈이니까.”
“아스타로요?”
“그래. 내가 저 자식 때문에 노아 님에게 얼마나 혼이 난 줄 알아? 이교도인지 뭔지. 그거 때문에 제도군에도 문제가 생겼다고.”
앤디는 이를 갈았다. 안일했던 제 실수에 화가 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저런 얄팍한 혀에 놀아난 상황이 짜증 났다. 어떻게 올리세스를 신이라고 믿고 추앙한단 말인가. 저딴 걸 믿는 것도 다 심지가 나약한 인간들뿐일 것이다, 라고 가볍게 생각했다. 그는 제 부관이 이교도가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긴. 포필렌도 우논에게 부작용을 남기는 마당에 이교도가 안 된다는 보장도 없지. 레온에게도 오랜 포필렌 복용으로 인한 부작용이 나타났음이 드러났다. 금단현상을 겪게 된 것이다. 그 포필렌은 심지어 어떤 개량도 하지 않은 자연 상태 그대로의 포필렌이었다. 그것도 레온이 직접 재배했던.
이엘은 동맹군에게 포필렌과 이교도의 심각성을 몇 번씩 알려 왔었지만 앤디처럼 가볍게 생각했던 자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런 건 나약한 심지를 가진 인간들이나 넘어가는 술수라고 치부하며. 하지만 이제는 이종족도 안전한 대상이 아니다.
“벌써 마을 10개가 함락당했어요. 인간들은 포필렌에 완전히 중독됐고 이교도의 숫자는 계속 늘어나고 있어요. 포레스트랑 제가 매일 밤 사람들을 구출해 밖으로 빼내는데도 이쪽으로 들어오는 숫자가 더 많아요.”
슈프는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앤디에게 이곳 사정을 알렸다. 곧장 아스타로의 목을 잘라서 들고 가려고 왔던 앤디는 그 얘기를 듣고 생각을 바꿨다.
“슈프. 일단 나도 이곳에서 함께 움직여야겠다.”
“아스타로를 죽이러 오신 게 아니에요?”
“아직 아냐. 저 뱀이 조금 더 자리 잡은 뒤에.”
“포레스트요?”
“슈프, 저 멀리 피해 있어라. 내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모른 척해. 난 저 마을로 들어갈 생각이니까.”
말을 마친 앤디가 회색빛 털을 가진 커다란 늑대로 변했다. 그는 성큼성큼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더니 갑자기 엄청난 속도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꺄악!”
“늑대다!”
“아악!”
“사, 살려 주세요!”
귀를 찢을 듯한 인간들의 비명 사이로 앤디는 사나운 하울링을 내뱉었다. 슈프에게 조금 더 뒤로 물러나라는 경고의 하울링이었다. 슈프는 앤디가 갑자기 왜 저러는지 몰라 당황했지만 일단 그의 말을 들으며 뒤로 물러섰다.
앤디는 멈추지 않았다. 자신을 향해 아스타로의 사병들이 총을 쏘고 화살을 쏘아 대는데도 이리저리 피하며 기어이 단상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그는 자신을 바라보며 놀란 눈을 뜨는 포레스트를 그대로 박치기하듯 머리로 박아 넘어뜨렸다. 그러곤 당황해서 비명도 못 지르는 포레스트에게, 그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말했다.
“노래를 불러서 나를 진정시키는 척해.”
“네?”
“빨리. 내가 시키는 대로 해.”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다. 아스타로의 소속이 되어 그가 시키는 대로 사람들을 홀리고 있던 포레스트는 난데없이 저를 들이받은 늑대가 누군지 몰라 당황한 상태였다. 제도에 주둔하고 있던 앤디와, 이엘을 따라 영지를 이동하던 포레스트는 서로 접점이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