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452화 (452/488)

452화

*

“사실은 그 전부터 목소리가 들렸어요. 누군가 저를 부르는 듯한 목소리요.”

우여곡절 끝에 이카르의 영지에 도착한 이온은, 잠깐 이야기 좀 하자는 이카르를 따라 함께 들판으로 나왔다. 그러고선 꺼낸 첫마디가 저것이었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고.

“그게 누군지 알겠어?”

“아니요. 모르겠어요. 남자인지 여자인지…… 성별조차 불분명해요. 하지만 듣기 좋은 목소리는 확실히 아니었어요.”

“그가 정확히 뭐라고 했는지 자세히 말해 봐.”

이카르는 심각한 표정으로 이온을 데리고 외곽 부근으로 향했다. 제도를 나온 뒤로 이온의 상태는 부쩍 좋아졌다. 언제 아팠냐는 듯 혈색이 돌아왔고, 오히려 기분은 이전보다 더 나아지기까지 했다.

이카르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이온의 안색을 살피곤 조용한 곳에서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긴 우리밖에 없으니까 다 얘기해.”

“땅굴에서 정신을 차렸던 순간부터 그랬어요. 그땐 막 깨어난 상태라 제정신이 아니었으니까 그냥 머릿속이 복잡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더 강해져요. 소리가 점점 분명하고 또렷하게 들려요.”

“그 목소리가 네게 뭐라고 말하는데?”

“그건 모르겠어요. 그냥 제 이름만 불러요. 마치 자기 말을 잘 듣고 있는지 확인하려는 것처럼요.”

“그럼 넌 그 목소리에 대답했나?”

“아뇨. 무서워서 계속 모른 척했어요. 오드와 이엘에게도 말하지 않았어요. 걱정할까 봐요.”

이온은 자신이 정확히 어떤 방법으로 살아난 건지는 여전히 모르지만, 그게 정상적인 방법이 아니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애초에 죽어 가는 사람을 살리는 것에 정상적인 방법이란 게 존재하지도 않을 테지만.

“잘했어. 대답하지 마. 한번 빠져들면 헤어나기 힘들어.”

“그게 뭔지…… 이카르 님은 알고 계신 거죠?”

“폐하께서 네게 말해도 좋다고 허락하시기 전까진 말해 줄 수 없다.”

“알겠습니다. 그럼 억지 부리지 않을게요. 소리에도 대답하지 않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지금은 몸이 정말 괜찮거든요. 너무 가벼워서 날아다닐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이온이 배시시 웃으며 농담을 내뱉자, 이카르의 마음이 복잡해졌다. 그는 알겠다며 휘파람을 불어 주변을 경비하던 하이에나를 불러왔다. 그러곤 이온을 그의 등에 태워 안전하게 저택까지 이동시키라는 명령을 잊지 않았다.

이온이 하이에나와 함께 사라진 후 이카르는 다시 심각한 표정으로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가 이온에게 접근하고 있다.

이엘의 말에 따르면 이곳은 아직 신이 만든 세계이기 때문에 ‘그’가 직접적으로 개입할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이엘이 처음 땅굴에서 ‘그’를 만날 수 있었던 것도, 오드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땅굴의 결계를 깨뜨리고 공간을 찢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이쪽 세계로 올 수 없으니 자신의 세계로 이엘을 불러들임으로써.

그러니까 지금 ‘그’가 이온을 부르고 있다는 건, 그때의 이엘처럼 자신의 공간에 이온을 데려갈 계획이라는 의미와도 같은 소리였다. 만약 여기서 이온이 ‘그’의 부름에 대답하고 공간에 들어가게 되면 또 일이 어떻게 꼬일지 모른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온을 지켜 내야 해.

이카르는 집무실로 돌아와 이엘에게 이온의 상태를 적은 편지를 썼다. 그러곤 밖에서 대기 중이던 발트에게 편지를 제도에 전해 주라고 명령했다. 발트와 함께 들어온 다른 하이에나에게는 이온에게 더 많은 경비를 붙이라고 조용히 일렀다.

“그리고 황자에게 조금이라도 이상이 생기면 곧장 내게 보고해라. 아주 조금도 늦어서는 안 돼.”

“알겠소, 대장.”

오랜 여정이 가져다준 피로가 온몸에 가득했다. 우논인 자신이 이 정도인데, 하물며 아이를 가진 나타니엘은 얼마나 지쳤을까. 이카르는 책상 위에 있던 펜을 손으로 도로록 굴렸다. 대체 언제쯤 이 지독한 전쟁이 끝날까. 그날이 속히 오길 바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오지 않기를 바란다.

그 끝이 과연 승리일지 패배일지, 아무도 확신하지 못하니까.

*

유클리드의 합류로 제도군은 발에 날개가 달린 것처럼 훨훨 날아다녔다. 전쟁광이라는 별명이 왜 붙었는지 몸소 보여 주겠다고 호언장담하던 그는, 정말로 전장에 나갔다 하면 승리의 소식을 들고 돌아왔다.

그 덕에 적군을 조금씩 바깥으로 밀어내는 것에 성공했고, 이제 제도의 경계선 밖까지 완전히 몰아낸 상태였다.

각 영주들 역시 폭동을 잠재웠고 외부의 침략을 잘 막아 내고 있다고 전했다. 병력이 약한 작은 영지들은 주변의 이종족들과 동맹을 맺어 수호했다. 이렇듯 글자 그대로의 전쟁은 승리를 향해 박차를 가하고 있었지만, 문제는 그쪽이 아니었다.

“왜 말하지 않았지? 앤디. 내게 변명해라.”

노아의 엄한 목소리에 앤디는 입을 다문 채 고개를 숙여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들이 제도에 돌아오기 전, 늑대들 중 하나가 이교도에 빠져 내부를 뒤흔들 뻔한 사건이 있었다. 그는 앤디의 직속 하관이었기 때문에 자칫하면 큰 소란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그래서 앤디는 누구보다 빠르게 처리했고 잘 마무리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노아는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분노한 상태였다.

“내가 제도로 돌아온 지 몇 주나 지났는데. 왜 내게 말하지 않았냐고 물었어, 앤디.”

“죄송합니다, 각하.”

“지금 그 말을 들으려고 내가 널 부른 줄 아나?”

“…….”

“변명해 봐. 대체 네가 어떻게 지휘했기에 늑대들 중에 이교도가…… 하! 지금 내 입으로 이런 말을 내뱉는 게 현실이 맞나? 넌 놈이 이교도가 될 때까지 전혀 몰랐나? 내가 자리를 비울 동안 단장과 수장 역할은 네 몫이라고 했는데도?”

“죄송합니다, 각하. 면목이 없습니다. 변명할 말씀도 없습니다. 다 제 잘못입니다. 제가…… 제가 전혀 돌아보지 못했습니다.”

“…….”

“무슨 벌이라도 마땅히 받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각하.”

“지금 네게 벌을 내리고 싶어서 내가 이러는 줄 알아?”

“…….”

“봐, 네가 꺼뜨리지 못한 불씨가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앤디는 이교도가 된 제 부관을 지하 감옥에 가둬 놨지만, 놈은 기어이 그곳을 탈출해 황궁 밖으로 달아났다. 그 과정에서 다치고 죽은 자가 상당했다.

뿐만 아니라 제도군 내부에서도 은근하게 숨어 있던 이교도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며 갈등을 빚었고, 크고 작은 싸움이 매일같이 늘어났다. 그렇게 요 며칠 사이에 색출된 자만 수십에 달했다.

초기에 진압하지 못한 불씨가 걷잡을 수 없이 번졌고 결국엔 내부의 분열을 가져온 것이다.

“적어도 내가 돌아오자마자 보고했으면 일이 이 지경까지 됐겠나? 지금 밖이 어떤 상황인지 누구보다 잘 아는 놈이 일 처리를 이렇게 해?”

“죄송합니다.”

호되게 혼나는 앤디를 보면서도 이번만은 알폰스도 노아를 말릴 수 없었다. 앤디는 단호한 편이었지만 동족에 한해서는 약한 면이 있었다.

이번 일 역시 문제가 생기자마자 이교도가 된 놈을 죽였더라면 후환이 없었을 텐데, 괜히 노아에게 처분을 맡긴다는 핑계로 차일피일 미뤘기 때문에 일이 꼬인 것이다. 결국 동족을 제 손으로 죽일 수 없다는 나약함 때문에.

“죄송하다는 소리는 이제 그만 집어치우고 앞으로 어떻게 수습할 건지 생각해.”

“예, 각하.”

“앞으론 사소한 것 하나도 빼놓지 말고 내게 곧장 보고해. 너희가 처리할 수 없는 선에서의 문제들이라면 더더욱.”

“예.”

급속도로 쌓인 피로감에 지친 노아가 모여 있던 늑대들을 전부 해산시켰다. 밖으로 나온 앤디는 제 머리를 쥐어뜯으며 벽에 기대 주저앉았다. 알폰스는 주변에 있던 늑대들과 다른 기사단들을 전부 밖으로 내보낸 뒤, 괴로워하는 앤디의 곁으로 다가갔다.

“앤디 경. 창피하게 여기서 이러지 말고 경의 침실로 가셔서 자책하십시오.”

“경은 공감이란 걸 전혀 못 합니까? 이런 땐 괜찮다고 말하는 거야.”

“괜찮지 않은데 어떻게 괜찮다고 합니까? 그리고 공감이라뇨. 저였다면 절대 이런 일은 없었을 겁니다. 전혀 공감되지 않습니다.”

“……됐습니다. 내가 경한테 뭘 바라겠어.”

애초에 앤디도 진짜로 그에게서 위로를 받으려고 던진 말이 아니었다. 솔직히 저지른 일에 비하면 그렇게 많이 혼난 것도 아니다. 황제인 이엘이 넘어가라고 지시했기 때문에 노아도 심하게 지적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앤디 스스로도 자신은 더 혼나는 게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교화시킬 수 있을 거라고 속단했다. 인간은 몰라도 이종족은, 특히 늑대는 신으로부터 만들어진 이래로 신을 떠난 적이 단 한순간도 없었으니까. 설령 신에게 버림받았을지라도 그들은 최선을 다해 신을 기다리고 믿었다. 그랬기 때문에 앤디는 한 번의 기회는 줘도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내가 너무 안일했어. 사태의 심각성을 이제야 깨닫다니.”

괴로워하는 앤디에게 알폰스는 딱히 위로해 줄 말이 없었다. 이건 부관의 잘못에 대해 마땅히 느껴야 하는 상관으로서의 책임이었다. 하지만 밑도 끝도 없이 자책만 하다가는 또 같은 실수를 반복할 것이다.

“앤디 경. 이렇게 자책하실 시간에 해결책이나 내놓으십시오. 그게 각하의 분노를 잠재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 중이고요.”

열심히 골몰하던 앤디는 알폰스를 빤히 쳐다보다가 누군가를 떠올렸다.

“슈프가 어디로 갔다고 했습니까?”

“어린 뱀과 함께 아스타로에게 향했습니다.”

“그래. 근원지는 아스타로 그놈이니까. 일단 그놈부터 처리해야겠네. 알폰스 경. 내가 없는 동안 황궁과 기사단을 맡아 주십시오.”

“어디 가십니까?”

“슈프랑 그 뱀에게. 잘하고 있는지 보고, 가는 김에 아스타로 놈도 잡아 오겠습니다.”

그동안 한곳에 너무 오래 머물렀다. 원래 앤디는 영지에 붙박여야 하는 노아를 대신해 밖으로 돌아다니는 역할을 주로 맡았는데 이렇게 1년이 넘는 시간을 제도 안에서만 생활하느라 꽤 답답했다.

“노아 님께 말씀 안 드리고 떠나실 겁니까?”

“경이 대신 말씀드려 주시죠.”

“…….”

“울상 짓지 말고. 따지고 보면 내가 상관 아닙니까? 상관이 말하면 제대로 듣고 따르십시오, 알폰스 경.”

“울상 지은 적 없습니다. 그리고 굳이 따지자면 앤디 님은 제 상관이 아니죠.”

“아, 진짜 거 되게……. 됐습니다. 말하든 말든 경이 알아서 하시고. 난 갑니다.”

그 말만 남기고 앤디는 늑대의 모습으로 변하더니 높은 벽을 타고 올라가 꼭대기쯤에 있는 좁은 창문 새로 빠져나가 훌쩍 뛰어내려 버렸다. 알폰스는 가만히 앤디의 흔적을 좇다가 한숨을 쉬며 다시 노아의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뭐야.”

“각하. 알폰스입니다.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들어와.”

조금 전에 피곤에 절어 있기에 쉬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노아는 늑대들이 나간 뒤에 전략부터 세우고 있었던 모양이다. 알폰스는 커다란 나무 테이블 위에 잔뜩 펼쳐진 지도들을 힐끗 보고는 문을 닫고 그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