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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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긴 정말 변한 게 하나도 없구나.”
“폐하께서 언제 방문하셔도 편히 쉬다 가실 수 있어야 하니까요. 이 방이 줄곧, 폐하를 기다렸어요.”
피시의 수줍은 목소리에 이엘이 고개를 끄덕이며 침실을 둘러보았다. 과거엔 조이나의 침실이었고, 대대로 변경백과 차기 변경백들이 사용하던 침실이었다. 그녀가 하이에나의 영지에 머물렀을 때 이 침실을 사용하기도 했었다. 그때와 다를 게 없는 침실 안을 둘러보며 이엘이 아주 잠깐 그리움에 젖었다.
뱀의 영지에서 도망쳐 몸을 숨기기 위해 이곳에 의탁했는데, 그때만 하더라도 하이에나들이 이렇게 큰 지지기반이 될 줄 몰랐다. 세잔티노 습격 사건만 봐도 당시엔 피시 외에는 그 누구도 그녀의 편에 서지 않았었으니까.
“돌아오신 걸 환영해요, 폐하.”
“응. 반겨 줘서 고마워, 피시.”
“뭘요. 당연한 건데요. 여긴 폐하의 영지잖아요.”
“…….”
“짐은 옆방에 풀어 두라고 명했습니다. 편한 옷으로 환복하시고 내려오세요. 식사를 준비하겠습니다.”
“피시.”
“예?”
“제도는 괜찮은 거지? 스완이 어느 순간부터 연락이 잘 안 되던데. 그 애는 같이 오지 않은 거야?”
원래 계획대로라면 스완은 피시와 함께 하이에나의 영지로 내려와 이엘과 합류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 때문인지, 이곳에 있어야 할 스완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그것에 관해서 들은 소식이 없던 이엘은 걱정이 가득한 표정으로 스완의 안부를 피시에게 물었다.
사실 최근 들어 스완과 연락을 하는 게 어려워졌다. 연락이 끊긴 게 아니라 일방적으로 그쪽에서 제 연락을 피하는 것 같았다.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이곳으로 오는 내내 스완을 향한 걱정을 멈출 수 없었다. 그래도 여기 도착하면 만날 수 있겠거니 싶어서 애써 염려를 억눌렀던 건데.
“글쎄요. 사정이 생겨서 제도에 남기로 했다고 들었어요. 원래는 저와 함께 귀족회의가 끝나자마자 이곳으로 오기로 했는데, 일정이 꼬여서 스완과 로날드는 제도에 남았거든요. 나중에 오겠다면서. 그런데 제도에 일이 생겼나 봐요. 거기에 남겠다고, 뒤늦게 소식이 전해졌어요.”
“그래? 요새 연락이 잘 안 돼서 걱정이었거든.”
“괜찮을 거예요. 여기보다 제도가 더 안전하니까요.”
“그래. 그럼 됐어.”
피시는 이엘에게 예쁘게 웃어 주곤 조용히 침실 문을 닫고 밖으로 나왔다. 벌써부터 복도가 시끄러웠다. 오랜만에 귀환한 근위대와 그의 가족들이 들뜬 목소리로 왁자지껄 떠들고 있었다.
“하트!”
그리고 그건 하트와 피시도 마찬가지였다. 저 멀리 복도 끝에 서서 정복 망토를 벗고 있던 하트를 발견했다. 피시가 반가운 듯 그의 이름을 부르며 손을 흔들었다.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야.”
“그래.”
언제나처럼 무뚝뚝하게 대답한 하트는 피시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으며 그의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 어디 아프거나 하지는 않아 보였다. 도리어 이엘을 보고 온 탓인지 기분이 좋은 듯했다. 그의 마음을 눈치챈 피시가 배시시 웃으며 안심시켰다.
“걱정 마. 난 잘 지냈으니까.”
“알겠다. 며칠만 쉴 테니, 그때까지만 폐하와 손님들을 부탁한다.”
“응, 피곤할 텐데 푹 쉬어. 여긴 나한텐 맡기고.”
“피시.”
“응?”
인사를 마치고 다이닝 룸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려던 피시를 불러 세웠다. 하트는 뭔가 말하려다가 입을 꾹 다물고는 고개를 흔들며 먼저 돌아섰다.
“하트가 별일이네. 말을 하다가 말고.”
무슨 문제라도 있나? 피시는 저 멀리 점이 되어 사라지는 하트의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금세 흥미를 잃고 돌아섰다.
1층으로 내려오니 시끌벅적한 소리가 더 커졌다. 근위대의 귀환도 귀환이지만, 하이에나들은 지금 자신들의 영지에 황제가 와 있다는 것에 더 흥분한 듯했다. 그럴 만도 했다. 그녀가 황위에 오른 지 몇 년이 지났지만 이곳을 찾은 횟수는 손에 꼽혔을 정도로 적었으니까.
피시는 제 뺨에 달라붙는 바닷바람을 느끼며 콧노래를 불렀다. 모처럼 폐하께서 친림하셨으니 융숭한 대접으로 푹 쉬다 가실 수 있게 해야겠다. 그 생각을 하며 고개를 위로 들어 올렸을 때, 피시는 적발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공작님.”
“오랜만이오.”
늠름하고 대단한 기백이 느껴지는 남자다. 피시는 제게 고개만 까딱이는 르네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먼 길을 온 건 그 역시 마찬가지일 텐데 지친 기색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오히려 근위대장과 2기사단장의 빈자리를 모자람 없이 채울 정도로, 그는 단단해 보였다.
“내게 할 말이 있소?”
“아닙니다.”
피시의 시선을 느낀 건지 정신없이 움직이는 기사단들을 정렬하던 르네가 그를 쳐다보며 물었다. 피시는 평소처럼 말갛게 웃으며 고개를 흔들고는 그 자리를 벗어났다.
“남작!”
그러나 몇 걸음 가지 못하고 누군가 저를 부르는 탓에 피시는 걸음을 멈춰야 했다.
“공작님?”
“잠깐 얘기 좀 하지.”
그를 불러 세운 건 다름 아닌 노아였다. 후드를 깊게 눌러쓴 채 벽 뒤에서 피시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무슨 일이신가요?”
“폐하를 부탁한다.”
“예?”
“당분간 자리를 비울 거야. 뱀의 영지에 다녀올 예정이다.”
“혹시 몰래 가시는 건가요?”
“폐하께만 말씀드렸다. 다른 놈들은 몰라. 모르는 편이 좋고.”
“알겠습니다. 다녀오세요. 폐하는 제가 잘 모시겠습니다.”
하이에나의 영지는 가장 안전하다. 그리고 그 영지 안에서라면 저 불안해 보이는 피시라 할지라도 다른 종족의 우논들보다 강할 테니까. 아마 근위대장인 하트는 오랜 여정으로 인해 누적된 피로를 풀기 위해 며칠간 푹 쉬겠지. 그래서 피시를 불렀던 것이다.
기분이 이상하군. 한때는 저놈이 미치광이로 불리며 모두의 손가락질을 당하던 때도 있었는데. 그런 시절이 언제 있었냐는 듯 피시는 누구보다 이 영지와 잘 어울리는 하이에나로 성장했다. 암묵적으로 이곳의 영주는 패티스였음에도 지금의 피시는 패티스보다 더 영주다워 보였다.
“남작.”
“네, 공작님. 말씀하세요.”
“능력을 조절하는 건 아직도 어렵나?”
노아의 물음에 피시가 웃던 얼굴을 걷어 냈다. 피시는 하트에게서 능력을 쓰는 법을 배우고 있었지만, 몇 년 전엔 노아에게서도 가르침을 받았다.
사실 가르치는 방식만 놓고 보면 하트보다 노아의 수준이 월등히 높고 훌륭하기 때문에 기초를 그에게서 배운 것에 감사해야 할 정도였다. 다만 종족이 다르다 보니 능력의 본질도 달라서 기본기를 배운 후로는 노아에게서 더 배울 게 없었다.
그래서 그 뒤로는 노아에게서 훈련을 받지 않았기에, 그가 자신의 상태에 관해 궁금할 법도 하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맞아요. 아직도 어려워요.”
“…….”
“하트의 말에 의하면 결정력이 부족해서라는데, 그걸 채우려면 경험을 쌓아야 한대요. 실전을 겪지 않으면 채워지지 않는다면서.”
피시의 말을 잠자코 듣던 노아가 그의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지금의 하이에나들은 전부 경험이 적은 어린놈들뿐이다. 원래도 하이에나의 수컷은 암컷보다 약한데 경험마저 떨어지기에 건국 초에 그들이 근위대를 맡는 것에 모두가 불안함을 느꼈던 것이다.
그리고 피시는 그중에서도 가장 경험이 적은 개체였다. 아니. 적다고 말하는 것도 우습다. 그냥 전투 자체에 대한 경험이 없는 편이었으니까.
“언젠가 폐하께서 저를 쓰실 수 있도록, 그날을 위해 훈련하고 있어요.”
피시는 주먹을 쥐었다가 펴며 중얼거렸다. 세잔티노에서부터 제도, 그리고 고니의 호수까지 이어졌던 그 지하에선 능력을 마음껏 사용했다. 누구보다 정밀하고 완벽한 컨트롤이었다고 자부할 수 있다. 단언컨대 그 순간만큼은 하트의 능력보다 뛰어났으리라.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지하를 나오는 순간부터는 다시 엉망진창인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컨트롤은커녕 그나마 몇 년간 하트의 혹독한 가르침으로 세워 놨던 기본기마저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하트가 그랬어요. 제 능력은 출력이 세기 때문에 조절만 잘 하면 현재 근위대들보다 쓸모 있을 거라고요.”
피시는 그렇게 말하면서 제 손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때의 그 짜릿한 손맛을 잊지 못한다. 지하에서 스스로의 몸을 띄웠던 그 순간이 잊히지가 않는다. 한낮의 꿈이 된 것처럼 사라져 버렸지만, 피시는 여전히 자신이 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그러니 걱정 말고 다녀오세요. 여긴 가장 안전한 하이에나의 영지니까요.”
“부탁한다.”
어쭙잖은 위로는 큰 도움이 되지 않을 테지. 노아는 어딘지 모르게 실망에 젖은 듯한 피시에게 어설픈 위로를 건네는 것을 포기하곤 몸을 돌려 성벽이 있는 쪽으로 사라졌다.
“쟤 어디 가는 거야?”
다른 이들의 눈을 피해 조용히 사라진 노아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피시가, 제 뒤에서 들린 낯선 이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재빨리 뒤로 돌았다.
“이런 중요한 시기에 귀한 전력이 빠지면 안 될 텐데.”
“누구시죠?”
피시로서는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푸른색이 은은하게 비치는 결 좋은 머리카락과 그 머리색만큼이나 아름답게 빛나는 눈동자까지……. 오묘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남자를 유심히 쳐다봤다. 이엘의 최측근에 속하는 자신도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그냥 뭐 이것저것 잡다하게 아는 인간 정도로 해 둘게.”
“네?”
“그나저나 네가 여기 영주야? 원래 하이에나는 암컷이 아니면 우두머리로 섬기지 않잖아.”
“암컷이 없으니까요.”
“아, 그러네. 내가 너무 당연한 질문을 했구나?”
인간이라고? 전혀. 저 생김새와 무례한 태도가 어떻게 인간이겠는가. 아무리 무딘 피시라 할지라도 이종족의 감이라는 게 남아 있다. 피시는 경계하는 눈초리로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당신의 정체를 폐하께선 알고 계신가요?”
“넌 그녀를 못 믿는구나? 그녀의 허락이 없었다면 내가 여기에 있을 수 있겠어?”
“그럼 됐습니다. 편히 쉬다 가세요.”
굳이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자에게까지 신경 쓸 만한 여유가 없었다. 피시는 남자에게 가볍게 묵례하곤 단호히 돌아섰다. 그러나 뒤이어 들린 목소리에 걸음이 붙박이듯 또 멈춰 섰다.
“아까 들어 보니, 능력을 쓰는 게 어렵다고 하던데.”
“…….”
“그래서 황제를 지킬 수나 있겠어?”
일부러 자신을 자극하고 있다. 적이든 아군이든, 자신을 무능하게 보면 볼수록 그녀에겐 더 큰 이득을 안겨 줄 테니까. 꾹 눌러 참았다. 바보 취급당해도, 여전히 미친놈 취급당해도 피시는 참아야 한다.
“그렇게 몸만 사리면 나중에 후회할 일 생길 거야.”
“누가 몸을 사린다는 거죠?”
그러나 끝내 참지 못했다. 자신은 여전히 어리고 어리석어서. 남자가 덫을 놨다는 걸 알면서도 피시는 흥분하며 돌아서고 말았다. 자격지심과 억울함에 울컥한 표정으로 남자를 노려봤다.
“너 스스로도 네가 가진 잠재성을 알고 있잖아. 알면서도 쓰지 않는 게 몸을 사리는 거지, 뭐야.”
“잠재성이 아니라 위험성입니다. 조절하지 못하면 모두를 죽이는 위험성이요.”
“조절만 하면 누구보다 뛰어난 능력이 될 텐데, 그런 걸 잠재성이라고 한단다.”
“조절을 못 하는 제겐 위험성에 더 가까워요.”
“네 입으로 그랬잖아. 실전을 겪어야 성장할 거라고.”
“…….”
“그럼 실전에 나서. 이렇게 영지에 처박혀서는 아무것도 못 할걸?”
킨은 제 말에 피시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지켜보았다. 아주 오래 살다 보면 이종족의 감이 쓸데없이 발달하게 되는데, 제 혜안이 정확하다면 저 하이에나는 아주 폭발적인 잠재력을 갖고 있을 것이다.
암컷 하이에나와 맞먹을 정도로 보이니, 그들이 없는 지금 세상에선 저놈이 가장 우수한 하이에나가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