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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364화 (364/488)
  • 364화

    *

    “폐하. 이 평야만 지나면 곧 하이에나의 영지가 보입니다.”

    “생각보다 빨리 도착해서 다행이네.”

    “그게 다 내 덕분 아닌가?”

    고개를 빳빳이 쳐든 킨의 말에 모두가 하나같이 미간을 찌푸리며 떫은 표정을 지었으나 반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의 말이 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카르의 영지를 나오고 근처에 있는 이종족의 영지 몇 개를 더 순회하는 동안에도 계절은 여전히 겨울이었다. 보통 때라면 한창 눈이 쏟아지고 있을 날짜였고, 실제로 제국 전역에 눈이 내리고 있을 터였다.

    그러나 영지 시찰을 하는 이엘 일행은 재규어의 영지를 벗어난 뒤로는 눈과 마주한 적이 없었다. 킨과 밀로가 날씨를 바꿔 쏟아지는 눈으로부터 그녀와 무리를 지킨 것이다.

    “안 그런가요, 폐하?”

    킨이 웃으며 그녀의 동의를 구했다. 그는 여전히 무례했지만 적어도 이엘의 앞에서만큼은 온순한 척 굴며, 다른 이종족들처럼 그녀를 공대했다.

    “그래, 맞아. 킨과 밀로의 공이 크다.”

    “들었지? 그러니까 나 귀찮게 하지 말고 축복의 열매나 더 가져와.”

    그녀의 대답에 의기양양해진 킨이 콧노래를 부르며 슈프의 등에 올라타더니 그 위에 벌러덩 누웠다. 저건 하루 종일 처먹기만 하네. 그렇게 숙덕거리던 하이에나들이 못마땅한 표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며 식량 주머니에서 축복의 열매를 가져와 킨에게 집어 던지듯 갖다 줬다.

    저렇게 투닥거리긴 해도 비교적 평화로운 상황이다. 제멋대로 굴 거라 생각했던 킨은, 암컷 용을 만나기 위해서인지 이엘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 제 딴엔 머리를 쓰는 듯했다.

    이엘은 시끌벅적한 무리들을 하나하나 점검한 후에, 다시 하트의 등 위에 올라탔다. 그러곤 고개만 뒤로 돌려 크게 소리쳤다.

    “다들 조금만 더 고생하자. 곧 하이에나의 영지니 들어가면 그땐 마음 편히 쉬게 해 줄게.”

    “예, 폐하!”

    동맹족들의 영지 중에서도 가장 안전한 곳이 하이에나의 영지였다. 누구도 쉽게 침입하지 못하는 곳인 데다가, 최근 들어 그곳만큼 경비가 강화된 곳도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각자의 영지에서 조금씩 쉬면서 교대로 호위를 맡았던 다른 종족들과는 달리, 근위대인 하이에나는 제도를 출발하면서부터 단 한 순간도 쉰 적이 없으니 이곳에선 발 뻗고 편히 쉴 수 있을 것이다.

    “폐하. 여기서부터는 제가 호위하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뒤에 있던 노아가 성큼성큼 다가와 커다란 늑대로 변했다. 그는 하트의 등에 올라탄 그녀의 앞에 앞다리를 꿇고 자세를 낮춰 주었다. 노아를 힐끔 쳐다보던 이엘은 하트가 무슨 말을 내뱉기도 전에 그의 등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그래, 하트 경. 여기서부턴 다른 이들의 호위를 받겠다. 경은 지친 근위대를 통솔하는 역할을 맡도록.”

    “폐하. 전 괜찮습니다.”

    “경은 괜찮지만 근위대는 아니야. 그대의 종족을 봐. 많이 지쳤다.”

    그녀의 말에 하트는 그제야 근위대의 상태를 살폈다. 반년이 넘게 이어진 긴 여정에 다들 티는 내지 않았지만 지칠 대로 지친 게 눈에 보였다. 결국 하트는 제 고집을 꺾고 그녀를 노아에게 맡긴 채 뒤로 물러나 하이에나들을 챙기는 역할을 맡았다.

    이엘은 안락한 휴식을 코앞에 두고 여느 때보다 신난 듯한 무리들을 쳐다보며 빙긋 웃었다. 그러고는 가볍게 뛰어올라 노아의 등 위에 안착했다.

    “그럼 부탁 좀 할게, 공작.”

    “맡겨 주십시오.”

    오랜만에 그의 등에 올라탄 터라 이유 없이 두근거렸다. 그 감정이 노아에게까지 전해졌다. 그리고 그건 노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앞선 여러 차례의 일로 인해 이엘과 노아는 이런 단란한 시간을 갖지 못했던 것이다.

    “노아. 그대는 하이에나의 영지에 처음 와 보지?”

    “네, 폐하. 처음입니다.”

    “아마 깜짝 놀랄 거야. 경치가 정말 아름답거든.”

    “폐하께서 그렇게 극찬하실 정도입니까?”

    “응. 과거엔 더 아름다웠다는데, 도저히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이 안 돼. 지금도 충분히 아름다워서.”

    그녀가 행복한 듯 하이에나의 영지를 자랑하는 모습에, 노아는 아주 잠깐 치졸한 질투를 했던 것 같다. 이엘이 마치 저가 하이에나인 양 뿌듯해하는 것 같아서……. 물론 스스로 속 좁은 질투라는 것을 깨닫자마자 그 마음은 쏙 사라졌다. 표면상 그녀가 하이에나 소속이라는 것도 맞으니까.

    “노아?”

    “예? 부르셨습니까?”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아닙니다. 그냥 듣기 좋은 폐하의 목소리에 취했나 봅니다.”

    “말은 여전히 잘해.”

    “사실입니다.”

    “따로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거지?”

    “…….”

    “그러니 호위를 바꿔서 이렇게 시간을 만든 것 아냐.”

    이엘의 말에 노아가 침묵했다.

    “내가 맞혀 볼까?”

    “폐하.”

    “로빈의 영지에 다녀올 생각이지?”

    “……예.”

    “잘 생각했어. 조심히 다녀오도록 해.”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또 이렇게 떠나게 되어 죄송합니다.”

    “미안하면 이번엔 늦지 마.”

    “…….”

    “날 기다리게 하지 마.”

    그녀의 단호한 목소리에 노아가 달리던 속도를 늦췄다. 가장 앞서 달리던 그의 속도가 느려지니 뒤따르던 무리의 속도도 점차 느려졌다. 하이에나의 영지를 코앞에 두고 갑자기 속도가 느려진 것에 후발대들은 무척 궁금한 듯했다. 앞의 상황을 확인하려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었다.

    “물론입니다, 폐하.”

    “…….”

    “이번엔 절대로 늦지 않겠습니다. 폐하께서 이곳을 떠나기 전까지 돌아올 것을 약속드립니다.”

    “자신 있나 보군.”

    “뱀이니까요.”

    “로빈은 만만히 볼 자가 아니야.”

    “알고 있습니다.”

    노아는 영문을 모르는 후발대가 저희 쪽으로 다가오기 전에 다시 속도를 올렸다. 앞에 장애물이 있었던 건가? 후발대는 어리둥절한 채 다시 무리를 따라 평야를 내달렸다.

    “이번엔 로빈이 저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그래. 알겠어.”

    그녀의 시원한 대답이 들림과 동시에, 저 멀리서부터 누군가 무리를 향해 달려오는 게 보였다.

    “폐하!”

    하이에나 떼가 마주 달려오고 있었다. 언제부터 나와서 기다렸는지 모를 피시와 다른 하이에나들이었다. 독수리들처럼 눈이 좋은 것도 아닌데 그녀가 경계를 넘자마자 알아보고 맞으러 나온 모양이었다.

    “그러니 제가 떠나기 전까지는 폐하의 곁을 지키는 건 제 몫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 마침 근위대장에게도 휴식을 주고 싶었으니까.”

    흔쾌히 허락한 그녀에게 화답하듯, 노아는 짧은 하울링으로 제 기분을 표현했다. 오랜만에 듣는 그의 하울링에 이엘도 작게 미소 지었다.

    “폐하! 어서 오세요!”

    벅찬 숨을 토해 내며 달려 나왔던 하이에나들 중 한 마리가 이엘을 발견하자마자 반가운 듯 소리를 지르며 사람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는 피시였다. 그녀를 그토록 오래 기다렸던.

    “기다렸어요. 폐하께서 오시기만을.”

    “남작. 설마 성 밖에서 하염없이 기다렸던 건가?”

    “예. 언제 오실지 모르는데 성 안에 있다가 마중에 늦으면 안 되니까요.”

    “볼이 빨갛구나.”

    이엘이 짧게 혀를 차며, 노아의 등 위에 올라탄 채 허리를 아래쪽으로 숙였다. 노아는 내키지 않았지만 그녀의 편의를 위해 앞발을 굽히고 높이를 한껏 낮춰 주었다. 이윽고 그녀의 손이 피시의 빨간 뺨에 닿았다.

    “그러다 감기 걸린대도.”

    “전 우논이니까요. 그리고 예전처럼 약하지 않은걸요.”

    새하얀 얼굴 위에 추위로 인해 붉은 홍조가 깊게 자리 잡았다. 하트나 패티스처럼 피시도 성장했지만 이엘의 눈엔 여전히 소년 같았다. 그게 퍽 안쓰러워 그녀는 장갑을 벗고 따뜻한 제 손으로 피시의 뺨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우논이어도 아플 수 있고, 약해질 수 있어. 부디 네 몸을 아끼렴, 피시.”

    “그럴게요. 폐하를 위해 아낄게요.”

    피시는 그 따뜻한 손바닥에 제 뺨을 묻은 채 행복한 듯 엷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곤 그녀를 위해 금세 손에서 떨어져 뒤로 물러섰다.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공작님. 피곤하실 테니 여기서부터는 제가 폐하의 호위를 맡을게요.”

    “아니. 괜찮소. 그동안 근위대장이 폐하의 호위를 맡아, 내 상태는 괜찮으니까.”

    형형하게 빛나는 눈으로 그녀의 호위를 맡겠다며 나선 피시의 제안을, 노아는 아주 가볍게 넘겨 버렸다. 어쩌면 이걸 염두에 두고 조금 전의 그 말을 한 건지도 모른다. 피시가 그녀를 발견하면 곧장 호위를 맡겠다고 나설 테니.

    “폐하. 공작께서 피곤하실 텐데 제게 오세요.”

    그리고 그게 먹히지 않으면 피시는 이렇게 자신에게 부탁할 테니 말이다. 이엘은 두 사람의 신경전에 머리가 아픈 건지 손바닥으로 이마를 감싸고는 피시를 향해 고개 저었다.

    “아니, 괜찮아. 공작의 말처럼 여태 근위대장이 짐의 호위를 맡았으니 노아 공은 피곤치 않을 것이다. 피시, 그대는 뒤따라오는 그대의 형제와 동족들을 잘 다독여 주도록 해. 나와 공작은 먼저 들어가겠다.”

    “……알겠어요. 폐하께서 원하시면 그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아주 잠깐 주저하던 피시는 언제 그랬냐는 듯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이고 물러섰다. 그는 그녀의 뒤쪽으로 줄지어 선 근위대에게 걸음을 향했다.

    “노아. 유치했어.”

    “제가요?”

    “시치미 떼지 마. 피시가 이렇게 나올 줄 알고 미리 내게 그런 말을 한 거잖아. 로빈의 영지에 가기 전까지만 호위를 맡겠다는.”

    “그런가요? 우연인 듯합니다. 저는 그런 의도가 없었습니다.”

    “피시는 그대보다 어린데 꼭 이렇게 해야 했어?”

    “폐하의 사랑을 받는 것에 나이와 종족이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

    “저는 더 치졸하고 유치한 짓이라도 할 수 있습니다.”

    “그대답지 않아.”

    “폐하의 앞에선 저는 제 자신을 기꺼이 버릴 수 있으니까요.”

    마치 그녀를 놀리듯 콧노래까지 부르며 노아는 여유로운 대답을 내놓고는, 하이에나의 성이 있는 곳을 향해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그러니 저를 더 예뻐해 주십시오.”

    “…….”

    “저도 질투할 줄 압니다.”

    “……안드로 경이 들으면 공작을 놀리겠구나.”

    “이미 압니다.”

    “…….”

    “아주 옛날부터 알고 있었고, 절 한심하게 보던데요.”

    그 옛날이란 건 아마도 그녀가 황위에 오르기 전일 테지. 이엘은 예상치 못한 노아의 질투로 괜히 제 얼굴이 홧홧해졌다.

    “폐하의 마음에 있는 조그만 틈도 뺏기고 싶지 않습니다.”

    “…….”

    “다 제게 주십시오.”

    “정말…….”

    아, 정말 할 말을 잃게 만드네……. 이엘은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이 커다란 늑대의 귀엽지 않은 투정이 썩 싫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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