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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324화 (324/488)
  • 324화

    *

    이엘을 발견한 우논 독수리가 재빨리 예의를 갖춰 인사했다.

    “폐하를 뵙습니다.”

    “그래. 수고가 많아. 근데 이쪽 복도는 지나갈 수 없다고?”

    “아닙니다. 폐하께선 성 어느 곳이든 가실 수 있습니다. 공작님은 폐하께서 가시는 길은 어디든 열어 두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을 향해 고개를 숙인 우논을 한 번 쳐다봤다가, 그의 뒤로 길게 이어진 기다란 복도를 응시했다. 여긴 특별할 게 없는 곳이지 않았나.

    조금 전 이 근방을 지나던 이엘은 시끄러운 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들리는 소란에 집중하니, 자신과 함께 왔던 기사단과 성을 지키는 우논 독수리 사이에 갈등이 생긴 듯했다. 갈등의 요는 이쪽 복도는 금지되어 아무나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었고.

    “그럼 짐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이곳을 지나갈 수 없다는 건가?”

    “예, 폐하. 공작님께서 특별히 내린 지시라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공작이 막은 곳이 이곳 말고도 더 있는가?”

    “아닙니다. 복도만 막으라고 하셨을 뿐, 그 외에는 달리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흐음. 르네가 직접 지시할 정도면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겠지. 이엘은 그 옆에 기죽은 듯 서 있던 기사의 어깨를 툭툭 쳐 주며 달랬다.

    “경은 다른 쪽으로 돌아가도록 하여라. 성의 주인이 금지한 것에 이유를 물을 자격은 없어.”

    “죄송합니다, 폐하. 제가 결례를 범했습니다.”

    “됐어. 경도 모르고 한 일이니 이 일의 책임은 지우지 않으마. 공작에겐 짐이 잘 얘기하겠다. 그만 돌아가도록.”

    “감사합니다, 폐하.”

    그 말을 끝으로 기사는 다른 쪽으로 돌아갔고, 경비를 서던 우논은 옆으로 비켜서며 이엘이 복도로 들어갈 수 있게 길을 내주었다. 원래 목적은 이쪽 길이 아니었지만 마음을 바꿔 크고 기다란 복도로 걸어갔다.

    당연히 이엘 외에는 아무도 이곳을 지나갈 수 없었기에 그녀의 뒤를 따르던 하트를 비롯하여 많은 수행원들은 다른 방향으로 돌아가야 했다. 이엘은 그들에게 괜찮다며, 조금 후에 보자는 말을 남기고 먼저 걷기 시작했다.

    “이쪽 복도를 왜 막은 걸까.”

    막을 거면 아예 다 막지, 자신에겐 허락된 건 무슨 일이고.

    한때 이곳에서 긴 시간을 무료하게 보냈던 적이 있는 터라 성의 면면이 이엘에겐 익숙했다. 이곳은 그리 특별한 곳이 아니었지만, 복도의 양쪽 끝에 중요한 공간들이 위치하고 있는 터라 필연적으로 거쳐 가야 했기에 접근성이 높을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막아 놓으면 빙 돌아가야 하니 불편하겠지. 이 복도만 막았다면 여기에 뭔가 있어서라는…… 아! 이엘은 벽에 걸린 거대한 초상화를 발견하곤 걸음을 멈췄다.

    “공작의 여동생…….”

    하프를 켜고 있는 릴리의 초상화 앞에 선 채 가만히 그림을 바라보았다. 혹시 이 그림 때문인가.

    “폐하.”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다가온 르네는 제게 절하며 공손히 인사했다.

    “폐하를 뵙습니다.”

    “공작도 소란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온 건가?”

    “죄송합니다, 폐하. 갑작스러운 제 지시로 폐하의 기사들에게 불편을 주었습니다.”

    “아니야. 어쨌든 객으로 머물고 있는 것은 우리이니, 주인인 공작이 그리 미안해할 건 없어.”

    “이유는…… 묻지 않으시는 겁니까?”

    “타당한 이유가 있어서겠지.”

    “…….”

    “사실 궁금하긴 하구나.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곳을 드나드는 것엔 별 제재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공작이 말하고 싶지 않은 이유라면, 굳이 하지 않아도 돼. 난 그대에게 명령을 하는 게 아니니까.”

    르네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곤 그녀의 시선을 따라 릴리의 초상화로 눈을 돌렸다. 언제나처럼 우아하고 단아한 제 동생이 하프를 켜고 있었다. 별것 아닌 그림에, 자신은 유난을 떨었다. 루시우스의 아들이 이 그림을 보는 게 못 견디게 끔찍하다는 유치한 이유로 이 복도를 막아 버렸다.

    “전에 말씀드렸지만 제 여동생은 사랑하는 남자의 손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응. 기억해.”

    “폐하께서 어렴풋하게 알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

    “러셀 후작의 아비, 그러니까 선대 후작이 바로 그자입니다.”

    그래서 이 통로를 막은 거구나. 일라이저가 그녀의 초상화를 보지 못하도록.

    “릴리는 그자를 많이 사랑했습니다.”

    “…….”

    “저와 제 아버님은 그 아이의 사랑이 짧게 앓고 지나갈 풋사랑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아이는 누구보다 진심이었습니다.”

    루시우스 러셀이 아이까지 있는 한 가정의 가장이라는 것을 알게 된 뒤로, 릴리는 제 마음을 깔끔히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사람의 감정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바꿀 수 있는 게 아니었기에. 그 아이는 10년이란 시간이 흘렀음에도 변함없이 그를 사랑했다.

    “이종족은 인간을 사랑하면 언제나 슬픈 결말을 맞게 됩니다.”

    “…….”

    “어떤 사람은 그게 신께서 인간과 이종족을 구별하기 위해 만든 장치라고 말했고, 또 어떤 사람은 슬픈 결과를 알고 있기에 본능적으로 끌리는 것이라고 말하더군요.”

    뭐가 됐든 비극을 맞아야 하는 쪽은 언제나 이종족이다. 특히 우논은, 인간보다 오래 사는 우논에게는 그 사랑이 이루어지든 이루어지지 않든 끝은 비극이 된다.

    “그때 내 고집을 밀고 나가, 그 아이의 데뷔탕트를 다음 해로 물렸다면 좋았을 텐데. 영지를 떠나 황성에 도착할 때까지 내가 그 아이의 곁에서 에스코트를 하며, 러셀 후작과 만나는 일이 없게 했다면 좋았을 텐데.”

    “…….”

    “……루시우스 러셀의 죽은 여동생과 릴리가 닮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르네.”

    “매일 그렇게 후회합니다.”

    르네는 품에서 꺼낸 손수건으로 초상화 끝에 묻은 작은 먼지를 떼어 냈다. 이엘의 앞에 털어놓은 말은 모두 진심이다. 릴리를 제 마음에 묻은 것과는 별개로, 그 순간순간들을 후회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오라비의 마음이었다.

    “이젠 제 곁을 떠나고 없는 릴리가, 이 초상화에선 맑게 웃고 있습니다.”

    “…….”

    “그러니 그자의 핏줄이 이 초상화를 보지 않았으면 싶었습니다.”

    “그랬구나.”

    “그게 외롭게 죽은 릴리에게 해 줄 수 있는, 무능력한 오라비의 마지막 배려라고 생각합니다.”

    이엘이 고개를 끄덕이며 초상화를 바라보았다. 정말로 닮았다. 일라이저의 영지에서 보았던 그의 고모라던 이벨리아와 매우 흡사한 얼굴이었다. 머리카락 색과 눈동자 색만 다를 뿐, 웃는 얼굴까지 상당히 닮았다.

    이엘은 며칠 전에도 이 앞에 왔었다. 르네의 영지에 도착하자마자 곧장 안내를 받아 이곳을 찾았던 것이다. 일라이저의 영지에서 보았던 이벨리아와 이곳의 릴리가 정말 닮았는지 확인하기 위하여. 세밀하게 뜯어보면 볼수록 소름이 끼치게 닮은 얼굴에, 이엘은 이곳에서 한참이나 서 있었었다.

    “일라이저의 편을 들고 싶은 건 아니야.”

    “…….”

    “근데 그가 나쁜 의도가 있었던 건 아닐 거야. 사실 지금 후작저에 초상화가 걸려 있거든. 선대 후작 부처와 선대 후작 영애, 그러니까 이벨리아 러셀의 그림이.”

    일라이저는 우연히 이곳을 지나가다가 제 고모를 닮은 릴리의 초상화에 걸음이 멈췄겠지. 그러곤 이상함을 느꼈을 것이다. 마치 그녀가 일라이저의 영지에서 이벨리아의 그림을 보고 곧장 릴리를 떠올렸던 것처럼.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게 우습지만…… 사실 나도 일라이저에게 진실을 말하지 못했어.”

    “진실이라면 어떤 진실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루시우스 경이 날 대신해 죽었다는 말 말이야.”

    “…….”

    “내 앞을 막아서다가 나 대신 죽었잖아, 루스 경이.”

    르네의 검에 루시우스가 죽었다. 두 사람 사이에 길고 긴 언쟁이 있었다. 감히 내 동생을 죽이고도 살아 있을 자격이 있냐는 르네의 호통에 루시우스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그는 곱게 죽어 줄 마음은 없다고 했다. 자신은 반드시 황녀를 지켜야 한다며.

    “일라이저는, 그는…… 나 때문에 너무 많은 걸 잃었어.”

    “폐하. 그건……,”

    “그는 제 어미와 손윗누이들을 죽인 이종족에게 복수하기 위해 한평생을 살아왔다. 그 뛰어난 검술도, 지략도 전부 복수심 하나 때문에 가능했던 거야.”

    “…….”

    “그런데 그 마음도 저버렸어. 나 때문에.”

    일라이저는 잃은 게 너무도 많았다. 그의 삶의 전부였던 마을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하기도 했고, 복수해야 할 상대를 눈앞에 두고도 삭이며 살아가고 있기도 하다. 일라이저가 이카르를 알아보았음에도 원한을 억누른 채 살아가는 것. 그 이유의 일부는 나 때문이겠지. 이엘은 그 생각에 시선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때 좀 충격을 받은 것 같더라고요.’

    우연히 앤디와 대화하다가 알게 됐다. 뱀의 영지에서 도망치던 이엘과 재규어의 모습을 보고 일라이저가 커다란 충격에 며칠을 앓았다고.

    ‘근데 금세 추스르긴 했어요. 그때 폐하께선 하이에나의 영지에서 한창 바쁘실 때라 따로 보고드릴 수 없었고, 노아 님도 일라이저에 관해선 잘 모르시거든요. 아무튼 그때 일은 저만 알고 있습니다.’

    ‘그럼 일라이저는 이카르를 알고 있었단 건가?’

    ‘맞아요. 폐하께서 즉위하시기 전부터 놈은 알고 있었습니다. 이카르가 제 가족을 죽인 자라는 것을요.’

    ‘…….’

    ‘좀…… 안쓰럽긴 하죠.’

    앤디가 드물게 제 감정을 붙여 설명했다. 어쩌면 가족을 잃은 일라이저에게 주드를 잃은 자신을 겹쳐 보았던 건지도 모른다. 억지로 뱀을 향한 원한을 접어야 했던 자신의 모습이, 이카르를 눈앞에 두고도 모른 척해야 하는 일라이저에게서 보였던 걸지도.

    ‘저희도 저희지만, 걔도 참 걔네요.’

    ‘…….’

    ‘충성심으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거라고 자신했는데, 역시 러셀 가문에는 비할 수가 없나 봐요.’

    앤디의 농담을 끝으로 이엘은 회상에서 빠져나왔다. 그녀는 다시 릴리의 초상화를 바라보며 씁쓸한 듯 중얼거렸다.

    “공작도 알고 있겠지만, 이카르가…… 일라이저의 가문을 불태웠거든.”

    왜 모르겠는가. 만일 독수리들이 이카르보다 빨랐다면 러셀 영지를 불태웠던 건 독수리들이었을 터였다. 그들이 도착했을 땐 이미 이카르의 습격으로 불바다가 된 후였다.

    “그래서 말할 수가 없었어. 후작의 아버지는 나를 지키다 죽었다고, 말할 수가 없었어.”

    일라이저는 제 아버지가 명예로운 죽음으로 전사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실제로 그는 황손을 지키다 죽었으니 기사단장으로서, 또 러셀 가문의 가주로서 명예로운 죽음을 선택한 것은 맞다. 진실을 알아도 일라이저는 외려 자부심을 가질지 모른다.

    하지만 어린 소년은 아버지를 잃었다. 루시우스가 명예로운 죽음을 당한 것과 별개로, 어린 일라이저는 한순간에 부모와 누이들을 잃었다. 그리고 이젠 복수와 원한을 감추고, 이엘의 곁에서 그녀의 그림자로 살아가고 있다.

    “미안해, 공작.”

    “폐하. 어찌 폐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런 말씀 마십시오, 부디.”

    “아니야. 미안해, 정말로.”

    “…….”

    “내가 공작에게도, 일라이저에게도, 이카르에게도……. 모두에게 몹쓸 짓을 하고 있는 듯해.”

    피의 복수가 모든 걸 종식시키는 건 절대 아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을 품을 수조차 없다는 건, 피해자의 입장에선 너무 많은 희생을 치르는 꼴이 된다. 어떤 것으로도 배상받을 수 없을 텐데, 그 마음마저 빼앗는 건 너무 잔인한 희생을 요구하는 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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