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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323화 (323/488)
  • 323화

    “내가 정찬 자리에선…… 식사를 잘 못 했거든.”

    “알고 있습니다.”

    “기억하고 있네. 맞아. 엔리케 경의 영지에 초대를 받았을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지.”

    당시 후작이었던 엔리케는 르네와 이엘을 비롯한 우논 몇을 초대해 정찬을 열었다. 엔리케는 끄트머리에서 식사를 하고 있던 이엘을 챙겨 준다는 명목으로 그녀에게 말을 걸었으나, 제게 쏠린 시선이 부담스럽고 힘들어진 이엘은 그 자리에서 진땀을 뺐다.

    “공작이 그때 나를 배려하기 위해 물러나 다른 곳에서 식사를 하라며 자리를 마련해 주었던 것. 다 기억하고 있어.”

    르네는 이렇게 이엘과 함께했던 기억들을 하나하나 되짚을수록 자신이 생각보다 빨리, 그리고 깊게 그녀를 마음에 두고 있었구나 싶었다. 뒤늦게 알아차린 게 우스울 정도였다.

    “늑대들과 살 때도 그랬거든. 다이닝 룸에서 노아와 식사하는 게 너무 괴롭고 목이 졸렸어.”

    “…….”

    “그때 노아는 내게 억지로 식사를 이어 갈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지 않았어.”

    “…….”

    “그냥 내가 식사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을 뿐이야.”

    이엘은 꽃다발을 품에 안고 그 자리에서 빙그르르 한 바퀴 돌며 르네를 향해 웃었다.

    “그러니까 괜찮아, 르네.”

    “…….”

    “공작이 피아노를 치는 게 어려우면, 그 몫은 내가 할게. 비록 엉망진창이겠지만.”

    르네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노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원래도 자신이 인정하는 몇 안 되는 우논들 중 하나였는데 이렇게까지 다정하고 친절하고 섬세하다면……. 내가 널 어떻게 이기겠는가.

    다정하지 않던 늑대가 한 사람에게만 다정해지는 게 믿기지 않았고, 한편으로는 그게 남 일 같지 않았다.

    동시에, 일찌감치 그녀를 마음에 품었다고 생각했던 조금 전의 자신이 민망해졌다. 노아는 저보다 훨씬 더 전부터, 그녀를 사랑했고 그 마음을 표현했던 모양이다. 어쩌면 노아 자신도, 그녀도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사람이 어떻게 모든 게 완벽하겠어. 가끔은 허점도 있어야지.”

    배시시 웃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르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언젠가는 예전처럼 그대가 피아노를 쳐 주었으면 좋겠어.”

    “…….”

    “나는 공작의 연주를 굉장히 좋아하거든. 이곳의 피아노만큼이나.”

    아마 그녀는 모르기 때문에 저런 말을 하는 거겠지. 네가 그렇게 말하면 나는 어떻게든 연주를 하게 될 거라는 걸. 고작 네 미소 하나에 다시 살기를 소망한 나는, 네가 원하면 무엇이든 할 거라는 걸.

    ‘난 내 두 눈을 달라고 하여도 기꺼이 드릴 것이오.’

    레온에게 했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정말로, 그녀가 필요하다고 말하면 이깟 눈알도 바칠 마음이 있었다.

    제 삶의 이유는 오직 이엘뿐이었으니까.

    *

    “속은 건가.”

    검은 늑대가 바닥에 코를 박고 킁킁거리며 중얼거렸다. 노아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재빨리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벌써 며칠째 윌터 백작령에 머물면서 영지 곳곳을 돌아다녔지만 로빈이 말한 윌터 백작의 차남은 찾을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로빈에게 속은 듯했다.

    그 생각을 하며 노아는 자신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음을 깨닫고 미간을 찌푸렸다. 무의식적으로 뱀의 말이 거짓이기를 바랐던 건가. 그는 상념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고개를 흔들고는 자신의 숙소를 향해 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그때였다.

    “죄송합니다, 작은 주인님!”

    “조용히 안 해?!”

    이종족의 예민한 감각이 발을 멈춰 세웠다. 노아는 바람을 타고 흘러들어 온 올리세스의 냄새를 맡고는 곧바로 늑대로 돌아가 몸을 낮췄다. 칠흑 같은 어둠이 깔린 뒤라 인간의 모습일 때보다는 늑대로 움직이는 게 들킬 가능성이 낮았기 때문이었다.

    노아는 소리가 들린 쪽을 향해 빠르게 움직이면서도 발소리가 나지 않게 온몸에 날을 세웠다.

    “놈에겐 효과가 없었나?”

    “그런 듯싶습니다. 아무래도 우논에겐 아무런 효과가 없는 듯합니다.”

    “그럴 리가. 그 타이곤은 포필렌이 없으면 잠을 못 자는데 효과가 없을 리가 있나.”

    “하지만 말씀하신 대로 그 늑대 공작에겐 치사량에 달하는 양을 주고 있음에도 큰 반응이 없었습니다.”

    치사량. 그 단어에 노아는 실소했다. 정말 자신을 상대로 포필렌의 효능을 실험하기라도 하는 건가. 물론 노아는 올리세스의 영지에 들어온 뒤로 그들이 주는 것을 일절 입에 대지 않았다. 이엘이 미리 경고해 준 덕에 포필렌 향을 분별할 수 있었기 때문에 냄새조차 맡지 않았던 것이다.

    “양을 더 추가할까?”

    “그러다 효과가 없으면 어떡하지요, 주인님? 대량으로 재배하던 모리아가 불타는 바람에 물량이 넉넉한 건 아닙니다.”

    “빌어먹을 스라소니 새끼들. 하여간 도움이 안 돼. 고작 테르 새끼 몇 마리가 약에 취했다고, 거기에 욱해서 죄다 불태워 버려? 그런 주제에 다시 화친하자며 돌아온 꼴을 봐라. 유클리드 그 미친 전쟁광이 놈도 결국 덜떨어진 이종족이라니까.”

    저 말을 들으면 유클리드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새삼 궁금해졌다. 정말 유클리드 놈의 본색을 보지 못해서 저런 말을 하는 거겠지. 웬만하면 타 종족과의 접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노아마저 유클리드를 상대하는 건 꺼렸다. 놈에게 전쟁광이란 단어가 괜히 붙은 게 아니란 소리다.

    “그런데 작은 주인님. 어째서 놈을 받아 주신 겁니까? 스라소니의 도움 따위 필요 없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아직까진 놈이 이종족들 사이에서 막강한 권세를 갖고 있는 건 확실하니까. 지금은 유클리드와 척을 지는 게 우리 쪽에선 손해야. 게다가 놈은 갖고 있는 자원도 넘쳐 나고.”

    “또 황녀의 반지도 갖고 있었다고 했지요.”

    “맞아. 황제가 놈에게 아주 단단히 미쳤나 봐. 그렇게 남자를 밝혀 주면 이쪽은 고맙지.”

    이엘을 향한 올리세스의 저급한 말에 노아가 일순 열이 올라 놈에게 달려들 뻔했다. 지금 당장 달려가 올리세스와 그 옆에 붙은 집사 놈의 모가지를 물어뜯어 버리고 싶었으나 그는 가까스로 이성을 차리며 인내를 다잡았다.

    “기껏해야 황녀였던 주제에 감히 황좌에 올라? 저가 여자라는 것을 방패로 삼고 여기저기 꼬리를 치는 꼴이 얼마나 우습고 하찮더냐. 그 가벼운 옷 속에 욕정이 가득한 수컷들을 숨겨 주고 황제가 된 꼴이라니. 르뷔 제국의 위상을 바닥으로 떨어뜨리는 계집이야.”

    그러나 이어진 말에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노아는 제 이성이 뚝 끊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그 상태로 올리세스를 향해 뛰쳐나가려고 했으나 불쑥 머릿속을 파고든 목소리에 멈춰 서고 말았다.

    ‘짐의 적은 올리세스가 아니야. 놈과 짐 사이에 엮여 있는 그 무언가야. 그러니 죽여선 안 돼. 아직은 안 돼, 노아.’

    놀랍게도 그녀는 노아의 성미를 그 자신보다 더 잘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 목소리가 귀에 맴돌지 않았더라면 노아는 지금 이 자리에서 인간 두 명을 흔적도 없이 갈가리 찢어 버렸을 테니.

    “거기 누구야!”

    그때 저택을 향해 걷던 올리세스가 뒤에서 느껴진 인기척에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왜 그러십니까, 작은 주인님?”

    “그냥 누가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그의 말에 집사도 고개를 돌려 뒤를 확인했으나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두 사람은 마치 시간이라도 멈춘 것처럼 그 자리에 서서 한참이나 지켜봤으나 인기척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바람 소리가 아니었을까요?”

    “그런가 보군. 요즘 잠을 제대로 못 잤더니 제정신이 아닌가 봐.”

    “저택에 돌아가셔서 좀 쉬십시오, 작은 주인님. 최근에 또 한 번 정신을 잃지 않으셨습니까.”

    최근에 정신을 잃었다는 집사의 말에 노아가 온 신경을 두 사람에게 집중시켰다. 올리세스의 몸 상태가 좋지 않은 건가? 직접 얼굴을 마주했을 땐 딱히 그런 낌새를 못 느꼈는데.

    “그래야겠어. 요새 약을 평소에 먹던 양보다 적게 복용했더니 제정신이 아닌 듯해.”

    “중독되지 않는 선에서 처방해 드리고 있으니, 염려 놓으시고 약을 드시지요. 저는 작은 주인님께서 예전처럼 쓰러지실까 염려됩니다.”

    중독되지 않는 선이라고 말했어. 그 얘기는…… 지금 올리세스도 포필렌을 복용하고 있다는 소리인가? 집사의 마지막 말은 올리세스가 최근이 아닌 예전에도 쓰러진 적이 있었고 그걸 막기 위해 포필렌을 복용하고 있다는 소리처럼 들렸다. 노아는 숨죽인 채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알겠어. 그보다 늑대를 감시하라고 한 건 잘하고 있나?”

    “예, 걱정 마십시오. 경비는 단단히 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다행이야. 그대가 참 유능해서. 집사의 말을 듣지 않았더라면 리노를 들킬 뻔했으니.”

    리노. 그 이름이 나왔다.

    “리노 도련님께서도 가끔은 맑은 공기를 마셔야 하니까요.”

    “크큭. 가만 보면 집사도 참 가학적이야. 어떤 미친놈이 맑은 공기를 쐬겠다고 바다와 인접한 곳에서 요양을 해?”

    “하지만 그곳은 그 누구의 출입도 허가되지 않으니 도련님께서도 아무 걱정 없이 푹 쉬실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곳은 저희에게도 꽤 중요한 곳이 아닙니까? 좋은 게 좋은 것이지요.”

    “빌어먹을 아버지는 그 자식이 뭐가 그렇게 애틋하다고 놈을 보겠다며 그곳엘 가시냐고. 하여튼 한심한 부자야. 이놈의 집구석, 내가 빨리 가주 자리를 받든가 해야지.”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응당 주인님께서 이어받으셔야지요.”

    “뭐 그때까지 황제를 좀 살려 둘까? 그 한심한 여자가 내 승계를 인정해 주는 꼴을 보는 것도 썩 나쁘지 않을 듯하니 말이야.”

    크게 웃음을 터뜨린 올리세스는 집사와 함께 저택 안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 노아는 차갑게 식은 표정으로 놈이 사라진 곳을 쳐다봤다. 언젠가 놈의 아가리를 찢어 버리는 건 반드시 자신의 손이 될 거라 다짐하며.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었다. 노아는 조금 전의 대화로 로빈의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아냈다. 정말로 리노 윌터가 살아 있었다. 지금은 이곳에 없지만…….

    “윌터 백작이 소유하고 있는 땅이 몇 개였지?”

    그렇게 중얼거리던 노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현재 자신이 있는 백작령은 제도와 가까운 내륙 지역이었다. 아까 올리세스의 말이 사실이라면 리노는 윌터 백작이 소유하고 있는, 바다와 인접한 지역들 중 한 곳에 있을 텐데. 지금 바로 출발하면 어떻게든 찾을 수는 있겠지만…….

    “문제는 포르 자작이야.”

    포르 자작령은 이곳에서 가깝다. 예정된 동선대로 이곳을 떠나 포르 자작령에 들렀다가 곧장 돌아가야 이엘과 합류할 수 있을 텐데. 리노 윌터가 어느 곳에 머물고 있는지는 알지 못하니 찾아내려면 시간이 꽤 걸릴 것이다.

    둘 중 하나만 만나고 돌아가는 게 지금으로서는 현명한 선택이다. 노아는 미간을 좁히며 고민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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