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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308화 (308/488)
  • 308화

    *

    “쯧.”

    지하 감옥에 들어서기 직전에 무의식적으로 복도의 창문을 응시했던 패티스는 볼썽사나운 꼴을 발견하곤 대번에 미간을 찌푸렸다.

    “아직도 저가 미쳐 버린 셋째 왕자인 줄 아는 건가.”

    폐하께서 과분한 남작이란 작위까지 내려 주셨으면 그 자리의 무게를 알아야 할 텐데, 제 형이란 작자는 예전과 다를 게 없어서. 그나마 이쪽 안뜰엔 허가받지 않은 자들은 출입할 수 없으니 저 꼴을 볼 사람은 없어 다행이다.

    그러나 예전처럼 피시를 불러다 욕하며 핀잔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패티스는 마치 고요한 풍경을 감상하듯 날뛰는 늑대 한 마리와 검은 머리 소년, 그리고 해맑게 웃는 제 형을 바라보고 있었다.

    “백작님.”

    그런 제 상념을 깨운 건 지하 감옥에서 나온 하이에나 우논이었다. 패티스는 우논이 창밖을 볼까, 그를 데리고 감옥을 향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놈이 실토했나?”

    “아니오. 저가 아는 건 그게 전부라는 말만 했습니다.”

    “고문 강도가 약했나 보군.”

    “아무래도 상처를 남기면 안 될 듯해서…….”

    주저하는 우논의 말도 일리가 있다. 이엘은 렉토스의 납치를 명령했지, 그에게 고문을 가하라는 말은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언제 그녀가 이곳으로 돌아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혹 놈의 몸에 고문의 흔적이 있으면 곤란해지는 건 하이에나였다.

    “됐다. 이 일의 책임은 내가 전적으로 맡을 테니 넌 여길 지키도록 해.”

    “예, 백작님.”

    우논을 뒤로하고 패티스는 계단을 성큼성큼 내려갔다. 사실 황궁엔 감옥이랄 곳이 따로 없었기 때문에 창고로 쓰던 지하에 렉토스를 가둬 놓은 상태였다. 그것도 창고치고는 깨끗하고 넓었으니 놈이 호사스럽게 지낸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래서 입을 다물고 있나?”

    패티스가 한껏 가라앉은 목소리로 철창 너머를 바라보며 말했다. 푹신한 매트에 누워 있던 렉토스는 눈을 뜨고 패티스를 한 번 보고는 앓는 소리를 내며 도로 눈을 감았다.

    “아이고, 죽겠네……. 여기저기 안 아픈 곳이 없습니다, 백작님.”

    “…….”

    “이러다 콱 죽어 버릴지도 몰라요. 그러면 곤란해지는 건 백작님이 아니십니까? 폐하께서 아시면 노여워하실 테니.”

    렉토스가 교활한 미소를 짓고는 다시 앓는 소리를 내며 매트 위를 굴렀다. 내가 눈치가 얼마나 빠른데. 자신을 이곳에 데려온 건 황제였다. 그리고 그녀는 저를 고문하라는 명령은 내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렇게 얌전히 가둬 놓은 것만 봐도.

    계획을 바꿨다. 자신이 알고 있는 건 이미 이곳에 잡혀 온 첫날 전부 실토했지만, 렉토스는 곧 생각을 바꿨다. 이곳을 나가면 자신은 갈 곳을 잃게 된다.

    제도는 황제의 허가를 받은 제도민만이 살 수 있는 곳이었기에 이엘과 척을 진 자신은 아마 이곳에 살 수 없으리라. 그래서 렉토스는 하이에나와 늑대에게서 뜯어먹을 수 있는 건 전부 뜯어먹을 생각이었다.

    저놈들은 내가 아직도 뭔가를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 이렇게 꿍꿍이가 있는 척 애매한 반응을 보인 채 입만 다물고 있어도……,

    “으악!!”

    그때였다. 쾅! 소리와 함께 렉토스는 제 몸이 천장에 처박힌 것을 느끼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머리가 깨진 건지 뜨거운 액체가 얼굴을 타고 흐르는 게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천장에 박힌 채 목이 졸려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그럼 죽든가.”

    “크, 크헉……!”

    “하찮은 미물 따위가, 네깟 게 뭐라고 감히 내 앞에서 목숨을 운운하는 거지?”

    조금 전까지 자신에게 물을 퍼붓던 우논과 차원이 달랐다. 이쪽은 정말 숨통을 끊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온몸을 엄습했다.

    “네가 뭘 믿고 까부는 건진 모르겠다만.”

    “사, 살려, 살려……! 큭!”

    “2차 전쟁 때 누구보다 인간을 많이 죽인 내 앞에서. 감히 하찮은 네 목숨 따위를 협박질의 도구로 사용해?”

    이대로라면 목이 뽑힐지도 모른다. 극한의 공포로 잠식된 렉토스가 바들바들 떠는 손으로 철창 너머의 패티스를 향해 항복의 의사를 표시했지만 그는 자신의 상황 따위에 관심이 없는 듯했다.

    “죽고 싶으면 죽어.”

    콰쾅―! 이번엔 렉토스의 몸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그가 처박힌 곳에 붉은 피가 고여 웅덩이를 만들었다. 그 모습을 철창 밖에서 관망하던 패티스는 능력을 사용해 자물쇠를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패티스는 뚜벅뚜벅 걸어가 쿨럭거리며 피를 토하는 렉토스의 앞에서 멈췄다. 그러곤 구둣발로 그의 얼굴을 툭툭 쳤다.

    “착각하나 본데, 내가 널 죽인다고 폐하께서 날 미워하실 거라 생각하나?”

    “…….”

    “애초에 폐하께서 널 이곳에 보내신 건 내게 일임하시겠단 뜻이다. 네가 여기서 죽든 말든, 폐하께선 네게 관심도 없으시니.”

    렉토스는 혼절하기 직전이었다. 쓸데없이 바닥이 더러워졌군. 그냥 목을 따 버릴 걸 그랬나, 쯧. 어차피 놈에게서 얻을 만한 단서는 다 얻었다. 조금이라도 더 뜯어내려 했는데 별수 없게 됐군. 패티스는 시체를 처리하는 것도 귀찮아, 그대로 놈을 방치한 채 그곳을 떠나려 했다.

    렉토스가 제 바지춤을 잡지만 않았더라면.

    “사, 살, 살려 주세…… 쿨럭!”

    “놔. 손가락까지 부러뜨리기 전에.”

    “마, 말씀드리겠습니다……! 제발…… 제발 살려 주세요……!”

    패티스는 신경질적으로 제 바지춤에 들러붙은 렉토스의 손을 떨쳐 내고 몸을 돌렸다. 그러곤 한쪽 무릎을 꿇고 내려와 피를 토하는 렉토스와 시선을 마주했다.

    “뭘? 아는 건 전부 털어놨다며. 네가 아는 게 뭐가 더 있다고.”

    “포, 포르…….”

    “뭐?”

    “포르라고 했습니다.”

    “누가.”

    “리, 리노 윌터가요. 자기 스승이 포르라고 했습니다! 이건 로빈도 모르는 내용입니다……!”

    그렇게 다급하게 말을 쏟아 낸 렉토스는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시야 사이로 패티스의 표정을 살폈다. 솔직히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 쓸데없고 가치 없는 내용이라 도박을 걸었다. 저쪽에선 리노 윌터를 알고 있는 듯하니 혹시나 하고……. 하지만 스승 따위의 이름을 알아봤자 뭘 더 알겠는가. 사실 저게 이름인지 성인지조차 모르는데.

    “포르?”

    통했나? 반신반의하는 마음에 던진 말을 하이에나는 덥석 물었다.

    “예, 예! 화, 확실합니다. 포르라고 그랬습니다. 매, 맹세할 수 있습니다!”

    “…….”

    “배, 백작님. 제발 살려 주세요……. 제,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발 살려 주십시오!”

    “그것 말고. 또 아는 건?”

    “예? 그, 그게…… 조금만 시간을 더 주시면 제가 어떻게든 떠올려 보겠습니다! 부디,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패티스는 볼품없이 피로 얼룩덜룩해진 남자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철창을 잠그고 그곳을 나왔다.

    지하 감옥을 빠져나오는 내내 그 이름을 떠올렸다. ‘포르.’ 그게 이름이라면, 널리고 널린 이름이니 쓸모가 없을 테지만…….

    성이라면 말이 달라진다.

    “백작님. 괜찮으십니까?”

    “3기사단장은 어디 있지?”

    지하 감옥을 완전히 벗어난 패티스는 제 옆을 보좌하던 우논에게 기사단장의 위치를 물었다. 그는 패티스가 뜬금없이 제 3기사단의 단장을 찾는 것이 의아했던 건지 잠깐 멈칫하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이 시간은 시계탑 아래서 3기사단이 훈련을 하는 시간입니다. 단장님은 아마 그곳에 있을 겁니다.”

    “알겠다.”

    우논에겐 따라오지 말라는 손짓을 하고 성큼성큼 걸어 성을 나왔다. 시계탑을 향해 걷는 걸음에 점점 속도가 붙었다. 패티스는 마치 뭔가에 쫓기기라도 한 듯 다급하게 3기사단장 라니에로 페루츠 후작을 찾아 나섰다.

    시계탑이 보이는 곳에 그토록 찾아다니던 3기사단이 보였다. 훈련에 매진하는 기사들 사이를 지나가며 자세를 봐주던 3기사단장 라니에로는 저를 향해 다가오는 패티스를 발견하곤 자리를 이탈했다. 패티스는 마른침을 삼키며 그를 불렀다.

    “페루츠 후작님, 잠깐 말씀 좀 나눌 수 있겠습니까?”

    “백작? 무슨 일이오?”

    갑작스런 패티스의 등장에 3기사단의 기사들도 훈련을 하다 말고 그를 쳐다봤다. 패티스는 라니에로의 너머로 훈련에 몰두하던 기사들 하나하나를 쳐다봤다. 3기사단은 전원이 신흥 세력으로 뽑힌 자들이다. 모두가 이엘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신귀족 세력이란 소리였다.

    “패티스 백작. 대체 여기까진 무슨 일이오? 폐하께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이오?”

    “포르 자작을 알고 계십니까?”

    라니에로는 이마에 송골송골 맺혀 있던 땀을 닦아 내며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이렇게 갑자기 자신을 찾아와, 뜬금없이 왜 포르 자작을 묻는 거지?

    “별일은 아닙니다만, 포르 자작은 본래 제 1르뷔 제국이 있을 때 작위가 없던 평민 가문이었지요. 하지만 폐하께 큰 신임을 얻어 자작 위를 받았던 걸로 기억하여, 혹 후작님과도 아는 사이인가 궁금했을 뿐입니다.”

    즉, 포르 자작 역시 신귀족이란 소리다.

    이엘은 적절한 자들에게 작위를 내려 주었고, 그들은 모두 자신이 신임할 수 있는 자들로 구성했다. 특히 3기사단장이 된 라니에로 페루츠는 과거 그녀가 머물렀던 마을 청년 중 한 사람으로 일라이저의 오랜 친구이기도 했다.

    하여 라니에로와 일라이저가 신귀족의 선두라고 할 수 있었기에 그를 찾아온 것이다. 그라면 새로 작위를 받은 포르 자작을 알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물론 알고 있소.”

    “…….”

    “그는 내 오랜 친우니까.”

    “그 말씀은…….”

    “맞소. 일라이저 러셀.”

    “…….”

    “러셀 후작과도 친구요. 우리 세 사람은 같은 마을에서 자란 친구니까.”

    “그렇다면 포르 자작이 작위를 받게 된 것은 그 때문이겠군요. 폐하께서도 원래 포르 자작을 알고 계셨을 테니.”

    “그건 아니오. 폐하께선 아무에게나 작위를 내려 주신 게 아니니까. 나는 정식으로 기사 서임을 받고 시험에 합격하여 단장이 되고 작위를 받았소. 그도 마찬가지요. 똑똑한 머리로 일찍이 폐하께 눈도장을 찍은 자요.”

    “…….”

    “물론 처음부터 폐하께서 포르 자작에게 관심을 두신 건 아니었지만.”

    “무슨 계기라도 있었습니까?”

    다소 다급해 보이는 패티스의 말에 라니에로는 의아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혹시 코르넬이 무슨 잘못이라도 저질렀소?”

    맞아. 자작의 이름이 코르넬 포르였다. 패티스는 생각을 정리하며 라니에로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궁금한 일이 생겨 그런 것이니 달리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오만……. 별건 아닌데, 과거 폐하의 스승님과 포르 자작의 숙부가 친구셨다고 하더군.”

    “예? 그 얘긴…….”

    “맞소. 포르 자작의 숙부는 황실 연구원이셨소. 당연히 2차 전쟁 때 목숨을 잃으셨고.”

    그래. 그런 거였어……. 리노 윌터가 어린 나이에 연구원으로 뽑혔다고 그랬지. 리노의 스승이 포르 자작의 숙부였던 것이다. 이렇게 퍼즐 조각이 하나 또 맞춰졌다. 다른 조각은 포르 자작의 영지에 있겠군. 패티스는 이 소식을 그녀에게 전하기 위해 서둘러 황성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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