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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301화 (301/488)

301화

로빈을 압박하던 힘을 빼며 이엘이 밖을 향해 소리쳤다. 말 끝나기 무섭게 안으로 들이닥친 하트와 뱀들은 엉망이 된 로빈과 침대 위를 번갈아 쳐다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녀의 손엔 총까지 들려진 상태였다. 멈칫하며 저희끼리 눈치를 보던 뱀들이 천천히 걸음을 움직이며 침대 쪽으로 향했다.

“다시 치료해라.”

“예, 예. 알겠습니다.”

뱀들은 진땀을 빼며 환부 소독과 봉합을 마치고 다시 깨끗한 천으로 정리했다. 그러고는 다시 이엘의 눈치를 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자신들의 주인은 로빈이었기에 연이은 사태에 대해 황제와 근위대에 해명을 요구할 수도 있었지만, 어쩐지 뱀들은 주저하며 눈치만 봤다.

그 행동에 로빈이 피식 웃었다. 제 영지 내에서 이런 소동이 벌어졌다. 이유가 무엇이 됐든 종족의 수장이 두 번이나 공격을 받았는데도 뱀들은 저보다 그녀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상대가 아무리 황제라 해도 수장인 내가 공격을 받았는데.

……이걸 보여 주려고 그러셨나. 네 종족의 주제나 알라는. 그는 한숨 끝에 손을 저어 뱀들을 내쫓았다.

“나는 괜찮으니 모두 나가라. 폐하께 드릴 말씀이 있으니까.”

“하, 하지만…….”

“주인이 누군지도 모르는 놈들에게 더 시킬 명령 따위 없다. 나가.”

폐하께서 떠나시는 대로 곧장 제 곁에 있는 우논들부터 갈아치울 작정이었다. 로빈은 미간을 좁힌 채 우물쭈물하는 놈들을 향해 다시 한 번 고갯짓을 했다. 우논들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재빨리 침실을 나갔고 그 뒤를 하트와 근위대도 따라 나갔기 때문에 침실 안엔 다시 이엘과 로빈만이 남겨졌다.

“제가 폐하의 화를 돋웠군요.”

“그대의 걱정 같지 않은 걱정은 알겠다. 하지만 지난 3년간 짐이 아무것도 안 한 건 아니니 그런 쓸데없는 걱정은 안 해도 돼.”

“좋습니다. 그럼 제가 알고 있는 것을 털어놓겠습니다.”

이엘은 여전히 총을 든 채 로빈의 입이 열리길 기다렸다. 그는 따끔따끔한 제 목을 손바닥으로 지그시 눌렀다가 떼며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예전부터 느낀 거지만 이엘은 보통 인간 남자들보다 체술이 좋은 편이다. 그녀가 보호석을 가진 채로 자신과 맞붙게 되면 결과가 어떻게 될지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말해, 로빈.”

“올리세스는 여러 종족에게 손을 뻗고 있습니다. 포석을 마련하고 있는 거겠지요. 스라소니나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

“사실 처음엔 그의 제안이 솔깃했습니다. 제게 폐하를 주겠다는 놈의 제안이.”

이맛살을 구겼다. 역시나 유클리드에게 한 말과 똑같다. 올리세스란 놈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그의 역겹고 악랄한 발상에 구역질이 났다.

“아마 그런 식으로 여러 종족에게 손을 뻗고 있을 겁니다. 자신이 황위에 오르면 폐하를 넘겨주겠다는 말 따위를 하며.”

“…….”

“폐하. 윌터 백작의 영지에 누군가 숨어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누구?”

“윌터 백작의 차남.”

그때까지 이엘은 얼굴도 잘 모르는 올리세스란 놈을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러다 들린 단어에 눈을 크게 뜨며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윌터 백작에게…… 차남이 있다고? 올리세스 윌터 말고 그의 동생이……?”

“예, 폐하.”

과거엔 있었다. 차자로 태어났음에도 영특하여 연구원으로 황궁에 들어왔던 백작의 차남이. 그러나 그는 전쟁이 터지기 한참 전에 죽었을 텐데. 이온의 친구였기에 그녀도 기억하고 있다.

“윌터 백작의 아들이 셋이었던가?”

“둘입니다.”

“…….”

“폐하께서도 아실 겁니다. 리노 윌터. 올리세스의 동생이자, 백작의 차남입니다.”

“그는 죽었어.”

“살아 있습니다.”

살아 있다니……. 그럼 죽었다고 위장한 건가? 분명 이온이 그의 장례에 다녀와 엉엉 울었던 것 같은데.

“폐하, 그가 진실을 알고 있습니다.”

“…….”

“윌터 백작의 영지, 그 지하에 리노 윌터가 갇혀 있습니다. 그가 많은 것을 알고 있을 겁니다.”

“…….”

“폐하와 제가 만났던 ‘그’는 생각보다 오래전부터 이곳에 있었습니다.”

정리하면, ‘목소리’의 존재를 올리세스 윌터의 동생인 리노 윌터가 알고 있다는 소리였다. 그걸 형인 올리세스에게 전했다는 건가. 그렇다면 아까 호수에서 말한 내용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헌데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지? 내가 ‘그’와 거래를 했다는 걸 윌터 형제는 모를 텐데.”

“그 거래 말고 다른 것에 폐하가 엮여 있습니다.”

“그게 뭔데.”

“저도 그것까지는 자세히 모릅니다.”

이건 로빈의 함정인가? 이엘이 눈을 가늘게 뜬 채 로빈을 쳐다봤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처럼 평온한 얼굴로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엘은 마치 눈싸움이라도 하듯 그와 눈을 한참 마주하다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먼저 긴장의 끈을 놓고 물었다.

“근데 그걸 공작은 어떻게 알고 있지? 백작의 영지에 다녀오기라도 했나?”

“폐하께서 가져가신 놈.”

“…….”

“이름이…… 렉토스 리히만이라고 했던가요.”

역시 렉토스를 빼돌린 걸 알고 있었군.

“우연히 세잔티노를 습격할 때 살려 놓았던 놈인데, 알고 보니 과거 리히만 백작의 사생아였다고 하더군요.”

“…….”

“목숨을 구걸하며 바라지도 않은 것까지 구구절절 털어놓았습니다.”

“…….”

“리히만 백작은 과거에 윌터 백작과 연이 깊은 가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렉토스 리히만은 소백작으로 입적되기 직전이었기 때문에 윌터가의 영지에 간 적이 있다고 하더군요. 그곳에서 리노 윌터를 만났다고 했습니다.”

렉토스는 윌터 백작령에서 리노를 만났고, 그는 렉토스에게 ‘목소리’의 존재를 얘기했다고? 하지만 그 말엔 상당한 어폐가 존재한다.

“리노 윌터는 어떻게 ‘그’의 존재를 알고 있으며, 그렇게 중요한 이야기를 외부인인 렉토스에게 했다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저도 그것까지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저 들은 대로 폐하께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그럼 결국 네 가설이란 소리네.”

아마 지금쯤 렉토스를 데려간 오드와 앤디도 이 내용을 알게 됐겠지. 로빈의 말이 사실이라면 오드도 리노 윌터가 살아 있다는 걸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모르는 게 없는 나자르니까.

그래서 로빈은 렉토스를 보내 준 거였다. 렉토스의 말이 사실이라면 제도에 있는 패티스나 앤디가 오드에게 물어볼 테고, 어쩌면 리노의 생존을 확인하기 위해 올리세스의 영지에 찾아갈지도 모르니까.

그게 아니더라도 이엘은 어떤 식으로든 리노 윌터의 생존 여부를 확인해야만 한다. 이렇게 수면 위로 떠오른 이상, 빠른 시일 내에 올리세스의 영지에 들러서 확인해야 하는 입장이 된 것이다.

로빈은 이 모든 것이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일부러 렉토스를 그녀에게 돌려준 거였다. 자신의 가설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늑대가 움직이든, 이엘이 움직이든, 누군가 올리세스의 영지로 향해 리노 윌터의 존재를 확신하게 되면 그걸 통해 제 가설을 확증하게 될 테니까.

“머리를 썼군, 공작.”

“비록 미천한 이종족이나, 이종족치고도 머리를 제법 쓰는 종족이니까요.”

“의외야. 과거의 그대였다면 그렇게 복잡한 길보다, 올리세스의 손을 잡고 날 납치하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했을 텐데.”

“3년이나 흘렀는걸요.”

“…….”

“그리고 제가 폐하를 알게 된 건 5년이 다 되어 갑니다.”

5년 전의 그 어리고 겁 많던 소녀는 사라졌다. 제 눈앞에 서 있는 건 치밀하고 차가운 제국의 황제, 그뿐이다.

로빈은 잠깐 그녀를 감상하듯 쳐다보다가 피식 웃으며 짧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곤 중얼거리듯 다시 한 번 그녀에게 제안했다.

“황위를 올리세스에게 넘겨줄 마음은, 역시 없으시겠지요.”

“그대는 왜 내가 그렇게 하기를 바라지?”

“그러면 올리세스는 폐하께 관심을 거둘 것이고, 폐하는 자유를 얻게 되니까요?”

“언제부터 공작이 나의 자유에 그리 큰 관심이 있었는지 모르겠군.”

그녀의 대답을 들으며 로빈은 생각을 곱씹었다. 분명 이엘은 ‘목소리’와 거래를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때 그녀는 세상을 무너뜨리기 위해 ‘그’와 손을 잡았다고 했지만, 아니. 그게 주목적이 아니다. 어쩔 수 없이 ‘그’의 손을 잡은 거야.

그게 뭘까. 네가 네 인생을 포기하면서까지 지키고 싶은 게 뭘까. 로빈은 매번 그 생각을 하고 또 했다.

“제가 반드시 폐하를 자유롭게 해 드리겠습니다.”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포기할 수 없다면 억지로 포기하게 만들면 된다.

“공작이? 재미있군. 그토록 짐의 자유를 바란다면, 지금처럼 영지에서 조용히 지내도록 하게. 어차피 그대와 짐은 결코 한편에 설 수 없는 사이니까.”

“그런가요. 여전히 저는 반대편에 있나 보군요.”

하늘을 뒤져서라도, 땅을 뒤져서라도. 네가 포기하지 못하는 그것을, 내가 먼저 없애면 되겠지.

“좋습니다. 어느 쪽이든 저는 좋습니다, 폐하.”

“…….”

“폐하께서 자유로워지실 수 있다면, 악역이라도 자처할 것입니다.”

“…….”

“지금까지처럼 말이지요.”

너를 ‘그’의 속박으로부터 내가 자유롭게 해 줄 테니. 그래, 악역이 된다고 해도 나는 기꺼이 할 것이다.

*

“리노 윌터가…… 대체 누굽니까?”

앤디가 안 그래도 큰 눈을 더 크게 치뜨며 패티스를 향해 물었지만 그는 차갑게 굳은 얼굴로 바닥에 엎드린 남자를 싸늘하게 쳐다볼 뿐이었다.

“네 말에 거짓이 있다면 혀를 뽑고 팔다리를 전부 잘라 버릴 것이다.”

“저, 정말입니다! 뱀의 공작이 제게 물어봤던 것을 전부 말씀드린 거예요!”

철창에 갇힌 렉토스가 억울하다는 듯 목에 핏대를 세우고 소리를 질렀다. 리노 윌터가 누구야? 앤디는 낯선 그 이름을 되뇌며 상처투성이가 된 렉토스를 쳐다봤다. 놈은 로빈의 영지에서 고생깨나 한 모양인지, 몇 년 전에 봤을 때보다 상태가 나빠 보였다.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저…… 패티스 님. 우선 뭐라도 좀 먹이고 신문하는 게 어떨까요.”

“앤디 경. 상당히 자애로워졌군. 인간에게 쓸데없는 자비를 베풀다니.”

“하지만…….”

“그 정도 굶는다고 안 죽는다. 놈이 진실을 말할 때까지 물 한 모금도 주지 마라.”

패티스는 그 말을 남기고 먼저 지하 감옥을 빠져나갔다. 물 한 모금도 주지 말라는 말에 렉토스가 흥분한 듯 철창을 흔들기 시작했다.

“제발요! 살려 주십시오! 저는 정말 진실만을 고했습니다!”

“야. 너 진짜야? 진짜로 올리세스 윌터가 반역을 꾸미고 있어?”

“사, 사실입니다! 뱀의 공작이 하는 얘길 엿들었습니다!”

몇 달 전 제도를 습격했던 배후도 올리세스 윌터로 추정 중이었고, 실제로 이엘도 올리세스 윌터의 움직임을 눈여겨보라고 전서를 전하기도 했다. 정말 놈이 반역을 준비하고 있다고? 가진 거라곤 고작 상단 몇 개로 인한 부와 이름뿐인 작위가 전부인데?

“야. 패티스 님은 인정사정없어. 거짓말인 게 탄로 나면 그 자리에서 바로 죽을걸?”

“거, 거짓말 아닙니다! 로빈이 그랬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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