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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300화 (300/488)

300화

이엘은 우선 로빈의 말에 적당히 대꾸해 주기로 결정했다.

“놈의 속셈을 알기 위해 겉으로 한편이 된 것처럼 꾸몄을 뿐입니다.”

“……그 말을 짐더러 믿으라고?”

“믿지 못하셔도, 이건 진실입니다.”

“…….”

“제가 그와 손을 잡아서 보게 될 이득은 없으니까요. 전 스라소니와 같이 폐하를 납치할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유클리드가 자신을 납치하려 했다는 계획까지 알고 있는 걸 보면 올리세스와 밀접한 관계였던 건 사실인 듯했다. 이엘은 동공이 세차게 흔들리는 걸 느낀 탓에 잠깐 눈을 감았다.

납치도 납치지만 마녀 사냥이라니……. 나를 이교도로 몰아 죽일 생각인가?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거야? 성전이 제 뒤에 있는데 감히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게 우스웠다. 올리세스 윌터가 제 젊은 피를 맹신하는 걸로 치부하기엔 놈의 생각이 점점 선을 넘고 있다.

물론 3차 전쟁 정도는 이엘도 예상했다. 그 중심에 인간이 있을 거란 것도 예견했고. 그렇기 때문에 그걸 막으려고 자신이 황위에 올라 균형을 맞추고 있는 게 아닌가. 자잘한 전쟁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지만…….

다만 마녀 사냥이란 단어가 그녀를 꺼림칙하게 만들었다. 왜 하고많은 이유 중 그딴 것을 이유로…… 설마?

“올리세스가 ‘그’를 만났나?”

“그건 아닙니다.”

혹시 자신이 ‘목소리’와 계약했다는 걸 알게 된 건 아닌가 싶었다. ‘그’는 신과 대척점에 서는 존재다. 신성제국의 황제가, 신이 아닌 다른 것의 손을 잡았다는 게 알려지면……. 이엘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때는 오드가 완전한 제 편이고 아니고의 문제가 아니다. 제국의 신념에 위반되는 짓인 것만은 확실하니까. 기껏 잡아 놓은 중심축이 무너지게 된다. 언젠가 밝혀질 테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야……. 지금 자신이 살해당하거나 끌어내려지면 제국엔 다시 혼란이 찾아온다.

골치가 아팠다. 그렇게 나를 끌어내릴 생각이었던 모양이군. 유클리드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올리세스 윌터는 그녀를 황위에서 끌어내리고 자신이 그 자리를 대신할 계략을 꾸미고 있다는. 애송이가 허세를 부린다고 생각했는데 놈에게도 계책이란 게 있었던 모양이다.

“폐하. 그건 아닙니다. 저는 침묵을 약속했고, 그 약속을 지키고 있으니까요.”

로빈의 영지에서 이엘은 그와 함께 ‘목소리’를 만났다. 같은 공간에 있었지만 ‘그’는 로빈과 자신에게 각각 다른 말을 전했고, 그 내용을 서로 알지 못한다.

다만 ‘그’는 처음 이엘에게 약속했던 대로 그녀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로빈을 이용했다고 말했고, 실제로 로빈은 그 공간에서 만난 존재가 ‘그’였음을 누구에게도 공표하지 않았다. 때문에 로빈의 영지에 머물던 뱀들조차 그녀가 ‘목소리’와 손을 잡았다는 건 알지 못한다.

진실을 아는 건 로빈과 이엘, 그리고 그녀의 편에 선 노아를 비롯한 몇몇 우논뿐이다.

“다만 올리세스 윌터는 ‘그’의 존재를 확신하고 있습니다.”

“확신이라니? 어떻게? 만난 적도 없고, 그대가 올리세스에게 털어놓은 적도 없는데 그 존재를 어떻게 확신하고 있다는 거지? 내부에서 새어 나갔다는 소린가?”

“폐하. 올리세스는 저보다 먼저 ‘그’의 존재를 알고 있었습니다.”

로빈보다 먼저 알고 있었다는 건…… 놈이 몇 년 전부터 ‘목소리’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소리가 된다. 대체 어떻게 알고 있었다는 거야? 만난 적도 없는 존재를 대체 어떻게.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올리세스 윌터는 폐하께서 ‘그’와 만났다는 건 모르고 있습니다. 제가 말한 적이 없으니까요.”

어쨌든 올리세스가 이엘과 ‘목소리’의 거래에 관해서는 알지 못한다는 의미였다. 그럼 우선, 조금 전에 로빈이 이야기했던 마녀 사냥으로 돌아가 보자.

이엘이 ‘그’를 만났다는 것 자체를 알지 못한다. 그러면 그것으로 그녀의 신뢰도를 떨어뜨릴 계획은 아니란 소리다.

그럼 대체 무슨 근거를 들어 나를 마녀로 몰아?

아냐. 마녀 사냥이란 단어가 주는 무게감은 상당하다. 아무 근거가 없다고 해도, 인간의 마음이란 건 한번 의심이 불을 지피면 걷잡을 수 없이 커져 가는 법이니까.

뜬소문이 이유 없이 날 리 없다…….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게끔, 올리세스 윌터는 교활한 심리전을 펼칠 생각이었던 것이다.

“폐하. 그 자리가 무거우시다면 언제든 내려놓으셔도 됩니다.”

“공작. 그 말은 곧 반역을 의미함을 알고도 하신 겁니까?”

그때까지 가만히 옆에서 지켜보기만 하던 일라이저가 벌떡 일어서며 검을 꺼내 로빈의 목에 갖다 댔다. 그로 인해 순간적으로 배가 흔들거리며 중심을 잃는 듯했지만, 하트가 재빨리 능력을 써 다시 안정을 되찾았다. 그와 함께 적막도 찾아왔다.

“폐하. 더는 듣고 계실 필요 없습니다.”

일라이저와 생각이 같았던 건지 하트마저 검을 꺼내 로빈의 목을 겨누며 말했다. 그러나 정작 이엘와 로빈은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서로를 쳐다보며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었다.

“폐하. 저는 폐하를 잃고 싶지 않습니다.”

“…….”

“그깟 황위 때문에 폐하가 벼랑 끝으로 몰리는 걸 원치 않아요.”

“그대는 짐이 올리세스 따위에게 밀릴 거라 생각하는가?”

“올리세스가 전부가 아닙니다.”

“…….”

“폐하는 지금도 자신을 포기하고 다른 것에 연연하고 계시잖습니까.”

로빈의 말을 담담히 듣고 있었지만, 그녀는 제 머릿속을 온통 헤집고 다니는 이온 생각에 눈앞이 일순 아득해졌다. 로빈이 이온의 존재를 알아챈 건 아닐 테고, 아마도 자신이 ‘목소리’와 거래를 해야만 했던 피치 못할 사정이란 게 있을지 모른다고 추측했으리라. 떠보는 거겠지.

“폐하. 버리십시오.”

“…….”

“예전에 드렸던 말씀은 빈말이 아닙니다. 저는 폐하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어요. 그러니 폐하께서도 폐하 자신만을 위해 사십시오. 전부 버리십시오.”

“…….”

“황위도 같은 맥락입니다. 그렇게까지 해서 폐하께서 짊어질 무게가…… 크윽!”

“공작에게 반역죄를 묻겠습니다, 폐하.”

하트와 일라이저가 동시에 로빈의 목에 검을 휘둘렀다. 마치 경고라도 하듯 날이 로빈의 목을 가볍게 스쳐 지나가긴 했지만 자상에서 피가 터지듯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엘은 미간을 찌푸린 채 로빈에게 다가가 제 옷으로 그의 피를 막았다.

“로빈. 피를 눌러라. 그리고 배를 돌려. 성으로 돌아가자.”

“크흑……! 폐, 폐하. 제 말씀을……,”

“내 삶의 목적은 네가 정하는 게 아니야.”

“…….”

“네가 말하는 게 뭔지 알겠어. 하지만 나는 그 어떤 것도 포기하지 않았다.”

“…….”

“난 내 자신을 포기하지 않았으니, 쓸데없는 말로 날 홀리려고 하지 마. 하트! 뭐 하나? 배를 돌리지 않고!”

그녀의 노성에 하트가 배를 돌렸다. 엄청난 속도로 호수를 내달리는 동안, 로빈은 그녀의 옆모습을 넋 나간 듯 쳐다보고 있었다.

역시 넌 내가 만난 인간들 중 가장 인간다운 인간이다. 우리가 그토록 닮고 싶어 하던 그 모습이 네게 있어. 그 생각을 하며 고통 속에서 허덕거렸다.

*

“며칠 푹 쉬면 금방 회복할 겁니다. 저는 우논이니까요.”

로빈은 목에 붕대를 감고 침대 헤드에 기댄 채 이엘을 향해 말했다. 치료가 끝날 때까지 자신을 계속 지켜보던 그녀는 그제야 깊은 한숨을 내쉬며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러곤 노기를 띤 목소리로 엄하게 물었다.

“은밀하게 말하고 싶은 게 있었다면 짐과 독대하면 될 일이었다. 근위대장과 2기사단장의 심기를 거스르면서까지 그곳에서 그런 말을 한 이유가 뭐야.”

지금 침실 안엔 안정을 취해야만 하는 로빈과 이엘뿐이었다. 그러니 이제 사실대로 이야기하란 뜻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폐하께선 저를 만나 주시지 않을 테니까요.”

“조금 전의 그 행동으로 그대는 죽을 수도 있었다. 명백히 반역의 여지가 있는 말이었으니까.”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폐하께선 제 목을 치실 리 없고, 근위대장과 러셀 후작은 폐하의 명령 없이 독단적으로 저를 처리할 리 없겠지요.”

“…….”

“이 정도 부상은 각오하고 던진 말입니다.”

조금만 더 깊게 찔렸다면 정말로 죽었을지 모른다. 우논이 회복력이 빠르다고 해도 죽으면 다 소용없는 짓인 걸 알면서. 이엘은 골치가 아프다는 표정으로 로빈을 쳐다보다가 옆에 있는 의자를 끌어와 그곳에 앉았다.

“마녀 사냥이라고 말했지. 그게 뭔 뜻이야.”

“황위를 내려놓으십시오.”

“로빈. 쓸데없는 말 하지 말라고 했잖아. 내 말이 우습나?”

“폐하께서 내려놓으시면 놈은 그런 짓을 벌이지 않을 겁니다.”

“설령 그딴 짓을 벌여도 내가 정말 마녀로 몰려 화형이라도 당할 거라고 생각해? 고작 올리세스 따위에게?”

“화형은 아니더라도 모두에게 버림받으실 순 있지요.”

“…….”

“저는 그때 폐하의 마음이 다치실 것을 염려하는 겁니다.”

언제부터 내 마음을 염려했다고. 거짓을 품고 있으면서도 당당한 로빈의 표정에 미간이 구겨졌다.

“폐하도 아시겠지만 인간들의 마음은 폐하를 온전히 향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신을 온전히 향하는 것도 아니고요.”

“…….”

“바람 앞의 등불처럼 그저 불안하기 짝이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지요. 작은 균열이 가져올 파장은 만만치 않을 겁니다.”

요컨대 이엘이 조금이라도 흠을 보인다면 금세 마음을 뒤집고 다른 편에 설 거란 소리였다. 그 정도는 그녀도 각오하고 시작했다. 애초에 모두의 마음을 붙잡을 수 있을 거란 희망은 버렸으니까. 그건 불가능에 가까운 바람이란 걸, 여기에 있는 모든 이가 동의하고 시작한 일이었다.

“폐하. 오드 님과 조금씩 거리를 두십시오.”

“뭐?”

“폐하께선 지나치게 성전에 기대고 계십니다. 그러다 성전이 돌아서면 폐하껜 남는 게 아무것도 없질 않습니까?”

“…….”

“보호석도 성전의 권한이고, 제국을 수호할 만한 강력한 힘도 성력이고. 이런 식이면 후에 오드 님이 죽거나 폐하께서 오드 님과 틀어지기라도 하면……,”

“내가 판단을 잘못 내렸군. 공작은 아까 그 호수에서 죽었어야 했어.”

어느 틈에 허벅지에 꽂아 둔 리볼버를 꺼낸 이엘이 로빈의 목을 가볍게 누르며 이마에 총구를 댔다.

“로빈. 네가 신을 따르고 말고는 나와 관계없어.”

“…….”

“하다하다 이젠 나와 오드 사이까지 이간질하려고?”

“저는 그저 폐하의 독립을 위해…… 크흑!”

목이 졸리면서 조금 전에 치료했던 환부가 다시 벌어진 모양이었다. 새하얀 붕대 위로 새빨간 피가 번지기 시작했고, 로빈이 고통으로 인해 거친 숨을 내쉬었다.

“내가 네게 물었던 것에 대답이나 해.”

“아,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폐하…….”

“하트! 들어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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