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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292화 (292/488)
  • 292화

    “아직은 제 감입니다. 확실하지 않아서 섣불리 말씀드리고 싶지 않아요.”

    “좋아. 그럼 경도 나름대로 알아보길 바라. 틀이 잡히는 대로 곧장 내게 말해 주면 더 고맙겠고.”

    “…….”

    “퍼즐이라고 생각해.”

    패티스의 말에 앤디는 눈을 크게 떴다. 그 단어가 너무도 확 와닿았으니까.

    “조각이 하나둘 맞춰져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쉬울 거야.”

    “……알겠습니다.”

    “그럼 난 좀 더 찾아보겠다.”

    “예, 저는…… 먼저 돌아가겠습니다. 가 볼 곳이 있어서요. 이 책은 제가 가져가도 될까요?”

    “다 보고 내 집무실로 와. 내가 갖다 놓을 테니까.”

    “……저기, 백작님. 이 책 혹시 어디서 가져온 건지도 알 수 있나요?”

    “글쎄. 도서관에 있는 책들 중 일부는 폐하께서 소장하고 계시던 것이라고 들었는데.”

    “폐하께서요?”

    “땅속에 숨어 사실 때에 오드 님을 통해 책을 받아서 보셨던 모양이야.”

    전쟁에서 살아남은 그녀는 오드와 함께 땅 아래 숨어 살았다고 했다. 그때 지상을 오가던 오드로부터 받아 공부하던 책들을 이곳에 가져온 듯했다.

    그렇다고 해도 양이 꽤 많은데……. 그걸 수용할 만한 공간이 있었던 건가. 그러고 보니 폐하께선 땅속에 관한 이야기를 한 번도 하신 적이 없는 것 같다. 노아 님껜 하셨나……? 나도 물어본 적이 없었네.

    “나머지는 거의 기증을 받은 것들이야. 필사본을 갖고 있는 자들이 꽤 돼서 그것들을 받은 것 같군. 인간들뿐 아니라 나를 비롯한 이종족들도 소장하고 있던 것들을 기증했지. 정리는 폐하께서 손수 다 하셨고.”

    “그럼 뱀이 줬을 수도 있겠군요?”

    “뱀이? 글쎄. 뱀의 영지에 있던 서고는 예전에 폐하께서 탈출하시면서 전부 불태우지 않았던가.”

    “로빈이 갖고 있다가 기증했을 수도 있잖아요.”

    “그럴 수도 있지. ……근데 그게 왜?”

    “아닙니다. 확실해지면 말씀드릴게요.”

    “알았어.”

    의문스러운 질문만 남겨 놓은 앤디는 문제의 책을 들고 금서 구역을 나가 버렸다.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패티스는 다시 천천히 책장을 살펴봤다.

    여긴 전부 성전과 나자르, 혹은 신과 관련된 책들뿐이다. 그러니 신탁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다면 분명 여기 있을 텐데……. 이게 정말 신이 준 퍼즐이라면, 게임이라면, 여기에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나하나 살펴보느라 꽤 긴 시간이 흘렀을 때였다. 밖에서 능력을 사용하느라 진이 빠진 스완이 더 못 하겠다고 말하려던 찰나에, 패티스의 시선이 어떤 한 책에 꽂혔다.

    “찾았어.”

    “진짜요?! 일단 갖고 나오세요. 더는 힘을 못 쓰겠어요. 자다가 나와서 집중이 잘 안 돼요.”

    집중이 안 되는 것치고는 꽤 오래 버티긴 했다. 패티스는 빠르게 책을 챙기고 티 나지 않게 서고를 정리하고는 문을 닫고 그곳을 나왔다. 능력이 풀려 자유롭게 된 사서의 눈을 피해 두 사람은 도서관도 무사히 빠져나왔다.

    “신탁의 내용도 있어요?”

    “어. 기다려 봐.”

    첫 장부터 빠르게 속독으로 내려갔지만 특이점을 찾지 못했다. 그러다 뭔가 생각난 건지, 패티스는 가장 마지막 페이지로 책을 넘겼다.

    “마지막 신탁을 보시려는 거예요?”

    “어. 제국민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면 마지막 신탁일 확률이 크니까. 근데…… 내용이 비었군.”

    가장 마지막으로 내려왔던 신탁은 날짜만 적혀 있을 뿐, 신탁의 내용은 적혀 있지 않았다. 그럼 이 부분이 중요한 걸까?

    “백작님. 혹시 폐하께서 태어나신 게 언제인지 알아요?”

    “그건 왜.”

    “여기 연도요. 제국력 1031년으로 되어 있어서요.”

    “…….”

    “폐하께서 태어나신 연도와 일치하잖아요.”

    스완의 말에 패티스의 시선이 신탁의 날짜로 향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폐하께서 태어나시기 다섯 달 전이군.”

    “네?”

    “마지막 신탁은 폐하께서 태어나시기 다섯 달 전에 내려왔고, 내용은 적혀 있지 않아.”

    “…….”

    “폐하와 관련된 모양이다.”

    퍼즐 조각이 하나 맞춰졌다.

    *

    대체 얼마나 호화로운 만찬을 대접하려고 황제의 친림을 간청하나 했는데, 로빈이 준비한 만찬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녀가 축복의 나무에서 열린 실과로 만든 음식만 먹는 것까지 고려해 그걸로 어마어마한 만찬을 준비한 것이다. 오죽하면 노아와 일라이저도 놀랄 정도였다.

    식사를 다 마친 그녀를 향해 로빈이 부드럽게 말을 붙였다.

    “부디 입맛에 맞으셨길 바랍니다, 폐하.”

    “맛있었네. 만족했어. 공작이 신경을 많이 쓴 모양이야.”

    “그럼요. 폐하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하여 부족함이 없게 준비했습니다. 만찬뿐 아니라 모든 것에서요.”

    이엘이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로빈은 이엘과 일행에게 본성이 아닌 별도의 저택을 내어주었고, 그곳엔 뱀 한 마리도 없이 통으로 비워 두었다. 그녀가 불편할까 뱀들의 출입은 엄격하게 금지하고 근위대나 기사단의 출입만을 허락한 것이다.

    “근데 의외였습니다. 공작도 함께 올 줄은 몰랐거든요.”

    로빈의 녹색 눈동자가 이엘에게서 노아를 향했다.

    “기사단장으로 폐하의 호위를 맡았는데, 마치 내가 오면 안 될 것처럼 말하는군.”

    “그렇다기엔 1기사단은 별로 없는 듯해서. 원래 1기사단은 전원이 제도를 맡기로 하지 않았나.”

    로빈의 말에 노아는 들고 있던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어쨌든 대외적으로 늑대인 1기사단과 이엘의 사이가 틀어진 걸로 되어 있으니 괜히 그걸 꼬투리 잡는 거겠지. 너는 기사단장씩이나 됐으면서 종족은 통제 못 하고 홀로 폐하 뒤나 따라다니냐는 의미로.

    그러나 노아는 잔을 들어 목을 축이고 로빈을 향해 여유 있는 미소를 지었다.

    “난 발 없는 것들처럼 줏대가 없진 않아서.”

    “…….”

    “여기저기 옮겨 다니는 기회주의적인 놈들처럼 살고 싶진 않거든.”

    “예나 지금이나 늑대는 참, 충성심이 깊어.”

    “없는 것보단 낫지 않겠나.”

    “그렇지. 칭찬한 걸세.”

    로빈 역시 마지막 말을 내뱉고는 와인을 마시며 노아와의 대화를 차단했다. 상석에 앉아 두 사람의 대화를 흥미롭게 지켜보던 이엘이 고개를 흔들며 좌중을 제지했다.

    “짐이 영지 시찰을 선언할 때 했던 말을 기억하겠지?”

    “…….”

    “이곳에 머무는 동안 경들이 싸우는 꼴을 보고 싶지 않으니 그쯤 하는 게 좋을 거야. 피곤하거든.”

    “송구합니다.”

    “명심하겠습니다, 폐하.”

    “그보다 최근에 공작의 영지에 인간들이 오간다는 소릴 들었는데.”

    이엘이 던진 의미심장한 말에 로빈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폐하. 이제 슬슬 인간들과 교류를 하는 게 어떨까 하여, 귀족들과 왕래를 시작했습니다.”

    “그 시작이 올리세스 윌터 남작?”

    “알고 계셨군요. 하지만 시작은 아닙니다. 조르단 공작과의 만남이 먼저였습니다.”

    조르단 공작이라면 건국하면서 공작 위로 승격된 자였다. 예정대로라면 이번 영지 시찰의 마지막 방문지가 그의 영지가 될 터였다.

    “조르단 공과 만났다고?”

    “예, 폐하. 제가 먼저 만남을 청했습니다.”

    조르단 공작은 기존의 구귀족들과는 달리 청렴하고 반듯한 자였다. 그녀가 황위에 오르겠다고 했을 때 반발하지 않았던 극소수의 원로들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다른 인간들처럼 이종족을 대놓고 배척하지는 않는다고 해서 뱀과 선뜻 교류를 할 사람은 아닐 텐데.

    “무슨 이유로?”

    “화합을 위해서죠.”

    노아는 하마터면 크게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뭐? 다른 놈도 아니고 네가 화합이란 단어를 내뱉어? 웃기지도 않는 말을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주절거리는 로빈을 어처구니없다는 낯으로 쏘아봤다.

    반면 이엘은 그의 대답이 제법 흥미를 당겼던 건지 계속해 보라는 듯 그를 향해 눈짓했다.

    “조르단 공작은 꽤 오랜 시간 제국을 받쳐 왔던 공신가문 중 하나이니 그의 도움을 얻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조언이라도 해 주던가?”

    “우선은 폐하께 신임을 얻으라고 하더군요.”

    “…….”

    “조르단 공작이 제 생각보다 더 충신이라 사실 조금 놀랐습니다. 하지만 그의 말이 옳다는 것엔 이견이 없습니다.”

    정말 입 안의 혀처럼 구는군. 노아는 뱀의 말에 질렸다는 표정을 지으며 로빈에게서 관심을 거뒀다.

    “공작의 입에서 조르단 공에 관한 칭찬이 나올 줄은 몰랐는걸.”

    “그는 1제국 때도 모두에게 호감을 샀던 귀족이니까요. 인간들과 교류를 하게 된다면 그와 제일 먼저 교류하고 싶었습니다.”

    이엘은 로빈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들었다. 아무 의심 없이 듣는다면 그가 정말 개과천선이라도 해서 평화주의자가 된 것같이 느껴질 정도로, 로빈의 이야기엔 작위적인 부분이 하나도 없었다. 정말로, 마음에서 우러나온 듯한 감상의 연속이었다.

    그게 퍽 재미있었다.

    “그렇다면 올리세스 윌터 남작도 화합을 위해 만났나? 그보다는 차라리 그의 아비인 윌터 백작이 더 적합할 텐데.”

    “백작은 제 만남 제의를 거절했습니다.”

    “…….”

    “여전히 이종족을 불편하게 생각하더군요.”

    요컨대 자신의 행보는 그녀가 원하는 제국의 평화와 결이 같다는 소리였다. 윌터 백작과도 화합하고 싶었으나 그건 그쪽에서 거절하였기에, 어쩔 수 없이 그의 아들인 올리세스 윌터 남작과 교류를 하고 있다는. 온전히 제국의 평화와 화합만을 생각하기에 그와 교류를 하고 있는 것이라는 뜻도 내포해서.

    그 뒤로도 비슷한 대화가 이어졌다. 자신은 다른 귀족들과 달리 순수한 교류를 원하고 있으며, 그녀의 바람처럼 제국의 평화와 안녕에 이바지하겠다는 것들이 주를 이뤘다.

    그래도 이 정도면 비교적 평온한 만찬이었다. 신경전을 벌일 것도 없이, 로빈이 한껏 자세를 낮춘 채 자신을 대했기 때문에. 게다가 로빈은 여전히 피곤해하는 이엘의 안색을 세심하게 살피며 만찬이 끝나고도 귀찮게 붙잡지 않았다.

    “호위 기사를 이렇게까지 배치하지 않아도 될 듯한데.”

    “뱀의 영지이니 더욱 신경 써야만 합니다.”

    “그래. 미리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하트의 말에 이엘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로빈이 이엘과 기사단을 위해 내어준 곳은 새로 지어진 듯한 저택이었다.

    그러나 그간 누구도 사용하지 않았던 건지 저택 안이 깨끗했다. 이엘이 폭파시켰던 성은 그대로 둔 채, 맞은편 터에 저택을 새로 짓고 아무도 사용하지 않았다니.

    “구조가…… 비슷한 것 같습니다.”

    일라이저는 그녀의 침실을 샅샅이 살피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이엘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침실을 천천히 둘러봤다. 어제 로빈의 영지에 도착하고 여독을 풀기 위해 이 저택에 들어서자마자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분명 새로운 공간이었음에도 이전에 와 본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서. 그리고 그 느낌은 침실 문을 열었을 때 적중했다.

    “미련이 뚝뚝 묻었어.”

    “…….”

    “가구 배치 하나하나 그곳과 다른 구석이 없는 걸 보니.”

    이엘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침대에 털썩 앉았다. 자신이 이곳에 납치되어 끌려왔을 때 머물렀던 침실과 소름이 끼칠 정도로 흡사했다. 옆에 딸린 투왈렛 룸은 물론이고 크고 작은 가구와 소품의 배치가 그때를 바로 떠올리게 할 정도로 완벽하게 일치했다. 심지어 그 방과 크기도 비슷한 듯했다.

    닮은 게 아니라 마치 그 성에 머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변태 새끼 아냐.”

    노아가 욕을 뇌까리며 불쾌한 표정을 지었고, 일라이저는 계속해서 그녀의 침실을 살피며 묵묵히 제 할 일을 했다. 이엘은 이런 짓까지 해 놓은 로빈의 태도가 그저 우습고 재밌었다. 그 방에 미미하게 퍼져 있던 향수 냄새까지 동일했다. 덕분에 그때의 기억이 더 선명해지고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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