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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291화 (291/488)

291화

*

모든 업무를 마친 패티스가 커다란 복도를 걷다가 열린 창밖을 응시했다. 몇 달째 하늘은 고요했다. 마치 지난번 습격 따위는 없었던 것처럼.

그날 이후로 제도에 평화는 찾아왔지만 아직 안심하긴 일렀다. 게다가 그때의 배후도 찾아내지 못했으니까……. 공습을 막아 낸 뒤에 습격한 놈들을 발견했지만, 그들은 이미 싸늘한 주검이 되어 있었다. 여기도 버리는 카드였던 것이다.

대다수가 무연고인 자들이었다. 무슨 이유로 제도를 공격해야만 했고, 어떤 이유로 죽어야 했는지 아마 자신들도 몰랐겠지. 그냥 ‘누군가’가 시키는 대로 이곳을 공격했던 것이다.

“하다못해 보호석 하나라도 쥐여 주지.”

성전기사단과 3기사단뿐 아니라 제도를 지키고 있던 1기사단과 하이에나들을 상대하려면 보호석은 필수였을 텐데도 보호석 하나 없이 제도를 습격했다. 최소한의 방어 체계도 갖추지 못한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던 패티스가 일순 멈칫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미쳤군. 이종족인 내가 인간을 상대로 그딴 연민을 갖다니……. 그것도 제도를 습격한 놈들을 상대로.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해서 생긴 일이라 판단한 그는, 머리를 흔들며 혼미한 정신을 깨우고 다시 도서관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최근 패티스는 과거 제국의 서적을 닥치는 대로 뒤지는 중이었다. 스완의 말처럼 신탁이 있었던 시기와 횟수를 정확히 알기 위해서. 그걸 알아내야 오드가 말한 수수께끼를 제대로 풀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근데 흔적이 없단 말이지…….”

신탁이 있었던 건 분명한데 기록들은 남아 있지 않았다. 하긴. 벌써 몇 번의 전쟁을 거듭했으니 남아 있는 기록이 적을 수밖에. 심지어 제 손으로 불태웠던 것들도 있었다. 이럴 때마다 과거의 자신이 저지른 짓을 후회하게 되는, 미묘한 감정이 생겼다.

“오셨습니까, 백작님.”

“수고가 많군.”

사서와 가벼운 인사를 주고받은 뒤, 들고 왔던 책을 원래 있던 자리에 꽂아 두었다. 그러곤 다시 처음부터 시작할 생각으로 첫 번째 책장이 있는 곳으로 향하려던 차였다.

“저긴…….”

혼잣말로 중얼거리던 패티스는 입을 닫고 미간을 찌푸린 채 도서관의 가장 구석진 곳으로 향했다. 커다란 벽엔 네모난 문이 달려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저쪽은 확인하지 못했다. 출입이 금지된 곳이라.

“저, 백작님. 그곳은 출입하시면 안 됩니다.”

뒤쪽에서 책을 꽂던 사서가 조심스럽게 그를 붙잡았다.

“아시겠지만 폐하와 오드 님 외에는 아무도 출입할 수 없는 곳이라서요…….”

“폐하의 허가를 받으면 가능한 건가?”

“예? 아, 그럼요. 가능합니다.”

“알겠네. 폐하께 여쭤보고 다시 찾도록 하지.”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돌아섰지만, 패티스는 그녀에게 허락을 구할 생각이 없었다. 지금 자신이 할 일은 그녀 모르게 움직여야 할 일이니까.

그 대신 그는 도서관을 나오자마자 스완의 침실을 찾았다.

“일어나.”

“뭐, 뭐야?! 노크도 없이 갑자기 들어오면 어떡해요. 저도 사생활이라는 게 있는데!”

“지금 그딴 소릴 할 때가 아냐. 도서관으로 가야 하니까 빨리 나와.”

“뭔가 찾았어요?”

“글쎄. 확신은 안 서지만…… 우리가 퍼즐을 제대로 맞춰 가고 있다면 내 예상도 맞겠지.”

그 말에 스완은 졸린 눈을 비비적거리며 주섬주섬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러곤 로브를 걸치고 후드를 푹 눌러써 얼굴을 가린 채 패티스의 뒤를 따랐다.

이미 새벽이 다 된 시간이라 황궁 내엔 경비를 서는 기사단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조용한 복도를 지나쳐 도서관 앞에 도착한 패티스는 제 앞에 선 두 명의 기사를 향해 눈짓했다.

“들어가겠다.”

“백작님. 뒤에 계신 분은 누구십니까.”

“제가 처리할까요?”

뒤에서 스완이 속삭였다. 아무래도 이엘 몰래 움직이는 일이다 보니 기사단도 속일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스완은 패티스가 허락하기도 전에 능력을 사용하려 눈을 크게 떴다.

“잠깐!”

그러나 갑자기 복도 끝에서 들린 귀에 익은 목소리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목소리의 주인공을 발견한 패티스와 스완의 얼굴이 동시에 찡그려졌다.

“네가 왜 여기 있냐?”

“…….”

“뭐가 어떻게 된 겁니까, 백작님?”

앤디가 미간을 좁힌 채 두 사람을 향해 해명을 바라는 표정을 지었다. 하여튼. 후각 하난 기가 막히다니까, 정말……. 저 끝에서 날 어떻게 알아본 거야. 스완이 꿍얼거리며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패티스는 스완을 슬쩍 보고는 다시 앤디를 보더니 눈짓하며 말했다.

“잠깐 경과 이야기하지.”

“알겠습니다. 너희는 가서 3층 복도 경비를 서도록 해라.”

“예.”

“예.”

기사들이 자리를 비우고 세 사람만 남고 나서야 스완은 갑갑한 후드를 벗었다. 앤디는 여전히 미간을 찌푸린 채 스완을 향해 잔소리를 쏟아부었다.

“대체 언제 황궁으로 온 거야? 폐하는 알고 계셔? 아니. 폐하께서 보내신 거야?”

“으휴, 잔소리! 그래, 맞아. 로날드랑 함께 왔어. 폐하도 알고 계시고.”

“그쪽에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지?!”

“목소리 좀 낮춰. 누가 듣겠어!”

스완의 핀잔에 앤디는 코끝을 긁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만히 두 사람을 지켜보기만 하던 패티스는 한숨을 내쉬며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폐하의 명령을 어기려 한다.”

“……네?!”

지금 내 귀가 잘못된 거 아니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패티스 백작이 폐하의 명령을 어긴다고……. 앤디가 미간을 좁히며 눈을 크게 떴다.

“금서 구역에 들어갈 거야.”

“폐하의 허락 없이요?! 미치셨어요?”

“…….”

“크흠, 죄송합니다. 말이 좀 셌네요. 어쨌든요, 폐하께 여쭤보기는 하셨어요?”

“아니.”

“스완을 통해 물어보면 바로 대답해 주실 텐데, 꼭 몰래 들어가야겠습니까? 그 정도로 중요한 일이면 폐하께서도 허락하실 겁니다.”

왜 기사들에게 스완의 정체를 밝히지 않은 건지 알 것 같았다. 백조의 능력으로 기사들과 사서를 혼란시키고 몰래 들어갈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 얘기는 이엘에게 허락조차 구하지 않았다는 얘기가 될 테고.

“패티스 님. 당신이 이렇게 대놓고 폐하의 뒤통수를 때릴 리는 없다고 믿습니다. 뭔가 이유가 있겠죠. 그러니 무슨 일인지 제게만 말씀해 주십시오. 죄송하지만 저는 폐하의 허락 없이 금서 구역에 들어가시는 걸 보고도 모른 척할 생각 없습니다. 제 주군은 폐하니까요.”

“아니. 폐하께 말씀드려도 좋아.”

“…….”

“하지만 일단 보도록 해. 폐하께 보고하기 전에 경이 먼저 보고 판단해도 늦지 않으니까.”

“예?”

“따라 들어와.”

패티스는 의문을 달고 있는 앤디를 지나쳐 도서관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고, 그 뒤를 따라가려던 스완은 앤디에게 붙잡혔다.

“야. 너까지 폐하께 비밀로 하겠다는 거냐?”

“백작이 말했잖아. 폐하께 말씀드려도 된다니까?”

“야, 그래도 너는…….”

“근데 폐하가 아직 아시면 안 되는 것 같아서 그래. 자세한 건 나와서 얘기해 줄게. 일단 지금은 그걸 찾는 게 우선이야.”

“네가 말하는 ‘그것’이 금서 구역에 있다고?”

“모르겠어. 일단은 백작을 믿고 들어가 보는 수밖에. 난 폐하를 절대 배신하지 않아. 오히려 폐하를 지키고 싶어서 이러는 거니까, 백작 말대로 네가 직접 보고 판단해서 우리가 의심스러우면 폐하께 말씀드려.”

“…….”

“나도…… 일단 보고 마음을 정할래.”

그 말을 끝으로 스완은 앤디의 손을 뿌리치고 도서관 안으로 들어갔다. 홀로 남겨진 앤디는 복잡한 듯 머리를 마구 헤집으며 왔다 갔다 서성거리다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아이씨, 나도 모르겠다. 여차하면 그냥 폐하랑 공작님께 말씀드리지, 뭐. 설마 자기 목숨이 폐하랑 연결돼 있는데 허튼짓을 하겠어?”

그리고 이엘에게 미쳐 버린 하이에나가 설마 그런 짓을 하겠어. 사실 자신이 막고 싶어도 막을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어쨌든 이엘이 황실 관리를 전적으로 패티스에게 넘기고 떠난 것도 사실이니까. 앤디는 애써 합리화하며 도서관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들어왔을 땐 이미 사서가 스완의 능력에 취해 혼자 횡설수설하는 중이었다. 패티스는 금서 구역에 들어간 건지 보이지 않았다.

“백작님? 뭐 발견하셨어요?”

“…….”

“백작님?”

열린 문 너머에 뭔가를 보고 있는 패티스를 발견했다. 앤디는 그쪽으로 향하며 신기한 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책이랑 담을 쌓아서 금서 구역이 창고처럼 생긴 곳인 줄 처음 알았네. 도서관을 자주 오기는 했지만 경비 때문에 왔던 거지, 책을 읽으려고 온 건 아니었으니까.

“혹시 폐하와 오드 님 외에 여기 출입한 자가 있던가?”

“예?”

“함부로 출입했던 자가 있던 것 같은데.”

“그럴 리가요? 도서관엔 허락받지 않은 자는 들어올 수 없고, 더더군다나 여긴 수시로 지켜보는걸요.”

“책 곳곳이 찢어져 있어. 의도적으로 찢은 것 같은데. 그게 아니면 원래 찢겨진 채로 보관되었던 건가.”

“네?”

들고 있던 책을 앤디에게 건네준 패티스는 다른 쪽을 확인하러 떠났다. 얼결에 책을 넘겨받은 앤디가 너덜너덜한 책을 펼쳤다. 패티스의 말대로 곳곳이 찢어져 있었지만 별다른 이상한 점을 찾진 못했다.

금서라고 해서 특별한 내용이 있나 싶었지만 대부분 성전이나 나자르와 관련된 내용들이었고, 제국서를 제외하고는 크게 중요한 내용들도 아니었다. 본다고 이해할 수 있는 것들도 아니었고.

흥미를 잃고 책을 덮으려던 앤디는, 어떤 글귀를 발견하고 손을 멈췄다. 무슨 장난처럼 그 글귀만 남기고 그 페이지가 통으로 찢어져 있었다.

「세 가지가 필요하다.」

순간적으로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순간 온몸에 털이 쭈뼛 서는 듯한 기분이 들면서 제 머릿속을 파고드는 것들이 있었다.

「늑대의 기름, 타이곤의 갈기, ……의 눈알은 죽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며, 그에 따른 마땅한…… 위험한…… 이기에 이는 극소수의…….」

내가 오드 님께 물어봤던 그 종이……. 뱀의 영지를 습격할 때 뭔가를 들고 도망치던 뱀을 죽이고 그에게서 빼앗았던 게 바로 그 종이 뭉텅이였다. 그때도 느낌이 서늘해서 오드에게 물어봤지만, 오드는 과거에 제국에서 사용하던 연구 자료 같다고만 말할 뿐이었다.

하지만 앤디는 줄곧 그게 마음에 걸렸다.

설마 이 세 가지가 그것들을 말하는 건 아니겠지……. 하필 그 종이를 오드에게 줬던 터라 찢어진 조각이 맞는지 확인해 볼 수도 없었다. 갑자기 머리에 피가 마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앤디 경?”

“…….”

“앤디 경. 뭔가 발견했나?”

“아, 아닙니다…….”

“…….”

“그냥 좀…… 책이 난해한 것 같아서요.”

어색하게 웃으며 서둘러 책을 덮었다. 손바닥 안이 축축하게 젖는 것 같았고, 입 안은 바싹바싹 마르는 것 같았다.

“알고 있는 게 있으면 말하지 그래?”

“…….”

“좋아. 내가 먼저 말하지. 우린 지금 신탁의 내용을 찾고 있어.”

“……신탁이요?”

“그래. 과거엔 나자르를 통해 신께서 직접 신탁을 내려 주셨고, 그건 절대적이었다. 제국민 모두에게 알려야 하는 내용이었지.”

“…….”

“거기에 뭔가 놓친 게 있는 것 같다는 판단에서 그 내용들을 찾고 있었다. 신탁의 내용들은 전부 중요한 것들이니까. 그러니 경도 알고 있는 게 있으면 다 말해. 그게 폐하를 위협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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