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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274화 (274/488)

274화

“중간중간 입구가 있었다고? 지하와 지상이 연결된 구멍을 말하는 거야?”

“응. 숨이 막힐 즈음해서 입구가 있었어. 그러면 이렇게 밖으로 나와서 쉬었고.”

“깊이가 그렇게 깊은데 네가 어떻게 올라오고 내려갔다는 거야.”

“능력을 썼어.”

“…….”

“아, 안 믿기지? 내가 능력을 썼다고 하니까……. 근데 진짜야. 정말로 능력을 사용했다니까? 봐 봐.”

그러더니 불쑥 테이블 위에 놓여진 티포트를 향해 손을 뻗는 것이다. 패티스는 미간을 찌푸리며 피시를 말리려고 했지만 피시의 능력이 먼저였다. 순간적으로 하늘로 솟아오른 티포트가 피시의 능력을 견디지 못하고 공중에서 폭발하듯 와장창 깨져 버렸다.

“……이런 실력으로 네가 무슨 능력을 썼다는 거야.”

“아, 아니야. 정말이야…….”

“차라리 릴프 강에서 정신을 잃어서, 그 강을 타고 이곳에 도착했다고 보는 게 더 신빙성이 있겠네.”

“아니야! 왜 내 말을 믿어 주지 않는 거야? 그럼 당장 내가 나왔던 곳으로 가면 되잖아!”

“알겠어, 일단 진정해.”

솔직히 반은 믿지 않는다. 그곳은 피시에게 정신적으로도 큰 충격을 안겨 준 곳이기도 하니까. 그 현장을 막상 또 마주하니 그 트라우마가 다시 도졌구나 싶은 생각에, 솔직히 패티스는 피시의 말을 반쯤 흘려듣고 있었다.

“패티. 내 말 좀 들어 봐.”

“알겠다고. 진정하면 들을 테니까 좀 쉬어.”

그 말을 끝으로 패티스는 문을 쾅 닫으며 방을 빠져나왔다. 가뜩이나 머리가 아파 죽겠는데……. 저런 허황된 이야기나 들어 주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실종된 줄로만 알고 얼마나 초조했는지, 네가 알기나 하냐고. 사지로 몰아 버린 것 같아서. 나중에 하트에게 무슨 변명을 해야 하나, 일분일초가 숨이 막혔는데.

“젠장…….”

“백작님! 왜 나와 계십니까?”

“…….”

“피시 님은 괜찮으십니까?”

그를 발견하고 멀리서 뛰어온 앤디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패티스는 앤디의 손에 들린 트레이 위의 잔과 물병을 보다가 고개를 흔들며 안으로 들어가 보라는 사인을 보냈다.

“그럼 여긴 제가 지키겠습니다. 백작님은 가서 좀 쉬십시오.”

“……앤디 경.”

“예?”

“경도 동생이 하나 있었다고 했나?”

“…….”

“아, 미안하군. 다른 의도로 물어본 건 아니야.”

“예. 있었습니다.”

“그 녀석이 고집을 피우거나 헛소리를 하면 어떻게 했나?”

뜬금없는 걸 물어보시네. 네쌍둥이 중 가장 막내라고 하지 않았나? 갑자기 동생은 왜……. 앤디는 제 턱을 긁적이며 패티스의 질문을 몇 번 곱씹어 보다가 엷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냥 다 들어 주었는데요?”

“…….”

“음. 애들이 하는 말이 다 거짓말은 아니더라고요.”

“…….”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영혼만 볼 수 있는 게 있다고 하잖아요.”

주드는 상상력이 뛰어났고 어릴 때부터 으스대는 성격이었던 것도 맞지만, 그 아이는 그렇게 순수했다.

“우선은 들어 주시는 게 어때요?”

“…….”

“세상은 말도 안 되는 일이 참 많이 일어나잖아요. 제가 이런 얘기를 하고 있는 게 웃기긴 한데.”

“…….”

“솔직히 지금 이 꼴이 된 것도, 누가 예상이나 했겠습니까. 신 외에는 아무도 몰랐겠죠.”

패티스는 앤디의 말을 다 듣고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그의 손에서 트레이를 빼앗아 갔다.

“여기서 대기하도록. 안엔 내가 들어가겠네.”

“예, 기다리겠습니다.”

어쩐지 기분 나쁘게 싱글벙글 웃는 앤디를 한 번 쏘아보고는 다시 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피시.”

“패티. 잠깐만. 안 믿기겠지만 일단 들어 주기만이라도……,”

“말해.”

“어?”

“말하라고. 들을 테니까.”

트레이를 내려놓고 컵에 물을 따라서 건넸다. 피시는 얼결에 그걸 받아 들고 목을 축이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패티스는 불쾌한 기색 없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정말로 들어 줄 것처럼.

“다 마셨어? 줘.”

“으응.”

패티스는 피시의 손에서 컵을 가져가 트레이에 올려놓고는, 옆에 있는 작은 의자를 가져와 앞에 놓고 앉았다.

“무슨 일이었는데.”

“드, 들어 주는 거야?”

“그래. 말했잖아, 듣겠다고.”

“알겠어.”

피시는 마른침을 삼키며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입을 열었다.

“지하로 내려오고 나는 무작정 걸었어. 빛 한 점 없는 곳이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냥 벽을 짚으면서 무작정 걷기 시작했어. 어차피 방향은 한쪽으로만 이어졌으니까.”

여기까진 맞다. 패티스가 그곳을 찾았을 때도, 입구부터 턱수염 일당이 세웠던 성벽까지 한쪽 방향으로만 길이 이어져 있었다.

“그러다가 그 인간들이 세웠다던 땅에 도착했고 그 뒤로도 그냥 걸었던 것 같아.”

“잠깐만. 거긴 우리가 메워 놓았어. 성벽이 세워졌던 곳에서부터는 막다른 지점이었을 텐데.”

“아니야. 분명 내가 소리를 질렀을 때 울림이 크게 느껴졌어. 어느 정도인지 가늠은 못 하지만, 그건 길이 있던 곳보다 큰 공간에 도착했단 뜻이잖아.”

“……일단 알겠어. 계속 얘기해 봐.”

“분명 조금 전에 있던 공간보다 큰 공간에 도착한 건 맞지만, 이번에도 한쪽 방향으로만 길이 이어져 있었어. 그래서 벽을 짚고 계속 걸었던 거야.”

인간들이 만들어 놓았던 공간은 작은 마을 하나쯤 되는 크기였다. 완벽한 원형은 아니었지만, 중앙에 있는 광장을 둥그렇게 둘러싼 곳이었는데. 백번 양보해서 그때 메워 놓았던 곳이 허물어진 탓에 공간이 열렸다고 해도, 절대로 한쪽 방향으로 길이 날 수가 없는 구조였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길을 만든 게 아니고서야.

“……그래서. 계속 말해.”

“한참 걷다가 끝이 안 보여서 본체화를 한 모습으로 달렸어. 그런데도 끝이 없었어.”

“…….”

“배가 고프다고 느껴질 때쯤 희미한 빛이 보였어. 하늘 위에서 쏟아지는 빛이.”

이종족도 인간처럼 매 끼니를 챙겨 먹지만, 우논의 경우 허기를 잘 못 느끼는 편이었다. 게다가 피시는 원래도 식사를 잘 하지 않는 편에 속했다. 그런 피시가 배가 고프다고 느낄 정도였다면 최소 사나흘 이상은 뛰었다는 소리다.

“허겁지겁 빛이 보이는 곳으로 달려갔어. 그리고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와 천장을 봤더니 빛이 쏟아지고 있었던 거야. 거기엔 겨우 사람 한 명 정도 오갈 수 있는 크기의 구멍이 위로 길게 나 있었어.”

“…….”

“능력을 썼어. 정말이야. 아까는 실패했는데……. 이상해. 거기선 됐어. 내 손에 능력을 썼더니 손이 허공에 떴고 그대로 위로 쭉 빨려 올라가듯 지상에 도착할 수 있었어.”

“알겠어. 그럼 그런 식으로 여기까지 왔다는 거야?”

“응…….”

모든 걸 털어놓고 나니, 피시는 그제야 자신이 겪은 일들이 비정상적임을 알아차렸다. 맞다. 꼭 필요한 때에 나타난 빛도 이상하고, 그렇게 곳곳에 지상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있었는데 이종족이나 인간들이 그걸 몰랐다는 것도 이상하다.

나 정말 바보인가 봐. 왜 그땐 아무 생각이 없었지? 당연하게 느껴졌다. 이상하게 그 공간은…… 자신이 다른 생각은 못 하도록, 오직 한길로만 걷게 만드는 기묘한 곳이었다.

“모, 못 믿겠지? 이해해……. 나도 지금 생각하니까 이상한 게 많네.”

“…….”

“애초에 내가…… 능력을 그렇게 세밀하게 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지.”

하이에나 중에서 가장 수준이 높은 하트도 스스로의 몸에 능력을 사용하지 못한다. 심지어 조이나조차 그녀의 몸을 띄운 적이 없었다. 근데도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였다니……. 피시는 이제야 밀려오는 부끄러움과 수치심에 아랫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패티스가 역정을 내도 할 말이 없었다. 이 모든 것을 증명할 증거가 없었으니까.

“그럼 거기서 알아낸 건 있어?”

“어? 아……. 아니, 미안해. 미안해, 패티스……. 모르겠어. 알아낸 건 없어.”

“…….”

“그냥 걷기만 했어. 미안해…….”

패티스는 피곤한 듯 미간을 손등으로 꾹꾹 누르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알겠어. 쉬어.”

“응…….”

그럼 그렇지. 릴프 강을 타고 떠내려온 게 분명하다. 세잔티노에서 정신을 잃고 강을 타고 여기까지 흘러 들어온 거지. 그러면 말이 된다. 세잔티노를 흐르는 릴프 강은 제도를 곧장 통과하는 쪽으로 길게 이어진 강이니까.

……잠깐만.

“피시. 한 방향으로 쭉 걸어왔다고?”

“응.”

“잠깐만 여기서 기다려.”

패티스는 급하게 그곳을 나와 어디론가 뛰어가기 시작했다. 이마에 땀이 흐를 정도로 미친 듯이 달려서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황궁도서관이었다. 그는 제게 인사하는 사서를 지나쳐 제 1르뷔 제국의 자료가 있는 곳까지 곧장 달렸다. 그러곤 책 한 권을 꺼내 책상 위에 놓고 펼쳤다.

“릴프…… 릴프 강이……. 찾았다.”

대륙의 지도를 찾아낸 패티스는 현재와 가장 가까운 쪽에 속하는 과거의 지도와, 아주 먼 옛날 대륙의 지도를 나란히 펴고 위치를 비교했다.

“그래, 여기까진 똑같아. 세잔티노부터 제도로 이어진 릴프 강 줄기. 다만 여기서부터는 강을 메워서 땅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끊겼지.”

원래 남서쪽에서 시작되는 릴프 강은 대륙의 중앙에 위치한 제도를 통과해서 북동부로 뻗어지는 강이었다. 그런데 언젠가 필요에 의해 동쪽으로 흐르는 강줄기 한 곳을 메워 버렸고, 그 탓에 북동부 끝에 위치한 호수와의 연결이 끊어지게 됐다.

그런데 지금 피시가 걸어왔다던 지하 땅굴의 방향이, 릴프 강이 제도로 이어진 방향과 일치한 것이다.

“패티스 님? 거기서 뭐 하십니까?”

때마침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려던 앤디가 그를 발견하고 도서관 안으로 들어왔다. 앤디는 자신이 온 것도 모르고 책에 집중한 패티스의 뒷모습을 보다가, 고개를 쏙 옆으로 빼서 그가 뭘 보는지 슬쩍 엿봤다.

“지도네요?”

“…….”

“그러고 보니 예전엔 여기가 이어졌다고 했죠.”

정확히 자신이 보던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킨 앤디로 인해 패티스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지으며 그를 쳐다봤다.

“앤디 경. 혹시…… 여기가 어디로 이어진 곳인지 알고 있나?”

“네? 아, 네. 여기 아래가 러셀 후작의 영지잖아요.”

그러고 보니 일라이저의 영지가 북동부 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원래 강이 이어졌던 호수의 바로 아래에.

“그럼 이 호수도 알고 있나?”

“여기요? 당연히 알고 있죠.”

“…….”

“스완이 사는 곳이에요.”

“스완이라면…….”

“네. 백조요.”

패티스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고는 다시 지도로 시선을 돌렸다. 원래 강이 이어졌다면 도착했을 호수가…… 고니들이 사는 호수였다고?

“그러고 보니 여기가 메워져서 호수랑 연결이 끊어졌네요.”

“…….”

“이것 때문에 고니들이 여기 사는지 몰랐던 거구나. 고니들은 타이밍이 좋았네요.”

“경은 이 호수에 고니가 산다는 걸 어떻게 알고 있었지? 아무도 몰랐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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