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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273화 (273/488)
  • 273화

    분명 건국 직전에 로빈이 자신을 찾아와 소모라의 반환과 함께 공작 위로 승격시켜 달라는 요구를 청했지. 그 대가로 이엘은 리게일리어를 비롯하여 선황의 친필 칙서를 갖게 되었고, 그게 일정 부분 그녀를 황제로 인식하는 데 도움이 되긴 했다.

    하지만 이엘이 로빈에게 공작 위를 주었던 건 단순히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굳이 리게일리어나 선황의 칙서가 없었어도 그녀가 황위에 오르는 것엔 변함이 없었을 테니까. 겨우 그것 하나 받겠다고 그에게 유리한 위치를 주었을 리가.

    제도 옆에 바로 맞닿은 땅들은 전부 공작령이었다. 그러니 원래 후작이었던 뱀이 사는 영지는 제도로부터 떨어진 곳이라 접근이 어려울 수밖에. 결국 이엘 역시 로빈을 감시하기 위해 공작 위로 승격시켰다는 뜻이다. 소모라는 과거 제국에선 공작령이었으니 로빈에게 반환한 것도 그 일환이었다.

    “로빈이 소모라 땅에 집착하고 있는 건 알고 있다만, 짐이 그것도 모르고 그에게 그 땅을 돌려주었을까 봐? 그쪽엔 더 심한 감시를 붙여 두었다.”

    “폐하. 소모라는 제 2의 세잔티노가 될지 모릅니다.”

    “…….”

    “폐하께서 세잔티노를 습격했을 때, 뱀도 함께 습격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때 로빈은 세잔티노에 머무르던 턱수염 일당들과 거래 중이었지만 그날 습격을 통해 인간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고 그들에게서 보호석을 훔쳐 제 영지로 달아났던 걸로 기억한다.

    “그러고 난 뒤에 폐하께서 제게 동맹의 조건으로 소모라 땅을 빼앗으라고 말씀하셨었죠.”

    “그래.”

    “그때 소모라 땅에서 조금 이상한 낌새를 느꼈거든요.”

    “왜 그때 말하지 않고 이제야 얘기하는 거지?”

    “폐하. 저는 한 종족을 오랜 시간 이끌어 온 우두머리입니다.”

    “…….”

    “가장 필요한 시기에 꺼낼 만한 카드가 제게도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요컨대 그때는 거래로 그녀와 동맹이 되었다면, 지금은 자신의 것을 낱낱이 보여 주겠다는 의미였다. 이엘이 원하는 대로.

    ‘백작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내게 토해 내라.’라는 그녀의 요구대로.

    “아마 그곳에 납치한 인간들이 몇 있지 않을까, 추측 중입니다.”

    그렇잖아도 오드를 통해 앤디로부터 소식을 들었다. 제도에 남아 보호석 수거에 집중하기 시작한 1기사단들이, 보호석을 수집하던 곳에서 뱀의 껍질을 발견했다는 소식을. 앤디가 급하게 뱀의 영지로 늑대들을 보냈다는데 그 뒤의 일은 듣지 못했다.

    보호석을 가지고 뭔 짓을 꾸미려는 거지?

    “좋아, 백작. 그래서 앞으로 그대의 계획은 뭐지?”

    “제 마음을 진심으로 받아 주시는 겁니까?”

    “그럴 생각이 없었다면 이곳에 오드 님과 함께 오지 않았겠지.”

    이엘이 제 뒤에 있는 오드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원래 오드는 이엘이 영지 순회를 하는 동안 제도민의 안전과 혹시 모를 위험을 막기 위해 성전 안에 머무는 걸로 되어 있었다.

    그러니 이렇게 그녀와 함께 있는 모습을 유클리드에게 보여 줬다는 건, 유클리드를 자신의 신뢰 범위 안으로 들여 줬다는 의미와도 같은 것이었다.

    말귀를 알아들은 유클리드가 반색하며 환하게 웃었다. 그게 정말 티 없이 맑은 소년의 미소처럼 보여서……. 아이러니하게도 이엘은 그의 웃음을 통해 순수했던 주드와 밀로를 떠올렸다.

    “제 계획은 이렇습니다. 폐하께서 돌아가신 뒤에 저는 올리세스 윌터와 만날 생각입니다. 그리고 놈에게서 정보를 빼돌려 폐하께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좋아. 그 대가로 원하는 건 무엇이지?”

    “글쎄요. 언젠가 폐하의 수많은 옆자리 중 하나를 제게 주시면 어떨까요.”

    “…….”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폐하의 마음이 제게 향하면 더없이 좋겠으나, 사람 마음이란 게 그렇게 쉽게 움직이는 게 아니란 건 저도 잘 아니까요.”

    이엘은 알고 있다. 노아나 르네, 레온처럼 유클리드가 자신을 사랑해서 따르는 게 아님을. 다만 그 마음에 이전처럼 더러운 욕망은 사라진 듯했고, 어쩌면 오랜 시간을 방탕하게 살았던 것에 대한 회의감을 느끼는 듯해서.

    “폐하께서도 아시겠지만, 저는 제 1르뷔 제국이 있던 시절에도 인간들과 관계가 썩 나쁘지 않았습니다. 원래 암컷의 수가 많지 않았던 종족이기도 하고, 전쟁으로 인해 죽었던 암컷 수보다 병사한 암컷의 수가 많았던 저희니까요.”

    “…….”

    “그러니 폐하께서 제국을 다스리신다고 해도, 솔직히 큰 불만 같은 건 없었습니다.”

    그냥 즐거웠을 뿐이다. 인간들이, 저희가 그토록 깔보던 여자가 황제로 즉위해 자신들 위에 군림하는 꼴을 별수 없이 지켜보아야 하는 그 모습이. 이종족의 입장에서 보고 있자니 그저 즐거웠을 따름이다.

    우논은 별일이 없는 한 영존하지만, 이 긴 시간을 사는 게 모두에게 동일한 행복은 아니었다. 그 안에서 찾을 수 있는 즐거움이 사라지면 이런 목숨은 길가에 굴러다니는 하찮은 돌멩이만도 못한 셈이 된다. 특히나 제 1의 욕구인 종족 번식마저 할 수 없게 된 지금의 상황이라면 더더욱.

    그러니 작은 즐거움이라도 찾아, 그렇게 하루. 또 그렇게 일 년. 연명하듯 이어 가는 삶이 자신들이었다.

    그리고 유클리드는 그 즐거움을 그녀에게 걸기로 한 것이다.

    “폐하께서 지금처럼 황제가 되셔서 마음껏 날개를 펼치시는 모습을 보는 게 저는 즐겁거든요.”

    “…….”

    “저희가 세상에서 제일 잘난 줄 알았던 인간 귀족 놈들이 쩔쩔매는 모습도 즐겁구요. 전전긍긍하는 타 종족과 인간들을 보는 것 역시.”

    손에 피를 묻히며 살생을 즐겼던 그 시절도 다 지나갔다. 마음이 시시각각 변하는 자신답게, 유클리드는 이제 또 새로운 재미를 찾아볼 생각이었다.

    “그러니 부디, 오래 군림하여 주시기를.”

    저의 또 다른 즐거움이 되어 주시기를.

    *

    “피시?!”

    흙투성이가 된 채 실려 온 건 다름 아닌 피시였다. 분명 세잔티노 지하에서 사라졌다던 자신의 형이 왜 이곳 제도에서 나타난 걸까. 패티스는 일단 정신을 잃은 듯한 피시를 얼른 황궁 안으로 옮겼다.

    다행히 그를 발견했던 게 경비를 서던 늑대들이었던 탓에 다른 사람들에겐 들키지 않은 모양이었다. 피시를 등에 업고 달려왔던 앤디가 황궁 안 은밀한 곳에 그를 내려 주고는 자신도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앤디 경. 어떻게 된 건가?”

    “땅을 파고 나오셨어요.”

    “뭐?”

    “아무래도 세잔티노부터 여기까지 땅속을 걸어오신 게 아닌가 싶은데요.”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나?”

    “불가능하죠.”

    “…….”

    “하지만 피시 님이 파신 게 아니라 기존에 파져 있던 땅이라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세잔티노에서…… 이곳까지 땅이 파져 있었다고? 지하가 연결돼 있어? 물론 수로 때문에 땅을 파기는 했지만……. 아니. 세잔티노의 지하는 그 깊이가 상당하다. 그때도 느꼈지만 인간들이 팔 수 있을 만한 깊이가 아니었다. 자연적으로 파여 있었거나, 성력으로 나자르가 팠거나. 그게 아니고서는 감당할 수 없는 깊이의 지하였다.

    인간들이 그 정도 지하를 팠었더라면 기록에라도 남겼을 터였다. 혹은 2차 전쟁 때 그곳으로 대피했겠지.

    어쨌든 애초에 인간들은 땅 아래엔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공간은 아닐 텐데……. 근데 그 공간이 이곳까지 연결되어 있었다고? 그렇다면 몇 년 전 세잔티노 습격 때도 이 공간이 존재했었다는 건가? 그걸 우리는 찾지 못했던 거고?

    “허억, 헉……!”

    그때였다. 갑자기 들린 숨소리에, 각자 고민에 빠졌던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피시 쪽으로 돌아갔다.

    “피시!”

    “피시 님. 괜찮으십니까?”

    “콜록! 콜록!”

    “앤디 경. 물을 좀 가져오게.”

    “예!”

    앤디가 급하게 문을 닫고 나가자마자 패티스는 피시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얼굴엔 흙을 잔뜩 묻힌 채 목이 졸린 것처럼 괴로운 기침을 여러 번 하던 피시가 점차 기침을 줄여 가기 시작했다.

    “피시. 정신이 들어? 괜찮아?”

    “여, 여기는…….”

    “황궁이야.”

    “……황궁이라고?”

    “그래.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갑자기 사라진 널 찾겠다고 세잔티노에 파견된 하이에나만 몇 마리인 줄 알아?”

    피시는 미간을 좁히며 관자놀이 쪽을 손바닥으로 꾹꾹 눌렀다. 중간중간 열린 통로를 통해 바깥바람을 쐬긴 했지만, 역시 그렇게 깊은 지하에 장시간 머무는 건 우논인 자신에게도 힘든 모양이었다.

    그는 자신을 바라보며 대체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해명을 바라는 패티스에게,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몰라 한참을 주저했다. 그러다가 결심이 선 건지 어렵게 운을 뗐다.

    “패티. 세잔티노에서 여기까지, 그리고 여기서부터 또 어딘가까지 땅굴처럼 커다란 공간이 존재하는 것 같아.”

    “……그럼 정말 세잔티노 지하에서부터 여기까지 걸어온 거란 소리야?”

    “응. 근데 길목 중간중간 지하로 들어갈 때의 입구처럼 구멍이 있었고, 거길 타고 올라가면 이렇게 바깥으로 나오게 돼.”

    “그게 가능하다고? 근데 왜 여태 우리가 몰랐지? 아니. 널 찾기 위해 세잔티노의 지하로 들어간 우논과 테르들은 막다른 벽을 마주하고 돌아왔어. 샅샅이 뒤져 봐도 네가 있을 만한 공간이 없다면서.”

    “아니야. 봐, 내가 여기 있잖아. 아무것도 안 보이는 어둠 속을 벽만 짚으면서 계속 걸었어. 그랬더니 제도에 도착했단 말이야.”

    피시가 지하로 내려가고 하루가 지났을 무렵, 사태가 심각해졌음을 인지한 우논들이 뒤따라 땅속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그들은 그곳에서 피시를 찾지 못했고, 결국 영지에서 하이에나 몇을 더 데려와 대대적인 수색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역시나 찾지 못했다. 그 어떤 곳에도 피시는 없었다.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는 소식에 패티스는 황당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지하는 물론이고 땅 위까지 몇 번이나 뒤졌으나 피시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분명 미미한 그의 냄새가 지하에 남아 있었지만, 마치 땅으로 꺼진 것처럼 그 자리에서 증발해 버린 것이다.

    그렇게 며칠이 흘렀는데…… 이렇게 갑자기 나타난다고? 이게 말이 돼? 애초에 그곳을 뒤졌을 때 이곳으로 이어지는 통로 같은 건 없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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