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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165화 (165/488)
  • 165화

    ‘눈이 안 보인다고 갇혀 살아야 하는 건 아니에요. 저도 더 넓은 세상을 볼 자격이 있어요. 그게 눈이 아니어도요.’

    그래서 점자를 알려 주셨잖아요. 그래서 연회를 열어 주셨잖아요. 침착하고 명료한 메이슨의 말에 엔리케가 미간을 찌푸리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유일하게 남은 제 하나뿐인 혈육을 안쓰럽게 쳐다보다가 이내 시선을 돌렸다. 손주의 항변에 달리 반박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할아버지와의 신경전 끝에 이엘이 있는 곳으로 왔다. 비단 이엘이 걱정돼서, 만나고 싶어서만은 아니었다. 엔리케에게 말했듯, 메이슨은 이제 제 밥값을 해내고 싶었다. 2차 전쟁 이후 인간 여자를 학살한 죄로 젊은 독수리들이 상당수 처형당했다. 게다가 다시 시작된 인간들의 사냥에 어린 개체들이 무차별적으로 납치당했다.

    그러니 이제는 자신도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 늠름하고 우아한 종족의 명예를 함께 지켜 나가고 싶다. 자신의 능력을 맹신해 과도하게 나서는 게 아니라,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저분과 함께 갈게요. 둘이 같이 가면 괜찮을 거예요. 네?’

    그렇게 고집을 부리는 로도 함께 이곳으로 왔다.

    “오헬…….”

    하지만 그것도 이엘이 싫으면 소용없다. 그녀가 싫어하고 거부한다면 메이슨은 슬프겠지만 로와 함께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녀에게 짐이 되고 싶진 않았으니까.

    “우리 돌아갈까?”

    제 소매 끝을 움켜쥐며 묻는 메이슨을 어떻게 돌려보낼까. 이엘은 작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곤 제 품 안으로 메이슨을 꼬옥 끌어안았다.

    “아니. 가지 마. 나랑 여기 있어 줘.”

    “오헬.”

    “와 줘서 고마워. 로도. 어서 이리 와.”

    멀찌감치 서서 두 사람을 바라보던 로가 머뭇거리다가 그녀의 손짓을 따라 가까이 다가갔다. 이엘은 로의 손목을 냉큼 잡아 똑같이 품에 끌어안아 주었다. 그러곤 두 소년의 등을 함께 토닥거렸다.

    “선물도 전해 줘서 고마워. 두 사람 다 내 옆에 있어. 위험하지 않게 지켜 줄게.”

    어차피 둘 다 우논이니 여차하면 본체화시켜서 도망치게 하면 된다. 뱀을 비롯한 다른 이종족의 공격은 밖에서 늑대들이 막아 줄 테고. 문제가 되는 건 내부 세력인데…….

    똑똑. 그 순간 잠가 두었던 성전 문을 누군가 두드렸다. 이엘은 소년들을 놓아 주고 문을 열어 주었다.

    ― 전하. 그 소년들이 이곳에 있습니까?

    이엘은 마주한 일라이저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엔 걱정이 잔뜩 묻어 있었다. 의심은 하고 있지만 애써 인간 아이들이라고 생각하려는 모양이다. 일라이저는 인간에게, 특히 약자들에겐 한없이 약했다. 어쨌든 다쳐서 오게 된 메이슨의 안부를 염려하는 모습이었다.

    이엘은 조심스럽게 옆으로 비켜 일라이저가 안으로 들어서게 해 주었다. 그는 들어오자마자 바닥에 주저앉아 쉬고 있는 두 소년과 눈이 마주쳤다. 정확히는 한 소년만이지만.

    ― 습격당한 마을은 어디랍니까? 그곳의 피해가……,

    ― 일.

    ― 네.

    ― 대충 느꼈겠지만 저들은 내 친구야.

    아. 그가 짧게 탄식했다. 일라이저는 저를 바라보는 소년의 금빛 눈동자를 지나쳐 그 옆에 앉아 있는 적발의 소년을 쳐다보았다. 검은 천으로 두 눈을 가린 채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는 소년이 그의 눈에 거슬렸다.

    ― 그렇다면 저들은…….

    ― 이종족이야. 우논이고.

    ― …….

    ― 나를 도우러 왔어. 숨겨 줄 수 있겠나?

    명령을 내리면 그는 기꺼이 따를 테지만 이엘은 일라이저에게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 전하의 명을 어찌 불복하겠습니까.

    ― 명령이 아냐.

    ― …….

    ― 그대가 원치 않으면 돌려보내겠다.

    일라이저는 적발의 소년에게 시선을 박은 채 입을 꾹 다물었다. 적색 머리, 뽑힌 것처럼 사라진 두 눈. 이엘이 말해 주지 않아도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이엘은 일라이저의 대답을 기다려 주었다. 그는 고민을 하는 듯했다. 충격을 받은 건지도 모른다. 한없이 미워만 하던 이종족이었는데, 막상 보게 된 어린 독수리는 인간으로부터 눈알이 빼앗겨 능력은커녕 앞도 못 보는 장애를 얻었다. 모든 게 그의 신념에서 벗어난다. 일라이저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메이슨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쩌면 먼 훗날 만나게 될지 모르는 르네와의 만남 역시, 일라이저에겐 다른 의미의 시련이 될 것 같단 생각에 선택권을 주기로 한 것이다.

    일라이저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세게 쥐었다.

    ― 저는…….

    우논……. 우논이라고. 할 말을 잃었다. 우논이라면 이종족 중에서도 최상위 계급이지 않던가. 그 우논이 왜 여길……? 일라이저는 이종족을 향한 혐오감이 남들의 몇 배는 된다. 그러니 우논을 보고 화가 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지. 하지만…….

    “오헬? 누가 왔어?”

    적발의 소년이 고개를 기우뚱 기울였다. 앞이 안 보이는 탓에 작은 분위기에도 예민한 모양이었다. 소년은 자리에서 일어나 이엘의 옷 끝을 움켜쥐며 조금 떨었다. 긍지 높은 우논 독수리라고 보기엔 의아할 정도로 유약해 보였다. 밖에서 뛰어노는 마을 아이들보다 더.

    이엘은 계속해서 일라이저를 기다려 주었다. 다른 종족도 아니고 독수리다. 그가 어머니와 누이들을 죽인 ‘이름 모를 이종족’을 죽이기 위해 삶을 바쳤다는 걸 알게 됐다. 그는 눈앞에서 스러져 간 가족을 평생 잊지 못한 채 살았다.

    그러나 자신의 아버지가 독수리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은 알지 못한다. 이엘은 말해 줄 수 없었다. 그러니 이것까지 내가 강제할 순 없다.

    ― 저희를 감시하기 위해 이종족이 보낸 건가요?

    ― 아니. 그건 아냐.

    ― …….

    ― 일.

    ― 저는 괜찮습니다. 전하께서 원치 않으신다면 모두에겐 비밀로 하겠습니다.

    일라이저는 그녀를 향해 공손히 인사를 하며 성전을 나갔다. 이엘은 그의 뒷모습을 안타깝게 쳐다봤다.

    그는 전쟁으로 인해 감정이 비정상적으로 분리되어 있다. 이종족을 향해선 혐오감이, 인간을 향해선 너그러움이. 인간으로 인해 고통당한 흔적을 가진 메이슨의 존재는 그의 감정에 큰 혼란스러움을 가져다주었을 것이다.

    “오헬. 방금 누구야?”

    “아냐. 우선은 좀 쉬도록 하자.”

    “응.”

    이엘은 로와 메이슨의 손을 잡고 성전을 나와 제집으로 향했다.

    *

    로와 메이슨이 이곳으로 온 지도 벌써 2주나 흘렀다. 그사이 두 우논은 인간들의 눈을 피해 이엘과 노아의 사이를 오가며 서로의 안부와 소식을 전해 주느라 바빴다. 처음엔 걱정이 많던 이엘도 이젠 두 사람을 믿고 맡길 만큼 여유가 생겼다.

    다만 문제는 여전히 내부 사정에 있었다. 병력이 늘어난 것만큼은 좋았지만 마음이 한곳으로 합쳐지지 않았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가는 법이다. 게다가 은근히 파벌을 조종하는 세력이 생긴 듯해서.

    이전의 턱수염과 같은 일당들은 분란을 만들어 세력을 흩어지게 하는 편이 좋았지만, 이곳은 약자들만 모여 사는 곳이다. 그들에게 불필요했던 결속이 절실히 필요한 곳.

    바스락― 짧은 한숨을 내쉬던 이엘이 나뭇잎이 바스라지는 소리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오늘은 그녀가 불침번을 서는 날이었다. 모두가 마을로 돌아가는 것을 확인했으니 마을 사람은 아닐 테지. 가뜩이나 최근 들어 여러 이종족이 근방을 어슬렁거린다는 소식에 경계를 단단히 했는데. 1차적으로 늑대들의 감시를 뚫고 이곳까지 온 걸까?

    미세하게 달라진 바람의 결이 그곳에 누군가 있음을 말해 주는데도 상대방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혹 뱀일까? 은신해서 몸을 숨기고 있는 걸까? 이엘은 주머니에 담겨 있는 보호석 하나를 사용할 생각으로 그 안에 손을 넣었다. 노아는 그녀가 뱀의 소굴에 잡혀갔을 때를 염려해 건넨 것이겠지만, 이엘은 지금이 더 위급하다고 생각한다. 여차하면 마을이 쑥대밭이 될 테니까.

    들고 있던 총을 더 세게 쥐며 깊은 심호흡을 할 때였다. 저 너머에서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또 나를 쏘려고?”

    작은 풀숲이 흔들리며 아주 작은 동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전히 눈을 어지럽히는 점박이 무늬를 달고 갸릉갸릉 울음소리까지 냈다. 이엘은 미간을 찌푸리며 들고 있던 총을 내려놓았다.

    “여긴 어떻게 온 거예요?”

    “네 냄새를 맡고.”

    “…….”

    “말했잖아. 네가 내 사정거리 안에 있어 줘야 한다고.”

    정말 새끼라도 된 것처럼 거리낌 없이 다가와 그녀의 다리에 얼굴을 치댔다. 그는 귀족으로서의 생활보다 야생에서 치열하게 산 시간이 길기 때문에 이런 행동은 개의치 않는 듯했다.

    그 어떤 새끼들보다 작은 우논을 쳐다보며 이엘이 허탈함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곤 아무렇지 않게 이카르를 들어 올려 제 무릎 위에 놓았다.

    “그럼 쉿. 들키니까 이렇게 있어요.”

    “이봐. 내가 이런 꼴이라 무슨 새끼인 줄 아나 본데……,”

    “기억 안 나요? 당신이 처음 쓰러졌을 때 내가 줄곧 품에 안고 왔는데.”

    “…….”

    “조용히 좀 해요. 들키면 안 된다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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