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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164화 (164/488)
  • 164화

    일라이저를 물끄러미 보던 이엘은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머물고 있던 집을 나와 사람들이 모여 있던 마을 입구 쪽으로 향했다. 가까이 갈수록 웅성거리는 소리와 혀를 차는 소리가 한데 얽혀 들렸다.

    “흠, 근데 정말 인간 맞을까?”

    “그럼 이종족이겠어? 이종족이 뭣 하러?”

    “아니, 뭐……. 의심해서 나쁠 게 없잖나.”

    이엘과 일라이저가 등장하자, 마을 사람들은 슬금슬금 자리를 비켜 줬다. 미간을 좁히며 인파를 뚫고 들어갔던 이엘은 터져 나오려는 탄식을 겨우 삼키고 그 자리에 우뚝 섰다.

    “가, 갈 곳이 없어요……. 사, 살려 주세요…….”

    “도와주세요…….”

    금발의 소년은 옆에 서 있는 적발의 소년을 끌어안으며 울먹거리고 있었다.

    “저희 좀…… 도와주세요…….”

    피가 잔뜩 묻어 해진 천을 두 눈에 두른 채 벌벌 떨고 있는 소년과 금발의 소년은 그녀가 알고 있는 아이들이었다.

    “어떻게 할까, 오헬?”

    “…….”

    “부상을 입고 있어서 데려왔어. 오드한테 보여 주는 게 낫지 않을까?”

    그녀의 자문을 구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귀에 들리지 않았다. 이엘은 미간을 좁히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금발의 소년이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이엘을 안심시키려는 듯 소년이 눈가를 찡그렸지만 도리어 걱정을 부르는 행동이었다.

    왜 여기에 로와 메이슨이 온 건지……. 이엘은 미간을 찌푸렸다.

    모든 종족의 왕이 그렇지만, 특히나 레온은 자신의 종족을 제 몸보다 더 아꼈다. 거기에 저와 같은 타이곤에는 더더욱. 그렇게 애지중지하는 나드가 그랬고, 밀로에게서 갈기의 위협을 받은 로가 그랬다. 그러니까 레온이 그토록 아끼는 로를 이곳에 보냈을 리 없다.

    “오헬?”

    갑자기 말수가 적어진 이엘을 마을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봤다. 이엘은 서둘러 표정을 감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눈을 다친 아이가 시급해요. 먼저 오드에게 보여 주세요.”

    “그래.”

    이엘의 지시를 따라 사람들은 별 의심하지 않고 아이들을 부축해 성전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모두가 자리를 떠난 뒤에야 일라이저는 그녀의 옷 끝을 살짝 잡아 세웠다.

    ― 전하. 안색이 안 좋으십니다.

    르네 역시 마찬가지다. 제 백성을, 그것도 눈을 잃은 새끼 독수리를 이곳에 보냈을 리 없다. 역시 아이들이 독단적으로 온 걸까. 안심은커녕 머리만 지끈지끈 아팠다.

    ― 전하.

    ― 괜찮다. 걱정 안 해도 돼.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말을 중얼거리며 이엘은 일라이저를 놔둔 채 성전으로 발길을 돌렸다. 눈알이 파일 정도로 크게 부상을 입고 온 환자는 여태 없었기 때문에 모두의 관심이 로와 메이슨에게 쏠렸다. 이엘은 몰려든 사람들의 주위를 돌려놓고 임시로 세운 성전 안으로 들어왔다.

    “오헬!”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메이슨이 그녀를 부르며 포로록 안겼다. 그새 많이 자랐지만 여전히 작은 적발의 소년이 이엘을 향해 배시시 웃었다. 검은 천은 변함없이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했지만, 이엘 역시 오랜만에 만난 메이슨을 보며 반갑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잘 지냈어, 메이슨?”

    “응. 오헬은?”

    “나도 잘 지냈지.”

    “잘 지내셨나요, 오헬 님?”

    저 멀리 격식을 차리며 묵례를 하는 로를 향해서도 웃어 주었다. 안쪽에서 차를 내오며 오드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이엘은 성전 문을 단단히 잠그고 두 소년을 끌어 안쪽 방으로 들어갔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너희가 왜 여길……,”

    “우리가 가겠다고 했어.”

    “늑대는 작은 우논이 없으니까요.”

    로가 생글생글 웃었지만 이엘은 그 대목에서 미간을 찌푸렸다.

    “너희들의 왕도 다 알아? 알면서 너희를 보냈다고?”

    “물론 반대하셨어요. 레온 님은 몹시 화가 나셨죠.”

    “르네 님도 반대하셨지만, 그냥 내가 왔어.”

    어쩌면 늑대 무리에 이 꼬마들만 한 우논이 있었더라면 그 아이가 자원해 왔을지도 모른다. 가장 어렸던 우논인 주드는 죽었고, 그 위로 있던 어린 우논들도 쑥쑥 자라 지금쯤 성체 비슷하게 되었을 테니. 이엘은 이마를 짚으며 짧게 탄식했다.

    “오지 않아도 됐어. 위험한데 왜 온 거야.”

    “전해 드릴 게 있어서요.”

    “나중에 내가 받으러 가면 되는데.”

    “감시가 심해서 마을 밖으로 나오지 못하잖아.”

    메이슨의 말에 입을 꾹 다물었다. 이엘이 남자들을 감시하며 경계하듯, 그들도 이방인인 이엘을 감시했다. 겉으로는 마을 사람들처럼 그녀를 곧잘 따랐지만, 이따금 대화를 할 때면 그녀를 배척하는 것이 은연중에 느껴질 정도였다. 덕분에 늑대들과는 스완이 없으면 소통이 전혀 되질 않았고, 그마저도 매번 가능한 게 아닌 터라 연락을 주고받는 횟수가 줄기 시작했다.

    메이슨은 할아버지인 엔리케의 반대를 무릅쓰고 왔다며 이야기했지만, 이엘은 내키지 않아 속이 탔다. 되도록 이 일엔 이종족이 끼어들지 않길 바랐으니까. 그냥 이 마을을 지켜보는 것만 해도 충분했다. 그녀의 속을 모르는 메이슨은 가짜 피가 묻은 천을 슥슥 닦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오헬이 있는데 왜 위험해?”

    “저희는 정말 괜찮아요! 밖에서 레온 님과 르네 님, 그리고 노아 님까지 모두 지켜 주고 계신걸요.”

    본의 아니게 모두 집합시켜 버렸네. 짧은 한숨을 내쉬는 이엘을 보며 로가 품에 숨겨 놓았던 주머니를 꺼냈다.

    “이걸 오헬 님께 전해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게 뭐야?”

    비로드로 된 주머니 안에는 손톱만 한 알갱이가 정확히 세 알 들어 있었다. 이엘은 제 손바닥 위에 알갱이를 올려 두고는 미간을 좁히며 쳐다봤다. ……이게 대체 뭘까? 그녀의 궁금증을 해결해 주기 위해 로가 입을 열었다.

    “그걸 깨뜨리면 안개가 분사되면서 동시에 정확한 위치가 알려집니다. 보호석을 변형시켜 제작했습니다.”

    “변형이라면…… 설마…….”

    “맞아. 내가 손을 좀 봤어.”

    말없이 뒤에서 지켜보던 오드가 대답했다. 이엘은 인상을 찌푸리며 오드의 옷을 잡아 흔들었다.

    “더 이상 보호석에 손대지 말라고 했잖아! 네가 위험해진다고!”

    “엘. 괜찮아, 그 정도는.”

    전혀 괜찮지 않다. 보호석에 손을 대면 댈수록 그로 인한 대가는 커진다. 이미 오드는 세잔티노 사건으로 한차례 크게 앓았다. 그 뒤로 성력도 많이 약해져 회복하는 데도 시간이 꽤 걸렸는데…….

    최근 들어 더 수척해 보이던 게 이것 때문이었어? 자주 마을을 나가던 게 이것 때문이라고? 이엘은 오드의 옷 끝을 더욱 세게 쥐며 화를 냈다.

    “왜 이런 짓을 한 거야?! 이런 쓸데없는 짓을 왜……!”

    “폐하께서 걱정하셨어.”

    살짝 우울함에 젖은 목소리로 메이슨이 중얼거렸다. 그녀를 이곳에 보내고, 르네 역시 속이 타고 답답한 건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나 깨나 이엘의 걱정뿐이었다. 기꺼이 그녀의 행보를 지지하고 연대하겠다고 했으나 걱정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르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한 것이다.

    그는 머리를 굴렸다. 굴리고 굴려서 그녀가 필요한 게 무엇인지, 알아차리고 실행했다.

    “위급 시에 노란 알갱이를 깨면 안개가 터지게 되고, 곧장 르네 님께 오헬 님의 위치가 전달됩니다. 그리고 이 두 개의 붉은 알갱이는 원래 보호석의 역할을 할 겁니다. 보호석의 크기보다 한참 작으니 넓게 작동되진 않아요. 그러니 탈출 시에 사용하라고 하셨어요.”

    “위급 시라면…….”

    “뱀에게 잡혔을 때. 희생하지 말라는 의미래.”

    메이슨의 대답에 이엘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런 시간이 오지 않기를 바랐지만, 혹 온다고 해도 피할 생각은 없었다. 어떻게든 타개해 볼 생각만 했다. 어떻게든 되겠지, 싶었다. 어쩌면 그런 식으로 애써 외면하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고.

    하지만 르네는 그녀가 그런 것까지 떠안길 바라지 않았다. 도망치는 방법을 제안해 주었다. 도망쳐도 된다고 말해 주었다. 노아가 말했던 것처럼.

    ‘그러니까…… 위험하면 꼭 도망쳐. 응?’

    뱀의 영지로 들어가면 노아는 그녀를 지켜볼 수 없게 된다.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그는 알 수 없다. 무작정 쳐들어가 때려 부수는 건 그녀의 계획을 막는 셈이니 할 수 없다. 그러니 독수리를 데려와 머리를 썼다.

    “알갱이가 작으니까 입 안에 넣고 계시다가 깨뜨리시면 된대요.”

    그녀의 안색을 살피며 로가 첨언했다. 이엘은 로의 설명을 들으며 손바닥에 놓인 알갱이를 쳐다봤다.

    아무 대책 없이 로빈을 맞는 것보단 도망칠 길을 열어 두고 상대하는 편이 그녀에게 심적으로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 르네는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사용하든 하지 않든, 그런 것과는 별개로.

    “오헬. 괜찮아? 우리가 와서…… 불편한 거야?”

    상대의 기분을 예민하게 느끼는 메이슨이 이엘의 소매 끝을 잡으며 조심스레 물었다.

    어른들의 회의를 몰래 엿들었다. 습격 이후로 잠잠히 행동하고 있지만, 뱀의 관심이 이엘의 마을에 쏠려 있다는 사실은 자명했다. 그런 와중에 이엘이 내부의 사정 때문에 마을 밖으로 자유롭게 오갈 수 없게 됐다.

    그러니 우논 중 하나가 인간인 척 마을에 잠입해 상황을 안팎으로 전해 주자는 말이 나오게 된 것이다. 물론 원래 예정된 사람은 앤디였다.

    ‘근데 공작을 받아 줄까요? 되레 의심을 받을 겁니다.’

    ‘확실히 젊은 남자는 의심부터 할 것 같네요.’

    그렇다고 의심을 덜 받을 만한 어린 우논을 보내기엔 늑대들은 어린 개체가 없었다. 그나마 있는 몇 마리는 다른 곳에서 아비를 따라 경비병을 보고 있었고, 소식을 전하고 정리해 돌아오기엔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로빈의 의중은 알 수가 없었고, 그의 추적망이 점점 좁혀지고 있었으니까.

    ‘그럼 제가 갈게요.’

    ‘메이슨!’

    후작 엔리케가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아이를 홀로 두고 올 수 없어 데리고 왔던 그는, 회의실에 갑자기 들어온 메이슨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모인 왕들에게 연거푸 사죄를 하며 손주를 데리고 나가려 했다.

    ‘그만 나가거라! 여기가 어디라고 네가……,’

    ‘이종족에게 습격을 당해 눈을 다쳤다고 하면 의심을 덜 받을 거예요.’

    ‘메이슨! 그만하라는 내 말이 들리지 않는 게냐!’

    ‘오헬이 있는 곳에 저도 가고 싶습니다.’

    노아는 턱을 괴며 메이슨을 빤히 쳐다봤다. 그는 이엘이 메이슨을 통해 주드를 보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러니 최대한 메이슨과 그녀가 만나지 않기를 바랐다.

    ‘불허한다.’

    ‘예? 어, 어째서…….’

    ‘차라리 앤디를 보내. 어린 우논은 오헬에게 보내지 마.’

    그녀가 아무리 주드의 그늘에서 벗어났다고 한들, 또 다른 주드가 생기면 모두 허사가 된다. 노아는 그런 위험이 될지도 모를 씨앗을 그녀의 곁에 둘 마음이 결코 없었다.

    ‘정 안 되면 내가 직접 가도 되고.’

    ‘폐하, 그건 안 됩니다.’

    ‘제가 갈게요. 그럼 제가 가겠습니다!’

    또 구석에서 작은 손이 하나 불쑥 올라왔다. 이번엔 레온의 곁에서 시중을 들던 로였다. 작은 소년의 자진에 레온은 짧게 탄식하며 제 이마를 짚었다.

    ‘어차피 보호석을 변형시켜 만든 알갱이도 전해 드려야 하지 않나요? 나자르 님도 최근엔 여길 자주 못 오시니 전해 줄 사람이 없잖아요.’

    ‘로. 네가 나설 곳이 아니야.’

    ‘저는 발이 빠릅니다. 여차하면 본체화를 해서 도망칠 테니 걱정 마세요! 중간에서 소식을 서로 전해 줄 전령이 필요하잖아요. 그건 제 역할이었던걸요, 늘.’

    레온은 매번 로를 시켰던 것에 처음으로 후회를 달았다. 이런 일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결국 로를 뒤로 밀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냥 내가 갈게. 인간들 눈 속이는 게 뭐 그렇게 어렵다고. 나 정도 외관이면 완전한 성인 남자로는 안 보일 테니 괜찮겠지. 안 그래도 불만이었어. 난 오헬이 뱀의 소굴로 들어가는 것에 철저하게 반대해. 안 내켜. 그러니까 데려올 거야.’

    ‘억지로 데려오는 건 소용없다. 그 애가 싫어할 테니까.’

    르네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레온은 미간을 좁혔다. 당신이 오헬에 관해 뭘 그렇게 잘 안다고 입을 열어? 그의 시비에도 르네는 발끈하지 않고 눈을 감은 채 무시로 일관했다. 아무튼 엉망이었다. 기껏 의견 합치를 했나 싶었는데 어째 또……. 안드로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폐하! 제가 가게 해 주세요. 부탁드려요. 네? 오헬이 너무 보고 싶어요. 위험하면 인사만 하고 바로 나올게요. 허락해 주세요.’

    ‘메이슨! 네가 낄 데가 아니라고 말했잖느냐!’

    ‘할아버지. 언제까지 저를 방에만 가두실 거예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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