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마른 웃음을 지은 이엘이 다시 부지런히 앞서 걷기 시작했다. 일종의 경고인 걸까. 물끄러미 황자의 뒷모습을 응시하던 일라이저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뒤따라 걸었다.
용서를 배우지 못했다. 그리고 배울 마음도 없다.
적어도…… 적어도 그 자식은 내 손으로 죽여야 한다. 그래야 불쌍하게 떠난 어머니와 누이들에게 면이 선다. 그것 하나로 버티며 생을 이어 왔는데 주군을 만났다고 그 마음을 버릴 수 있겠는가. 안타깝게도 자신은 아버지처럼 곧고 선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 솔직하게 말하자면 저분의 길을 따르겠노라 말하는 것 역시 복수의 일종이다. 이종족을 억눌러 인간들의 세상이 다시금 도래하는 걸 두 눈으로 보고 싶다는 복수. 애초에 저분도 마찬가지일 것이라 생각했다. 인간들을 위해 황위에 오르겠다는 뜻인 줄 알았다. 곁에 있는 늑대 따위, 그저 이용하는 도구에 불과하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 전하. 저는……,
― 지금은 다른 생각 하지 마라. 아이들을 구출하는 게 우선이야.
어느새 놈들이 매복해 있던 장소에 도착했다. 이엘은 갈등에 사로잡힌 일라이저에게 주의를 주고 시선을 건너편으로 돌렸다. 저 멀리 흉흉한 눈동자 수십 개가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존재를 알아차린 늑대들이 뒤로 진을 물렸다.
한편 풀숲 너머에 대기하고 있던 인간들은 꽤 어수선해 보였다. 정신없이 주변을 돌아다니며 무언가를 초조하게 기다리던 남자들 중 하나가 견디지 못하고 적막을 깼다.
“정말 이러면 접선할 수 있다고?”
“그래. 닥치고 좀 기다려!”
“하지만 벌써 며칠째 아무 소식도 없잖아…….”
“멍청하긴! 대가리가 안 돌아가면 입이나 다물어!”
자세를 낮춰 우거진 풀 사이로 상황을 살폈다. 아이들은 보이지 않았고 남자 몇 명만 있을 뿐이었다. 일단은 아이들의 안전 확보가 우선인데. 이엘이 메고 있던 장총을 앞으로 돌려 장전 준비를 할 때였다.
― 전하. 잠시만요.
심각한 표정의 일라이저가 서둘러 총을 잡아 내렸다.
― 아는 자들입니다.
일라이저는 당황과 혼란 속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왜 저 사람들이……? 불과 몇 달 전만 하더라도 함께 동고동락하던 마을 사람들 중 일부였다. 흘러 들어온 보호석의 유혹에 넘어가 마을을 이탈하긴 했지만 아이들을 납치할 리가 없다. 보호석이 있기 전까진 제법 잘 지냈던 사람들인데. 도대체 왜…….
― 늑대가…… 잘못 추적한 건 아닐까요.
그의 자신 없는 물음에 이엘은 고개를 저었다. 늑대의 추적은 정확하다. 특히나 이런 사안에 있어서는 더더욱. 그녀가 단호하게 부정하자 일라이저의 얼굴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아이들이 폐쇄된 마을에서 그토록 쉽게 납치당했던 건 전부 면식범이기 때문이었나. 허탈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도대체 왜……. 아이들은 아무 죄가 없잖아. 이래서는…… 이종족과 다를 게 없잖아.
― 그대는 여기서 기다리도록. 나 혼자 처리하겠다.
― 아니요, 전하.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 일, 너는……,
― 제게 인간을 향해 총을 겨눌 수 있냐고 물으셨지요.
― …….
― 저도 지켜야 할 것과 무너뜨려야 할 것 정도는 구별할 수 있습니다.
일라이저는 총을 쥔 채 자리를 벗어나 밖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망설임 없이 인간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는 그의 뒤를 따라 이엘도 함께 나갔다. 조금 걱정이 됐다. 마냥 순하기만 한 일라이저가 저치들을 향해 큰소리 한 번 낼 수 있을지가. 되레 상처나 받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성큼성큼 걷던 걸음이 멈췄다. 그러나 일라이저와 이엘이 숲을 완전히 벗어나 무리에 도착할 때까지도 인간들은 두 사람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고 나서야 두 사람을 발견한 인간들이 눈을 크게 뜨며 놀랐다. 기척도 없이 등장한 것에 꽤 놀란 듯했다. 그러나 이내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호방한 척 일라이저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역시. 그럴 줄 알았다.”
“오랜만이구나, 일라이저.”
“…….”
“네가 올 줄 알았단다.”
득의만면한 얼굴로 일라이저를 쳐다보는 남자들의 태도에 이엘이 미간을 찌푸렸다. 보아하니 원래 마을에서 함께 지냈던 무리 같은데……. 그렇다면 도중에 마을을 벗어난 자들이겠군. 늑대들이 어느 정도 거리를 벌리고 있던 이유를 알 것 같다.
이전에 노아와 함께 봤던, 보호석을 찾아 이종족 사냥을 나선 놈들 중 일부가 섞여 있었다.
“아차, 넌 귀가 안 들리니 손짓으로 말해야 하지?”
수어를 할 줄도 모르면서 대충 두 손으로 휘휘 젓는 행위를 하며 저희끼리 조롱했다. 일라이저는 그들이 하는 말을 눈으로 다 듣고 있었다. 수어가 없어도 입 모양으로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으니까. 그러나 그는 반응하지 않았다.
― 왜 아이들을 납치하셨습니까?
차분한 일라이저의 물음에 남자들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가 다시 낄낄거리며 배를 잡고 웃었다. 여기 네 손짓을 누가 알아먹겠냐! 조롱하며 웃는 모습에 일라이저가 굳게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우선은 대화로 풀어야 한다. 남자들은 수어를 모르니 아무리 손으로 말해 봤자 무시할 게 빤하다.
하지만 그의 말이 튀어나오기도 전에 홱 하는 소리와 함께 남자의 옆머리가 잘려 허공에 흩뿌려졌다.
“안 들리는 건 당신인 것 같은데. 쓸모도 없는 귀, 잘라 주면 되나.”
대답을 들을 생각도 없는 건지 이엘의 검이 또 한 번 남자의 머리카락을 잘랐다. 어찌나 정교하고 깔끔한지, 조금만 옆으로 움직였다면 정말 귀가 잘려 나갈 정도로 예리했다. 언제 검을 뽑았지……? 동공이 흔들릴 정도로 놀란 남자들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왜 아이들을 납치했냐고 묻잖아. 입을 찢어 주면 대답할 건가?”
제 앞을 가로막고 선 이엘의 등이 이상할 정도로 커다랗게 느껴졌다. 화려하진 않지만 가벼운 손놀림 때문에 검이 스스로 날아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완벽한 황궁 검술. 아버지의 검이었다. 일라이저는 그 순간 아버지가 제 앞에 나타난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
“애, 앤디 님! 나서야 하는 거 아닙니까?”
“쉿. 일단 지켜보자.”
웬일로 앤디가 차분했다. 되레 다른 늑대들이 그의 눈치를 보며 안절부절못했다. 분명 왕께서 오헬의 안전에 혼신의 힘을 다하라고 하셨는데…….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가만히 있질 못하는 늑대들을 뒤로하고 앤디는 차갑게 식은 눈동자로 인간들을 관망하고 있었다.
아직은 검을 쥐기 힘들 텐데. 그 생각에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영지를 떠나기 전까지도 이엘은 검을 제대로 쥐지 못했다. 덜덜 떨리는 손에 힘이 들어가지 못하니 자연히 검을 쥐는 것 자체가 어려웠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눈앞에 있는 소년은 보란 듯이 검을 굳게 쥐고 가볍게 휘두르고 있었다. 저 악바리가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기특하게도 온 힘을 다하는 모양이다. 그 생각에 묘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고마웠다. 저런 끈질긴 생명력은 이미 한 번 동생을 잃은 앤디에게 있어 눈물 나게 고마운 일이다.
언젠가 어렴풋하게 들은 적이 있다. 황자는 전에 없을 완벽한 왕의 재목이며 그에게 붙어 딸려 나온 황녀는 할 줄 아는 게 전혀 없는 무능한 인간이라고. 하지만 그건 전혀 틀린 말이다. 적어도 앤디의 눈엔 황자보다 황녀의 존재감이 더 뚜렷하다.
“이, 이……!”
“이제 들어 줄 마음이 생겼나?”
홱홱 소리를 내며 엄청난 속도로 제 눈앞을 오가는 날붙이 때문에 남자는 아연실색했다. 어찌나 날카롭게 벼려져 있는지 조금만 스쳐도 머리카락이 뭉텅이씩 잘려져 나갔다. 조금 전엔 목덜미를 스쳤는데 부러 노린 건지 실수한 건지는 몰라도 정말 죽을 뻔했다. 피가 터져 나오는 곳을 지혈하며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너 이 자식! 감히……!”
다소 식상한 말을 하면서도 두려워서 꼼짝도 못 하는 꼴이 한심했다. 예전에 만났던 턱수염 일당들과 비교하면 조무래기만도 못하다. 갖고 있는 무기라곤 총과 보호석이 전부인데 그마저 총은 손에 쥐지도 못하고 바들바들 떨고 있는 모습이란.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
“아, 아이들이라니? 대체 뭔 소릴 하는지……!”
“말해 줄 마음이 없다면 굳이 시간을 벌 이유도 없네.”
말을 마친 이엘은 순식간에 남자의 오금을 발로 후려쳐 무릎을 꿇리고 그의 머리통을 밟아 눌렀다. 그와 동시에 검을 쥔 손을 뻗어 주변에 있던 일당들에게도 일격을 가했다. 변변치 않은 검 하나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그제야 멍청하게 당하던 남자들이 쥐고 있던 총을 들었지만 그보다 일라이저가 빨랐다.
탕―! 소음기를 달지 않은 총의 굉음에 공기가 거세게 흔들렸다. 공포탄이 아닌 실탄이었다.
“으, 으헉……!”
바로 코앞을 스쳐 지나간 총알에 간이 콩알만큼 작아진 푸른 머리 남자가 숨을 확 들이켰다. 저도 모르게 벌벌 떨며 손바닥으로 입을 막은 남자는 움찔거리다 뒤로 나자빠졌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일라이저가 저희를 향해 총을 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건지 모두 충격에 휩싸인 표정이었다.
용병도 아니고 기사도 아니다. 제국이 있던 시절에도 놀고먹는 것밖에 모르던 자들이었다. 손에 흙 한 번 묻혀 본 적 없이 귀하게 자란 ‘인간’이었다. 전쟁 이후론 쓸모 있는 존재로도 취급받지 않았기 때문에 목숨만 겨우 부지했다.
무기를 쥔 것도 겨우 몇 달이다. 그러니 보호석 몇 개를 주웠다고 마을을 이탈해 저희끼리 무리를 꾸린 것도 나쁜 결과만 가져올 수밖에.
“자, 잠깐! 이야기를 좀 하자, 일.”
이엘에게 무릎이 꿇린 채 밟혀 있던 남자가 손을 번쩍 들고 일라이저를 불러 세웠다. 지금은 거드름을 피울 때가 아니었다. 저가 알던 것과 딴판으로 달라진 일라이저의 눈동자에 흠칫 놀랐다. 거래 전에 우위를 점하려고 했었는데 수포로 돌아갔다.
“아, 아이들이 있는 곳을 안내하마. 어차피 우리가 여기서 죽으면 아이들은 뱀에게 죽는다!”
“같잖은 협박이네요.”
“과연 그럴까?”
“…….”
“너희가 떠나온 마을엔 누가 남았지?”
이엘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그녀의 안색이 파리해지자 일라이저가 걱정스럽게 이엘을 쳐다봤다. 남자가 엎어진 상태라 입 모양을 볼 수 없던 일라이저는 무슨 말이 오가는지 몰라 불안이 밀려왔다.
“지금 가도 늦을 텐데.”
비죽거리는 말투에 이엘이 남자를 밟고 있던 발을 뗐다. 마을에 장정 수는 적은 편이었지만 이종족에게 쉽게 무너질 정도로 약하진 않았다. 애초에 그걸 염려해 이엘과 일라이저만 추격에 나선 것이기도 했고. 아마 지금쯤이면 오드도 마을에 돌아갔을 테니 결계만으로 충분히 뱀을 쫓아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종족이, 그것도 뱀이 은신까지 하며 작정해 달려들면 막을 방도는 없다. 늑대들의 영지에서도, 독수리의 영지에서도. 그 온 전력으로도 예측하고 막기 어려웠던 게 그들의 습격이었다. 가진 게 없는 인간으로서는 뱀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가뜩이나 마을을 지켜보던 늑대들이 전부 철수한 상태였다. 만일 오드의 귀환이 조금이라도 늦어진다면…….
“우리를 다시 마을로 들어가게 해 줘.”
“뭐?”
“어차피 마을은 보호석도 없고 여러 가지로 손이 모자라잖나. 우리가 합세하면 나쁠 게 없을 텐데?”
“그보단 당신들이 합류하려는 이유가 납득이 안 가는데.”
“소문을 들었거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