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160화 (160/488)
  • 160화

    ― …….

    ― 괜찮아요?

    내가 생각보다 그분을 깊게 연모하였나. 쓴웃음을 삼켰다. 어차피 그분은 자신의 존재조차 모르셨을 텐데. 자신 역시 먼발치에서 몰래 훔쳐본 게 고작이다. 어린 마음에 그저 설레서. 아버지로부터 귀에 익히 듣던 그 귀한 분을 본 게 그저 설레서.

    하지만 황녀는 저를 모른다. 아, 어쩌면 정략혼이라는 이유로 얼굴도 모르는 저를 미워하고 계셨을지도. 억지로 맺어진 관계를 누가 좋아할까. 그 생각이 드니 이런 작은 마음조차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한편 이엘은 여전히 저를 뚫어져라 쳐다보기만 하는 일라이저를 걱정스레 보았다. 혹시 열이 다시 끓는 건 아닐까? 걱정이 앞서 손을 뻗어 그의 이마로 향할 때였다. 일라이저가 그녀의 손을 덮듯이 잡아 세웠다.

    “묻고 싶어요.”

    “네?”

    “황족……이십니까?”

    그는 루시우스 러셀의 아들일지도 모른다. 이엘은 섣불리 답하지 않고 가만히 그를 쳐다보았다. 어차피 이 계획의 끄트머리엔 모든 걸 털어놓는 제 모습이 그려져 있다. 숨겨 봤자 오래갈 일도 아니었고.

    다만 두려워서.

    루시우스가 저를 지켜 주다가 죽었다는 걸 그 아들이 알게 된다면……. 비겁한 두려움이 밀려왔다. 정말 그가 루시우스의 아들이라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불쑥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르네가 자신을 볼 때 이런 마음이었을까, 하는.

    “말씀해 주세요.”

    나는 왜 당신이 그분으로 보이는 걸까. 황족이라면 차라리 황자인 편이 당신껜 나을 텐데. 만일 당신이 그분이라면……. 이 얼마나 끔찍한 세상일까. 그걸 알면서도 마음속에선 그분이길 바라는 제 모습에 구역질이 났다. 심하게 요동치는 일라이저의 눈동자가 그녀를 오롯이 담았다.

    “그걸 왜 물어보나요?”

    또박또박 말하는 그녀의 입술을 가만히 바라보던 일라이저가 잡고 있던 이엘의 손을 놔 주었다. 맑은 눈동자엔 거짓이 없었다. 오랜 시간 듣지 않고 살다 보면 다른 것에 더 예민해지기 마련이다. 일라이저는 눈빛만 봐도 상대가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수 있다.

    ― 만일 그렇다면 당신이 제 주인이 되니까요.

    이어진 침묵 끝에 일라이저가 다시 이엘의 손을 잡고 상처가 생긴 그 손등 위에 이마를 붙였다가 뗐다.

    ― 러셀 후작가의 일라이저 루시우스 러셀입니다.

    ― …….

    ― 전하, 당신을 기다렸습니다.

    황자이든, 황녀이든 관계없이. 황족이라면 그가 모든 걸 바쳐야 하는 존재임에 틀림없다. 어쩌면 자신은 이 사람을 만나기 위해 살아남았던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밀려왔다.

    ― 제국은 무너졌습니다. 이렇게 예를 차릴 필요 없습니다.

    ― 당신께서 황위에 오르신다면.

    ― …….

    ― 저는 기꺼이 함께할 겁니다.

    한 번도 기사 서임식을 본 적은 없지만, 이 무거운 다짐과 경건한 충성은 책 너머로 보았던 그 그림을 떠올리게 했다.

    ― 재건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전하. 무너진 게 아닙니다.

    인간들의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제국이 있던 시절에도 이종족에 비해 숫자가 적었기 때문에, 똑같이 전쟁을 겪었어도 피해를 비교하는 것조차 너무 참담한 수준이 되어 버렸다. 그들을 보호해 주던 보호석, 황실, 연구실. 그 모든 게 사라졌으니 인간들은 이종족을 상대로 내세울 만한 게 죄 없어진 셈이었다.

    그래서 전쟁 직후의 인간들은 제국을 재건할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생전 처음 느껴 보는 공포와 무력감에 질려, 제 앞길 생각하기에 급급했던 것이다. 애당초 무리를 짓거나 동족 의식을 갖고 있는 이종족과 사고가 달랐다. 인간은 철저하게 개인주의적이었고 같은 인간끼리도 차별을 두는 혈통주의를 타고났다.

    그러니 갑작스런 전쟁에 무방비했고, 무력하게 몰락할 수밖에 없었다. 무리를 추스르고 복수할 기회를 엿보며 인내하던 이종족과는 상이했다.

    ― 당신이 황위에 오르신다면 인간들은 당신과 뜻을 함께할 겁니다, 전하.

    결국 그 지긋지긋한 혈통주의가 그녀를 황위에 올릴 것이다. 이엘이 서둘러 나서게 된 것 또한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인간들은 머리를 굴리기 시작할 것이고, 턱수염 일당과 같은 자들이 하나둘 나타나 황위를 노리겠지. 어차피 황족이 아닌 이상 모두가 똑같다. 갖고 있는 힘의 크기만 다를 뿐이다.

    그러니 그 전에 인간들의 다급하고 절박한 심리를 이용해야 한다. 지금의 상황을 타개할 수만 있다면. 풍요로웠던 이전의 제국을 되찾는 것까진 바라지 않는다. 단지 지금 자신의 상황만 더 나아질 수 있다면. 다시 인간이 왕이 되는 세상이 돌아오기만 한다면……. 그 작은 생각이 미련으로 남아 있는 지금이야말로 적기였다.

    유일한 황족의 씨앗이라면, 그들은 마땅히 이엘을 왕의 재목으로 거론할 것이다. 너무도 단순하고 이기적인 마음 하나로.

    ― 분명 깊게 숙고한다고 하지 않았나요?

    ― 전하. 당신이 살아 계신데 제가 어찌 더 생각하겠습니까.

    과연 러셀 가문의 핏줄답다. 황실에 절대적인 충성을 하는 정통 기사 가문답게 그녀를 바라보는 일라이저의 눈빛부터 달라졌다.

    맹목적인 충성임에도 크게 놀라지 않았다. 그럴 줄 알았으니까. 오드의 성력으로 눈동자와 머리카락 색을 잠깐이라도 가릴 수 있음에도 부러 가리지 않았던 건, 어쩌면 은연중에 이러한 결과를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일라이저를 가만히 바라보던 이엘이 그를 향해 제 손등을 내밀었다. 그러곤 남자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나지막하게, 그리고 또렷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말이 쉬워지겠구나.”

    “…….”

    “그대 가문의 뜻대로 따르라.”

    일라이저가 그 말에 순종하듯 눈을 감았다가 뜨며 그녀가 내민 손등 위에 입술을 묻었다. 그리고 원래대로라면 반지가 있었어야 할 손가락에 그의 입술이 깊게 닿았다. 일라이저의 가슴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복수밖에 남지 않았던 삶에 작은 빛줄기가 스며드는 기분이었다.

    *

    밀려드는 역한 악취에 일라이저는 천으로 이엘의 코를 가려 주었다. 엉망이었다. 난도질이라도 당한 듯 뱀의 사체가 지저분하게 조각조각 찢어져 있었다. 일라이저는 그녀를 뒤로 두고 허리를 숙여 사체를 뒤적거렸다. 테르뿐만 아니라 둔도 있었던 모양이다. 제법 크기가 크고 만만치 않았을 텐데도 이 많은 수의 뱀이 당했다.

    ― 늑대가 한바탕한 것 같습니다.

    혹 끄나풀이 도망쳐 로빈에게 고하지 않도록, 늑대는 철저하게 도륙해 놓았다. 이엘은 물끄러미 뱀의 사체를 내려보다가 걸음을 돌렸다. 지금은 이런 데서 시간을 허비할 때가 아니다.

    늑대들은 이엘에게 뱀의 사체로 방향을 일러 주고 있었다. 아마 이 산 꼭대기쯤에 인간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 전하. 위험하니 저 혼자 다녀오겠습니다.

    ― 그대 혼자 가서 어쩌려고?

    ― …….

    ― 일. 그대는 인간들에게 총을 쏠 수 있나?

    그는 인간에게 무른 사람이다. 처음 만났을 때, 그저 위협 용도로 공포탄만 쏠 때부터 알아봤지만 같이 지내보니 지나칠 정도로 인간들에게 약하다는 걸 알게 됐다. 아마 일라이저는 인간들로 인해 자신의 신변에 문제가 생긴다고 해도 그들을 용서해 줄지 모른다.

    인간에 한해서는 바보 같을 정도로 천진해서. 그 부분은 제 아비보다 더 순수하다.

    그러면서도 이종족을 향한 극도의 혐오감은 그 누구보다 격렬했다. 이런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감정의 배분이 엉망이 된 그가 안쓰러웠다. 전쟁은 모든 존재들에게 독을 안기고 무책임하게 떠났다.

    ― 전하께서 처리하라고 하신다면……,

    ― 됐다. 나 역시 죽인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대충 손으로 그의 말을 끊고 앞서 걸었다. 일라이저는 자신이 황족인 걸 알고 난 뒤로 위험한 상황에서 제하려 했다. 어렴풋하게 느끼고 있었으면서도 확증이 없어 여기까지 자신을 데리고 온 것에 후회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고개를 저어 부정했다.

    ― 내 손으로 하고자 하는 걸, 그대가 막을 의무는 없다.

    ― 명심하겠습니다.

    주저하는 모습까지 루스 경을 닮았구나. 이엘은 저도 모르게 입술 끝을 올려 웃고 말았다.

    그 시절에 좋아하고 존경하던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비록 황명을 따라 자신이 아닌 이온을 택했지만 종내에는 제게 돌아온 소중한 스승. 제국의 제일 검이니 뭐니 하는 수식어는 그녀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편견 없이, 차별 없이 자신과 이온을 대하던 스승일 뿐.

    그러니 조금 걱정이 되는 것이다. 훗날 마주하게 될 일라이저와 르네 때문에. 이엘과 같은 길을 걷게 된 이상, 두 사람의 만남은 필연적이다.

    르네가 루시우스를 그저 제 앞을 가로막았던 기사 하나쯤으로 생각한다면, 그래서 그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일라이저를 앞에 두고도 그의 아들임을 알아채지 못할 것이다. 혹은 일라이저가 이종족을 향한 원한을 감내한다면. 그래서 복수 따위 삼켜 낸다면……. 우려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

    하지만 두 가능성 모두 괴로움을 동반하는 건 확실하다. 르네가 모른다고 한들, 이엘은 제 스승의 목숨이 누구에게 쥐여 있었는지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스승의 목숨이 바스라진 건 전부 제 탓이었다. 알고도 모른 척할 순 없다. 그건 신념을 떠나, 저를 위해 죽은 자에 대한 도의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더 먼 곳을 봐야 한다면……. 나만 입 다물면 모를 텐데. 그 생각이 밀려오니 숨이 턱 막혔다. 대의를 위해 진실을 모른 척하는 게 과연 맞는 일일까? 그게 아니라 용서하라 명한다 해도 일라이저는 분명 충성으로 따를 텐데.

    아니. 사실은 그게 전부가 아냐.

    이엘은 어느 순간부터 불안한 추측을 떠안고 있었다. 어쩌면…… 르네의 누이가 사랑했다던 인간 남자가 루시우스 러셀이 아닐까 하는. 물론 그의 입을 통해 나왔던 단서만으로는 단정할 수 없었지만, 계속해서 희미한 그녀의 기억이 불안함을 가져오고 있었다.

    ‘기어이 너와 마주하게 되는구나, 러셀.’

    제 목숨이 위태로웠던 그 밤, 그녀의 앞을 가로막은 루시우스를 향해 르네는 싸늘한 시선을 보냈다. 그 뒤로는 기억이 흐릿해서 확신하진 못한다. 하지만 직감이 자꾸만 루시우스와 르네를 가리켜서…….

    그게 사실이라면. 일라이저뿐만 아니라 르네에게도 강요하는 꼴이 된다. 그들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희생은 나 하나면 족하지 않나. 입술을 깨물었다.

    ― 일. 내가 늑대와 뜻을 함께하고 있다는 것, 알고 있겠지.

    ― 네, 전하. 알고 있습니다.

    ― 그대가 이종족을 싫어한다는 걸 나 역시 알고 있다.

    그녀의 말에 일라이저는 침묵했다. 황자께서 우려하시는 게 무엇인지 알 듯해서.

    ― 나는 작은 일 하나를 이루고자 제국을 재건하는 게 아냐.

    ― …….

    ― 그렇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누군가는 희생을 해야 할지 모른다.

    알고 있다. 처음 이엘을 만났을 때도, 그리고 다시 늑대의 소굴에서 재회했을 때도. 또 그녀가 오드와 함께 저가 사는 마을에 찾아왔을 때에도. 언제나 이엘은 이종족과 함께였다. 황족이면서, 이종족의 손에 모든 걸 잃어버린 황족이면서. 어쩌면 자신보다 원한이 더 깊을 텐데도.

    ― 그게 그대일 수도.

    ― …….

    ― 혹은 나일 수도 있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