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
“정말 괜찮겠어?”
“네. 지금은 스완과 같으니까요.”
분명 그날 제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는데도 노아는 여전히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 보듯 이엘을 쳐다보았다. 어릴 때 물을 무서워했던 제 경험상, 수영을 못하면 물에 들어가는 게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잘 알고 있다. 그의 걱정 어린 얼굴에도 이엘은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 보였다.
“목숨을 건 계약이었으니 이 정도 장점은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그녀의 말에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마지못해 수긍했다.
릴프 강에 도착한 1기사단은 안개가 피어나길 기다리며 기슭 쪽에서 매복 중이었다. 2기사단과 앤디는 지금쯤 독수리들을 타고 먼저 세잔티노에 도착해 있을 것이다. 원래 계획대로 독수리와 함께 이엘이 먼저 피시를 만나는 게 좋았을 테지만…….
“내 반쪽. 내 옆에서 절대 떨어지면 안 돼. 알았어?”
“걱정 마. 너야말로 한눈팔지 말고 늑대들 사이에 잘 숨어 있어.”
“걱정도 팔자야.”
스완이 결 좋은 머리카락을 손에 돌돌 감으며 이엘을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늑대의 영지에 온 이래로 꽤 예민하더니, 물가로 나오니 다시 기분이 좋아진 모양이다. 스완은 제 곁으로 이엘을 끌어당기며 종알종알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이엘은 시큰둥한 얼굴로 들어 주다가도 손을 뻗어 흐트러진 그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는 등, 꽤 가벼운 터치가 오고 갔다.
“내 반쪽. 너도 다치지 않게 늑대 놈들한테 잘 숨겨 달라고 해. 응? 알았지?”
“그렇게 걱정 안 해도 절대 안 죽을 테니까, 나 말고 네 몸이나 조심해.”
“내 반쪽. 난 정말 네가 없으면 안 돼. 너 죽으면 나도 끝이라고.”
“누가 들으면 꽤 오해할 만한 내용인 건 너도 알지, 스완?”
이엘이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내저었지만 스완은 뭐가 그렇게 좋은 건지 그 예쁜 얼굴로 방싯방싯 웃음을 터뜨렸다. 멀리서 지켜보던 노아는 인상을 쓰며 스완을 탐탁지 않게 쳐다보고 있었다. 저게 물가로 오니 미쳤나. 수작 부리는 꼴이 못마땅해 한 소리 하려던 차였다.
“노아 님.”
“……어.”
스완을 뒤로하고 그녀가 제게 날아오듯 다가왔다. 노아는 좀생이 같은 제 마음이 괜히 머쓱해 관자놀이를 긁적거리며 헛기침을 했다.
“죄송해요. 스완 때문에.”
“아, 피시 말인가?”
고개를 끄덕인 이엘은 짧게 한숨을 쉬며 스완을 힐끗 쳐다보았다. 원래 계획대로였다면 이엘은 독수리와 함께 먼저 릴프 강을 지나쳐 기슭에서 피시를 만났어야 했다. 그러나 그녀가 없으면 안 된다는 스완의 고집에 발이 묶여, 그들은 먼저 보내고 이렇게 후발대로 남아 강을 건너게 된 것이다.
자신 없이 먼저 떠난 2기사단과 독수리들이 걱정이었다. 경계가 심한 피시가 과연 마찰을 일으키지 않고 그들을 받아들일지……. 이번 출입을 허가한 건 전적으로 자신이 가겠다고 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으니까.
“네. 괜찮겠죠? 왕자님이 예민하셔서 걱정이에요.”
그 예민하신 왕자님이 누구 앞에만 서면 얌전해진다니. 노아는 입을 다물며 이엘을 가만히 내려보았다. 하이에나도 그렇고 백조도 그렇고, 다루기 힘든 것들이 그녀의 손에선 참 쉽게 움직인다.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진지하게 고민에 빠진 이엘이 고개를 올려 노아와 시선을 마주했다.
“여러모로 계획에서 어긋난 게 많네요. 죄송해요, 폐하.”
“그런 말 하지 말라니까. 네 잘못이 아니고 저놈 때문이잖아.”
“그러니까요. 그게 제 잘못이죠, 뭐.”
작은 웃음을 흘리며 그녀의 다정한 시선이 스완에게로 향했다. 밀로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철이 없어 보이는 저 어린 백조를 연신 걱정스레 쳐다보다가 그녀가 먼저 노아의 로브 자락 끝을 툭툭 털어 매만져 주었다.
“마음에 안 드시겠지만, 스완을 부탁드려요.”
“걱정 마. 공과 사는 구분하니까.”
“다행이네요.”
“넌 괜찮겠어? 무리하는 건 아니지?”
“네. 저는 지금 무척 즐거운걸요.”
“…….”
“부디 다치지 마세요, 폐하.”
즐겁다는 사람 표정이 저래도 되는 건가. 그녀의 대답이 못마땅해, 노아는 미간을 찌푸리고 한숨을 쉬었다.
이엘은 노아의 한숨을 못 들은 척하며 다시 스완에게 향했다.
이엘의 말처럼 시간이 더 지나자 물결 위에 찾아든 안개가 자욱해지기 시작했다. 물가에 들어가 가만히 강 저편을 응시하던 오드가 고개를 끄덕이곤 곁에 있던 우논의 등에 올라탔다. 그것을 신호로 늑대들은 일제히 강으로 조용히 뛰어들었다.
버려진 땅이라더니 이 근방 역시 버려진 건가. 지나칠 정도로 조용한 릴프 강은 마치 늑대무리를 알아서 피하는 것처럼 작은 파동조차 일지 않았다. 오드가 탄 우논이 선두로 건너기 시작했고 그 뒤를 따라 늑대들이 촘촘하게 무리를 지어 건넜다. 릴프 강은 큰 편이 아니라 건너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건너편 기슭에 내린 이엘은 늑대들이 물기를 털어 내는 동안 노아와 함께 먼저 세잔티노 땅을 밟았다. 황폐한 터. 메마른 땅. 과연 과거에 부귀영화를 누리던 그 도시가 맞는지 의심이 될 정도였다. 전쟁을 겪은 땅이 으레 그렇긴 하다마는, 세잔티노는 그 정도가 과했다.
“하이에나의 원한을 제대로 샀군요.”
“제도로 가겠다는 그들과 타협한 게 세잔티노였으니까.”
원망이 어찌 세잔티노만이었겠는가. 그들의 가장 큰 적은 황족이었을 것이다.
하이에나는 1차 전쟁 이후 무리의 리더를 잃고 뿔뿔이 흩어졌다가 2차 전쟁 때쯤 힘을 모았다. 원래 합이 좋았던 종족이나 중심이 사라졌으니 하나가 되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 이 때문에 다른 이종족들은 하이에나의 합류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사위 분간 못 하고 엉망으로 만들어 버릴까 걱정이 되었으니까. 그래서 합의를 보았던 게 세잔티노였는데.
“뱀과 연합해 제도까지 올라와 모조리 죽였을 줄은 아무도 몰랐지만.”
약속을 어기고 세잔티노를 몰살시킨 뒤 제도로 향한 하이에나는 인간 학살에 가장 큰 일조를 했다. 그때부터 그들은 타 종족과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엘은 황무지가 된 땅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1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는데도 풀 한 포기 나지 않을 정도로 짓밟힌 땅이 가여웠다. 죄는 인간이 지었는데 죗값은 되레 땅이 받고 있는 셈이구나. 흙 한 줌에도 하이에나의 분노가 느껴졌다.
“오헬?”
낯선 냄새에 노아가 반응하기도 전에 누군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몹시 불안한 어조였으나 반가운 기색이 실려 있었다. 이엘은 땅을 바라보던 시선을 소리 나는 쪽으로 돌렸다. 저 멀리 서 있던 소년이 그녀와 눈을 마주치자 활짝 웃고 있었다.
“오헬!”
소년이 달려와 그녀를 품에 와락 끌어안았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노아도, 이엘도 밀쳐 내지 못했다. 피시는 이엘의 목덜미에 코를 박고 마치 생사를 확인하는 것처럼 그녀의 향을 맘껏 취했다. 오헬……. 그의 웅얼거리는 목소리에 이엘은 뿌리치지 못하고 엉거주춤 끌려 안겨 버렸다.
“오셨습니까, 폐하.”
“어. 수고했다, 앤디.”
“아닙니다. 뭐, 하이에나 왕자님께서 잘 계셔 준 덕분에.”
못마땅한 기색을 내비치며 앤디의 매서운 눈초리가 피시에게 붙었다. 저건 왜 남의 동생을 끌어안고 난리야? 짜증 나게. 혀를 차며 피시를 위아래로 훑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피시는 다른 늑대 따위 안중에도 없었다. 그는 그토록 보고 싶었던 단 하나의 인간에게만 집중했다.
“보고 싶었어.”
“전하. 오랜만이에요.”
“뱀들이 공격했다는 말 들었어. 다친 데는 없어? 그러니까 나의 영지로 오라고 했잖아. 거긴 위험해.”
“괜찮아요. 다 지난 일입니다.”
“넌 내가 보고 싶지 않았어?”
“보고 싶었어요. 잘 계셨나요, 피시 님?”
그녀의 입에서 제 이름이 나오자 피시의 맑은 눈동자에 더할 나위 없는 부드러움이 퍼져 나갔다. 그는 안경을 고쳐 올리며 순하게 웃어 보였다. 그녀가 자신에게 도움을 청했다. 내 도움이 필요하다 말했어. 그렇다면 기꺼이 그 손을 잡아 주어야지. 피시는 그 생각으로 몇 날 며칠을 손꼽아 기다렸다.
앤디와 함께 먼저 도착해 있던 르네는 전에 없이 딱딱한 얼굴로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소문으로 들었던 그 미치광이 왕자가 맞는지 의심이 될 정도로, 피시는 이상할 게 없어 보였다. 물론 그들이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땐 이렇지 않았지만.
‘오헬은……?’
‘강을 통해 올 겁니다, 왕자님.’
‘강을 건넌다고? 위험하게 강을 건너게 하면 어쩌자는 거야?!’
‘진정하십시오, 왕자님. 노아 님이 계시니……,’
‘아, 안 돼……. 릴프 강이 먹어 버릴 거야. 아― 내 소중한 것을 다 삼켜 버릴 거라고…….’
그는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제 귀를 틀어막고 주저앉았다. 그의 주변에 자잘한 흙먼지가 조금씩 부유하기 시작했다. 미치광이 왕자는 제 능력을 제어할 마음 따위 없어 보였다. 2기사단과 독수리들은 아군도, 적군도 아닌 저 미치광이 왕자에게서 혹시나 봉변이라도 당할까 서로 눈치 보기 바빴다.
피시는 작게 웅얼거리던 것을 멈췄다. 그러더니 곧 짜증이 난 목소리로 잔뜩 성화를 부리다가 다시 초조하게 그 자리를 맴돌기 시작했다. 그는 여러 가지로 몹시 불안정해 보였다.
르네는 차라리 교활하긴 해도 패티스 쪽이 더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왜 이 왕자를 불러들였는지 그때까지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을 보니.
“오헬. 기다렸어. 네가 오기만을.”
“저도 다시 건강하게 뵙게 되어 좋네요, 전하.”
“세잔티노를 지나치면 바로 우리 영지야. 일이 끝나는 대로 잠깐이라도 들러. 응?”
“글쎄요. 일이 어떻게 될지 잘 모르니까요.”
“오헬. 손이 많이 차가워.”
저걸 두고 지극정성이라고 해야 하는 건가. 이제 하이에나 왕자는 신분도 잊고 호들갑을 떨며 이엘의 차가운 손을 제 입김으로 녹이고 있었다. 르네는 헛웃음을 지으며 시선을 돌리다 노아와 눈이 마주쳤다. 그 역시 자신과 비슷한 표정이었다. 못마땅하지만 뭐라 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 하이에나의 협조를 구해야 하는 처지여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다.
“그리고 형도 데려왔어.”
“형이라면……,”
“하트. 인사해.”
둘째 왕자가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일전에 영지에 방문했을 때도 말이 없던 왕자였다. 하트는 노아를 향해 고개만 꾸벅 숙일 뿐 오늘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이엘은 표정 하나 없는 남자를 힐끔 쳐다보다가 서둘러 계획을 이야기했다.
“이미 보호석은 해제되었어요. 남자가 물건을 들고 본거지로 들어간 모양이에요.”
“그래. 저 아래 모여 있는 게 눈에 잘 보이는군.”
“발동 중이었던 보호석은 오드의 결계로 모두 파악했습니다. 오드가 적어 준 위치로 이동해 늑대들은 그 보호석을 제거하고, 독수리들은 위치 파악이 안 된 보호석들을 찾아 주세요. 저와 스완은 턱수염을 만나러 가겠습니다.”
“둘이서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