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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112화 (112/488)

112화

“독수리?”

“네. 제가 그 남자에게 준 물건에 보호석의 기능을 일시적으로 해제시키는 결계를 걸어 뒀어요. 물건이 근방에 가면 보호석의 기능이 사라질 겁니다. 즉, 독수리의 투시 능력이 가능해지는 거죠. 땅 아래 숨겨진 본거지를 찾아낼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그 물건은 도착한 이래로 계속 여기에 머물러 있다며.”

앤디가 조금 전 X 표시를 해 두었던 곳을 손으로 가리켰다. 남자가 개인적으로 머무는 주거지로 예상한 곳이었다. 이엘은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정찰병에 따르면 남자가 다른 곳으로 오갈 때도 물건은 거기 있었어요. 놔두고 다녔으니까요.”

“그럼 소용없잖아.”

“아닙니다. 곧 물건을 들고 다닐 수밖에 없을 거예요.”

“왜지?”

“그 물건은 턱수염과 그 일당들에게 꽤 중요한 거거든요.”

대체 그 물건이란 게 뭔지 모르겠다. 알려 달라고 말해도 노아는 궁금해하지 말라며 일축할 뿐이었고. 얼마나 대단한 물건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지금으로선 그 물건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 남자는 의심과 불신으로 점철되어 있어요. 놓고 다니는 것도 곧 불안하게 되겠죠. 자신이 아니면 믿을 수 없는 게 인간이니까요.”

“…….”

“처음이야 턱수염의 눈을 피해 숨겨 놨다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두고 다니는 게 더 불안해질 거예요. 곧 물건의 위치가 움직일 겁니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습격해야 돼요.”

“좋아. 보호석을 해제했다고 치자. 그걸 박살 내려면 찾아야 하잖아. 몇 개가 있는지도 모르는데 그걸 무슨 수로 찾아?”

“해제뿐만 아니라 탐지할 수 있는 결계식도 혼합하여 탑재했어요. 보호석은 각각 동일한 양의 결계식이 걸려 있습니다. 즉, 보호석이 작동하는 수만큼 증가되어 탐지될 테니 개수를 알아내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다만.”

문제는 다른 것에 있었다. 보호석은 무조건적으로 작동되는 게 아니라 비활성 모드로 설정이 가능하기 때문에 숨겨져 있는 것의 개수는 찾아낼 수 없다. 작동하지 않는 것의 개수까지는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다.

“비활성 모드로 설정되어 있는 보호석의 개수까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 부분은 르네 님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어요. 오드의 도움을 받으면 좋겠지만, 말씀드렸듯이 물체에 건 결계가 발동하는 동안은 새로운 성력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에겐 인식계가 없으니 독수리의 눈을 믿어야 합니다. 그들이 다 찾아내기를 바라야죠.”

“폐하. 너무 무리한 잠입이 아닐까요. 걱정됩니다.”

“맞습니다. 비활성 모드의 보호석 개수를 파악하지 못하면 소용없어요. 독수리가 다 찾아낼 거란 보장을 못 하잖습니까!”

“하지만 보호석이 있다며. 그걸 막을 수 있는 기회는 지금뿐이잖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일부라도 파괴하느냐, 안 하느냐의 차이야.”

우논들끼리도 의견이 분분했다. 확실히 막연한 작전인 것은 맞지만 지금만큼 적절한 시기도 없었다. 그때 노아가 들고 있던 서류를 테이블 위에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웅성거리던 소리가 줄어들고 모두의 시선이 왕에게 향했다.

“이전에 오헬이 했던 말. 기억 안 나?”

“…….”

“합이 중요하다. 출발도 전에 이렇게 의견이 안 맞으면 되겠어?”

“하지만 폐하. 정말 보호석이 있는 겁니까? 아직 확실치 않은데 너무 무리하는 건 아닌지 걱정됩니다.”

“맞습니다, 폐하. 보호석이 있었다면 영지 습격 때 무장하고 돌입했겠죠. 분명 바다에 저희가 버렸던 걸로……,”

“그럼 이건 어떤가요.”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이엘이 테이블 위에 동그란 돌을 하나 올려 두었다. 불투명한 보석이 데록데록 굴러다니다가 노아의 앞에 우뚝 멈춰 섰다. 그는 돌을 손가락으로 잡아 올렸다.

<1121-22258-133359>

보호석의 코드였다.

“1121. 과거 공작 가문이었던 시탄 공작가의 것입니다.”

“대체 넌 저걸 어디에서 가져왔지?”

“바다에서요.”

“뭐?”

“정확히 바다는 아니에요. 바다로 흘러가는 호수 어귀에서 발견했습니다.”

그녀의 예상이 맞았다. 바다는 이물질을 계속해서 뱉어 내고 있었다. 어디에, 얼마나 뱉어 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로써 보호석의 존재만큼은 확실해졌다.

“몇 년 전부터 저런 게 바다 위에서 떠올라 우리 쪽으로도 흘러들어 왔어.”

그것도 내가 가져온 거야. 스완이 팔짱을 낀 채 보호석을 흉물스럽다는 듯이 쳐다봤다. 백조들이 사는 호수는 바다와 잇닿은 곳이었는데, 가끔 장마가 올 때면 바다로부터 이물질들이 호수로 쏟아져 들어왔다. 백조들은 그 이물질을 일일이 수거해 뭍으로 내던지곤 했는데 그 안에 보호석이 섞여 있었다.

“스완의 말에 의하면 최근 들어 인간들이 호수 근처에 자주 오갔다고 했어요. 물론 백조들이 환각으로 모두 내쫓긴 했지만요. 다만 바다와 연결된 곳이 그 호수만이 아니란 게 문제입니다. 분명해요. 보호석은 인간들의 손에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럼 몇 개인지도 모르는 보호석을 일일이 수거해야 한다는 거야?”

“안타깝게도 지금으로서는요.”

“폐하. 독수리들의 지원 요청을 서두르시는 게 좋겠습니다.”

“연락을 보냈어. 곧 답이 올 거다.”

마지막이 썩 좋지는 않았지만 르네는 분명 한달음에 날아올 것이다. 보호석의 존재가 알려지는 순간, 3차 전쟁은 상상에서 그치지 않을 테니까. 아마도 르네는 그 전쟁이 발발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겠지. 노아 자신처럼.

죽기를 바라던 독수리가 어떤 상황 이후로 제대로 된 삶을 살기 시작했다. 그러니 르네는 이 작전에 절대적으로 동의할 것이다.

술렁거리는 늑대들을 힐끔 보며 이엘은 오드의 성력으로 구현된 지도 위로 시선을 던졌다. 어제저녁, 아주 잠깐이지만 반지의 위치가 머물던 공간을 벗어났다가 다시 돌아왔다. 슬슬 불안해진 남자가 반지를 갖고 움직이기 시작한 모양이지.

그녀는 반지가 물어 올 분란을 기대했다. 결속이 집단을 만든다면 그 결속부터 무너뜨리면 될 일이었다. 남자는 자신의 보스인 턱수염을 못마땅하게 여겼고 권력에 욕심이 많아 보였다. 그런 자에게 황자의 반지를 주었으니 이제 슬슬 반역을 꿈꿀 때가 되었을 터.

이온의 반지가 그렇게 쓰이는 건 씁쓸했지만, 유명무실한 반지가 그렇게라도 이득을 주길 기대했다.

“폐하, 정찰병이 왔습니다.”

“들어와.”

때마침 이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인간 무리의 뒤를 추적하던 정찰병들이 속속 돌아왔다. 개중 하나가 노아에게 인사를 마치고 이엘에게 지도를 건네주었다. 이엘은 자신이 표시했던 지도와 우논이 가져온 지도를 비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여기예요. 세잔티노.”

“세잔티노라면…….”

“변경으로 가기 위해 거쳐야 하는 지역입니다.”

“…….”

“하이에나들에게도 말씀하실 건가요?”

하필 두 곳 중 하나가 세잔티노라니. 전쟁으로 폐허가 된 도시 세잔티노는 과거 하이에나들로부터 약탈을 일삼던 무역도시였다. 정확히는 무역을 가장한 약탈도시라고 표현하는 게 맞겠지만.

하이에나들의 영지가 부유하고 아름답다는 건 제국민들 누구나 인정하는 바였다. 그러나 그 땅은 바다가 바로 맞닿은 땅끝 지방이었다. 즉, 목숨을 걸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곳.

그래서 인간들은 하이에나의 영지와 제도 사이에 위치한 세잔티노를 개발해 하이에나들로부터 온갖 것을 수탈해 빼돌렸다. 바다로부터의 위험은 하이에나가 해결하고 그 이득은 인간들이 죄 취한 것이다.

“하이에나와 손을 잡았으니 협조를 요청하면 그들도 기꺼이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세잔티노는 하이에나의 분노로 짓밟힌 땅이니 괜히 그들의 화만 돋울까 염려됩니다, 폐하.”

안드로의 말이 맞다. 그 땅이 풀 한 포기 살지 못할 정도로 짓밟힌 것은 전부 하이에나의 보복 때문이 아니던가. 세잔티노 땅 아래 인간들의 본거지가 숨어 있다고 한다면 그 미치광이 왕자들이 어떻게 나올지 불 보듯 뻔했다. 골치가 아파진 노아는 짧은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그 땅은 하이에나의 영지와 맞닿아 있습니다. 말도 없이 오간다면 후에 뒤탈이 나지 않을까요?”

앤디의 말도 맞다. 여러모로 신경 쓰이는군. 노아가 혀를 차더니 시선을 그녀에게 돌렸다. 이엘은 가만히 노아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하이에나 전부가 아닌 일부만을 불러들이시면 됩니다, 폐하.”

“일부라면…… 너 설마…….”

“셋째 왕자님만 부르십시오. 왕족이니 그분의 허가만 있어도 뒤탈은 없을 거예요.”

“그 미치광이 왕자를?!”

다른 우논들이 고함을 지르며 반발했다. 하지만 노아는 영리한 그녀의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그 땅이 지금은 버려진 땅이고 살고 있는 존재가 없다고는 해도, 그들 사이에 세잔티노의 주인이 하이에나라는 것쯤은 공공연한 사실이었으니까. 확실히 말도 없이 쳐들어갔다간 그 지독한 패티스 놈의 덫에 걸릴지도 모를 일이다.

“왜 하필 그 미치광이 왕자를 부르자는 거야? 그 왕자가 또 무슨 꿍꿍이를 갖고 너한테 접근할 줄 알고.”

앤디가 발 벗고 나서며 크게 반대했다. 그때 봤던 그 왕자의 집요한 눈동자가 아직도 뇌리에 남아 있다. 그놈이 제 동생을 혹 데리고 갈까, 솔직히 이번 하이에나의 방문 때도 노아만큼이나 염려했던 게 자신이었다.

“저를 믿어 주세요. 다른 두 왕자님보다 피시 님께 허락을 구하는 편이 더 쉬울 거예요.”

지금은 이해타산을 따지는 게 중요하다. 앤디의 말대로 그 미치광이 왕자가 무슨 꿍꿍이를 꾸며 접근할지는 모르겠지만, 이엘은 그걸 이용할 수 있다면 이용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피시가 제게 극단적인 호감을 갖고 있다는 건 확실하니까.

결국…… 이용이란 단어를 쓰게 되는구나. 자신 역시 이기적인 인간임을 절감하며 이엘이 쓴웃음을 삼켰다. 제게 선의의 호감을 갖고 있는 상대를 향해 이런 계획을 짜는 게 못내 괴로웠지만, 큰 이익을 위해서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노아로부터 받은 피시의 편지엔 절절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어떻게든 만나고 싶은데, 이엘이 직접 보러 와 주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는 식의 글만 한가득했다. 들리는 소문으로만 판단하면 당장이라도 영지로 쳐들어와 납치를 하고도 남을 텐데도, 그는 얌전히 기다리는 쪽을 택했다. 그러니 그녀의 부탁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줄 것이다.

“그분의 허락만 구하면 탈은 없을 테니, 그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이엘의 말에 노아도 고민에 빠졌다. 하이에나 전부를 끌어들이기엔 그들과 완벽한 신뢰 관계가 구축되지 않아 온전히 믿을 수 없었고, 그렇다고 무작정 습격하기엔 세잔티노의 소유권이 문제였다. 화친을 맺은 지 얼마나 됐다고 말도 없이 서로의 영지를 넘나들다니. 이거야말로 무례하기 짝이 없는 행위이다.

결국 노아는 이엘의 말을 듣는 것으로 회의를 끝냈다. 아직도 반발하는 자들이 몇몇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녀의 말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무리의 중심이 그녀임을, 모두가 인정하고 말았으니까.

그리고 마침내 결전의 날이 돌아왔다. 르네와 일부 우논이 늑대들의 영지에 찾아왔고, 피시로부터 허락의 편지도 도착했다. 그리고 바로 어제부터 반지의 위치가 세잔티노로 흘러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발동 중인 보호석은 총 네 개입니다. 각각 세잔티노의 동서남북에 하나씩 고정되어 있는 것으로 추측 중이에요. 자세한 건 직접 봐야겠지만.”

“좋다. 나머지는 우리에게 맡겨라.”

오랜만에 보는 르네가 그 말을 마치며 이엘의 옆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열심히 첨언하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니, 그 먼 시간 동안 비행한 피로가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참 우스운 일이다.

“세잔티노 근처엔 피시 님이 계실 거예요. 그분은 제게 맡기고 다른 분들은 일절 관여하시면 안 됩니다.”

워낙 경계가 심한 소년이니 부러 마찰을 일으킬 필요는 없다 생각한다. 우논들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지만 앤디만은 여전히 불만이었다. 노아는 그런 앤디의 등을 툭툭 쳐 주고는 기사단의 정비를 준비했다.

“3기사단은 영지에 남아 원정 떠난 것을 다른 종족이 모르게 잘 지켜라. 우리는 릴프 강에서 갈라진다. 2기사단은 독수리와 함께 먼저 떠나 세잔티노에서 대기하도록. 그리고 1기사단은 릴프 강을 타고 세잔티노로 들어간다.”

“예.”

이엘은 노아의 등 위에 올라타며 깊은 심호흡을 했다. 무사히 돌아오는 것을 최우선에 두자. 모두가 다치지 않도록. 그녀는 마음을 다잡으며, 처음으로 신께 순수한 기도를 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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