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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71화 (71/488)
  • 71화

    뜬금없는 소리에 이엘의 눈이 커졌다. 갑자기 웬 피아노……? 커다란 눈동자로 저를 쳐다보는 소년의 얼굴에, 르네가 저도 모르게 속으로 웃었다. 드디어 소년의 관심이 제게 쏟아진 것이다.

    “가르쳐 주겠다.”

    “저는…… 음치에, 박치인데요?”

    “처음부터 잘하는 자는 없어.”

    “그게 아니라…… 심각한 수준일 텐데요…….”

    음악에 관한 이야기만 나오면 한없이 작아진다. 어릴 때부터 이온을 따라잡기 위해 노력한 덕에 다른 건 다 잘했어도 음악만큼은 따라갈 수 없었다. 갖고 태어나지 못한 재능이었다. 멋쩍게 웃으며 두 손을 내저었지만,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배워 보고 싶기도 했다. 그 옛날 황궁에서의 추억이 그리워서.

    “못한다고 뭐라고 하지 않을 테니, 배우도록 해라.”

    “……폐하께서 가르쳐 주실 건가요?”

    “그럼 이 성 안에 나 외에 또 누가 있단 거지? 왜. 내게 배우는 것이 싫은가?”

    “아,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왠지 저 까탈스러운 성미에 못하면 구박할 것 같기도 하고. 배우다가 울지나 않으면 다행이겠다. 이엘이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저 정말 못하는데요……. 자신이 없어 계속 거절하는 소년을 보며 르네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괜찮다. 못할 것처럼 생겼으니 딱히 기대도 안 해.”

    “…….”

    “따라와.”

    그래도 굳이 저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잖아. 투덜거리며 이엘도 그의 뒤를 따랐다.

    이제는 꽤 익숙해진 릴리의 방이었다. 여기서 르네가 연주하는 피아노를 몇 번 들었다. 언제나 볕이 따뜻하게 드는 곳이었다. 이 방의 주인이 얼마나 성 안의 사람들에게 사랑받았는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늠할 수 있었다.

    르네는 제게 릴리에 관한 이야기를 단 한 번도 해 주지 않았다. 대화 중에 그녀의 이름이 몇 번 나오긴 했지만, 동생에 관해서는 전혀 입을 떼지 않았다. 물론 이엘도 굳이 묻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엘은 릴리가 얼마나 큰 사랑을 받고 자란 영애였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앉아라.”

    피아노 바로 옆에 선 붉은 머리의 남자를 힐끔 쳐다보다가 한숨과 함께 엉덩이를 붙였다. 못하면 크게 혼낼 것 같은데……. 부드럽게 일러 주던 이온조차 포기한 실력이었다. 이엘은 마른침을 삼키며 건반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머, 먼저 하나씩 누를까요?”

    떨기는. 르네는 저를 바라보는 녹안의 주인과 눈을 마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엘은 낮은 도에서부터 높은 도까지, 차례대로 하나씩 눌러 보았다. 도를 바로 찾는 걸 보면 확실히 피아노를 접해 본 적이 있는 모양이군. 게다가 누군가에게 배운 것처럼 건반을 누르는 손가락의 모양도 동그랗게 굽어져 있었다.

    팔짱을 끼고 곁에서 지켜보던 르네가 이엘의 오른쪽 자리에 털썩 앉았다. 혼자 앉을 땐 크게 느껴졌던 비로드 재질의 피아노 의자가, 두 사람이 붙어 앉으니 새삼 좁게 느껴졌다. 게다가 조금만 움직여도 두 사람의 어깨가 딱딱 부딪쳐서 이엘은 저도 모르게 자꾸만 움츠러들었다.

    “치고 싶은 걸 쳐 보거라.”

    “네? 치, 치고 싶은 거요?”

    “그래. 아무거나.”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아무거나 치라는 게 대체 무슨 말이야……? 일단 양손을 모두 건반 위에 올리긴 했는데……. 거기서 진도를 통 나가지 못하고 괜히 손끝만 꼼지락거렸다. 보다 못한 르네의 왼손이 이엘의 왼쪽 손등을 덮었다.

    “그냥 이렇게.”

    “…….”

    “아무거나 쳐도 괜찮다고.”

    그와 그녀의 왼손이 누르는 대로 무거운 베이스음이 퍼졌다. 그리고 그 위에 르네의 오른손이 누르는 코드가 덧입혀졌다. 박자도 없고, 음률도 없는 엉망인 베이스에 잘 어울리는 멜로디가 더해졌다.

    이엘은 여전히 제 손등 위에 머물러 있는 르네의 손바닥 때문에 얼굴이 발개졌다. 그 커다란 손이 제 손을 덮고도 남아서, 마치 잡아먹힌 것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이런 식의 마찰은 그녀에게 곤란함을 가져다줄 뿐인데.

    르네는 대충 이엘의 엉망인 반주에 맞춰 주면서 힐끔 그녀를 내려보았다. 얼어 버린 것처럼 그 자리에 굳어서 귀 끝이 새빨갛게 타올라 있었다. 의외의 모습이었다. 늘 딱딱하게 격식만 차려서 감정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 아니. 누구보다 감정 표현이 확실했지. 그 잿빛 늑대를 묻어 주던 날. 아무도 없는 새벽에 몰래 나와 무덤을 끌어안고 숨이 멎을 것처럼 울었지. 눈이 좋은 자신만 보았던 비밀스러운 모습이었다. 보는 사람조차 무너지게 만들 정도로 괴로운 얼굴로.

    다시는 그런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였나, 괜히 쓸데없는 말을 붙였다.

    “박치라면 춤도 꽝이겠군.”

    “추, 춤이요?!”

    오, 제발 춤은……. 나라가 이렇게 되면서 데뷔탕트가 사라진 게 그녀에겐 천만다행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그 데뷔탕트 때문에 온몸이 혹사당했을 테니까.

    나는 정말 음악과 철천지원수인 게 틀림없어. 이엘은 제 머리를 붙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르네의 입가에 웃음이 옅게 번졌다.

    “네가 춤추는 모습을 보는 것도 재밌겠군.”

    “네? 춤이라뇨. 절대 안 돼요. 다른 건 몰라도 그건 정말 못 합니다.”

    차라리 검을 양손에 들고 칼춤을 추는 게 더 낫겠다. 이엘은 골머리를 앓는 것처럼 고개를 저었다.

    “곧 연회가 열릴 것이다.”

    “연회요? 갑자기 무슨……,”

    어제 만찬에서 르네는 귀족들에게 다시 선포했다.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의 선택 때문에 목숨을 버리지 말라는. 왕에게 절대적 충성을 다하는 독수리들은 그 명령에 그러겠노라 다시 한 번 맹세했다. 특히 새끼가 있는 귀족들은 그 소식에 얼마나 크게 안도했는지 모른다. 명령에 따라 자살에 동의했지만 이엘의 말대로 아직 살아야 할 이유가 독수리들에겐 많았던 것이다.

    그리고 후작의 지휘 아래, 이것을 기념하자는 연회가 열리게 됐단다. 물론 르네는 그것에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네게도 어울릴 만한 연회복을 마련해 주마.”

    “아뇨! 저는 그곳에 갈 마음이 전혀 없는데요?!”

    갑자기 웬 연회며, 거기에 내가 왜 가? 질겁하며 손사래를 치는 이엘의 반응이 퍽 웃겼다. 어차피 후작의 지시 아래 이루어지는 것이니 르네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지만 손님이 가겠다면 친히 데려다줄 의향이 있었다. 이따금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알아가는 것도 왕의 할 일이니까.

    “바깥바람을 쐬어도 좋다.”

    “그러니까 전 괜찮다니까요!”

    “연회는 약 보름 후니, 고민해 보도록.”

    말을 마친 르네는 피아노 위에 제 손을 올려 아까처럼 아름다운 멜로디를 연주했다. 그의 옆모습을 홀리듯이 쳐다보던 이엘은 미간을 구기다가 제 왼손을 건반 위에 올려놓았다.

    *

    대충 로브를 두르고 후드로 머리를 가리긴 했지만, 붉은 머리의 남자들 틈에 가려질 리 없었다. 그런다고 인간인 자신의 냄새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고. 누가 봐도 왕의 자태로 우아하게 걷는 르네와 그 옆에 눈치를 보며 바싹 긴장한 자신의 모습은 저 멀리서 보아도 시선이 쏠릴 수밖에.

    “몸이 안 좋으면 다음에 나와도 된다.”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제발 당신에게 쏠린 이 시선들 좀 어떻게 하면 안 돼요? 차마 그렇게 말할 수 없어 이엘은 고개를 흔들며 손을 저었다. ……괜찮아요, 전. 그녀의 시큰둥한 대답에 르네는 살풋 미간을 찌푸렸다. 아픈 것도 아니면서 왜 그런 표정인 거지. 기껏 나가고 싶어 하길래 데려왔더니.

    르네는 이엘이 제 영지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기를 바랐다. 성 안에만 갇혀 있는 것보다는 너른 영지를 둘러보며 조금이라도 숨 쉴 곳을 찾기를 원했다. 그건 단순히 안타까워서만은 아니었다. 그녀가 이제는 그럴 만한 자격을 갖게 되었음을, 제 백성들에게도 알리고 싶어서.

    ‘점자……?’

    ‘네. 왜 점자를 도입하지 않으시는 건가요?’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

    ‘독수리들은 다른 종족에 비해 보지 못하는 개체가 많잖아요.’

    어제저녁, 갑자기 피아노 연습을 하다 말고 그녀가 르네를 물끄러미 응시하며 툭 내뱉었다. 생각지도 못한 단어에 르네는 건반 위에 올린 제 손을 내리고 이엘과 눈을 마주했다. 그녀의 눈동자엔 진심 어린 걱정과 의문이 담겨 있었다.

    ‘독수리들은 똑똑해서 테르들조차 글자를 안다고 들었습니다.’

    ‘…….’

    ‘그럼 점자가 있다면 더 쉬울 텐데요.’

    ‘…….’

    ‘점자가, 인간을 위한 도구라 그런 건가요?’

    독수리들의 눈을 그렇게 만든 건 전부 인간들이니까요? 그렇게 덧붙인 이엘은 르네의 입술에서 떨어질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르네는 그녀의 물음에 대해 한참이나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갑자기 네 입에서 점자가 나올 줄 몰랐는데. 독수리의 일에 웬 관심이지?’

    ‘메이슨 때문입니다.’

    ‘…….’

    ‘메이슨은 아직 아무것도 누리지 못했잖아요.’

    ‘…….’

    ‘능력도 발현되지 못했다는데…… 그 애의 빼앗긴 세상을 조금이나마 돌려주고 싶습니다.’

    ‘너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저와는 상관없지만 폐하는 아니시잖아요.’

    ‘…….’

    ‘폐하의 백성이지 않습니까?’

    무례한 질문이었나요? 그녀의 거듭된 물음에 또 대답하지 못했다.

    점자. 르네도 아예 생각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독수리의 눈알이 황금의 값어치를 훨씬 웃돌기 시작하면서 우논이고 테르고 가릴 것 없이 닥치는 대로 납치되던 시절이 있었다.

    납치되어 눈알이 뽑힌 독수리들 중 일부는 식용으로 판매되었고, 또 일부는 살아 돌아왔으나 제대로 살아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들에게 눈은 능력이기도 했지만 인간의 지식을 조금이나마 맛볼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기도 했다.

    그때 독수리들 사이에서 돌던 말이 바로 점자였다. 인간의 도구를 이용해 어떻게든 살아 보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끝내 점자는 도입될 수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들에게 점자를 가르쳐 줄 인간이 없었으니까.

    인간의 글자조차 겨우겨우 배웠고, 테르들이 사용할 수 있다고는 해도 전부가 가능한 건 아니었다. 이종족들 중 머리가 좋은 편이지만 인간의 것은 그들이 스스로 배우기에 늘 어려움이 따랐다. 그러니 점자 도입은 독수리들만의 힘으론 역부족일 수밖에.

    ‘점자를 쓸 수 있는 인간들이 없더군.’

    ‘네?’

    ‘너흰 우리의 눈알을 가져가면 되니까.’

    ‘…….’

    ‘어느 순간, 맹인은 없었다. 르뷔 제국엔 앞을 못 보는 인간은 하나도 없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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