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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70화 (70/488)

70화

여태 그렇게 알고만 있었다. 20년 전 1차 종족 전쟁 때, 인간은 이종족의 모든 암컷을 죽여 버렸고 10년 전에 일어난 2차 종족 전쟁에선 반대로 이종족들이 보복으로 인간 여자를 모두 죽였다고.

그래서 우리 모두가 같은 벌을 받고 있노라고, 그렇게 탓했다. 내가 이렇게 혼자 살아남은 여자가 되어 살기 위해 버둥거리는 건,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들의 죄라고. 잘못이라고. 그렇게 탓하며 겨우겨우 생을 이었다.

“그 전쟁은 황족과의 전쟁이었다고 하셨어. 다른 인간들은 관계없는 전쟁이라고.”

“…….”

“나도 자세한 건 몰라. 그렇지만 잘 모르겠어. 왜 할아버지는 우리 아빠까지 죽인 거야? 나도 엄마를 빼앗겼는데. 우리 아빠가 잘못한 거야? 너희가 먼저 우릴 괴롭혔는데?”

미안…… 나 먼저 갈게, 메이슨. 이엘은 메이슨에게 미안하지만 서둘러 방을 뛰쳐나왔다.

그동안 왜 그들의 보복의 대상이 약한 여자였을까, 늘 그것에 대해 생각했다. 그들도 똑같은 죄를 저질렀다고 생각했다. 뿌린 대로 거둔 것이라고 속으로 비난했다. 적어도 그들의 보복 대상은 인간 ‘여자’가 되면 안 됐다.

물론 평민이었던 인간들조차 이종족을 괄시하고 박대한 것은 맞지만 20년 전의 그 암컷 몰살 계획은 평민들과 거리가 먼 전쟁이었다. 그러니 10년 전에 일방적으로 이뤄진 평민 학살은 명백한 이종족의 죄였다. 그렇게 믿으며 살았다.

그게, 자신을 무겁게 짓누르는 죄책감으로부터 조금이나마 도망칠 수 있게 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고? 그게 전쟁의 의도가 아니었다고? 안 돼. 그러면 안 되잖아. 그러면 난…… 난 누굴 탓해야 하는 거야? 우리가 모두 같은 죄를 저지른 게 아니었어? 죄를 지은 자들은 전부 죽었어? 이미 벌을 받았다고?

그럼 난 그동안 대체 누구를 미워했던 거야? 난, 이렇게 혼자 남겨진 나는. 대체 어떻게 버티라고, 누가…….

혼란스러움에 방향도 제대로 잡지 못하고 무작정 뛰던 이엘이 모퉁이를 돌자마자 누군가와 부딪치고 말았다. 퍽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부딪쳐 뒤로 넘어진 그녀의 앞으로 손이 다가왔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남자의 붉은 눈동자가 보였다.

“괜찮나?”

“……르네 님.”

“일어나라.”

그제야 이엘은 독수리의 왕이 왜 삶을 끊어 버리려 했는지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그는 과연 책임감 강한 독수리였고, 백성의 허물을 대신 짊어지려 하는 성군이었다. 그러니까…… 이종족들은 근본적으로 우리 인간과 다른 존재였다. 심지어 죄의 무게까지, 우리가 그들보다 나은 건 하나도 없었다.

죽어야 할 건 평민 백성들이 아니라 나였는데. 황족인 나였는데…….

“안색이 안 좋군. 그만 돌아가도록 하지.”

“…….”

“아까 식사 때문에 그런가. 앞으로는 귀찮게 귀족들이 널 부르지 않게 하마. 식사는 내 성에서만 하는 걸로 하지.”

그때 당신의 손에 죽었어야 했는데…….

죽어야 하는 존재는 살았고, 살아야 하는 존재들이 죽어 버린, 이건 말도 안 되는 진실이었다.

*

“아……!”

짧은 비명을 지르며 이엘이 제 손가락을 움켜쥐었다. 그녀의 손 위로 붉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옳지 않은 응급처치임을 알면서도 제 입으로 손가락을 물고는 서둘러 바닥에 깨진 유리 조각을 모았다. 넋을 놓고 있다가 이 아까운 것을 다 깨뜨려 버렸다.

어제 후작저에서 돌아온 뒤로 줄곧 정신을 놓고 있더니 결국 사고를 치고 말았다. 오드에게서 건네받은 약을 바닥에 떨어뜨려 죄 쏟아 버린 것이다. 물론 오드가 챙겨 온 약이 더 있으니 달라고 해도 되겠지만 여유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결국 이엘은 위험을 감수하고 바닥에 흥건한 약물을 손으로 온몸에 바르기 시작했다.

‘마실 수 없다면 향을 몸에 발라야만 해. 하지만 몸에 바르는 건 오래 지속되지 않아. 명심해.’

오드의 목소리가 귀 언저리를 울렸다. 약을 마셨을 때 보통 지속되는 시간은 약 한 달 안팎. 경우에 따라 그 이후 며칠 더 지속되기도 했다. 그보다 짧다면 대략 일주일 전후로 다시 복용을 해야겠구나. 잊어버리지 말아야 할 텐데. 가뜩이나 신경 쓸 일이 많은데 이런 멍청한 짓을 저지른 제 자신이 한심했다.

결국 이엘은 주저앉아 제 머리를 짚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여태 구축해 두었던 작은 성이 무너진 기분이 들었다.

모든 이종족이 인간들을 학살했고, 특히 여자들을 전부 죽였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이 세계에서 홀로 남겨진 것은 그들 때문이라고, 그렇게 원망하며 살았다. 적어도 미워할 이유로는 충분했다.

그런데 그 모든 게 박살 났다. 이제 원망할 대상도 없고, 자격도 없다.

그것뿐 아니라 독수리의 눈알도…….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는 건 언제나 힘들었다. 그래서 이엘은 부러 아침부터 노아의 침실로 향해 그를 간호하는 것에만 집중했다.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잠든 노아가 깨어나길 기다리며 꽃병의 물을 갈아 주는 게 전부였다. 무능력한 나날뿐이었다.

“엘. 괜찮아? 몸이 좋지 않아 보이는데.”

“응, 괜찮아. 잠을 좀 못 자서 그런가 봐.”

“어제 식사 자리에서 무슨 일 있었던 건 아니지?”

“응, 아냐. 아무 일도 없었어.”

검진 시간에 맞춰 성으로 찾아온 오드는 이엘의 안색을 살폈다. 어제 후작저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닌지, 말은 아니라고 했지만 영 좋지 않은 낯이었다.

“엘. 내가 했던 말 기억하지?”

“어떤 말?”

“무리에서 떨어져 지내는 개체도 있어. 네가 원한다면 그들에게서 얻으면 돼.”

“…….”

“독수리의 영지에 왔다고 서두를 필요 없다는 거야.”

“응. 알아. 고마워.”

표정을 보니 그것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하지만 추궁해 봤자 말해 줄 리도 없으니, 오드는 아쉬운 대로 물러났다. 그렇게 걱정이 가득한 오드를 배웅해 주고 그녀는 다시 노아의 곁으로 다가왔다.

후작저에서 르네와 함께 돌아왔지만 끝내 물어보지 못했다. 진실을 마주하는 게 이렇게 고역이라니. 차라리 아무것도 몰랐던 시간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짧은 한숨을 내쉬며 이엘은 잠든 노아의 창백한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노아…….”

“…….”

노아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전에는 악몽을 꾸는 것처럼 드문드문 인상을 찡그리고 앓는 소리도 냈지만 이곳으로 온 뒤로는 그냥 잠자는 사람처럼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그게 벌써 한 달째였다.

할 일이 없는 이엘은 서둘러 노아와 함께 늑대들의 영지로 돌아가기 위해 그를 간호하는 일에 몰두했다. 하루라도 빨리…… 당신과 함께 돌아가고 싶어. 하지만…….

그가 눈을 떴을 때, 박살이 난 영지와 늑대들에 대해서 뭐라고 말해야 할까.

그와 함께 다녀온 제 1기사단은 노아의 희생 덕에 모두가 안전했지만 제 2기사단, 그리고 제 3기사단은 엄청난 수의 늑대가 죽었다. 그리고 자신 역시 주드를 지키지 못했다. 그걸 다 어떻게 말해야 할까. 어디서부터 말해야 해. 벌써부터 마음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래도 당신이 빨리 눈을 떴으면 좋겠어. 노아, 당신에게 물어볼 게 많아. 대체 10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왜, 진실을 감춘 거야? 난 당신이 아닌 자에겐 물어볼 자신이 없어. 그러니까 제발 눈을 떠 줘.

“오헬.”

노아의 팔을 주무르고 있던 이엘의 손이 멈췄다. 문에 기댄 채 미간을 찌푸린 채로 르네가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 건 시종을 붙여 줄 테니 네가 하지 않아도 된다.”

“아뇨. 딱히 할 일이 없어서 그런 거예요. 노아 님이 일어나셔야 저도 영지로 돌아갈 수 있으니까요.”

“…….”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잠깐 따라오거라.”

이곳에 와서 이엘이 하는 일이라곤 이렇게 노아를 간호하는 일과 적당히 르네의 다과 시간에 함께 참석하는 게 전부였다.

르네는 성 안에 시종을 비롯한 자들을 따로 두지 않았다. 그를 지킬 근위대 역시 전부 왕성 밖으로 물린 탓에 성 안에 머무는 자는 르네와 이엘, 그리고 잠든 노아뿐이었다. 덕분에 이엘은 이렇게 르네의 다과 자리에 함께 할 때가 왕왕 있었다.

“불편한 곳은 없나.”

“네, 폐하의 은혜로 무탈합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표정은 별로 좋지 않아 보였다. 역시 어제 일 때문인가. 르네는 괜히 소년이 신경 쓰여 못내 답답했다. 그를 얕보는 귀족들을 누르기 위해 부러 자리에 합석하도록 했고, 그 이후엔 부담스러워 식사를 통 못 하는 그를 위해 굳이 만찬 자리에서 회의를 열겠다며 나가도록 했다. 혹 그게 불편했던 것인가.

어제저녁, 후작의 저택에서 왕성으로 돌아오는 내내 그녀는 제 눈치를 보며 입술만 연신 달싹거렸다. 르네는 누군가의 수다를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지만 이엘이 하는 말은 싫어하지 않았다. 무엇이든 물어본다면 기꺼이 응할 의향이 있었다. 하지만 이엘은 끝끝내 제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네가 좋아하는 과자가 있는데도 먹질 않는군.”

“입맛이 없습니다.”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하거라. 너는 손님으로 온 것이니 그 정도 대우는 받아도 되니까.”

“네. 살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신과의 대화를 늘 불편해하니 이런 자리를 만들지 말자고 다짐해 봐도, 르네는 이상하게 소년이 노아의 간호를 하고 있는 꼴을 보면 기분이 나빠졌다. 물론 그는 늑대 무리에 속하니 제 왕의 안위를 살피는 게 제일 중요하다마는. 그럼에도 굳이 붙여 주겠다는 시종까지 마다하며 그 방에만 틀어박혀 있는 게 못마땅했다.

또 한편으로는 그렇게 무료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모습이 안쓰럽기도 했고.

독수리들은 인간의 출입에 크게 반발했다. 물론 왕인 자신이 나서 제지시켰으니 앞에선 아무 말도 못 하겠지만 뒤에선 불평하고 있을 게 빤했다. 인간도 그걸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제 성 안에서만 움직일 뿐, 밖으로 나가고 싶단 소리를 일절 꺼내지 않았다. 갑갑할 텐데도.

안쓰럽다라……. 내가 그런 감정을 갖는 날이 오게 될 줄이야. 홍차가 담긴 찻잔을 스푼으로 휘저으며 씁쓸하게 자조했다.

“홍차는 네 입맛에 맞지 않는 건가?”

“아니요. 좋아합니다.”

“따로 좋아하는 차가 있나?”

“차는 다 좋아해요.”

여전히 르네는 인간이 싫고 불쾌했지만 전부가 그런 건 아니었다. 특히 이엘은 예외였다. 그녀와의 대화는 르네에게 때론 재미를 가져다주기도 했고 흥미를 끌어 주기도 했다.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솔직히 바쁜 정무를 빨리 처리하고 굳이 다과 시간을 만들 정도로.

르네는 이 시간이 무료하지 않았다. 그래서 자꾸만 이런 시간을 만들고 있는지도 모르지.

“오헬.”

“네?”

이번에도 제 이름이 불리자 흠칫 놀랐다. 원래도 성 안에 시종을 따로 부리지 않았지만 인간 소년이 불편해할까, 안에 거하던 근위대까지 전부 밖으로 내보냈는데도 여전히 이엘은 자신을 어려워했다. 그래도 함께 얼굴을 마주하며 시간을 꽤 보냈는데.

“피아노를 배워 보겠나.”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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