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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62화 (62/488)
  • 62화

    처음으로 인간 소년이 제 손을 잡아 부탁을 했다. 하지만 노아는 자신이 아끼는 인간이 이토록 망가진 것에 대해 스스로에게 화가 났고 참을 수 없었다. 지켜 주겠다는 말은 전부 거짓이 되었다.

    결국 이 소년은 스스로 살아남은 것이다. 도움을 받은 건 이쪽이었다. 자질 없는 왕의 모습이 여실히 드러난 기분이었다.

    “추격한다. 앤디, 안드로. 추격대를 꾸려.”

    “예, 폐하!”

    “안 됩니다, 폐하. 지금은 추격할 때가 아니에요!”

    이엘이 소리를 지르자 다시 입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노아는 인상을 쓰며 다가와 서둘러 그녀의 입을 닦아 주기 시작했다. 오드! 그의 부름에 오드가 달려와 손을 썼지만 이엘이 그를 거부했다. 그녀가 몸을 일으키며 노아의 팔을 붙잡았다.

    “전쟁을 다시 일으키고 싶으세요?”

    “오헬.”

    “다시 모두를 피해자로 만드실 생각인가요?”

    뼈를 찌르는 말에 노아가 입을 다물었다. 다른 늑대들은 서둘러 추격을 하자며 아우성이었다. 옆에 있던 오드 역시 고개를 저었다. 부디 제 간언을 기억하십시오. 그렇게 나지막하게 말하는 음성을 들었지만 노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건 인간과 이종족의 이해 차였다. 앞뒤를 생각하며 몸을 숙이기엔 피해가 너무 컸다.

    “독수리가 오고 있다.”

    “…….”

    “지금이라면 승산이 있어. 추격한다.”

    어차피 언젠가는 벌어질 일이었다. 극과 극으로 치닫는 체계는 서로에게 아무런 이득도 되지 않았다. 이미 공공의 적이 사라져 버렸으니, 남은 건 먹이를 두고 싸우는 치열한 생존뿐.

    “추격대는 세 조로 나눈다. 앤디는 2기사단과 함께 놈들의 소굴로 가, 연구소와 영지를 박살 내도록. 안드로는 3기사단과 함께 도망친 인간들을 잡아라. 그리고 1기사단은 나를 따라 놈들을 쫓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이 다스리던 시절엔 그들 사이에 전쟁 따위 없었지만, 인간이 최하위층으로 떨어지니 이젠 전쟁이 숱하게 벌어진다. 그게 이 세계에서 살아남는 이종족들의 생존 법칙이었다. 약한 자들은 모두 사라지고 강한 자만 살아남는 것이. 인간인 이엘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이 이해 차였다.

    “오드. 부상자들을 이곳에 데려다줄 테니 그들을 잘 치료하도록 해라.”

    “네.”

    끝으로 노아는 누워 있는 이엘을 눈에 담았다. 비밀이 많은 인간이지만 다시 한 번 자신이 아끼고 있음을 절감했다. 거짓 없이 늑대들을 대하고, 그 늑대를 구하기 위해 제일 소중하다는 제 목숨을 거는 모습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소년은 완전한 자신의 백성이었다. 그러면서도 완전한 자신의 인간이었다.

    이상할 정도로 노아는 저 인간 소년이 신경 쓰였다. 무언가 헛된 기대를 바라게 되는 것처럼.

    “오드, 이들이 독에 중독된 건 아니겠지.”

    “걱정 마십시오, 폐하. 영문은 모르겠지만 뱀의 왕이 해독약을 던져 주고 가서 지금은 모두 괜찮습니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로빈의 관심을 받는군. 미간을 찌푸리며 머리를 쓸어 올린 노아는 불안에 휩싸인 소년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다녀오마.”

    부드럽게 속삭이며 이엘의 구불거리는 머리를 쓸어 준 노아가 제복 망토를 걸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순식간에 모여 있던 우논들을 데리고 사라졌다. 이엘은 뻑뻑한 눈으로 노아가 사라지는 것을 모두 확인했다. 가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엘. 괜찮니?”

    “불안해, 오드. 무언가 또 놓친 게 있는 것 같아.”

    “왜 그런 소리를 해.”

    “뱀들이 이렇게 쉽게 떠날 리가 없잖아.”

    “…….”

    “모르겠어. 내가 뭔가를 놓친 건지, 그게 아니면 쓸데없이 불안한 건지.”

    이럴 때 눈치 없는 밀로라도 곁에 있으면 좀 좋아. 아니. 차라리 그 눈치 없는 놈이 없어서 다행이다. 적어도 이런 피해에 휘말리진 않았으니까. 부디 너만이라도 안전한 곳에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시간이 조금 더 흘러 다친 늑대들이 하나둘 성전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오드는 다친 몸으로 결계를 치느라, 아픈 늑대들을 돌보느라 매우 바빴다. 둘 중 그 어떤 것도 소홀히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엔 이엘도 아픈 몸으로 곁에서 도와줄 수밖에 없었다. 쉬라는 오드의 말에도 고집을 부리며 그를 도왔다. 동시에 한시라도 빨리 늑대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엘. 눈이라도 붙이는 건 어때?”

    “노아가 돌아올 때까진 안심할 수 없어.”

    “그를 많이 의지하게 되었구나.”

    “그러게. 나도 모르게 그 사람을 믿게 됐네.”

    “그러니?”

    “그는 좋은 왕이야. 내 아버지랑 다르지. 자기 사람을 쉽게 버리지 않아. 아마 나도 버리지 않을걸.”

    물론 아닐 수도 있다. 내 존재를 눈치챈다면, 바로 내 목을 조르겠지만.

    “그보다 오드야말로 좀 쉬어. 너도 다쳤잖아.”

    “결계가 불안해. 아무래도 힘을 다 쓴 모양이야, 나도. 이온에게 있는 결계까지 신경 쓰려니 여간 힘든 일이 아니네.”

    “그럼 내가 보초를 설까?”

    “아니. 그럴 순 없지. 괜찮아, 아직까진. 외부에서 느껴지는 위험 정도는 막아 낼 수 있으니까.”

    밤이 된 영지는 언제 불에 탔냐는 듯 고요했다. 온통 짓밟히고 타 버려서 허허벌판이 되어 버린 밖을 내다보며 그녀는 간절하게 손을 모았다. 이 끔찍한 시간들이 어서 빨리 지나가기를 바랐다.

    우습게도 이온을 황위에 앉히려면 이런 전쟁쯤은 앞으로 숱하게 겪어야 할 텐데, 겨우 이 정도에 겁을 먹다니. 고개를 흔들었다.

    “오헬.”

    자고 있던 늑대들 틈에서 주드가 눈을 뜨고 다가왔다. 커다란 잿빛 늑대가 절뚝거리며 그녀의 곁으로 다가와 털을 비비자, 이엘이 웃으며 주드의 몸을 쓸어 주었다. 워낙 회복력이 좋은 우논이니 다른 늑대들에 비해 정신을 빨리 차렸다. 물론 로빈의 독기에 화상을 입은 곳은 여전했고 몸은 엉망이었지만. 그게 안쓰러워서, 이엘은 한숨을 집어삼키고 조용히 주드의 상태를 물었다.

    “아프지?”

    “괜찮아. 이 정도는.”

    “고마워, 주드. 네가 날 살렸어.”

    “아냐. 이번에도 네가 날 살렸어. 매번 네가 날 구해 줘. 인간인 너를 늑대인 내가 지켜야 하는데도.”

    “그게 뭐가 중요해. 강한 사람이 지켜 주면 되는 거지.”

    “네가 나보다 강하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주드의 투정에 이엘이 웃었다. 아무리 기운을 차렸어도 화상 자국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아프고 안쓰러웠다. 화상으로 인해 녹아 버린 곳 주변을 쓰다듬으며 이엘은 주드에게 더 깊게 기댔다.

    튼튼한 우논 님, 빨리 낫자. 그녀의 장난스런 목소리에 주드가 투덜거렸다. 그러나 곧 주드도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그녀의 손길을 받아 냈다. 이까짓 상처, 금방 나아. 그 말과 함께 피실 웃던 주드가 별안간 코를 찡긋거리기 시작했다.

    “왜 그래?”

    “뭔가 이상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아서.”

    “냄새? 무슨 냄새?”

    “잠깐만.”

    그녀의 품에서 벗어난 늑대가 홀을 지나 가장 끝 방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엘도 벽에 세워 둔 검을 들고 주드의 뒤를 따라 걸었다.

    화약 냄새와 독 냄새에 뒤덮인 곳에 무언가가 있다. 분명히 뭔가 있어. 주드는 가까이 갈수록 제 코를 찌르는 듯한 악취에 털이 곤두섰다.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오지 마, 오헬.”

    “뭐? 갑자기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뭔가가 여기에 있는 것 같아.”

    “있다니. 뭐가 있다고……!”

    스스스―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서 갑자기 나타난 흑발의 남자가 그녀를 쳐다보며 비웃었다. 남자와 눈이 마주친 이엘의 눈동자가 커졌다. 어, 어떻게……! 손에 쥔 검을 재빠르게 휘둘렀다.

    늦었다……. 기척도 없이 다가온 남자는 이엘을 향해 순식간에 검을 휘두른 뒤였다. 그 모든 일련의 동작들이 부드럽고 조용해서 마치 무언극을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고요함 속에 푸욱 찔리는 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기다리고 있었다.”

    아주 느릿한 목소리에 검이 배를 꿰뚫는 소리가 섞여 들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이엘도 들고 있던 검으로 리플의 어깨에 찔러 넣었다. 늦었지만 확실하게 어깨 인대를 끊어 버리는 것에 성공했다. 리플이 크억! 신음 소리와 함께 제 어깨를 붙잡는 모습이, 아주 느린 장면으로 보였다.

    “아아― 나의 왕께 선물을 드리고 싶었는데…….”

    바닥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은 리플은 이엘을 바라보며 안광을 번뜩였다. 큭큭 웃음을 터뜨린 그가 혀를 찼다. 아쉽게 됐군. 그의 음성에 이엘은 제 배를 움켜쥐었지만 아무렇지 않았다. 아프지도, 괴롭지도 않았다.

    아무것도 흐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 자신의 눈앞에서 잿빛 늑대가 바닥에 쿵 떨어졌다.

    “주드……?”

    “오, 오헬…….”

    “주, 주드! 아, 안 돼…… 주드!!”

    “…….”

    “아악― 주드―!”

    이엘이 쓰러진 늑대를 살피는 새에 계획이 실패한 리플이 사라졌다. 그녀는 리플을 뒤쫓을 생각도 하지 않고 주드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안 돼! 정신 차려, 주드!”

    “엘! 무슨 일이야?!”

    “아, 안에 있었어…… 뱀이 아직 남아 있었어……. 아아…… 왜 몰랐을까! 왜 로빈의 심복이 없다는 걸 내가 몰랐을까, 왜!”

    간과하고 있었어. 그 누구보다 충성심 깊은 자가 그 리플이란 자였는데. 한시도 제 왕의 곁에서 떠나지 않는 자가 처음부터 끝까지 보이질 않았는데, 왜!

    이엘은 눈물을 흘리며 터져 나오는 주드의 피를 어떻게든 막아 보려 손을 뻗었다. 그러나 검이 깊게 박힌 곳에선 피가 분수처럼 터질 뿐이었다. 살려 줘, 오드! 제발! 그녀의 고함에 오드도 손을 써 보려 했지만 끝내 고개를 젓고 말았다.

    “검이 너무 깊게 박힌 데다가 독까지 묻어 있었어. 뱀들의 독은 치명적이야. 해독제가 없으면 불가능해.”

    “조금 전에 로빈이 던지고 간 그 해독제! 그거 있잖아, 오드. 제발…….”

    “뱀들은 각자 사용하는 독이 달라. 내가 보긴 하겠지만 우리를 공격했던 그자의 것이 아니라면 해독제를 구하러 가는 수밖에 없어, 엘.”

    “그럼 어떡해? 이대로 두란 말이야?! 안 돼. 주드, 제발 눈을 떠 줘. 제발…….”

    피가 잔뜩 묻은 손이 달달 떨리기 시작했다. 그사이 오드가 늑대의 몸을 살폈다. 그의 몸에서 뽑아낸 독을 작은 통에 담아, 가지고 있던 해독제와 섞었지만 역시나 전혀 효과가 없었다. 주드의 몸을 찌른 독은 로빈의 것이 아니었다.

    고개를 젓는 오드를 보며 이엘은 절망했다. 간신히 숨을 헐떡거리며 생명을 이어 가던 주드가 깊게 감겨 있던 눈을 떴다. 잿빛 늑대의 눈이 빛나며 이엘과 오드를 담았다.

    “기름…….”

    “뭐라고, 주드? 지금 뭐라고 했어?”

    “기름을 가져가, 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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