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그때였다. 우드드득 소리와 함께 주드에게서 뻗어 나온 얼음이 바닥을 타고 로빈을 향해 돌진했다. 일전에 노아나 앤디가 보여 주었던 위력에 비하면 상당히 약했지만 속도감이 엄청난 출력이었다. 가는 길목을 막는 뱀들의 목을 전부 꿰뚫고 창처럼 뾰족하게 날이 선 얼음이 로빈의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그대로 로빈의 몸통을 뚫나 싶을 정도의 속도였다.
“쯧. 귀찮게.”
그러나 상대는 우논, 그것도 가장 강한 왕이었다. 로빈의 손 하나에 엄청나게 솟아올랐던 얼음 장벽과 창이 허탈하게 부서졌다.
그의 손에서 빠져나간 독기는 얼음을 전부 녹이고도 멈추지 않고 계속 뻗어 나갔다. 독기는 그대로 흘러나가 쓰러진 늑대들을 휩쌌다. 재갈이 물린 주드의 털에 닿아 살갗을 녹이자, 주드가 고통스럽게 소리를 질렀다. 덩달아 쓰러져 있는 늑대들도 독기를 견디지 못하고 발버둥 쳤다.
커다란 주드의 몸 위에 털이 빠지면서 동그랗게 화상 자국이 생겼지만 로빈은 멈추지 않았다. 절규하는 주드의 비명 소리는 그녀를 괴롭게 만들었다.
“그만해요! 제발 그만!”
고함을 지름과 동시에 이엘의 입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유독가스에 너무 오랜 시간 노출된 데다가 조금 전에 로빈이 뿌린 독기가 근처에 있던 그녀에게도 영향을 끼친 탓이었다.
콜록거리며 입을 틀어막는 이엘을 확인한 로빈이 미간을 찌푸리며 손을 거뒀다. 황급히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의 상태를 확인한 로빈은 쯧, 혀를 차곤 머리를 잔뜩 헤집었다. 되도록 흠이 없기를 바랐는데. 제 독기는 제대로 빼내지 않으면 후유증을 남길 것이다.
“해독제를 가져와.”
“네, 폐하. 여기 있습니다.”
로빈이 그녀의 턱을 붙잡고 입을 벌려 해독제를 부으려고 했지만 이엘은 신경질적으로 그의 손을 쳐 버렸다.
“뭐 하는 거예요, 지금?”
“다 네가 말을 듣지 않아서 생긴 일이야.”
“제가요? 이게 다 제 잘못이라고요?”
“그래. 넌 나와 약속을 어겼어. 우리의 계약에 네 탈출이 있었던가?”
“그 연구가 그렇게 중요하던가요?”
“넌 인간이라 이해 못 할지도 몰라. 우린 종족의 모든 게 달려 있어, 거기에.”
“그럼 애초에 인간 여자를 죽이지 말지 그랬어요.”
“그래. 애초에 너희가 암컷들만 살려 뒀더라면.”
“…….”
“그랬다면 인간의 신발 아래 머리가 눌려도 그럭저럭 살았을 거야. 너희를 죽일 생각 따윈 꿈에도 하지 못했겠지.”
지금 로빈의 말은 전혀 변명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전부 옳은 소리를 하는 그의 말에 이엘은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그의 말이 맞다. 애초에 암컷들만 살려 뒀더라면……. 이종족을 그렇게 학대하지만 않았어도. 이 망할 실험이고 연구고 인간이 시작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는데. 과욕이 불러일으킨 대참사는 모든 종족의 멸망을 가져왔다.
“……순순히 따라갈게요. 대신 여기 있는 늑대들의 목숨은 앗지 말아 주세요.”
“네 말을 내게 믿으란 건가? 이미 배신을 한 전적이 있는 너를?”
“그럼 나의 어떤 점을 믿고 연구를 맡기시려고? 당신이나 나나 벼랑에 몰린 건 피차 똑같아. 지금 고개를 조아려야 하는 건 내가 아니라 당신이라고.”
으르렁거리는 꼴이 딱 늑대를 닮았다. 몇 달 여기 있었다고 그새 완전히 물들어 버린 걸 보며 로빈의 눈썹이 틀어졌다.
여전히 당돌하고 건방진 건 변함없었지만 그게 그의 기분을 나쁘게 하진 않았다. 천성이 인간의 발에 밟혀 살던 짐승이라 그런가. 로빈은 자조했지만 곁에 서 있던 자들은 아니었다. 건방진 인간의 말투와 언행에, 무리 중 하나가 검을 빼 이엘의 턱 아래 갖다 댔다.
“폐하. 혀를 뽑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혀는 연구에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 건방진 놈의 혀를 뽑아 다시는 폐하께 말대답하지 못하도록, 부디 허락해 주십시오!”
이엘은 어처구니없는 뱀들의 충성심을 비웃었다. 같잖은 왕놀이도 제법 잘하고 있나 보구나. 그 생각과 함께 피가 섞인 침을 바닥에 뱉었다. 입 안이 온통 피로 얼룩져 비린 맛이 그득했다. 로빈은 그녀를 물끄러미 보다가 손을 들어 검을 뽑은 뱀을 제지했다.
“일전에 너희에게 귀빈이라 말한 것을 또 잊어버렸나 보군.”
“폐하, 하지만……,”
“시끄럽다. 지금은 그딴 게 중요한 게 아냐. 오헬, 일어나라. 네 말대로 이 녀석들의 목숨을 살려 줄 테니 순순히 따라와. 네게 더는 손대고 싶지 않아.”
로빈의 목소리에 쓰러져 있던 주드가 재갈이 물린 채로 끼익끼익 소리를 질렀다. 그마저도 옆에 있던 뱀들이 발로 걷어차는 바람에 금세 사라졌지만.
이엘은 일부러 주드 쪽을 바라보지 않았다. 곳곳에 널브러져 피투성이가 된 다른 늑대들에게도 시선을 주지 않았다.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수많은 뱀들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로빈은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를 주시하며 제일 뒤에서 걷기 시작했다. 엉망이 된 성전 내부를 외면하던 이엘은 일순 제 눈 끝에 걸린 하얀 천을 발견했다.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시선은 정면을 향했지만 분명 흙투성이가 된 흰 옷이 눈 끝에 걸렸다.
죽은 것처럼 엎어져 있던 흰 천이 조금 움직였고 이엘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로빈 님. 암컷이 살아나면 가장 좋아할 게 누군지 아세요?”
“…….”
“당신들 이종족이 아니에요.”
“…….”
“바로 인간이지.”
뱀들은 미간을 찌푸리며 함부로 나불거리는 입을 다물게 하고 싶었지만 제 왕이 가만히 계시니 쉽게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비틀거리면서도 할 말은 다 하는 꼴이 딱 ‘인간’이었다. 저 모가지를 비틀어 버리고 싶다. 그들은 그녀를 그런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그러나 뱀들의 매서운 눈초리를 받으면서도 이엘은 로빈을 향해 웃긴 말을 늘어놓았다.
“그러니까 지금 당신과 내가 하려는 일은 오히려 인간을 돕는 일이란 거죠.”
“날 자극하려고 하지 마라.”
“그들이 살아난 암컷을 갖기 위해 얼마나 잔인한 짓을 저지를지, 상상이 안 되시죠?”
“오헬.”
“당신들은 종족의 미래를 위해 암컷을 만든다고 했지.”
“…….”
“하지만 인간은 어떨 것 같아? 아이? 후손? 미래? 그딴 건 전혀 관심 없어.”
이엘의 말에 뱀들이 하나같이 인상을 찌푸렸지만 로빈은 묵묵히 듣기만 했다. 그녀의 말이 맞다. 인간들은 미래, 후손 그런 것에 전혀 관심이 없다. 그들은 오직 현재의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을 뿐.
“자기 욕구를 채우기 위해 암컷들을 또 학살하고 괴롭히고 능멸할 거예요.”
“…….”
“그게 당신이 원하는 종족의 미래야? 종족의 번식 따위를 위해 태어날 암컷들이, 인간의 욕구 따위에 휘둘릴 그 암컷들이 불쌍하지도 않아?”
“그만.”
“인간은 그래요. 인간들은 다 그렇게 약고 비열해. 그리고.”
말을 하다 말고 이엘이 걷던 걸음을 멈췄다. 마치 목에 뭐가 걸린 것처럼 그 자리에서 컥컥거리던 그녀는, 터져 나온 기침 새로 피를 뿜었다. 손바닥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지만 역부족이었다. 한번 터지기 시작한 피는 걷잡을 수 없이 쏟아졌다.
그렇게 해독제를 거부하더니, 기어코! 짜증이 솟구친 로빈이 성큼성큼 걸어오는 순간, 이엘은 그를 놓치지 않고 허리를 숙이고 바닥을 굴러 옆으로 빠졌다.
“폐하!”
놀란 뱀들이 제 왕을 보호하기 위해 달려드는 사이에 이엘은 바닥에 있던 지팡이를 발로 걷어찼고 쓰러져 있던 오드의 손에 정확히 안착했다. 동시에 오드는 지팡이를 위로 쳐들었고 눈이 부실 정도로 엄청난 빛이 지팡이에서 터져 나왔다. 흙으로 얼룩져 엉망이 되었던 오드의 흰 옷이 빛을 흡수한 것처럼 환하게 밝아졌다.
생전 처음 보는 빛에 뱀들이 눈을 못 뜨는 동안 이엘은 품 안에 넣고 다니던 긴 막대를 꺼냈다. 뾰족하게 갈린 끝으로 쓰러져 있던 주드의 재갈을 끊었다. 주드는 풀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하울링으로 구조 신호를 터뜨렸다.
아우우―! 답신이 근처에서 들려왔다. 연이어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신호에는 노아와 앤디의 것도 실려 있었다. 모두가 이곳으로 오고 있는 것을 확인한 주드가 마지막 하울링을 끝으로 바닥에 쓰러졌다.
뱀들은 당황해 안절부절못했지만 가운데 서 있는 로빈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저 이엘을 제 시선 안에 담을 뿐이었다.
허무하겠지, 눈앞에서 놓치게 되었으니. 이엘이 웃었다. 내가 이겼어. 그 웃음을 지켜보며 로빈이 피식 웃었다. 과연, 그럴까?
그러나 그녀는 그의 눈빛에 동요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인간은 배신을 잘 때리죠. 특히 뱀들에겐 그게 더 쉽고.”
이엘의 목소리를 들은 로빈이 하하하, 크게 웃었다. 어수선한 틈에서도 로빈은 여유를 잃지 않았다. 끈덕지고 집요한 눈으로 그녀를 끝까지 바라보았다. 마치 지금 이 상황이 재미있다는 듯.
늑대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점차 커졌다. 뱀들은 왕을 피신시키기 위해 소동을 피웠지만 로빈만은 요동하지 않았다. 그는 성전 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들고 있던 해독제를 이엘의 품으로 던진 채 순식간에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제 왕의 은신을 따라, 남아 있던 모든 뱀들이 눈앞에서 투명 인간처럼 전부 사라졌다. 그리고 기척도 완전히 사라졌다.
이제야 영지를 다 떠나 버린 것이다.
이엘은 정말 온 힘이 다 빠져서 바닥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황급히 그녀의 곁으로 다가온 오드가 성지에 결계를 치곤 해독제를 열었다. 이엘의 입에서 쏟아진 피와 배합해 해독이 되는지 확인한 후, 그녀의 입 안에 해독제를 넣었다. 그제야 쏟아지던 피가 멈췄다.
“엘. 괜찮니?”
“응…… 난 괜찮아. 그보다 주드랑 다른 늑대들에게도 이 해독제를 줘.”
“정말 죽을 뻔했어.”
오드의 말에 동의한다. 이번엔 정말 영락없이 끌려가나 싶었다. 자신과 오드, 그리고 주드의 호흡이 잘 맞은 덕분에 시간을 벌어 살았다. 셋 중 하나라도 호흡이 맞지 않았다면 모두가 죽었을 테니까.
오드가 그녀의 말대로 늑대들을 살펴보기 위해 일어난 순간, 성전 안으로 한 무리의 늑대들이 들이닥쳤다.
“……빌어먹을.”
성지를 공격한 것은 명백히 전쟁을 선포한 것과 같은 행위였다. 제일 먼저 안으로 들어선 검은 늑대가 순식간에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노아는 쓰러진 이엘과 늑대들을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가장 안전한 곳일 거라 생각했는데. 그것도 욕심에 눈이 먼 자들 앞에선 소용없는 짓이었나. 하긴. 완전히 신을 저버린 것들인데.
가까이 다가온 노아는 바닥에 흥건한 이엘의 피를 발견하곤 미간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보호하기는커녕 온갖 피해는 이 인간 소년이 다 맞았다. 그런데도 살아 있는 게 대견하다고 해야 할지, 그게 아니면 놀랍다고 해야 할지. 노아는 바닥에 누워 있는 이엘의 옆으로 다가와 그녀의 이마를 짚었다.
“좀 쉬어라. 뒷일은 우리에게 맡기고.”
“폐하. 보복은 안 됩니다. 가지 마세요.”
“…….”
“지금은 그냥 여기 계세요. 제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