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석주는 병원으로 돌아가야 했다. 병원에서 석주의 부재를 눈치 채고 연락을 수없이 해 온 탓이다. 석주를 혼자 보낼 수 없어 경애도 금방 되돌아갔다.
식이 끝나고 다 같이 모여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태연이 문득 물었다.
“신혼여행은 오늘 바로 가?”
식사가 끝 무렵에 다다르자 태연이 물었다. 태준은 고개를 저었다. 오늘 하루 정도는 쉬고 내일 출국할 예정이었다.
“근데 신혼여행은 어디로 가?”
“니스로 간댄다.”
태석이 은밀한 눈짓을 하며 태준 대신 대답해 주었다.
태석의 말대로 신혼여행지는 니스였다. 태준과 선혜가 만난 곳이자 수호가 생겨난 곳.
“좋겠다. 윤수호. 비행기도 타고.”
세빈이 부러운 투로 투덜거렸다. 말없이 스테이크를 먹고 있던 수호가 입을 연 건 그때였다.
“나 안 갈 건데.”
수호의 말에 모두가 놀란 얼굴로 수호를 돌아보았다. 선혜와 태준도 마찬가지였다.
“그게 무슨 소리야, 수호야?”
당연히 같이 가는 줄 알았다. 아무리 신혼여행이라고 해도 수호를 떼어놓고 가긴 뭐했으니까. 데리고 가서 엄마와 아빠가 함께한 추억을 이야기해주고 싶기도 했는데.
갑자기 안 간다니.
“나 안 가요. 할머니 집에 있을래요. 그래도 되죠, 할머니?”
졸지에 지목을 당한 시연은 얼떨떨해했지만 금세 반색했다.
“아휴, 그럼! 우리 수호 오면 할머니는 대환영이지?”
수호는 먹던 스테이크를 마저 먹었다. 선혜와 태준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태준이 수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수호 혼자 있어도 괜찮겠어? 엄마 아빠 일주일은 갔다가 올 건데.”
“괜찮아요.”
우리 수호가 언제 이렇게 컸지. 선혜도 태준도 다소 감동한 얼굴로 수호를 보았다. 안심한 얼굴로 둘 다 물을 마시는 때였다.
“근데 대신.”
수호가 입을 연 것은.
“동생 만들어주세요.”
풉! 태준뿐만 아니라, 선혜 또한 마시던 물을 그대로 뿜어버리고 말았다. 어른들은 일제히 밥 먹던 걸 멈추고 멍하니 수호를 보고 있었다.
어른들을 한 바퀴 둘러본 수호가 선혜와 태준을 향해 말을 덧붙였다.
“여동생.”
그러고는 씩 웃는다.
선혜는 할 말을 잃은 표정으로 수호를 보았고 태준은 별안간 옆에서 파안대소를 하기 시작했다. 선혜가 비딱하게 쳐다보자 갑자기 바싹 붙어 속삭이길.
“각오해요.”
그러면서 씩 웃는 게 수호랑 어쩜 그렇게 닮았는지.
부전자전. 옛말 틀린 거 하나 없다고, 선혜는 생각했다.
#외전 – 사랑한다는 말
선혜는 몸을 지분거리는 손길에 눈을 떴다. 슬쩍 아래를 내려다보니 옷 속으로 파고든 손이 보인다.
다른 손은 슬그머니 잠옷 단추를 따고 있었다. 비딱하게 뒤를 돌아보는데 목덜미에 입을 맞추고 있는 태준과 눈이 마주쳤다. 선혜와 눈이 마주치자 슬며시 눈웃음을 친다.
“굿모닝.”
선혜는 어이없는 표정을 짓다가 태준의 손을 찰싹 내려쳤다. 음흉한 얼굴을 하고 있던 태준이 금세 강아지 같은 표정으로 선혜를 쳐다보았다.
“우리 애기 잘 있나 본 건데.”
“애기가 배에 있지 가슴에 있나.”
할 말이 없는지 슬쩍 눈을 돌린다. 그러더니 뒤늦게 배를 어루만지며 인사를 건넨다.
“우리 봄이 잘 잤어?”
봄. 선혜의 배 속에 있는 아이의 태명이다.
수호와 집안 어른들의 소원대로 허니문 베이비였다. 여동생인지, 남동생인지 아직 성별은 모르지만 수호는 기뻐해 마지않았다.
선혜는 피식거리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준이 아쉬운 얼굴로 선혜를 쳐다보았다. 올망졸망한 눈빛을 보다가 선혜가 졌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허리 숙여 입을 맞춰주는데 돌변한 태준이 선혜의 몸을 휙 돌려 침대에 눕혔다.
“출근해야 되는데.”
태준이 여유롭게 시계를 들어 시간을 보여주었다.
“아직 시간 있는데.”
반박할 말이 없다. 선혜는 체념한 듯 눈을 감았다. 입술이 겹쳐지고 아침부터 달뜬 숨이 침대를 덥히기 시작했다. 잠옷 단추가 하나둘 풀린 옷섶 사이로 태준의 커다란 손이 파고드는 그때.
벌컥.
“엄마, 아빠…….”
노크도 없이 열린 방문. 그리고 비몽사몽한 수호의 목소리.
“뭐 해요?”
선혜와 태준은 돌처럼 굳었다.
선혜가 놀라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태준은 허우적대다가 침대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아침 댓바람부터 쿵 하는 요란한 소리가 바닥을 울린다. 선혜가 벌어진 잠옷을 여미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태준을 내려다보았다.
“괜찮아요?”
수호도 다가온다.
“아빠. 괜찮아요?”
아침부터 진하게 사랑을 나누고 싶었는데. 그걸 방해한 아들이지만 걱정하는 모습만큼은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그래서 태준은 웃는다. 아파도, 행복한 얼굴로.
“그럼. 아빠 완전 튼튼하잖아.”
“지금 눈에 눈물 고였는데.”
“아냐. 하품해서 그래, 하품해서. 아유 졸려.”
태준이 자기도 모르게 찔끔 나온 눈물을 태연스럽게 닦았다. 수호는 태준이 괜찮다는 걸 확인하자마자 침대로 폴짝 올라왔다.
오자마자 선혜의 배에 손을 올린다. 임신 5주. 아직 나오지도 않은 배에 손을 올리고 묻는다.
“봄아, 잘 잤어?”
이제는 익숙해진 수호의 일상.
소원대로 동생을 얻은 수호는 매일매일 배 속의 아이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 모습이 사랑스럽고 기특하기도 해서 선혜는 수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어느새 침대로 올라온 태준도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따사로운 봄볕이 내려앉은 침대 위.
세 가족의 모습은 아침부터 화목하기만 했다.
*
“오늘도 퇴근하고 병원으로 갈 거죠?”
“네.”
출근길 집을 나서며 태준이 물었다. 선혜는 고개를 끄덕였다. 석주는 아직도 호스피스 병동에 있었다.
“나도 끝나고 곧장 갈게요.”
“그래요.”
태준은 수호를 학교에 데려다주기 위해, 선혜는 곧장 회사로 가기 위해 주차장에서 갈라졌다.
별안간 태준이 돌아서는 선혜를 붙들었다. 그리고 품에 꼭 안아주었다.
“오늘도 괜찮을 거예요.”
티 내고 있진 않지만 불안해하는 선혜를 위한 말이었다. 선혜는 웃으며 태준의 등을 쓸어주었다.
“네.”
수호의 앞에서 보란 듯이 가볍게 입을 맞추고 헤어졌다.
선혜는 차를 타고 출발하면서 생각했다.
퇴근길에, 스케치북과 연필을 사 가야겠다고.
*
선혜는 퇴근길에 스케치북과 연필을 샀다. 사는 김에 색연필도 샀다.
기분 좋게 병동으로 들어서는데 어느 한 병실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났다. 임종을 앞둔 환자가 머무는 병실이었다.
병동에 오며 가며 얼굴을 알고 지낸 아주머니가 손수건으로 입을 틀어막고 병실 밖에서 울고 있었다. 망연한 얼굴로 바라보는데 눈이 마주쳤다.
평소에는 인사만 하고 지나치는 사이였지만 차마 지나칠 수가 없었다. 선혜는 다가가 서툴게 위로를 건넸다.
“좋은 곳 가셨을 거예요. 너무 슬퍼 마세요.”
아주머니가 그 말에 오열을 했다. 선혜는 팔을 뻗어 아주머니의 어깨를 다독여주었다. 아주머니는 울며 얹힌 것들을 선혜에게 털어놓았다.
“너무 후회가 돼.”
선혜는 잠자코 들어주었다.
“살아 생전에 원망만 했거든. 지금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닌 건데, 그렇게 원망만 했어. 손도 많이 잡고 사랑한다고 많이 말하라고 주위에서 많이들 그랬거든? 근데 부끄럽다고 잘 안 했어. 무엇보다도 그게 제일 후회가 돼…….”
아주머니가 붉어진 눈시울을 들어 선혜를 보았다.
“아가씨는 나처럼 그러지 마. 아버지 손도 많이 잡아주고, 사랑한다고 많이 말해 드려. 부끄럽다고 피하지 말고. 알았지?”
나처럼 후회하지 마. 아주머니가 젖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아주머니의 말에 선혜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는 아주머니의 손을 꼭 잡아주며 아주머니의 눈물이 그칠 때까지 옆을 지켜주었다.
*
병실로 들어서자 석주가 밝은 표정으로 반겨주었다.
“왔어?”
“네. 엄마는요?”
“가게에 일이 있다고 잠깐 갔어.”
선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석주에게 스케치북과 새 연필들을 건네주었다. 석주는 아이처럼 기뻐하며 스케치북과 연필을 받았다. 그러다 선혜의 얼굴을 보더니 궁금한 눈으로 물었다.
“얼굴이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선혜는 자기도 모르게 손사래까지 쳤다.
“아니에요. 퇴근해서 피곤한가.”
“피곤하면 집에 가지. 나 혼자 있어도 괜찮아. 얼른 가.”
“됐어요. 있다가 갈게요.”
실랑이를 해 봤자 선혜가 이길 걸 알았는지 석주는 더 이상 보채지 않았다. 다만 새 스케치북에 새 연필로 그림을 끄적일 뿐.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선혜는 석주가 다 쓴 스케치북을 정리하기 위해 가져갔다.
그런데 그러다 실수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바닥으로 떨어지며 스케치북이 펼쳐졌다. 스케치북을 주워들던 선혜는 펼쳐진 스케치북의 한 구석에 자그맣게 적힌 글씨들을 발견했다.
봄. 민호, 인호, 준호, 수애, 수진, 수지…….
인호라는 이름과 수애라는 이름에 동그라미가 처져 있었다.
“이게 뭐예요?”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선혜가 물었다. 그림을 그리던 석주는 선혜가 가리킨 글씨를 보더니 민망한 얼굴로 웃었다.
“아, 그거 그냥…….”
멋쩍은 듯 머뭇머뭇. 그러다 선혜의 배를 바라보며 입을 연다.
“둘째 이름을 생각해 봤거든.”
선혜는 눈을 깜박였다.
“그냥 혼자 이것저것 생각해 본 거야. 크게 신경 안 써도 돼.”
석주는 그렇게 말하고 그림을 마저 그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툭, 연필이 부러진다.
석주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자꾸 부러지네, 하는 혼잣말에 가슴이 아팠다. 연필이 닳아 없어지는 속도보다, 손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아 떨어뜨리거나, 힘 조절이 되지 않아 연필 끝이 부러지는 나날들이 갈수록 늘어가고 있었다.
소모되는 연필의 양 만큼, 석주의 수명이 닳아 없어지기라도 하는 느낌이었다.
선혜는 부러진 연필 끝으로 그림을 그리려 애쓰는 석주를 만류했다. 칼을 들어 능숙하게 연필을 깎아주었다. 석주는 말없이 선혜가 연필을 깎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인호랑 수애가 제일 마음에 들어서 동그라미 치신 거예요?”
불현듯 선혜가 던진 질문에, 석주가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들이면 인호가 젤 나을 것 같고, 딸이면 수애가 제일 나을 것 같아서.”
“아들이면 좋겠어요, 딸이면 좋겠어요?”
“딸.”
망설임 없는 대답이었다.
“너 닮은 손녀 보고 싶긴 해.”
선혜는 연필을 깎던 걸 멈추고 석주를 바라보았다. 석주는 다소 씁쓸하게 웃은 뒤 선혜의 시선을 피했다. 선혜는 고개 숙여 다시 연필을 깎기 시작했다. 다소 숙연한 분위기가 병실을 채웠다.
연필을 다 깎아 건네준 뒤 석주가 끄적인 아이의 이름을 보던 선혜가 석주에게 물었다.
“이거 이름, 무슨 뜻이에요?”
석주가 그림을 그리며 말했다.
“별 대단한 뜻은 없고. 인호는 끌 인(引)자에 보호할 호(護)자를 썼어.”
“끌 인이요?”
“끌 인자가 ‘물리치다’라는 뜻이 있거든. 물리쳐서 보호하라는 뜻이야. 씩씩한 이름이지?”
“수애는요?”
“지킬 수(守)에 사랑 애(愛).”
석주가 무안한 얼굴로 웃었다.
“별거 없지? 이럴 줄 알았으면 한자 공부 좀 더 할걸.”
선혜는 고개를 저었다. 좋은 이름이었다. 인호, 수애.
애 이름에 대한 고민이 사실 많긴 했지만 아직 태어나기까지 한참이 남아서 결정을 미뤄두고 있었다.
아버지가, 태어날 애를 보는 걸 바라는 건 무리일 것이다.
어쩌면 가시기 전 마지막으로 주는 선물일지도.
선혜는 그림을 그리는 석주의 손을 가만히 움켜잡았다. 석주가 그림을 그리다 말고 선혜를 보았다.
“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 쓸게요.”
“정말? 마음에 들어?”
“네.”
석주가 활짝 웃는다. 그 모습을 보며 선혜는 석주의 손을 꼭 움켜잡았다. 오기 전 들었던 아주머니의 말이 떠올랐다. 손을 많이 잡아주지 못하고, 사랑한다는 말을 못 한 게 제일 후회가 되었다는 그 말이.
손은 어떻게 잡긴 했는데…… 그다음이 문제다. 사랑한다는 말이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계속 머뭇거리는 동안 얼굴에 열이 올랐다. 그 모습을 본 석주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물었다.
“너 어디 아프니? 얼굴이 발개.”
“아니, 그게 아니라…….”
선혜는 무안하여 고개를 돌렸다.
다짜고짜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 게 쉽지가 않다. 그게 원망했던 사람이라면 더욱이.
‘원망했던.’
선혜는 생각을 하다가 문득 그 단어를 곱씹었다. ‘원망하는’이 아니라 ‘원망했던’.
나, 언제부터 내려놓았던 거지.
갑작스러운 깨달음에 머리가 멍해진다.
“선혜야?”
걱정스럽게 부르는 석주의 목소리에 선혜는 정신을 퍼뜩 차렸다. 빤히 석주의 얼굴을 보고 있던 선혜의 입술이 달싹였다.
“그…….”
“응?”
“그…… 사……. 사…….”
“응? 사 뭐?”
선혜의 눈이 빠르게 깜박인다. 입가에 경련이 인다.
아. 못하겠다. 죄송해요, 아주머니, 아니 아버지.
선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상하게 자꾸 덥네요. 잠깐 나갔다 올게요.”
도망치듯 병실을 나서 병실 문 앞에서 자괴감 어린 얼굴로 머리를 감싸는 선혜.
미치겠다는 표정이다.
한편 석주는 닫힌 병실 문을 보며 소리 없이 웃었다.
나이가 들면 눈치가 느는 법이다.
선혜가 무슨 말을 할지 벌써 눈치 챘다.
고마운 마음이 컸다. 이런 나에게 그 말을 해주려는 네게 한없이 고맙다.
결국 그날 선혜는 말하지 못했다.
대신, 글로 남기고 갔다.
[사랑해요, 아버지.]
선혜가 남긴 쪽지를 본 석주가 작게 중얼거렸다.
“진짜 내 딸이라니까…….”
말을 마친 석주는 다시 그림 그리기에 집중했다.
그리고 그 그림은 석주가 남긴 마지막 선물이 되었다.
*
석주가 그날 그린 그림은 어떤 여자아이의 초상화였다. 일곱 살배기 어린 여자아이. 수애라고 이름 지은 선혜의 딸 말이다.
사실 상상으로 그려냈다기보다는, 석주의 기억 속에 있는 어린 선혜였다. 어린 그 시절과 달리 활짝 웃는 얼굴.
그리고 먼 훗날. 그림에서 현실이 된 아이가 선혜를 보며 물었다.
“엄마. 내 이름은 누가 지어준 거야?”
선혜는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봄이 다가오던 날 아버지와 나누던 대화를. 오랜 시간이 지나도 선명하기만 한 기억.
“외할아버지가.”
“외할아버지가?”
“응.”
선혜의 딸, 수애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외할아버지는 어떤 분이셨어, 엄마?”
선혜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네 이름처럼 살려고 하신 분.”
“내 이름처럼 살려고 한 게 뭔데?”
선혜는 희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사랑하고, 지켜주려고 애썼던 사람.”
떠나던 마지막까지 그랬던 사람.
‘씩씩하게 살아, 선혜야. 남들이 뭐라 해도 흔들리지 말고.’
선혜는 석주의 유언을 떠올렸다. 고개 들어 창밖을 보았다.
화창하고 맑았다. 아버지가 떠나던 그날처럼.
떠올리자 그날의 후회가 생각이 났다.
가장 큰 후회는 그것이었다.
사랑한다고, 많이 말해주지 못했던 것.
부끄럽다는 이유만으로 해 주지 못했다. 글로만 남겼을 뿐. 충분하다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가장 큰 후회로 남았다. 지금도 여전히 가슴을 무겁게 만들 정도로.
“엄마?”
저를 부르는 수애의 목소리에 선혜는 고개 돌려 수애를 바라보았다. 손을 뻗어 흐트러진 아이의 잔머리를 쓸어 올리고 입을 열었다.
“사랑해, 수애야.”
그때는 차마 말로 하지 못했던, 글로만 남겼던 말.
수애가 폭삭 선혜의 품에 안겼다.
“나도, 엄마.”
선혜는 행복한 얼굴로 웃었다. 멀리 부엌에서 요리를 하던 태준이 빼꼼 고개를 내민다.
“나는요? 나는?”
“아빠, 좀.”
이제 중학생이 된 수호가 태준을 말린다. 투덜거리는 태준과 수호 사이에 작은 실랑이가 오고 가고 선혜와 수애는 그 모습을 보며 웃었다.
더할 나위 없이 사랑으로 가득한 가족의 모습이었다.
# 외전 – side story
다가오는 봄에 지민은 새로운 회사에 취업을 했다.
이직 난에 운이 좋았다고나 할까. 레어미디어에서 일한 경력으로 경기도에 위치한 작은 디자인 회사에 취업할 수 있었다.
‘잘해 보자.’
첫 출근 날. 지민은 빌라에 버금가는 회사 건물 앞에서 굳은 결심을 한 뒤 안으로 들어갔다.
“아, 어서와요 김지민 씨.”
건물 안 사무실로 들어서자 사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반갑게 지민을 맞아주었다. 서글서글한 인상의 사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였다.
사무실은 사십 평 남짓이었는데 디자인을 하는 회사답게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었다. 작은 회사답게 직원은 몇 없었다.
사장은 직원들에게 지민을 소개했다. 직원들도 모두 인상이 좋았다. 회사 분위기도 좋았고. 새 출발치고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때였다.
비어 있는 책상 하나가 보였다.
한눈에 보기에도 지저분하게 어질러진 책상이었다. 먹다 남긴 쿠키가 널브러져 있는데…… 뭔가 쿠키의 모양새가 낯이 익었다.
어디서 봤더라.
고개를 갸웃하는 때였다.
“김지민 씨.”
사장이 부르는 소리에 지민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사장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네, 사장님.”
사장이 반걸음 다가와 섰다. 서글서글했던 첫인상과 다르게 조금은 눈에 힘을 주고 지민을 쳐다본다.
부담스럽기도 하고 무섭기도 해서 고개를 슬쩍 뒤로 빼며 눈치를 보는 때였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몇 가지 있는데 말야.”
사장이 검지를 척하니 들어올린다.
“첫째는 사내 연애.”
이번엔 중지.
“두 번째는 헛소문.”
순간 움찔할 뻔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사장의 눈이 가늘어지기에 지민은 긴장하며 쳐다보았다.
그의 엄지가 척하니 올려졌다.
“쌈박질.”
지민은 눈을 깜박였다.
쌈박질이라니.
사장이 인상을 한껏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사내에서 아무리 갈등이 생겨도 말이야, 큰 소리를 내면서 싸운다든가, 하는 건 자제해 줬으면 좋겠어. 여기는 사적인 공간이 아니니까. 공과 사 구분해 달라는 얘기지.”
정말 질색하는 표정이었다.
“안 그래도 작은 회사라 다들 얼마나 불편해지겠어, 안 그래?”
“네. 그렇죠.”
“우리 지민 씨 인상도 좋으니까 그럴 일 없을 거라고 믿어, 응?”
지민은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사장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돌아서다가 어느 한 곳을 응시하더니 인상을 확 찌푸렸다.
아까 지민이 쳐다보던 그 자리였다.
지저분하게 어질러져 있던 책상.
“윤 주임 연락 한번 해 봐.”
옆에 있던 다른 직원에게 사장이 말했다. 직원이 사장의 눈치를 보다 어디론가 통화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사무실 문이 열리고 한 여자가 사무실로 들어왔다. 지민은 문 쪽을 돌아보았다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문이 열리고 들어온 건 여자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으로 치장한 여자. 입은 걸 다 합하면 회사에서 받는 연봉을 훌쩍 넘는 금액이었다.
하지만 지민이 놀란 건 여자가 비싼 명품으로 치장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 여자가 다름 아닌 고은이었기 때문.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했던가.
고은을 보자마자 열이 머리 끝까지 솟아올랐다. 졸지에 소문을 지어낸 장본인이 되어 사람들에게 눈총을 받았던 나날들이 떠올랐다.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퍼트린 건 맞지만 만들어낸 건 아닌데. 분명 카페에서 고은이 수호가 태석에게 아빠 소리를 하는 걸 봤다고 했었다. 엄연히 말하면 소문을 지어낸 건 고은이었다.
억울한 마음에 화가 고은에게 향했었다. 그래서 고은의 번호를 알아내 전화를 해서 따진 적이 있었는데 그때 고은이 뭐라고 했었더라.
‘너나 잘하세요. 지가 잘못 들어서 퍼트려놓고 괜히 남 탓이야.’
그러고서 전화를 뚝 끊었다. 번호까지 바꿔서 더 연락해 따지지도 못했다.
만나기만 해 봐라, 가만 두지 않으리.
끓는 속을 다스리며 이직을 준비하느라 얼마나 힘들었었나.
힘겨웠던 나날들을 떠올리는 지민의 두 주먹이 꽉 말아쥐어졌다.
한편 고은은 지민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짓던 것도 잠시뿐. 얼마 전 신입 사원이 온다고 했었던 사장의 말을 떠올리며 여유를 되찾았다. 자신이 윗사람이니 지민이 허튼짓을 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신입 사원이신가 보네요.”
웃으며 다가와 손을 내민다.
“반가워요. 나는 윤고은 주임이에요. 앞으로 잘 부탁…… 악!”
하지만 고은은 인사를 끝맺지 못했다. 다짜고짜 달려들어 머리채를 휘어잡는 지민 때문이었다.
그 광경을 본 모두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지민은 악에 받쳐 소리쳤다.
“너 잘 만났다. 내가, 내가 너 때문에! 너 때문에 무슨 꼴을 당했는 줄 알아, 이 나쁜 년아!”
“이거 놔! 이런 미친……!”
“말려, 빨리 말려!”
사장이 소리를 지르고 직원들이 달려와 두 사람을 뜯어 말리기 시작했다. 지민이 떨어져나가자 고은도 제 성질을 못 이기고 달려들었다.
작은 사무실 중앙에서 난데없이 벌어진 드잡이. 사장은 화가 나 얼굴이 벌게져서 소리쳤다.
“그만하지 못해!”
호랑이 같은 외침에 드잡이가 멈추었다. 지민도 고은도 만신창이가 된 얼굴로 사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사장은 기가 막힌 얼굴로 둘을 번갈아 보다가 헛웃음을 쳤다. 하지만 곧 그 웃음은 씻은 듯 사라지고 서늘한 표정만이 남았다.
“두 사람, 내 앞에서 쌈박질 한 각오는 되어 있겠지.”
지민은 뒤늦게 가슴이 철렁했다. 첫 이미지는 망쳤지만 그래도 설마 자르거나 할 줄을 몰랐는데.
하지만 노조조차 없는 회사에서는 사장이 왕인 법.
사장은 그날로 지민과 고은을 해고시켰다.
지민은 다시 이직을 준비했지만 쉽지 않았고.
고은은 잘리지 않을 거라 자신하며 사들인 명품으로 인해 빚더미를 떠안게 되었다.
아, 그리고 민영은.
이직을 하지 못해 생활고에 시달리는 중이었다.
지독히도.
자업자득이었다.
*
기주는 오늘도 레어미디어에서 멀리 떨어진 식당에 자리를 잡았다.
멍하니 앉아 메뉴를 기다리고 있자니 현타가 크게 밀려든다.
내가, 왜 이러고 있나.
태석의 멱살을 잡은 이후로 계속해서 사직서를 냈지만 반려당했다.
태석의 입김이 작용한 것일 터.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태석이 원망스럽다. 인생에 천적이 있다면 그 녀석이 아닐까. 아니, 나만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신 태석 그놈은 신경도 쓰지 않을 텐데.
하지만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부서로 인사이동 신청을 계속 하고 있는데 그마저도 무산되었다. 기주는 회사뿐만이 아니라 지금 일하고 있는 디자인 팀에서도 벗어나고 싶었다. 아니, 도망치고 싶었다.
왜냐하면…….
“여기까지 와서 뭐 하세요.”
기주는 제 귀를 의심했다. 생각으로만 떠올린 사람의 목소리가 코앞에서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퍼뜩 놀라 고개를 들자 눈이 마주쳤다.
앞에 앉은 희재랑.
“으억!”
너무 놀라 희한한 소리를 내고 말았다.
기겁을 하고 놀라는 기주와는 다르게 희재는 특유의 무심한 표정으로 기주를 응시할 따름이다.
“여기 숨겨진 맛집이라도 되나 봐요? 여기까지 오셔서 점심을 다 드시게.”
“그, 여,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맨날 도망치길래 한번 따라와 봤어요.”
“뭐, 뭐?”
기주는 기가막혀 반문을 한 뒤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같은 회사 직원이라도 있을까 싶어서 말이다. 하지만 희재가 맛집이라고 칭한 게 무색하게도 가게에 있는 손님은 기주와 희재 뿐이었다.
‘도망갈까.’
잠깐 그런 생각을 했지만 때마침 음식이 나왔다.
기주는 차마 음식에 손도 대지 못하고 쳐다만 보고 있었다.
음식을 가지고 나온 아주머니에게 주문을 마친 희재가 기주를 빤히 쳐다보았다.
늘 느끼는 거지만, 이 남자. 사회 생활 오래한 것 같지 않게 표정관리가 잘 안 된다. 보는 사람 씁쓸하게.
“안 먹어요?”
기주가 눈만 들어 희재를 보았다. 그러더니 체념한 얼굴로 수저를 들어 밥을 먹기 시작했다. 희재는 턱을 괴고 기주가 밥을 먹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 불현듯 입을 여는데.
“그날 내가 별로였나 봐요?”
“풉!”
기주는 마시던 국물을 그대로 뿜어버리고 말았다. 미친듯이 기침을 하는 그에게 희재는 태연하게 물을 한 잔 따라 건네주었다. 희재에게 물을 받아 벌컥벌컥 들이켠 기주가 뒤늦게 반문했다.
“뭐?”
“이렇게 기를 쓰고 피해다니시니까 묻는 거예요.”
희재가 두 팔꿈치를 식탁에 기대고 기주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내가 별로였어요?”
기주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뭐 이런 여자가 다 있지. 무슨 여자가 이렇게 직설적이고, 저돌적이고…….
“난 좋았는데.”
솔직해?
그나저나, 뭐라고?
“좋았……다고?”
기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희재가 그런 기주를 응시하며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네.”
도회적인 눈빛으로 기주를 쓸어내린다.
“가끔 일하다가 생각날 정도로.”
그리고 다시 기주 눈을 똑바로 본다.
“좋았어요.”
기주는 눈을 깜박였다.
그러다 곧 얼굴이 벌게지고 헛기침을 한다. 차마 희재의 눈을 마주칠 수가 없어 시선을 피했다. 다시 밥을 한 술 크게 떠서 입 안에 넣으려고 하는 때였다.
“우리 또 할래요?”
이번에는 수저를 놓쳤다.
“가끔 만날래요?”
“사귀자는 뜻이야?”
희재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팀장님 좋아하시는 분 따로 있잖아요.”
머릿속에 지현이 떠오른다.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 아픈 사람. 절로, 마음이 숙연해지는 사람.
“연애하자는 거 아니에요. 그냥 가볍게, 진지함 빼고 만나자는…….”
“그래.”
기주의 대답이 생각 외로 쉽게 떨어지자 희재가 살짝 눈을 크게 떴다.
기주가 눈을 들어 희재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만나보자.”
별 의미 없는 대답이었다. 어차피 마음 없는 관계쯤이야 금방 끝날 게 뻔하니.
그런데.
“정말이죠?”
이 여자, 왜 이렇게 기뻐 보이지.
“무르기 없기예요?”
왜 이렇게 신났어. 이게 뭐라고…….
그나저나 이렇게 웃을 줄 아는 사람이었던가.
매번 까칠하게 굴거나 무표정일 때만 봐서 그런지 환하게 웃는 얼굴이 낯설다.
기주는 자기도 모르게 희재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고 희재가 시킨 음식이 나왔을 때 그 사실을 알아차렸다. 무안하여 시선을 돌렸다. 말없이 밥을 먹다가 문득 고개 들어 창 밖을 보았다.
창밖 목련 나무에 꽃봉오리가 맺혀 있었다.
목련, 이라.
목련을 닮은, 목련을 좋아했던 한 사람이 떠오른다. 결코, 가질 수 없는 사람이.
씁쓸하게 미소 짓다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희재가 있었다. 기주는 새삼스럽게 희재를 뜯어 보았다. 삼십대 중반임이 믿기지 않는 뽀얀 피부. 투명한 다갈색 눈동자.
착각일까. 어디선가 꽃향기가 나는 것 같다. 이상하다. 아직 꽃은 피지 않았는데.
봄은 아직인데.
“왜요?”
기주는 다시금 깨달았다. 자기도 모르게 희재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고개 숙여 밥을 먹는 와중에도 간간이 시선이 갔다. 눈이 마주친 어느 순간에는 웃고 말았다.
올해 나이 마흔 하나. 사고를 쳐도 단단히 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사람으로 잊는다고 하던데. 이렇게라도 네가 잊혀졌으면 좋겠다, 지현아.
그때의 기주는 몰랐다.
지현이 깨끗하게 잊혀질 줄은.
희재와 보낸 그 날 밤이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될 줄은.
파트너에서 진심으로 마음을 나누는 연인이 될 줄도.
계절이 아닌 또 다른 의미로 봄이 찾아오고 있었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