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만난 애 아빠-104화 (104/109)
  • #104. 맞잡은 손 + 에필로그

    석주는 병실에서 태준의 부모님과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태준에게 이야기를 전해 들은 현철과 시연이 부랴부랴 찾아온 것이었다.

    초면이기도 하고 낯을 많이 가리는 석주는 어색해했다.

    “제가 차림이 이래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저희가 너무 갑작스럽게 찾아와서 죄송하죠.”

    시연이 공손하게 말했다.

    그러고 나서는 침묵이 찾아왔다.

    갑자기 오느라 준비한 말이 없었다. 시한부를 선고받은 사람에게 위로의 말을 전하고 싶은데 말을 고르기가 쉽지 않았다.

    “선혜와 수호를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의외로 먼저 운을 뗀 건 석주였다.

    “아시고 나서 많이 놀라고 당황스러우셨을 텐데.”

    시연이 손사래를 쳤다.

    “감사는요. 당연히 받아들여야죠.”

    “우리 선혜, 착한 아이예요.”

    석주가 조용히 말을 이어갔다.

    “겉보기에는 무심해 보이고 냉정해 보일지 몰라도, 누구보다도 생각이 깊고 마음이 따듯한 앱니다. 그러니 부디 오해하지 말아주세요.”

    “걱정하지 마세요, 사돈. 우리 새아가 사람 좋은 건 수호 잘 키운 것만 봐도 알 수 있거든요.”

    시연의 말에 석주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의 얼굴이 조금 가라앉았다.

    “제가…… 초면에 너무 염치없는 부탁을 드리는 것 같지만.”

    줄곧 고개를 숙이고 있던 석주가 고개를 들었다.

    “제가 선혜에게 해준 게 많이 없어요. 못난 애비 만나서 마음고생을 많이 했거든요.”

    석주의 떨리는 눈이 현철과 시연을 번갈아 보았다. 둘의 눈빛이 따듯해서일까. 용기가 생겼다.

    “그러니까 두 분께서 많이 아껴주세요.”

    석주가 고개를 푹 숙였다. 손을 테이블 위로 내어놓고 있어 절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우리 선혜, 잘 좀 부탁드립니다.”

    부탁을 하는 목소리가 떨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시연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현철은 마음 아픈 눈으로 석주를 보다가 손을 뻗었다.

    석주는 제 손을 감싸는 크고 듬직한 손길에 고개를 들었다.

    현철이 단단한 음성으로 말했다.

    “선혜는 이제 저희 가족이에요. 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그런 말씀 마세요.”

    석주는 현철의 손을 잡은 채 몇 번이나 머리를 꾸벅거렸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를 반복하면서.

    *

    태준과 선혜의 결혼식 준비는 착착 진행 중이었다. 식장도 예약했고 드레스와 태준의 턱시도, 그리고 수호의 예복까지 모두 고른 상태였다. 모두 일사천리로 척척 진행되었다.

    바쁜 와중에도 선혜는 석주에게 자주 들르고 있었다.

    병문안뿐 아니라 다른 것도 하고 있는 요즘이다.

    “여긴 좀 더 선을 추가하고요. 비율이 좀 안 맞아서 다시 맞추고…… 여긴 좀 지우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침대 위에는 스케치북, 연필, 그리고 지우개가 놓여 있었고 석주는 열심히 그림을 그리는 중이었다. 선혜가 석주에게 그림을 가르치게 된 지도 어느덧 한 달 반 남짓.

    선혜가 석주에게 그림을 가르쳐주게 된 계기는 사소했다.

    그림을 그리며 놀다 지쳐 잠이든 수호 옆에서 석주가 스케치북에 연필을 끄적이는 걸 보게 되었다.

    선혜와 눈이 마주치자 민망해하며 연필을 내려놓아 완성본을 보지 못했지만, 연필로 그린 것 치고 꽤 섬세하고 다채로웠다.

    그림을 그리는 데 집중하던 아버지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린 선혜는 그길로 스케치북을 비롯한 연필과 지우개 등 미술 도구를 선물했다.

    그 뒤로 석주는 그림 그리기에 몰두하기 시작했고 선혜는 자연스럽게 그의 선생이 되었다.

    가르치면서 알게 되었다. 미술에 대한 재능을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았다는 사실을.

    아버지의 꿈이 원래는 의사가 아니라 화가였다는 사실도.

    할머니에 의해 오랫동안 묻어두었던 꿈을 다시 꺼내기 시작한 석주는 전보다 훨씬 행복해 보였다.

    “오. 잘 그렸네?”

    과일을 깎던 경애가 다가와 그림을 보더니 감탄했다. 석주의 옆에 바짝 서서 그림을 구경하다가 입에 과일을 넣어주는 행동이 자연스러웠다. 옆에 가까이 다가가 앉는 모습도.

    사이 좋은 부모님의 모습은 이젠 익숙하기만 했다.

    지난 1차 항암을 부작용 없이 무사히 마친 뒤, 석주는 경애의 집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리고 이주 간격으로 병원에 입원해 항암 치료를 받고 있었다. 이번이 벌써 세 번째 항암이었다.

    치료를 이어가고는 있었으나 큰 차도는 없었다. 항암은 완벽한 치료제가 아니었다. 다만, 암의 진행 속도를 더디게 할 뿐이지.

    치료를 하는 동안 표정은 밝아진 석주였으나, 안색은 큰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살이 더 빠져서 야위어 보이면 모를까. 가끔 그 사실을 대면할 때마다 가슴이 갑갑해졌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선혜는 무던히도 애쓰고 있었다.

    심호흡을 하고 있는데 문득 시야에 들어오는 광경이 있었다.

    어느 틈에. 경애와 석주의 손이 다정하게 포개어져 있다. 자기도 모르게 빤히 바라보자 경애가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가 선혜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불에라도 덴 것처럼 화들짝 놀라며 석주의 손을 놓는 경애다.

    선혜는 어이없는 얼굴로 웃었다.

    “자리 비켜드려요? 둘이 오붓한 시간 보내게?”

    “얘는! 그냥 늬 아빠 손이 좀 차서 그런 거거든!”

    “아아. 네.”

    들은 척 만척.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인 선혜는 물을 뜨고 오겠다는 핑계를 대며 병실을 나섰다. 병실 문을 닫기 직전 틈새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민망해할 때는 언제고 석주의 손을 다시 잡고 있는 경애다. 제 손을 덥히는 경애를 바라보는 석주의 시선이 따듯했다. 따사로운 햇살 아래 다정한 두 사람의 모습이 보기 좋아서 선혜는 오래도록 바라본 뒤 문을 닫았다.

    문을 등지고 돌아서는 때였다.

    때마침 병실로 다가오는 의사와 마주쳤다. 석주의 주치의였다.

    선혜와 마주치자 다소 난감한 얼굴로 다가온다.

    “보호자 분.”

    말을 꺼내는 의사의 표정이 밝지 않았다.

    “제가 드릴 말씀이 있는데 잠깐 시간 괜찮으실까요?”

    *

    선혜가 없는 병실. 경애와 석주는 손을 하나씩 포갠 채 TV를 보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선혜 얘는 왜 이렇게 안 와.”

    시간을 확인한 경애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석주도 그림을 그리다 말고 시간을 확인했다. 선혜가 물을 뜨러 나간다며 병실을 나간 뒤 벌써 삼십 분이나 지나 있었다.

    연락도 없이 오질 않으니 슬슬 걱정이 된다. 석주가 연필을 내려놓고 핸드폰을 들어올리는 때였다.

    병실 문이 열리고 선혜가 들어왔다. 채워오겠다는 물병은 텅 비어 있었고 찬 바람을 쐬었는지 뺨이 얼어 있었다.

    “선혜 너…… 왜 그래?”

    그런 선혜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천천히 다가오다가 석주를 보더니만 금세 눈시울을 붉힌다. 손등으로 입을 틀어막은 선혜의 입에서 흐느낌이 터져 막힌 틈새로 신음처럼 새어나왔다.

    놀란 석주가 침대에서 일어나다가 순간 눈앞이 어지러워 휘청거렸다. 경애는 석주를 부축함과 동시에 걱정스럽게 선혜를 보았다.

    “선혜야.”

    겨우 울음을 삼킨 선혜가 천천히 다가왔다. 다가와 석주의 안색을 살핀다.

    마냥 흰 줄 알았던 안색도, 노란빛이 감도는 흰자도 이제야 눈에 들어왔다.

    왜 몰랐을까.

    ‘환자분 간 수치와 신장 수치가 상당히 안 좋아요.’

    의사가 전한 소식은 희망과는 거리가 멀었다.

    ‘죄송하지만…… 더 이상의 항암 치료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호스피스로 전과해서 그쪽으로 치료받는 게 여러모로 나으실 것 같아요.’

    선혜는 손을 뻗어 석주의 손을 잡아보았다. 뒤늦게 깨달았다. 그간, 아버지의 손을 한 번도 잡아 본 적 없다는 사실을.

    “아빠. 나 부탁이 있어요.”

    떠오르는 의사의 말을 부정하듯, 선혜는 입을 열었다.

    “나 시집갈 때 같이 입장해 주면 안 돼요?”

    석주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경애도 마찬가지였다.

    석주는 시선을 천천히 내려 선혜가 잡은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한동안 쳐다보다가 그가 고개 들어 선혜와 눈을 맞추었다.

    “그래.”

    힘을 주어 선혜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아빠가 약속할게.”

    힘을, 더욱 준다.

    “꼭, 그럴게.”

    다부진 다짐을 받은 선혜는 웃었다.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석주는 호스피스로 전과 전동이 되었다.

    퇴원 예정은 없었다.

    *

    2월 말. 봄을 앞둬서 그런지 바람이 이젠 차지 않다. 햇볕도 따사로웠다. 봄의 기운을 머금은 푸른 잔디가 넓게 깔린 서울 외곽의 한 카페는 결혼 준비에 한창이었다.

    “외숙모 진짜 이쁘다. 그치, 엄마.”

    야외에 간단하게 마련된 신부 대기실. 하얀 벤치에 부케를 들고 앉아 있는 선혜를 보며 세빈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태연 또한 답지 않게 놀란 눈으로 선혜를 보고 있었다.

    화려한 외모는 드레스와 전문 메이크업에 힘입어 더욱 빛을 발하고 있었다. 태연의 남편인 하산이 농담과 진담을 반반 섞어 자신의 회사로 이직하라며 몇 번을 권유했는지 모른다.

    태준은 그런 선혜의 옆에 꼭 붙어 앉아 있었다. 선혜를 바라보는 눈동자에서는 금방이라도 꿀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았다.

    수호도 상황이 다르진 않았다.

    “엄마 오늘 너무 예뻐. 천사 같아.”

    칭찬에 인색한 수호가 눈을 빛내며 하는 칭찬에 선혜가 머리를 쓰다듬으며 고맙다고 말했다.

    그런 선혜의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다소 어두워 보였다. 고개를 돌린 선혜의 시선이 식장 입구에 닿았다. 벌써 몇 번째 쳐다보는지 모를 일이다.

    엄마인 경애 쪽을 바라보면 상황이 비슷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곱게 한복을 차려입은 경애는 한숨을 내쉬며 비어 있는 옆자리를 응시 중이었다.

    결국 석주는 결혼식에 오지 못했다.

    며칠 전. 혈액 검사상에서 면역 수치가 급격히 떨어져 외출을 엄격히 금지당한 석주였다.

    그래도 차츰 오르고 있어 오늘 아침 혈액검사를 확인한 뒤에 가능하면 외출을 받아 오기로 했는데 수치가 애매하여 결국 외출을 받아내지 못했다.

    선혜는 쓴웃음을 지었다.

    충동적으로 괜한 부탁을 드렸나 싶었다.

    아버지 성격에 엄청 미안해하실 텐데. 마음의 짐을 덜어주기는커녕 짐을 더 얹어준 기분이 들어 마음이 무거워졌다.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다가 태준과 눈이 마주쳤다. 선혜는 반쯤 내쉰 한숨을 도로 들이켰다. 함께 좋은 날을 맞는 사람 옆에서 이 무슨 추태인지. 태준에게 미안한 마음이 절로 들었다.

    하지만 태준은 선혜를 탓하는 대신 선혜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입장, 나랑 같이 해요.”

    선혜는 엷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태준이 잡아준 손에 힘을 주었다.

    식을 오 분 앞둔 시간이었다.

    플래너의 안내를 받아 태준과 나란히 자리에서 일어서는 때였다.

    저벅거리며 누군가가 천천히 다가와 앞에 섰다. 고개를 든 선혜는 깜짝 놀라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아빠.”

    석주가 앞에 서 있었다. 태준이 미리 마련해주었던 예복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채였다.

    “병원에서 외출 허락 못 해준다고 했다면서요.”

    “그랬는데…….”

    석주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그냥 몰래 빠져나왔어.”

    어이없어 바라보는 와중 석주가 손을 내밀었다. 면장갑을 낀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동안 태준이 손을 놓아주었다.

    선혜가 천천히 석주의 손을 잡았다.

    플래너의 안내를 따라 버진로드 끝에 섰다. 돌아본 하객들이 석주를 보고 놀라 순간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경애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한참을 돌아보고 있었다. 석주는 갑자기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자 긴장했는지 몸을 굳혔다.

    “그, 연습을 못 했는데 괜찮을까?”

    소심하게 묻는 석주에게 선혜가 말했다.

    “괜찮아요.”

    괜찮다고.

    “비틀거려도, 헛디뎌도, 넘어져도 다 괜찮아요.”

    서툴러도 괜찮으니까.

    “옆에만 있어 주세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석주가 말 못 할 눈으로 선혜를 바라보는 동안 태준이 입장했다. 석주와 선혜는 손을 잡고 나란히 버진로드의 시작점에 섰다.

    “신부, 입장!”

    웅장한 음악이 깔린다. 하얗게 깔린 융단 위로 석주와 선혜의 발걸음이 하나씩 나아갔다.

    석주는 용케 비틀거리지도, 헛디디지도 넘어지지도 않았다.

    다만 나아가는 내내 조용히 눈물을 흘릴 뿐.

    그런 석주에게 하객들의 박수가 하나둘 쏟아지기 시작했다.

    응원과 격려의 박수에 힘입어 드디어 길의 끝에 다다랐다. 선혜의 새로운 시작을 함께 할 사람이 끝에 서 있었다. 이제 그 사람에게 선혜를 넘겨 줄 때가 되었다.

    석주는 고개를 돌려 선혜를 마주 보았다.

    “선혜야.”

    달싹이는 입술에 머뭇거림이 묻어났지만.

    “아빠가 많이 많이.”

    그는 말했다.

    “사랑한다.”

    사랑한다고.

    선혜는 눈물이 글썽한 눈으로 석주를 보았지만 우는 대신 웃었다.

    아주 활짝.

    지금껏 한 번도 짓지 못했던, 아름답고 환한 웃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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