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만난 애 아빠-90화 (90/109)
  • #90. 방심은 금물

    춘희는 오늘도 창문 너머로 가게 밖을 응시하고 있는 경애를 보고 한숨을 내 쉬었다.

    석주가 휴가를 낸 일주일 동안 걱정스럽게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일이 잦아진 경애였다.

    “또 저러고 계시네.”

    “저런 거 보면 참 미운 정이 더 무섭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니까.”

    김 씨 아주머니가 옆에서 속닥거렸다. 다시금 한숨을 푹 내쉬는 춘희의 얼굴에도 그늘이 가득했다. 잠을 못 자기라도 한 것처럼 눈 밑이 거무죽죽하기도 했고.

    김 씨 아주머니가 놀리듯 물었다.

    “자기도 그 아저씨랑 그새 미운 정이라도 들었나 봐?”

    “그런 거 아니거든요. 사장님이 저러고 계시니까 속상해서 그렇지.”

    먹구름이 드리운 경애의 뒷모습을 보고만 있자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춘희는 성큼성큼 다가가서 경애의 옆에 털썩 앉더니 물었다.

    “왜 그렇게 창밖을 보고 계세요? 하도 쳐다보셔서 창문이 깨지겠어요.”

    괜히 과장되게 손짓까지 덧붙여가며 말이다.

    하지만 경애는 여전히 춘희가 아닌 창밖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그냥. 날씨가 너무 좋길래.”

    경애의 말마따나 날씨가 좋았다. 가을이 깊어진 만큼 높고 푸른 하늘은 그냥 보기만 해도 가슴이 탁 트이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그 하늘을 바라보는 경애의 얼굴은 왜 이리도 어두운지.

    다시금 경애의 얼굴을 펴게 하기 위해 춘희가 과장된 투로 크게 말했다.

    “선혜는 좋-겠다! 잘생긴 남편이랑 아들이랑 이런 날 놀이동산도 가고.”

    그 노력이 가상했는지 경애가 춘희를 이제야 돌아본다.

    “부러우면 너도 따라가지 그랬어?”

    “제가 왜요? 낄끼 빠빠 몰라요, 사장님?”

    “낄끼 빠빠? 그게 뭔데?”

    “나 참. 사장님 요새 유행어잖아요, 유행어!”

    춘희가 열심히 낄끼 빠빠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어이없어하던 경애는 춘희의 우스꽝스러운 손짓과 표정을 보다가 종내에는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경애가 웃는 걸 보며 춘희는 속으로 마음을 놓았지만 겉으로는 핀잔을 놓았다.

    “창밖 그만 보고 일어나세요. 사장님이 계속 이렇게 놀면 우리도 확 그냥 놀러 나갈 거예요.”

    “알았다, 알았어.”

    경애는 마지못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선이 닿는 곳에는 달력이 있었다.

    석주의 휴가가 끝나고 복귀하는 날이 빨간 동그라미로 표시되어 있었다.

    그 주는 석주가 일하는 마지막 주이기도 했다.

    월급 봉투를 준비해야겠다고 경애는 생각하다가 문득 웃고 말았다.

    돌아가신 석주의 어머니가 석주와 헤어지라며 줬던 봉투가 생각났기 때문에.

    그때도 백만 원. 내가 너에게 주는 월급도 백만 원.

    돈은 돌고 돈다던데 이렇게도 도는구나 싶었다. 웃음 끝이 씁쓸하게 물들었다.

    *

    같은 시각.

    선혜와 태준, 그리고 수호 일행은 놀이동산 앞에 도착해 있었다.

    할로윈 이벤트 첫날이니만큼 방문객들이 어마어마했다. 오픈 시간을 기다리는 사람들로 입구가 인산인해였다. 선혜는 걱정스럽게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정신 바짝 차려야겠네.’

    까딱하면 수호가 미아가 되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수호의 손을 꼭 부여잡으며 선혜가 말했다.

    “수호, 엄마랑 아빠 손 놓치지 말고 꼭 붙잡아야 돼? 어디 갈 때 혼자서 절대 가지 말고. 알았지?”

    “응!”

    벌써부터 신났는지 눈을 빛내며 고개를 힘차게 끄덕인다.

    “걱정하지 마요. 내가 우리 수호 손 단단히 붙잡고 있을 테니까.”

    태준이 수호와 잡은 손을 올려 흔들어 보였다. 선혜는 그의 말에 웃었지만, 불안감을 완전히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벌써부터 저쪽에서 엄마를 잃어버린 아이가 엉엉 울고 있었으니까. 다행히도 아이의 부모가 금방 아이를 찾아 안고 달래며 멀어졌지만, 마냥 남의 일처럼 보이지가 않았다.

    그런 선혜의 모습을 잠자코 바라보던 태준이 문득 물었다.

    “안 불안하게 해 줄까요?”

    선혜가 궁금한 얼굴로 태준을 바라보는데 태준이 씩 웃었다.

    그러더니 순식간에 수호를 번쩍 들어 제 어깨에 목말을 태웠다.

    갑자기 높은 곳에 올라선 수호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눈을 깜빡거렸다. 선혜도 수호와 비슷한 표정으로 수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렇게 하면 잃어버릴 위험 없죠?”

    “안 무거워요?”

    “네. 전혀. 선혜 씨도 태울 수 있을 걸요?”

    되도 않는 허세를 부리며 태준이 수호의 손을 잡고 만세를 한다.

    놀란 것도 잠시뿐.

    “우와. 진짜 높다!”

    수호가 눈앞의 풍경을 내려다보며 활짝 웃었다.

    때마침 오픈 시간에 임박해 놀이동산 입구가 열리기 시작했다.

    화려하기 그지없는 아이들의 꿈과 환상의 나라.

    태준이 그곳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자, 출발하겠습니다-.”

    “출발!”

    선혜는 조용히 미소 지으며 하나가 되어 앞장서는 두 사람의 뒤를 따라 놀이동산으로 들어갔다.

    가족 나들이의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

    쉼 없이 들어오던 손님들이 잠깐 뜸해지자 직원들은 모처럼만에 쉬고 있었다.

    하지만 쉬는 시간도 잠시 뿐.

    누군가가 입구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핸드폰을 보며 농땡이를 피우던 직원은 영업용 미소를 활짝 꽃피우며 손님을 받았다.

    티켓 하나를 보고 당황을 속으로 삼킨 뒤 물었다.

    “한 분 맞으시죠?”

    “네.”

    직원은 손목에 입장권 팔찌를 감아주고 손님을 들여보냈다. 다른 직원이 쪼르르 다가오더니 물었다.

    “뭐야. 저 아저씨 혼자서 온 거야?”

    “네. 그런가 봐요.”

    드문 일이었다. 이런 곳에 나이 지긋한 아저씨 혼자 오다니.

    그런데 그 드문 일이 오늘 두 번이나 일어났다.

    방금 비슷한 차림새의 어떤 남자도 안으로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커다란 가방을 들고 말이다.

    “아까 그 사람이랑 친군가.”

    하지만 그렇게 생각해 보려 해도 좀처럼 납득이 가지 않아서 두 직원은 동시에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

    ‘힘들다.’

    화장실에 다녀온 선혜는 지친 얼굴로 근처에 놓인 벤치에 털썩 앉았다. 욱신거리는 다리를 두드리는 와중이었다.

    “엄마! 나 탄다!”

    멀리서 수호의 외침이 들려와 고개를 들었다. 화장실을 다녀온 사이 줄어든 줄 끝에 선 수호가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지쳐 한숨을 쉬는 것도 잠시. 선혜는 웃으며 수호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곧 태준과 수호가 나란히 회전목마를 타러 들어가고 기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몹시도 즐거운지 수호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떠날 줄을 몰랐다.

    “저렇게나 좋을까.”

    덕분에 선혜의 얼굴에도 지친 기색이 금세 가신다.

    새삼스러운 눈으로 선혜는 수호를 응시했다.

    지금껏 이렇게 들뜨고 신이 난 수호는 본 적이 없었다.

    그 때문일까. 평소에는 잔소리를 잘 하지 않는 편이었는데.

    ‘수호야. 조심해야지.’

    ‘수호야. 혼자 가면 어떡해.’

    ‘수호야, 앞에 봐야지!’

    선혜의 입에서는 비슷한 내용의 잔소리가 쉼 없이 쏟아져나왔다.

    그럴 때마다 수호는 멋쩍은 얼굴로 웃으며 손을 잡고 착 붙어왔는데, 사랑스러운 그 모습에 야단을 치다가도 못내 웃어버리는 선혜였다.

    사실 수호랑 이런 곳에 놀러 온 게 처음은 아니었다. 수호가 다섯 살이었을 때 둘이서 동물원을 한 번 가본 적이 있긴 했다. 그때는 지금보다 더 어렸어도 이렇게 신나 보이진 않았는데.

    ‘아빠랑 노는 게 더 재밌나.’

    그렇게 생각하자 속이 괜히 쓰렸다. 순간 아차 싶었다.

    뭐야. 나 지금 질투라도 하는 거야?

    스스로가 우스워 헛웃음을 치며 머리칼을 쓸어올리는 때였다.

    “내 풍선!”

    어느 아이의 새된 목소리가 귓가에 파고들었다.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자 헬륨 풍선을 놓친 아이가 울먹거리며 허공을 보고 있었다.

    두둥실 떠오르는 풍선을 바라보며 선혜 또한 안타까운 표정을 짓는 때였다.

    멀지 않은 곳에서 아이의 아버지가 달려와 힘차게 발돋움을 했다.

    그러고는 풍선을 향해 팔을 힘껏 뻗었다. 찬란한 햇살이 풍선에 가려지고 역광에 비친 인영이 가까스로 풍선에 달린 끈의 끝부분을 붙들었다. 그 모든 광경이 선혜의 검은 눈동자에 선연하게 비쳤다.

    “우와! 아빠 최고!”

    울기 직전까지 갔던 아이는 아빠의 활약에 엄지를 치켜들며 활짝 웃었다. 아이의 아버지는 웃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놓치지 말라며 손목에 끈을 묶어주었다.

    “…….”

    그 모습을 바라보는 선혜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지어졌다.

    지금 본 광경과 비슷한 기억 하나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석주의 집에 맡겨지고 나서 며칠 뒤, 석주가 갑자기 놀이동산에 선혜를 데리고 간 적이 있었다.

    어색했지만 그래도 어린 마음에 설렜던 기억이 있다.

    석주는 말없이 선혜에게 솜사탕이며 장난감이며 사주기도 하고 사진을 찍어주기도 했다.

    조금씩 아버지와의 어색함이 흐려지던 찰나.

    ‘어!’

    석주가 사진을 찍어주고 있는데 손에 들려 있던 헬륨 풍선 끈을 놓치고 말았다. 사진을 찍던 석주가 놀라 뒤늦게 달려왔지만 풍선은 손 닿을 수 없을 만큼 날아간 상태였다.

    어린 선혜는 속상한 나머지 자기도 모르게 울고 말았다.

    우는 선혜를 두고 석주가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 때에 석주가 가지고 있던 삐삐가 울렸다. 병원에서 응급 호출이 온 것이었다. 별 수 없이 둘은 놀이동산을 나와야만 했었다.

    그때는 어린 마음에 아버지가 참 미웠었는데.

    다시 돌이켜 보니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할 것 같기도 하다.

    빛바랜 기억만큼 감정도 빛이 바래버린 건지, 자란 만큼 그때 아버지의 상황을 이해하게 된 건지.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의미 없이 바닥에 시선을 두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때였다.

    앞에 그림자가 지는가 싶더니 눈앞에 척하니 소프트 콘 아이스크림이 내밀어졌다. 손목에 익숙한 가죽 시계를 찬 사람.

    태준이었다.

    “안 먹어요?”

    선혜가 아이스크림을 받자 옆에 태준이 앉고 수호는 태준의 무릎 위에 앉았다.

    선혜의 표정을 살피던 태준이 문득 물었다.

    “피곤하면 숙소로 갈래요?”

    10월 말. 해가 제법 짧아져 조금씩 해가 기울어가고 있었다.

    선혜는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수호의 눈을 보고 멈추었다.

    아쉬움이 가득한 아이의 눈과 마주치자 잠깐 쉬자는 말이 차마 나오지 않았다.

    “아뇨. 페스티벌까지 보고 들어가요, 우리.”

    “어…… 그래요.”

    대답을 어영부영 마친 태준을 보며 선혜가 고개를 갸웃하는데, 태준이 대뜸 선혜의 아이스크림을 뺏어가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태준은 저를 바라보며 피식거리는 선혜를 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어떡하지…….’

    곤란함을 애써 숨기고 말이다.

    *

    “어떡해요?”

    남자 화장실.

    수호가 손을 씻으며 묻자 태준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호텔에서 불꽃놀이를 보며 프러포즈를 하려고 했는데 페스티벌을 다 보고 숙소로 가겠다는 선혜 때문에 계획이 틀어지고 만 것이다.

    “어쩌긴 뭘 어째. 플랜 B로 가는 거지.”

    “플랜 B?”

    못 알아듣는 수호에게 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뭔데요?”

    “별거 없어.”

    별거 없다.

    장소가 호텔에서 페스티벌 장소로 바뀐 것 뿐.

    페스티벌의 하이라이트인 불꽃놀이가 광장에서 열린다고 했다. 사람 많고 시끄러워서 잘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불꽃놀이가 끝날 때면 귓가에 속삭이는 말 정도는 들을 수 있겠지.

    태준은 주머니에 든 반지 케이스를 만지작거리며 결심을 굳혔다.

    “이제 나가자.”

    그런데 수호의 손을 잡고 화장실을 나가는 때였다.

    때마침 화장실로 들어오던 누군가와 맞닥뜨렸다.

    커다란 호랑이 인형 옷을 입은 직원이었는데 태준은 자기도 모르게 흠칫했다.

    태준이 비켜서지 않자 인형 옷을 입은 사람이 빤히 쳐다본다. 태준이 뒤늦게 무안한 얼굴로 비켜섰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인형 탈을 쓴 사람과 부딪히지 않게 조심하며 화장실을 나갔다.

    걸어가다 문득 뭔가 이상하다 싶어 태준은 멈춰 섰다.

    ‘직원용 화장실이 따로 있을 텐데.’

    급해서 달려오기라도 한 건가 싶었지만 아까 그 태도는 급한 거랑은 거리가 멀었다.

    그리고 사람을 왜 그렇게 뚫어지게 쳐다보는지. 인형 너머 새까만 눈이 생각나자 불쾌해졌다.

    “왜 그래요, 아빠?”

    “응? 아냐, 아무것도.”

    태준은 수호를 데리고 걸어갔다.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이던 수호는 걸어가다 비스듬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마주쳤다.

    “…….”

    이쪽을 바라보는 커다란 호랑이 인형과.

    이제껏 인형 탈을 쓴 사람을 보면 반갑게 손을 흔들었던 수호였지만 수호는 흠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수호의 얼굴도 태준과 마찬가지로 불쾌함에 찌푸려져 있었다.

    *

    어느덧 해가 저물어 날이 어둑해지더니 새까만 밤이 찾아왔다.

    페스티벌이 시작되자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개장 시간에 입구에서 봤던 인파보다 배나 되는 인파가 몰려들자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광장이 꽉 차게 되었다.

    일찍 도착한 덕택에 수호는 바리게이트에 딱 붙어 페스티벌을 구경하고 있었다.

    눈이 부실정도로 화려한 불빛과 군무들을 보는 수호의 눈이 반짝반짝했다.

    무용수들이 손을 흔들면 정신없이 손을 흔들며 인사하기 바빴다.

    이윽고 노래가 더욱 빨라지기 시작했다. 무용수들의 춤사위도 격렬해진다. 보는 사람들의 입 밖으로 탄성이 나오는 와중이었다.

    분장을 한 무용수들이 하나둘 바리게이트로 다가와 어린아이들에게 손짓했다. 수호에게도 마찬가지. 주위를 둘러보니 무용수들에게 불려간 아이들이 노래에 맞추어 즐겁게 춤을 추고 있었다.

    잠깐 주저하던 것도 잠시. 수호는 냉큼 무용수의 손을 잡고 바리게이트를 나섰다.

    서툴지만 무용수의 움직임에 맞추어 춤을 추는 수호. 그 모습을 보던 태준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주 신났네. 진작 데려올 걸.”

    “그러게요.”

    태준이 선혜를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슬며시 선혜의 손을 잡았다. 갑자기 태준이 손을 잡아오자 선혜가 고개 돌려 태준을 바라보았다.

    “앞으로 이런 데 자주 와요, 우리.”

    선혜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현란한 불빛이 스쳐 지나가는 선혜의 얼굴이 새삼 고혹적으로 태준의 눈에 비쳤다.

    가끔 그런 순간이 있다. 원래도 예쁜 이 사람이 더 특별히 예뻐보이는 순간.

    그래서 가슴이 벅차게 뛰는 순간이.

    그리고 또 그런 순간이 있다.

    계획 했던 것보다도 더 완벽한 기회가 오는 순간.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반지의 윤곽이 새삼 선명하게 느껴졌다. 어떤 신호처럼.

    페스티벌의 불빛은 불꽃놀이만큼이나 충분히 아름다웠다.

    “선혜 씨.”

    태준이 진지한 목소리로 부르며 선혜를 바라보았다.

    선혜는 자신을 담은 다갈색 눈동자를 가만히 마주 보았다.

    가끔 그런 순간이 있다.

    원래도 예쁜 이 사람의 눈이 특별히 더 예뻐 보이는 순간이.

    매일같이 불리는 자신의 이름이 특별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그래서 새삼 가슴 뛰는 순간이.

    태준이 천천히 주머니에 있던 반지 케이스를 꺼내려고 하는 때였다.

    뒤에서 누군가가 태준을 팍 밀었다. 하마터면 반지 케이스를 떨어뜨릴 뻔했다. 가슴이 철렁하여 손으로 케이스를 만지작거리다가 뒤를 휙 돌아보자 아이 아버지 한명이 재빠르게 사과를 해 왔다.

    “아, 죄송합니다.”

    덕분에 무르익었던 분위기가 팍 식어버렸다. 태준은 사과를 받으면서도 괜히 제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털었다. 그렇게 무심결에 앞을 돌아본 태준은 뒤늦게 깨달았다.

    “어?”

    “수호…….”

    그건 선혜도 마찬가지.

    방금까지만 해도 무용수와 춤을 추고 있던 수호가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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