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만난 애 아빠-71화 (71/109)
  • #71. 마음에 밟히는 사람

    수호는 경애의 집 마당에서 혼자 공놀이를 하고 있었다. 탱탱볼 하나를 바닥에 튀기기도 하고 담벼락을 향해 발로 차기도 하고.

    한참 그렇게 놀고 있는데 부엌에서 찌개를 끓이던 경애가 마당을 향해 소리쳤다.

    “수호야. 공 담 바깥으로 넘어가지 않게 조심해, 알았지?”

    “네- 할머니.”

    순순히 대답한 수호는 공차기를 그치고 손으로 공을 움켜잡았다.

    아까 장 보러 갔을 때 경애가 사준 탱탱볼은 아주 마음에 들었다. 색깔도, 던지는 대로 튀어 오르는 탄성도 무척이나. 하지만 엄마와 아빠를 기다리는 무료함을 완전히 씻어주진 못했다.

    수호의 시선이 대문 밖으로 힐끔 향했다. 전화를 해 볼까 싶었지만, 아까도 전화로 보챘기에 또 보챌 수가 없었다.

    ‘언제 오는 거야…….’

    엄마 아빠는 아직인가. 또 나만 쏙 빼놓고 둘이서만 재밌게 노는 모양이었다.

    서운함에 입이 댓 발 나오고 공을 차는 발에 힘이 불끈 들어갔다.

    뻥-. 발에 채인 공이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담을 향해 날아갔다.

    그런데 담벼락에 맞고 튀어오른 공이 근처에 있는 나무에 부딪히더니 허공으로 휙 솟아 올랐다. 남다른 탄성력에 거센 힘까지 보태어 차인 공이 담을 훌쩍 넘어간 건 순식간의 일이었다.

    수호는 당황하여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재빨리 대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자 비탈길을 따라 정신없이 굴러가는 공이 보였다. 수호는 잠깐 집 쪽을 돌아보았으나 망설임은 잠시뿐이었다.

    할머니가 사주신 공. 저대로 잃어버릴 수는 없지.

    ‘얼른 가져오자.’

    수호는 대문을 박차고 나가 공을 따라 뛰어갔다.

    *

    경애는 부엌에서 쉴 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한쪽 레인지에서는 찌개가 끓고 있었고 다른 쪽 레인지에서는 부침개가 노릇노릇하게 구워지고 있었다. 또 다른 레인지에 올려져 있는 찜기에서는 만두가 쪄지고 있었다.

    선혜가 태준과 함께 수호를 데리러 온다기에 다 같이 밥이라도 한 끼 먹을 생각이었다. 저번에는 해장이랍시고 국밥만 먹인 게 아쉬워 이전부터 한 번쯤은 제 손으로 사위 배를 두둑이 채워주고 싶었달까.

    무엇보다도 상견례 이전에 태준을 통해 태준의 부모님 성향도 좀 알아보고 싶었다.

    경애는 자신이 굽히고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집안 차이가 워낙 커야 말이다. 어떻게든 좋게 보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그래야 나중에 선혜의 결혼 생활이 무탈할 테니.

    뭐라도 사 가야 하나. 아, 옷은 뭘 입어야 하지…….

    이것저것 고민하며 분주하게 손을 움직이던 경애의 손이 멈칫했다.

    상견례까지 하기로 한 마당에 설마 아버지가 없는 걸 흠잡지는 않겠지.

    만약 선혜의 아버지에 대해 물어보면 뭐라고 둘러대나 걱정이 되었다. 차라리 사별이면 안타까워하고 말겠지마는, 헤어졌다고 하면 더 궁금해하고 어쩌면 언짢아할 수도 있었다. 가정환경을 운운하면서 말이다.

    생각해 보면 한 번도 안정적인 가정환경에서 자라지 못한 선혜였다.

    어린 시절에는 아빠 없는 애, 다 자라서는 엄마 없는 애, 그리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아빠 없는 처지가 되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다 제 탓인 것 같아서 속이 쓰려오는데 치이익, 찌개 넘치는 소리가 들렸다.

    경애는 서둘러 가스레인지 쪽으로 달려가 불을 껐다. 끓어오른 거품을 걷어내고 간을 한번 보았다.

    만족한 얼굴을 하며 고개를 끄덕이던 경애는 각종 밑반찬들이 놓여 있는 테이블 한가운데에 찌개를 내려놓았다. 온기가 날아가지 않게 뚜껑을 닫았다. 밥도 뜸만 들이면 끝이다.

    선혜 얘는 어디까지 왔으려나. 출발은 했나 모르겠네. 그런 생각을 하며 선혜에게 전화를 걸려던 경애는 마당이 조용하다는 사실을 뒤늦게 눈치챘다.

    “수호야?”

    핸드폰을 도로 내려놓고 경애는 거실을 향해 나갔다. 거실 창을 통해 조금씩 보이던 마당이 이윽고 시야를 가득 채웠지만 수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수호가 가지고 놀던 공도 보이지 않았고.

    반쯤 열린 대문만이 바람결에 흔들리고 있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경애는 서둘러 신을 벗고 뛰어나왔다.

    “수호야!”

    경애의 외침 뒤로 멀리서 빠앙-! 하는 클랙슨 소리가 들렸다.

    사색이 된 경애는 슬리퍼를 신은 채 정신없이 비탈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

    경애의 머릿속에 후회와 걱정이 정신없이 뒤섞였다.

    애가 혼자 놀게 내버려 두지 말걸. 설마 방금 클랙슨 소리가 수호와 관계된 건 아니겠지.

    상상만 해도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는 기분이었다.

    “수호야, 수호야!”

    정신없이 수호를 부르며 달려가는 때였다.

    골목이 교차되는 지점에 서 있는 수호가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정신없이 달려가던 경애는 수호에게 공을 닦아 건네주는 사람의 모습을 보자마자 차츰 멈춰 서고 말았다.

    수호에게 공을 건네며 머쓱하게 서 있는 이는, 다름 아닌 석주였으므로.

    쟤가 왜 여깄어?

    절로 얼굴이 찌푸려지는데 고개를 돌리는 석주와 눈이 마주쳤다.

    석주는 경애를 보더니 한껏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서둘러 눈을 피하더니만 바닥에 널브러진 물건들을 마찬가지로 떨어져 있던 봉투에 담기 시작했다.

    모두 인스턴트 음식이었다. 즉석밥, 3분 카레, 컵라면 기타 등등. 몇몇은 포장이 뜯어져 내용물이 흘러 나온 것도 있었다. 그중 가장 멀쩡한 건, 경애가 있는 방향으로 굴러오다 뒤집어진 참치캔이었다.

    석주는 머뭇거리다가 경애의 발치로 다가와 허리를 숙여 참치캔을 집어들었다. 말없이 돌아서는 그를 붙든 건 경애의 날 선 목소리였다.

    “너, 이제 우리 집까지 쫓아다니니?”

    “아냐, 그런 거.”

    석주가 즉각 반응하며 손사래를 쳤다.

    “우리 집도 이 근처야.”

    하지만 경애는 믿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근데 왜 집에 안 가고 수호 근처에 얼씬거리는데?”

    “그게…….”

    석주가 당황하여 말을 못 잇고 있는 걸 유심히 바라보던 수호가 입을 뗐다.

    “할아버지가 나 구해줬는데.”

    할아버지? 그 호칭에 경애가 수호를 홱 돌아보았다.

    “누가 할아버지야?”

    “우리 엄마 아빠잖아요. 그럼 할아버지 아니에요?”

    야무진 대꾸에 경애는 할 말을 잃은 얼굴로 수호를 보았다.

    언제 눈치를 챈 건지. 그러다 지난 밤 가게에서 소장을 향해 선혜가 제 딸이라며 울부짖던 석주의 모습이 떠올랐다. 하긴. 그 외침을 들었으니 이 야무진 아이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수호는 호기심으로 눈을 빛내며 석주를 빤히 쳐다보았다. 엄마의 아빠되는 사람이라니까 궁금한 건 당연하겠지만, 석주를 수상하게 여기는 경애의 입장에서는 달갑지 않은 모습이었다.

    경애는 수호의 손을 꼭 부여잡고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자신의 눈치를 보는 석주를 한껏 노려본 경애는 몸을 돌렸다.

    경애를 바라보는 수호의 눈에는 궁금증이 가득했다.

    대체 할아버지가 뭘 어쨌길래 엄마도, 할머니도 이토록이나 싫어하는 걸까.

    수호는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망연한 얼굴로 경애를 바라보고 있던 석주가 수호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친 그 순간에 방금 일이 생각이 났다.

    공을 주워 들던 그 순간 클랙슨 소리를 내며 달려들던 차 한 대.

    공포에 질려 꼼짝도 하지 못한 절체절명의 순간, 저를 끌어당긴 단단한 팔.

    폭삭 안긴 품은 먼지 냄새가 났지만 따듯했고, 운전자의 욕설을 듣지 못하게 귀를 가려주는 손 또한 마찬가지였다.

    달려오느라 땅에 패대기 쳐진 자신의 물건들을 챙기기보다 쓰레기 더미에 처박힌 수호의 공을 먼저 살펴주었다. 소맷부리로 오물을 닦아 건네주는 모습에서는 세심한 배려가 엿보였다.

    그리고 지금도, 자신이 손을 흔들자 슬며시 손을 마주 흔들어주는 모습까지.

    나쁜 사람으로 보이진 않는데.

    “늬 엄마 오면 할아버지 얘기는 꺼내지도 말어, 알았지?”

    정색하며 신신당부하는 경애에게 수호는 마지못한 얼굴로 알았다고 답했다.

    그러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힐끔 뒤를 본다. 석주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돌아보지 않는 경애를 하염없이 바라보면서.

    엄마도, 할머니도 꺼리는 사람이라는 걸 알지만.

    이상하게 수호는 할아버지가 싫지 않았다.

    *

    경애와 수호가 집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태준과 선혜가 경애의 집에 도착했다.

    수호는 선혜에게 달려가 와락 안겼고 서운함을 한껏 내비치며 아이처럼 툴툴거렸다. 태준과 선혜는 성심성의껏 수호의 투덜거림을 받아주었다.

    태준은 빈손으로 오지 않았다. 어디서 구했는지 커다란 몬스테라 화분을 하나 구해왔다. 꽃보다는 관엽식물을 좋아하신다 해서 가져왔다는 말을 애교스러운 미소와 함께 덧붙이면서 말이다.

    곧 네 사람은 한 식탁에 둘러 앉아 밥을 먹었다. 밥을 먹는 데서만 그치지 않고 식사를 마친 뒤에는 과일도 깎아 먹으며 시간을 보냈다.

    과일을 다 먹은 뒤 수호와 태준은 마당에서 공놀이를 하기 시작했다. 경애가 사준 그 탱탱볼로 말이다.

    벽에다가 던지며 홀로 놀 때 보다 훨씬 재미있는지 수호의 얼굴에는 내내 웃음꽃이 만발해 있었다. 소리 내서 까르륵 까르륵 웃기도 했다. 그 모습을 선혜와 경애가 베란다 창 너머로 응시하고 있었다.

    “잘 노네.”

    “그러니까.”

    선혜가 아이처럼 웃고 좋아하는 수호를 보며 말했다.

    “몰랐어. 수호가 밖에서 노는 걸 저렇게 좋아하는 줄은.”

    “괜히 자괴감 들지 마. 말도 안 하고 티도 안 내는데 아무리 부모라도 별수 있겠니?”

    “그래도.”

    “늬 아들인 걸 어쩌겠어.”

    약간의 비아냥이 섞인 말에 선혜가 경애를 돌아보았다. 때마침 경애도 선혜를 돌아보았다.

    “너, 약혼했었다면서.”

    약혼에 대해서는 경애에게 일언반구도 한 적이 없어 선혜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어떻게 알았어?”

    “늬 아빠한테 캐물어서 알았지.”

    “뭘 물어봤길래 아버지가 그런 얘기를 해?”

    “네가 왜 애를 배서 미혼모 센터에 있었냐고.”

    경애가 얼굴을 한 것 찡그리며 물었다.

    “약혼자가 아주 개차반 같은 놈이었다며?”

    “아버지가……그런 것까지 얘기했어?”

    “그래. 돈 가지고 너 흥정하려고 하고, 술 먹으면 너한테 손찌검도 하는 그런 놈이었다고. 나이도 무진장 많았다며?”

    선혜가 고개를 끄덕이자 경애는 이를 으득 갈며 진저리를 쳤다.

    “너는 왜 그런 걸 엄마 만나서 얘기를 안 해?”

    “해 봤자 별로 좋은 얘기도 아니잖아. 뭐 하러.”

    선혜는 고개를 돌리며 작게 말했다. 경애는 답답한 듯 선혜를 응시했지만 더 따져 묻지는 않았다.

    아마도 얘기를 들으면 자신이 속상해할까 봐 얘기를 안 했겠지.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더니, 어릴 때 모습 그대로다 싶었다.

    “그러는 엄마는 왜 나한테 아버지 만난 얘기 안 했어?”

    “해 봤자 별로 좋은 얘기도 아닌데 뭐하러.”

    자신이 했던 말을 그대로 따라하는 경애의 모습에 선혜는 열없이 웃어버리고 말았다.

    “나한테 또 말 안 한 거 없지?”

    선혜는 고개를 끄덕인 뒤 경애에게 물었다.

    “엄마는?”

    순간 경애의 눈이 흔들렸다. 눈치 빠른 선혜가 경애의 얼굴을 집요하게 쳐다보자 경애가 마지못한 얼굴로 입술을 뗐다.

    “아까 늬 아버지 마주쳤었어.”

    “어디서?”

    “이 근처에서. 집이 이 근처라더라.”

    선혜가 놀라 머리를 들고 경애를 쳐다보았다. 경애는 여전히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엄마 괜찮겠어?”

    “안 괜찮을 게 뭐 있겠어.”

    경애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지만 선혜의 눈에서는 걱정이 좀처럼 거둬지지 않았다.

    “내가 보안 업체 불러다가 CCTV라도 설치해 줄까?”

    “됐네요. 내가 혼자 사는 게 하루 이틀이야? 그리고 네 아버지 키만 크지 힘도 없어 뵈던데. 엄마가 언제든지 때려 눕힐 수 있거든?”

    “그래도.”

    “걱정 하지 마.”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연락 해야 돼?”

    “알았어, 지지배야.”

    둘이 대화를 마칠 때쯤이었다. 태준과 수호가 집으로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보던 경애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슬슬 집에들 가. 해 지면 골목 어두워져. 차도 밀릴 테고.”

    세 사람 모두 그 말에 아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창밖으로는 땅거미가 점점 짙게 내려앉고 있었다.

    *

    선혜와 수호는 태준의 차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뒷좌석에 앉은 선혜의 품에는 수호가 안긴 채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백미러로 그런 수호의 모습을 본 태준이 피식 웃었다.

    “너무 빡세게 놀아줬나.”

    선혜가 머리를 쓰다듬자 곧 눈을 감고 잠이드는 수호다. 잠드는 속도가 LTE급이었다.

    “태준 씨는 안 피곤해요?”

    “괜찮아요.”

    잠도 얼마 못 자고 애랑 놀아주기까지 했는데도 태준을 그의 말마따나 멀쩡해 보였다.

    “선혜 씨도 피곤하면 좀 자지 그래요?”

    “아니에요. 나도 괜찮아요.”

    대답한 선혜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응시했다. 후미진 골목이 노을에 물들어가는 풍경을 가만히 응시하는데 경애의 말이 생각이 났다.

    아버지 이 근처에 사신다고.

    그리고…… 엄마를 만났을 때 다 얘기를 했다고. 자신의 약혼에 대해서.

    의외였다. 선혜가 애를 배서 출가한 이유에 대해 한낱 거짓 없이 말했다는 사실이.

    자신이 짐작한 대로 돈 때문에 엄마 근처를 배회했다면 저렇게 사실대로 이야기했을 리가 없었다.

    돈 때문에 엄마 근처를 배회한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아버지 말대로 아니었던 걸까.

    ‘만나서 뭘 하려고 한 것도 아냐. 그냥, 멀리서라도…….’

    정말 그냥 보고싶어서였을까?

    혼란이 짙어지는 와중이었다.

    바라보는 창밖 풍경 속에 익숙한 사람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후줄근한 차림새로 바닥을 보며 걸어가고 있는 사람. 차가 천천히 옆을 지나가자 얼굴이 드러난다. 석주였다.

    골똘히 생각에 잠긴 얼굴이 제법 심각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차가 옆에 지나가는데도, 선혜가 뚫어지게 쳐다보는데도 알지 못했다.

    곧 차가 지나가고 석주의 모습이 뒤로 멀어졌다. 선혜는 자기도 모르게 뒤로 고개를 돌려 바라보다가 천천히 앞을 응시하였다.

    입 밖으로 저절로 한숨이 샜다.

    다시 볼 일이 없었으면 좋겠는데.

    바람과는 달리 자주 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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