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만난 애 아빠-37화 (37/109)
  • #37. 예상치 못한 복병

    “연애해요, 우리.”

    말을 마친 태준은 선혜의 답을 기다렸다. 선혜에게 닿은 시선은 결코 떼지 않은 채였다.

    한참 동안 태준의 얼굴을 동요를 머금은 눈동자로 바라보던 그녀가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차분한 손길이 커핏잔을 들어 올려 입가로 가져갔다. 침묵 속에서 얼음이 서로 부딪히는 잘그락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태준 씨, 나는요.”

    잔을 내려놓은 선혜가 입을 열었다.

    “나는 수호가 일 순위인 사람이에요.”

    선혜가 강조하듯 덧붙였다.

    “수호가 제일 중요해요.”

    거절인가. 그런 생각이 들어 맥이 축 빠지려는 때였다.

    “그래서…….”

    선혜가 답지 않게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태준 씨를 많이 서운하게 할 수도 있어요. 수호 보느라 시간도 많이 내지 못할 거고요.”

    태준의 눈이 서서히 희망을 품고 반짝이기 시작했다.

    선혜는 그 눈을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래도 괜찮겠어요?”

    “당연히 괜찮죠.”

    걱정스럽게 물은 게 무색하게도 태준은 뭘 그런걸 묻느냐며 시원스레 웃었다.

    “나 많은 거 안 바래요.”

    태준의 눈이 깊어졌다.

    “그냥 밀어내지만 않으면 돼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그의 눈이 말하고 있었다.

    소박하기만 한 말에 가슴이 울렁였다.

    밑도 끝도 없이 밀어붙일 때보다 더욱 마음이 약해졌다.

    게다가 저렇게 촉촉한 눈으로 쳐다보면 어쩌자는 건지.

    못 이기겠다, 정말.

    선혜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태준을 보았다.

    “그래요.”

    마주한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로, 선혜가 입을 열었다.

    “해요, 연애.”

    선혜의 수락에 태준의 눈동자가 일렁였다.

    곧 그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깃들었다.

    창밖은 여름일진대 카페 안은 계절과 상관없이 훈훈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늦봄의 어느 찬란한 순간처럼.

    *

    대화를 마치자 마자 두 사람은 카페를 나섰다. 수호를 맡긴 시간이 아직 다 되지는 않았지만 혼자 오래 두기가 불안하다며 일어나는 선혜를 태준은 군말 없이 따랐다. 다 마시지 못한 음료수는 테이크 아웃 잔에 담은 채였다.

    “혹시 점심 약속 있어요?”

    카페를 나오자마자 태준이 물었다.

    선혜는 고개를 저어보였다.

    “아뇨.”

    “그럼 같이 점심 먹지 않을래요? 수호랑 셋이서.”

    갑작스러운 제안이었기에 선혜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수호랑요?”

    “네. 수호한테 맛있는 거 사 주고 싶거든요.”

    태준이 머쓱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컵라면 말고요.”

    아. 선혜는 전에 편의점 앞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민망한 얼굴을 무표정으로 감추며 머리칼을 쓸어올리는 때였다.

    “그래도 되죠?”

    태준이 물어왔다.

    선혜는 선선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당연히 되었다.

    오히려 이렇게 셋이 자주 만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 기회가 되면 수호에게 태준의 정체를 밝혀주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다.

    이 남자가 자신의 아빠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수호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좋아하지 않을까.’

    태준이 많이 좋냐는 말에 수줍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던 수호였으니까.

    “수호 좋아하는 음식 뭐 있어요?”

    “돈가스랑 카레 좋아하더라고요.”

    선혜의 대답에 태준이 놀라면서도 반가운 얼굴을 했다.

    “진짜요? 나도 돈가스랑 카레 좋아하는데.”

    태준이 신기하다는 듯이 말하곤 눈을 휘며 웃었다.

    피는 못 속인다더니 음식 취향도 닮나 보다.

    그 밖에도 태준은 수호가 좋아하는 것들에 관해 물었다. 아주 사소한 것까지도. 관심과 정성을 기울이는 모습에 선혜는 숨김없이 대답해 주었다.

    그나저나.

    ‘돈가스랑 카레 좋아하는구나.’

    새로 안 사실이 뇌리에 깊이 새겨졌다. 그 외에도 궁금한게 많았지만 천천히 알아가자 싶었다.

    이 남자의 부탁대로 앞으로는 밀어내지 않을 생각이었다.

    밀어내는 대신 나아가기로 했다.

    천천히. 그럼 시나브로 알게 되는 것들이 있겠지.

    한걸음 한걸음 걸어가는 데에 망설임을 덜어냈다. 조금은 조심스럽지만 확실하게 태준을 향해 간다.

    한편. 수호를 향한 태준의 발걸음은 거침없이 나아가고 있었다.

    표정이 위풍당당하기 그지없다.

    수호야. 기다려라.

    ‘아빠가 간다.’

    *

    하지만 예상치 못한 복병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싫어.”

    태준은 찬 바람이 쌩쌩 부는 수호를 보며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선혜 또한 수호를 당황한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수호가 선혜의 손을 고쳐 잡더니 고개를 젖혀 선혜를 올려다보았다.

    “엄마랑 둘이 먹을래. 아저씨 빼고.”

    당연히 수호가 좋다고 할 줄 알았던 두 사람이었기에 당황이 배가 되었다.

    선혜는 눈을 굴려 태준을 쳐다보았다.

    태준은 어쩔 줄을 몰라하고 있었다. 입술을 달싹거리는 걸 보아하니 설득할 만한 말을 찾는 것 같은데 저를 힘주어 똑바로 쳐다보는 수호의 기세에 눌려 어물쩍거리기만 하고 있었다.

    자기라도 수호를 설득해 볼까 싶은 마음에 선혜가 수호를 향해 몸을 살짝 기울였다.

    “아저씨가 엄청 맛있는 밥 사 주신다는데. 돈가스 카레 덮밥 맛있게 하는 데가 있대.”

    수호가 좋아하는 음식의 총 집합체이니 꽤 설득력 있을 거라생각했으나 오산이었다.

    “싫어.”

    수호의 단호한 대답에 선혜의 얼굴이 아연해졌다.

    도와주려고 했는데 태준의 가슴에 대못을 하나 더 박은 셈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태준은 울먹거리는 얼굴로 수호를 쳐다보고 있었다. 수호는 그런 태준을 이상하다는 듯이 한번 훑어 보고는 고개를 팽하니 돌려 버렸다.

    태준이 상처 받은 강아지 같은 표정으로 선혜를 보았다.

    하지만 선혜로서도 별 수 없었다.

    애가 저렇게 싫다는데.

    선혜는 속으로 한숨을 삼키고 입을 열었다.

    “알겠어. 둘이 가자.”

    “응!”

    선혜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수호가 활짝 웃으며 답했다. 태준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그런 수호를 보고 있었다. 태준이 수호에게 무어라고 하려는 찰나.

    수호가 선혜의 손을 잡고 흔들며 칭얼거렸다.

    “엄마, 빨리 가자. 나 배고파.”

    선혜는 마지못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태준을 돌아보았다. 고개짓을 하며 인사하는 얼굴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

    곧 서로의 손을 잡고 멀어지는 두 사람.

    태준은 세상 황당하다는 얼굴로 자리에 서서 멀어지는 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 둘 사이에 끼고 싶은 마음에 저도 모르게 한 발을 내딛는데 순간 수호가 뒤를 돌아본다.

    찌릿 노려보는 시선에 순간 멈칫해 버리고 말았다.

    무슨 어린애 눈빛이 저리도 당돌한지.

    제 아들이지만.

    “나 참…….”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

    선혜와 수호는 카레집에서 점심을 먹은 뒤 근처에 있는 아이스크림 가게에 와 있었다.

    열심히 아이스크림을 퍼먹는 수호와는 달리 선혜는 턱을 괴고 수호를 바라볼 뿐이었다.

    수호가 맛있다며 먹어보라고 권했지만 손이 가지 않았다.

    플라스틱 수저를 만지작거리기를 여러번. 선혜가 어렵사리 입을 뗐다.

    “수호야.”

    부르는 소리에 수호가 고개를 들었다.

    “아깐 왜 그랬어?”

    아이 치고 무심한 얼굴. 그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선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 태준 아저씨 좋다고 그랬었잖아.”

    “…….”

    “아빠면 좋을 것 같다며.”

    수호가 눈을 내리 깔더니 수저로 아이스크림을 뒤적거리다 대답했다.

    “이젠 별론데.”

    “갑자기?”

    “응.”

    “왜?”

    “그냥.”

    짧게 대답한 수호가 아이스크림을 입에 밀어 넣었다.

    아이스크림을 우물거리는 수호를 바라보며 선혜는 고민에 빠졌다.

    어쩐다.

    애가 갑자기 이렇게 싫어할 줄은 몰랐는데.

    이러면 태준과 연애를 시작했다는 사실을 밝히기도 어렵지 않은가.

    그나저나 갑자기 왜 싫어진 거지?

    수영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선혜가 고개를 갸웃하고 있는 때였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선혜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태준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점심 맛있게 먹었어요?]

    측은하게만 느껴지는 내용을 보며 선혜가 쓰게 입을 다물었다. 메시지로라도 달래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답장을 하기 위해 두 손으로 핸드폰을 제대로 쥐는 때였다.

    “엄마.”

    수호가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드는 때였다.

    “아.”

    수호가 아이스크림이 듬뿍 담긴 수저를 눈앞에 밀었다. 얼결에 몸을 기울이고 받아 먹으려고 입을 벌리는 때였다.

    입가로 다가오던 수저가 중심을 잃고 살짝 기울어지더니, 툭.

    핸드폰 화면 위로 아이스크림 덩어리가 떨어졌다.

    정확히 태준의 메시지가 떠올라 있는 위치에 말이다.

    설마.

    무심결에 든 생각을 고개를 내저어 털어냈다.

    에이. 아니겠지. 고작 일곱 살이 어떻게.

    “아깝다.”

    수호가 전혀 아깝지 않은 투로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느릿하게 일어나 정리대에서 휴지를 가져왔다. 선혜는 휴지를 받아들어 핸드폰 화면을 닦아냈다.

    태준에게 답장을 하려고 손을 움직이던 선혜는 슬쩍 수호의 눈치를 보았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수호와 눈이 허공에서 딱 마주쳤다.

    곧바로 모르는 척 딴청을 피우긴 했지만 선혜는 보았다.

    아이스크림을 듬뿍 푼 수저를 손에 꼭 쥐고 있는 수호. 핸드폰을 노려보는 얼굴은 비장하기까지 했었다.

    통렬한 깨달음이 머릿속을 강타했다.

    질투하는 거구나.

    ‘그래서 아까 일부러…….’

    수호의 깜찍한 행동을 되새긴 선혜의 입이 반쯤 벌어졌다.

    제 아들이지만.

    ‘나 참…….’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

    한편 그 시각.

    태준은 집에서 홀로 쓸쓸하게 컵라면을 먹고 있었다.

    평소 식욕대로 두 개를 해치운 뒤 그것도 모자라 밥 한 공기까지 말아먹었다.

    부른 배를 안고 소파에 앉아 있는 때였다.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수호가 한 말이 메아리처럼 머릿속을 울려댔다.

    힘주어 노려보던 눈빛 또한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렸다.

    “하…….”

    태준이 탁한 한숨을 흘리며 의자 등받이로 고개를 젖혔다.

    아까 다른 여자랑 있었다고 배신감에 화를 내던 애가 왜 갑자기 그렇게 태도가 돌변한 거지?

    골똘히 고민하는데 순간 한가지 가설이 머릿속을 퍼뜩 스쳤다.

    설마.

    ‘질투하는 거?’

    맞다는 확신이 드는 건 금방이었다.

    “아니, 아직 뭐 제대로 시작도 안 했는데.”

    기가 차서 중얼거리면서도 수호의 날카로운 시선을 떠올리면 기분이 저절로 처졌다.

    아들아. 왜 아빠를 그렇게 쳐다보니. 이 아빠 서운하다.

    태준은 기운 없는 얼굴로 소파에 늘어졌다. 그러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수호에게 보낼 메시지를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수호야. 아저씨도 밥 같이 먹고 싶었는데.]

    아저씨라는 호칭이 어쩐지 씁쓸하여 한참을 바라보며 답장을 기다렸다.

    그런데.

    1분, 2분.

    10분, 30분.

    그렇게 한 시간이 지나도 답장은 오지 않았다.

    태준은 허탈하게 숨을 내쉬었다.

    “……뭐야.”

    혹시 몰라 [수호야?]라고 메시지를 보냈지만 묵묵부답.

    심지어 읽지도 않았다.

    차단했나?

    순간 든 생각을 애써 떨쳐낸 태준은 희망을 품은 채로 열심히 손가락을 움직였다.

    [수호야.]

    [수호야……?]

    하지만 그 뒤에도 메시지로 여러 번 애타게 불렀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태준은 힘없이 핸드폰을 내려놓고 말았다.

    “허어…….”

    아들에게 무시당했다는 사실 하나로 태준은 하얗게 말라버렸다. 바람이 불면 금방이라도 파스스 부서질 것 같은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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