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만난 애 아빠-36화 (36/109)
  • #36. 연애해요, 우리

    선혜는 수호를 수영장에 데려다주고 카페에 앉아 태블릿 PC로 작업 중에 있었다.

    일에 어느 정도 집중했을까. 뻐근한 어깨를 풀어주기 위하여 기지개를 켜던 선혜는 문득 핸드폰에 시선을 두었다. 조금 가라앉은 시선으로 핸드폰을 보던 선혜가 손을 뻗어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어제부터 조용하기만 한 핸드폰. 태준에게서 연락 온 건 없었다.

    기대라도 했던 것인지 씁쓸한 미소가 절로 지어진다. 핸드폰을 내려놓은 선혜는 물끄러미 앞에 있는 통창 너머를 바라보았다.

    이전에 이곳에서 작업하다가 우연히 태준을 만난 날, 창문을 똑똑 두드리며 ‘파이팅’ 입 모양으로 외치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진실을 알게 된 후에도 그렇게 웃어줄 수 있을까.

    태석은 좋아서 난리를 칠 것이라고 했지만, 글쎄. 이게 그렇게 마냥 좋아할 만한 문제는 아니지 않나.

    게다가 아무리 업어서 키운 자식 같은 동생이라고 한들 그 속내를 하나하나 다 짐작할 수는 없는 노릇이며, 늘 예외란 건 있는 법이니.

    선혜는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굳이 불안해하지 말자.

    책임지라 떠민 것이 아니기에 그녀는 그의 선택을 존중만 하면 되었다.

    수호의 아버지가 되어줄지, 아니면 이대로 없는 자식 셈 치고 제 인생을 살지.

    후자를 생각하면 수호에게 미안하고 씁쓸하긴 했지만…….

    태블릿 위를 오가던 펜의 움직임이 멈췄다. 어쩐지 가슴이 먹먹해져 손이 움직이지 않는다.

    펜을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현재 시각이 눈에 들어왔다. 수호를 데려갈 시간이 임박해 있었다. 선혜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기고 카페를 나섰다.

    *

    수영장 근처 주차장에 주차를 마친 선혜는 수영장 건물 쪽으로 다가가 섰다. 입구 옆쪽에 있는 벽에 기대어 수호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무더운 여름임에도 그늘이 드리워진 벽은 꽤 시원했다.

    그곳에 등과 머리를 살짝 기댄 채 수호를 기다리는데 다급한 발소리가 안에서부터 빠르게 가까워졌다.

    옆을 돌아보기가 무섭게 휭 바람이 불었다. 눈을 깜빡이며 흐트러진 머리칼을 귀 뒤로 쓸어넘기는데 입구를 나선 장신의 남자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익숙한 뒷모습에 설마 하는데 손에 감긴 붕대가 눈에 들어왔다. 선혜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그를 불렀다.

    “태준 씨?”

    주차장으로 내달리려던 그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그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태준임을 확인한 선혜의 표정이 더욱 안 좋아졌다.

    아무리 수영이 좋다고 해도 그렇지, 손을 다쳤는데도 수영이 하고 싶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걱정하는 마음에 자기도 모르게 한 걸음 다가서려던 선혜는 태준과 눈이 마주치자 멈칫 섰다.

    “…….”

    뭘까, 저 표정은.

    태준은 입을 꾹 다물고 눈에 힘을 주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속을 가늠할 수 없는 애매한 얼굴에 괜히 긴장되었다.

    괜히 불렀나.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 태준이 성큼성큼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다지 멀지 않은 거리가 단숨에 좁혀지는가 싶더니 태준이 손을 뻗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어찌할 새도 없이 그 품에 안겨 버리고 말았다. 선혜는 놀라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선혜를 품에 안은 태준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선혜의 목덜미에 묻었다. 울 것 같은 표정과는 다르게 태준의 입 밖으로는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

    태준의 머릿속에서 하고 싶은 말이 앞을 다툰다.

    미안하다는 말이 먼저여야 할지 고맙다는 말이 먼저여야 할지 모르겠다.

    고맙고 미안하고, 또 미안하고 고마워서 자꾸만 울컥울컥한다.

    이 여자가 내 아들을 낳아 키웠단다.

    다른 사람도 아닌 내 아이.

    내 아이를.

    둘이서 아이 키우기도 벅찬 세상이다. 만만치 않은 육아비와 정신적, 그리고 육체적 노동. 그 모든 걸 혼자 감내했을 지난 세월을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보상해 줄 것이다.

    어떻게든, 무슨 수를 써서든.

    수호한테도 좋은 아버지가 되어줄 것이다.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노력을…….

    태준이 몰아치는 감정에 완연히 취해 있는 때였다.

    “저기.”

    선혜가 손을 들더니 그를 떼어내려 슬쩍 밀어냈다. 하지만 태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절대 놓아주지 않을 거다. 그 의지를 수반한 움직임은 굳건하고 단단하기만 했다. 문득 귓가에 선혜의 한숨 소리가 스쳤다.

    “저기, 태준 씨.”

    이런 순간에도 저를 밀어내려는 선혜가 원망스러워 고개를 든 태준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하지만 다음 순간.

    “수호가 봐요.”

    태준이 눈을 느리게 슴벅거렸다.

    “수호가…… 본다고요.”

    그 말에 태준이 비로소 선혜를 품에서 떼어냈다. 바라본 선혜의 얼굴에는 곤란함이 가득했다. 슬쩍 곁눈질로 태준을 보던 그녀가 그의 어깨너머를 쳐다보았다. 태준은 천천히 뒤를 돌아 그 시선을 따라갔다.

    선혜의 말마따나 수호가 그곳에 서 있었다.

    태준과 똑같은 얼굴로, 하지만 짓고 있는 비딱한 표정은 선혜와 같다.

    수호가 느리게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보기만 하는 수호의 눈초리에 두 어른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태준을 슬쩍 쏘아보는 선혜와 민망한 얼굴로 큼큼 헛기침을 하는 태준.

    “…….”

    수호는 그저 그런 둘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어지는 정적 속.

    멀리서는 매미 하나가 눈치 없이 시끄럽게 울어대고 있었다.

    **

    수호는 키즈카페 블록 방에 홀로 앉아 있었다.

    바닥에 널브러진 블록을 쌓는 얼굴에는 흥미라곤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근처에서 놀던 또래 여자애들이 관심 있는 얼굴로 다가와 말을 걸어도 대꾸조차 하지 않는다. 그 모습을 재밌다는 얼굴로 지켜보던 선생님이 다가와 수호의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수호라고 했지?”

    자기를 부르는 소리에도 고개조차 들지 않는 아이. 건방지다 여길 만한데도 이상하게 밉지가 않다. 도리어 귀여워 웃음만 샌다.

    “애들하고도 같이 놀지 그래? 너랑 친해지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선생님의 말씀에도 묵묵부답. 선생님은 그런 수호를 빤히 들여다보다가 피식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아이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아무런 모양새도 없이 그저 쌓이기만 한 블록들을 수호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다 고개를 들어 시간을 확인한다.

    선혜가 수호를 이곳에 맡긴 건 십 분 전쯤.

    넉넉히 한 시간을 예약해 놓은 선혜는 태준과 함께 어디론가 가버렸다. 자기도 가면 안 되냐고 물었지만 어른들끼리 할 얘기가 있다고. 미안하다고 하며 안아주는 엄마에게 더는 조를 수가 없었다.

    어른들이 할 얘기가 대체 무엇이기에 자기만 쏙 빼놓은 것일까.

    순간 수영장 앞에서 서로를 부둥켜안고 있던 선혜와 태준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팔을 들어 태준을 마주 안으려다가 자기를 보자마자 굳은 엄마의 모습도. 엄마의 당황한 얼굴을 떠올린 그 순간, 결국 높다랗게 쌓이던 블록이 중심을 잃더니만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기분이 흩어진 블록의 상태와 같다.

    엉망진창.

    아저씨가 아빠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수호가 간과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아빠라는 존재는 엄마와 짝이라는 것.

    “…….”

    난생처음 느껴보는 질투라는 감정에 수호는 인상을 썼다.

    작은 손이 블록을 약하게 집어 던졌다.

    뜨거운 콧김이 콧구멍 사이로 느리게 뿜어져 나왔다.

    **

    선혜와 태준은 키즈카페 근처에 있는 카페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공교롭게도 이전에 그와 마주 봤던 카페였다. 그가 자신이 싱글 맘이라는 걸 알고 다짜고짜 연애하자 제안했던 그곳. 자리도 똑같았다.

    혼자 남겨둔 수호가 걱정되는지 직원이 내어온 음료는 손도 대지 않은 채 선혜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수호도 데려올까 싶었지만 아무래도 이야기를 하다 보면 6년 전 그날 이야기를 하게 될 것 같았다. 아이가 듣기에 적절한 내용은 아니니 수호가 없는 자리에서 이야기하기로 한 두 사람이었다.

    먼저 운을 뗀 건 태준이었다.

    “왜 진작 말 안 했어요?”

    고개를 돌려 보니 아까와 비슷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태준이다.

    선혜는 그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음료로 시선을 내리고 대답했다.

    “말할 타이밍도 여의치 않았고…….”

    무엇보다.

    “태준 씨를 잘 몰랐으니까요.”

    선혜는 조용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우리 안 지 얼마 안 됐잖아요. 그때 니스에서도 그랬고 같이 회사 다니기 시작한 지도 겨우 한 달 조금 넘었는걸요. 잘 알지도 못 해서 신뢰가 쌓이지 않은 사람한테 다짜고짜 당신이 애 아빠라고 말 할 순 없었어요.”

    하긴.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다지 가벼운 진실은 아니었으니 말하는 데 있어 조심스러웠을 터. 거기에 자기가 너무 막무가내로 들이밀었으니 부담스럽기도 했을 것이다. 태준은 이해가 가는 선혜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갑자기 왜 말한 거예요? 선혜 씨 말대로 우리가 신뢰가 쌓인 사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데.”

    선혜가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어차피 나랑도 수호랑도 계속 마주치는 사이인데 알 권리는 있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거든요.”

    선혜가 눈을 들어 태준을 보았다.

    “미안해요. 숨겨서.”

    덤덤한 듯하지만, 진심이 담긴 사과였다. 태준은 그 사과에 아연했다.

    “그걸 왜 선혜 씨가 사과하는 겁니까. 바보같이 아들도 못 알아본 내가 해야죠.”

    선혜는 그 말에 희미하게 웃었다.

    “그동안…… 혼자 애 키우면서 힘들진 않았어요?”

    태준이 묻자 수호를 키우던 과거가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을 스쳐 갔다.

    미혼모라는 사실에 선입견을 가지고 바라보던 사람들의 시선과 냉대.

    그 속에서 홀로 아이를 키우면서 버텨야 했던 나날들.

    몹시도 힘들었던 시간이었지만 선혜는 태준을 향해 미약한 미소를 내보일 뿐이다.

    “괜찮았어요.”

    태준의 얼굴에 드리운 죄책감을 보던 선혜가 말했다.

    “태준 씨 원망한 적 없어요. 수호 낳은 걸 후회 해 본 적도 없고요.”

    그 말에 태준의 맑은 다갈색 눈동자가 가만히 흔들렸다.

    입술을 달싹이던 태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애 이름은 왜 수호예요?”

    선혜는 수호의 이름을 짓던 순간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나는…….”

    경제적인 어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아버지에게 저를 맡긴 엄마와, 뒤늦게 떠안은 책임감에 버거워하면서 외면하기만 했던 아버지와는 달리.

    “지켜주고 싶었거든요.”

    끝까지.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말이다.

    선혜가 말을 마친 뒤 잠시 침묵이 찾아왔다. 태준은 시선을 내리깐 채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했고 선혜 또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 사실 말한 이후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진 못했는데.

    경애의 말대로 당장 합치는 건 무리일 테고.

    그렇다면…….

    “신뢰.”

    그 단어를 읊조리던 태준이 눈을 들어 선혜를 보았다.

    선혜도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마주했다.

    “그 신뢰, 앞으로 쌓아가면 되겠네요.”

    선혜는 그 말에 눈을 깜박였다.

    순간 기시감이 찾아 들었다.

    같은 카페, 같은 자리.

    설마 설마 하며 바라보는 사이 태준이 테이블에 팔을 기대고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보다 가까운 거리에서는 모든 것이 선명했다.

    투명하게 빛나는 눈동자와 그 안에 담긴 간절함이.

    “나랑 만나보지 않을래요?”

    전과 같은 말이었지만 그때보다 완곡한 어조였다. 표정 또한 더욱 진지했다.

    선혜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선혜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태준이 조금 더 힘을 실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 인정받고 싶어요. 애 아빠로서.”

    진심을 담은 눈이 깊어졌다.

    “늦었지만 수호랑 선혜 씨한테 책임을 다 하고 싶어요.”

    책임. 그 단어에 책임진다는 말을 채 끝내지 못한 아버지가 떠올랐다.

    “나한테 기회를 줘요. 선혜 씨랑 수호한테 잘할 기회.”

    아버지와 비교되는 태준의 모습에 괜히 가슴이 먹먹해졌다.

    “나도 지켜주고 싶어요. 수호랑 선혜 씨 둘 다.”

    선혜는 새삼 깨달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태준의 눈빛이 6년 전과 다름이 없다는 걸.

    맹목을 담아 타오르는 눈.

    그 눈을 한 채로 태준이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선혜도 그 말을 속으로 되뇌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연애해요, 우리.”

    그 모습이 잔상처럼 맴돌던 아버지의 모습을 완전히 지워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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