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만난 애 아빠-25화 (25/109)

#25. 수작질

태준의 차에서 내린 선혜는 한숨과 함께 머리를 쓸어 올렸다. 운전석에서 내린 태준이 어느새 앞에 다가와 섰다. 싱글벙글 웃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맥이 빠진다.

‘말로만요?’

그 말에 제법 긴장하며 그를 쳐다보며 물었었다.

‘뭘 원하는데요?’

‘주말에 나랑 밥 한 끼 같이 해요.’

겨우? 고작 그런 걸 바란다고? 의심스럽게 보았지만, 더 바라는 게 없는 눈이었다.

못 들어줄 청도 아니었기에 선혜는 고개를 끄덕였고 약속은 빠르게 성사되었다.

메뉴는 복날을 맞이하여 삼계탕. 날짜는 이번 주 토요일 이른 점심. 수호가 수영 강습을 받고 있을 시간대였다.

출근 시간이 임박한 것을 확인하고 차에서 내리면서 살짝 걱정했다. 그의 성화에 못 이긴 척 약속을 받아들이긴 했다만 마냥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그와 밥을 먹는다. 단둘이.

혹시라도 회사 사람들을 마주할까 두려운 마음에 룸이 딸린 삼계탕 전문점을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든 선혜는.

“……!”

고은을 마주하고 순간 얼굴을 굳혔다.

아침부터 마주하기에 달가운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회사 직원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하며 선혜는 걸음을 옮겼다. 태준이 그런 선혜의 뒤를 따라갔다.

고은은 줄곧 태준을 쳐다보았다. 선혜의 비스듬히 뒤에 서서 일정한 간격으로 뒤쫓는 그를.

힐끔 고은을 쳐다보긴 했으나 그저 스치는 시선일 뿐. 선혜를 바라보는 눈에 담긴 온기는 고은에게 단 한 번도 향하지 않았다.

등 뒤에서는 두 사람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참, 해장은 했어요?”

선혜를 챙기는 태준의 목소리는 지독히도 다정했다.

“아뇨. 딱히.”

“그럼 그 숙취해소제 꼭 마셔요. 효과가 그렇게 좋다더라고요. 헛개수 질리면 생수로 바꿔 마시고요.”

말 하나 허투루 하는 것 없이 온통 선혜를 향한 배려뿐이다.

카트 손잡이를 붙든 고은의 손 위로 뼈가 하얗게 불거져 있었다. 고은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아침에 차에서 같이 내리기까지 했으면서 다른 회사원들이 나타나자 곧바로 입을 다물고 서로를 모르는 척하는 두 사람.

그 모습이 꼭.

비밀 연애라도 하는 모습이었다.

고은의 뺨이 희게 떨렸다.

*

“으으…….”

아침부터 디자인팀 사무실은 기주의 앓는 소리로 가득했다.

잊을 만하면 들리고, 잊을 만하면 들리고. 저 상태로 출근을 한 게 용할 지경이다.

“그냥 반차 쓰시지.”

민영이 걱정을 가장하여 듣기 싫다는 속내를 감추고 제안했지만, 기주는 손을 들어 휘휘 내저을 뿐이다.

“근데 선혜 씨는 괜찮은 모양이네?”

민영이 흘긋 선혜를 보며 물었다.

기주와 다르게 선혜는 숙취에 시달리는 것 같지 않았다. 화장이 전보다 조금 연하긴 했지만 청순한 분위기를 풍길 뿐, 숙취로 골골대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태준이 사 줬던 숙취해소제가 제법 효과가 좋았던 탓이었다.

“네.”

대답을 마친 선혜는 책상 한구석에 물끄러미 시선을 두었다. 그곳에는 빈 헛개수 음료병과 생수병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태준의 말마따나 갈증이 심하여 자꾸 손이 간 탓에 비운 지 오래였는데 병을 버리는 게 어쩐지 내키지 않아 책상 구석에 밀어둔 터다.

저게 뭐라고 버리지도 못하는지.

선혜는 남몰래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또다시 들려오는 신음에 걱정스럽게 기주를 쳐다보았다.

같이 늦게까지 술을 마셨는데 저만 멀쩡하니 괜히 신경이 쓰였다. 결국, 선혜는 자리에서 일어나 기주를 향해 다가갔다.

“팀장님.”

책상에 엎어져 있는 기주를 부르자, 그가 겨우 눈만 들어 선혜를 보았다.

“어…… 선혜 씨…….”

“뭐라도 좀 사다 드릴까요? 숙취해소제나 헛개수 같은 거.”

선혜의 배려에 감동했는지 기주의 눈이 촉촉해졌다.

기주가 입술을 달싹였다.

“그럼 나…… 커피 좀.”

“네? 커피요?”

“찬 거 말고……. 따듯한 거로…….”

이 와중에도 커피를 찾다니. 카페인 중독이 의심되는 상황.

정말 사 줘도 되나, 고민하는데 기주가 말했다.

“난 커피로 해장하는 편이라.”

기주의 말에 선혜는 못내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이 원한다는데 별수 없었다.

“카페 가려고 하는데 혹시 커피 필요하신 분 계세요?”

사무실을 나서기 전 선혜가 팀원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저마다 손을 들며 메뉴를 시켰고 선혜는 주문을 핸드폰 메모장에 적은 뒤 사무실을 나섰다.

이제는 익숙해진 막내의 업무였다.

*

선혜는 본사 건물 1층에 있는 카페로 향했다. 고은과 마주할 게 탐탁지 않았지만 별수 없었다. 업무 중에 나온 거라 멀리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고은은 오늘도 카운터 담당이었다. 선혜를 보자마자 눈을 세모꼴로 떠 보이지만 선혜는 못 본 척 카운터로 다가가 주문을 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 아이스 카페라테 두 잔 주시고요, 헤이즐넛 시럽 추가해서 아메리카노 따듯한 거 한 잔 주세요.”

주문을 마치고 카드를 내밀자 고은이 받아든다. 카드를 긁는 손길이 다소 신경질적이라는 생각이 드는 건 기분 탓이겠지. 선혜는 고은에게 카드를 선선한 태도로 받아들고는 커피가 나오는 옆 카운터 앞에 섰다.

다들 업무 중이어서 그런지 카페는 한산했다. 손님은 선혜 한 명뿐이었다.

아니, 추가다.

회사 건물로 막 들어선 태준이 선혜를 발견하더니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아침에도 주차장에서 봤는데 또 잔뜩 반가운 얼굴이다. 주위에 신경 쓸 사람도 없으니 거리낌 없이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커피 사러 왔어요?”

아침에 받은 것도 있기에 선혜는 선선히 대답했다.

“네.”

“숙취는요?”

“괜찮아졌어요. 덕분에.”

선혜의 그 말에 기분 좋은 듯 웃는 태준이다. 워낙 기분 좋게 웃어서 그런지 선혜는 자기도 모르게 마주 보고 웃을 뻔하다가 올라가는 입꼬리를 겨우 내리눌렀다.

시선을 슬쩍 카운터로 틀자 음료가 하나둘 나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서 있는데 태준이 물었다.

“커피 심부름인가 봐요?”

“네.”

“몇 잔이에요? 많아 보이는데.”

“별로 안 많아요. 다섯 잔뿐이라서.”

“손 모자라지 않아요? 들어줄까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자잘한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을 고은이 연신 힐끔거렸다. 한 번에 많은 음료가 주문된 터라 고은은 매니저를 도와 음료를 만드는 일을 거들고 있었다. 얼음을 푹푹 푸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둘이 저렇게 사이좋은 모습을 또 보고 있자니 열불이 났다.

왜 하고많은 사람 중에 윤선혜 쟤란 말이야. 입을 꾹 다물고 끓어오르는 속을 애써 가라앉히고 있는 때였다.

“고은 씨. 나 잠깐 화장실이 급해서. 이거 음료 마무리만 지어 주라. 샷 나오면 그냥 컵에다가 부어주기만 하면 돼. 헤이즐넛 시럽은 저쪽에 있고.”

매니저가 식은땀을 흘리며 작게 속삭이는 말에 고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곧 매니저가 급한 걸음으로 카페를 나서고 고은은 마무리를 짓기 시작했다.

샷 하나를 우유가 담긴 잔에 붓고 얼음을 채워 넣은 뒤, 다른 테이크아웃 잔에 뜨거운 물을 붓기 시작했다.

“태준 씨. 혹시 가고 싶은 삼계탕집 있어요?”

졸졸. 컵에 담기는 물소리 사이로 두 사람의 대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온다.

“가족들이랑 자주 가는 데 하나 있긴 해요. 강남 쪽이라 거리도 가까울걸요?”

“예약해야 하는 데 아니에요?”

“맞긴 한데 우리 가족이 거기 단골이라. 아버지 이름 말하면 아마 바로 자리 내어 줄 거예요.”

“아……. 네.”

“식당에서 바로 만날까요?”

“그러죠, 뭐.”

누가 봐도 데이트를 앞둔 남녀의 대화다.

고은은 컵에 따라지는 뜨거운 물 위로 솟아오르는 하얀 김을 가만히 응시했다.

이미 정해진 물의 양을 벗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물을 따르는 고은.

곧 물 따르는 걸 멈추고 샷을 붓자 잔 너머로 아슬아슬하게 커피가 찰랑거렸다.

헤이즐넛 시럽을 몇 번 넣자 더욱 위험하게 솟아오르다 결국 조금 넘쳤다. 고은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흐른 커피를 휴지로 닦아낸 후 잔 위에 캡을 씌웠다.

다소, 헐겁게.

그리고 나머지 찬 음료가 담긴 잔을 캐리어에 넣고 헤이즐넛 시럽이 추가된 따듯한 아메리카노만 별도로 준비하여 카운터에 내밀었다.

“주문하신 음료 나왔습니다.”

선혜는 태준과 나누던 대화를 마치고 커피가 나왔다는 말에 손을 뻗었다. 선혜의 하얗고 고운 손이 다가오는 걸 보며 고은이 회심의 미소를 드리우는, 바로 그 순간.

태준의 커다랗고 하얀 손이 끼어들었다.

“내가 들어줄게요. 무거울 텐데.”

고은의 눈이 순간 커졌다.

“안……!”

고은이 안 된다고 소리치며 다가오기도 전에 이미 일은 벌어졌다.

태준의 큼지막한 손이 컵을 쥐고 들어 올리자마자 헐거운 캡이 벗겨져 떨어지더니만, 커피가 그의 손등 위로 왈칵 쏟아졌다.

“아, 뜨거!”

놀란 태준이 잔을 떨어뜨리고 안에 있던 커피가 카운터를 적셨다.

태준은 고통에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제 손을 확인했다. 단순한 1도 화상일 줄 알았는데 물이 생각보다 뜨거웠는지 짧은 새에 피부까지 벗겨지고 있었다. 손을 허공에 가볍게 털며 혓소리를 내는 때였다.

손목이 덥석 잡혔다. 제 손목을 붙든 선혜의 손을 보고 눈을 깜박거리는 사이 태준은 어디론가 끌려가고 있었다.

어어, 하는 새에 태준과 선혜는 카페 구석에 있는 정리 대에 섰다.

선혜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태준의 손을 음료 버리는 곳 위에 두더니, 얼음물이 담긴 플라스틱병을 들어 올려 그의 손위에 쏟아붓기 시작했다.

손에 닿는 차가운 감촉에 태준이 움찔거리며 저도 모르게 손을 빼려 하자 선혜가 그의 손목을 단단히 움켜잡았다.

“가만히 있어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태준은 고개를 들어 선혜를 보았다.

목소리가 차분해서 몰랐는데 잔뜩 속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치 자기가 아픈 것 같은 그런 얼굴. 근데 그러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화가 난 것 같기도 하다.

손목을 어루만지는 손길에는 걱정이 묻어났다. 찬물을 천천히 붓는 손길은 조심스러웠고.

소중히 대해지는 느낌에 태준은 손에 느껴지는 고통도 잊고 선혜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고통이 느껴지지 않은 지는 오래.

이윽고 물병의 물이 바닥을 보이며 흐르는 물줄기가 끊겼다. 선혜는 한숨을 내쉬며 물병을 내려놓았다.

여전히 태준의 손을 놓아주지 않은 채 피부가 벗겨진 하얀 손을 들여다보는데 뒤늦게 고은이 허둥대며 달려와 태준의 옆에 섰다.

“죄, 죄송합니다. 이걸 어떻게…….”

“죄송하다고 할 거면.”

고은의 말이 끊어지고 태준과 고은의 시선이 선혜에게 동시에 향한 그때, 선혜가 서늘한 눈으로 고은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죄송할 짓을 하지를 말던가.”

고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선혜는 그런 고은의 얼굴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중간에 낀 태준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선혜를 쳐다보고 있는 사이.

“고은 씨,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매니저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그리고 엉망이 된 카운터와 태준의 화상 입은 손을 보더니 사색이 되었다. 단번에 상황을 파악한 매니저가 허리를 깊이 숙여 사과했다.

“죄, 죄송합니다. 이걸 어떻게……!”

한숨을 내쉬며 느리게 머리칼을 쓸어올린 선혜가 매니저를 향해 말했다.

“음료 좀 다시 만들어 주시겠어요?”

고은을 대할 때와는 차원이 다른 예의 바른 말투. 고은이 주먹을 꾹 쥐고 부들부들 떠는 사이 알겠다고 한 매니저가 고은을 붙들고 카운터 안으로 들어갔다.

“왜 사고 치고 그래!”

매니저가 작은 목소리로 타박했다.

“죄송합니다.”

고은이 입을 꾹 다물고 고개 숙여 사과했다.

소리 죽여 씨근덕거리던 매니저는 이내 음료를 다시 만드느라 분주해졌다.

고은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다가 고개를 들어 흘끔 선혜를 쳐다보았다.

선혜는 여전히 태준의 손을 붙든 채로 걱정스럽게 상처를 살피고 있었다. 그러다 고은의 시선을 느꼈는지 이쪽을 쳐다본다.

원망이 담긴 차가운 시선.

고은은 깨달았다. 제 수작을 선혜가 눈치챘다는 사실을.

서둘러 시선을 피한 고은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