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만난 애 아빠-24화 (24/109)
  • #24. 틈

    선혜는 꼼짝없이 얼어붙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반응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경애가 정색한 얼굴로 물었다.

    “수호 아빠니?”

    아니, 묻는 게 아니라 확인 사살이라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선혜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경애가 수저를 내려놓고 재차 물었다.

    “수호 아빠, 맞지?”

    확신에 가까운 질문에 피할 곳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선혜는 눈을 내리고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맞아.”

    경애의 눈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크게 흔들렸다.

    이어지는 침묵 속에서 선혜는 수저를 들고 밥을 먹었다.

    제대로 들어가지도 않는데 꾸역꾸역 쑤셔 넣고 씹었다.

    밥알이 마치 모래알처럼 입안을 구른다. 해장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체할 것만 같다.

    결국, 몇 수저 뜨지 못하고 수저를 내려놓은 선혜가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그 남자는 모르는 눈치던데.”

    경애가 설마 하는 얼굴로 물었다.

    “너, 설마 말 안 했니?”

    “응.”

    “뭐?”

    태연자약한 대꾸에 경애가 경악한 얼굴로 반문했다. 선혜는 그런 경애를 두고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퍼뜩 정신을 차린 경애가 헐레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선혜의 뒤를 빠른 걸음으로 쫓았다. 그리고 선혜의 손목을 잡아 세웠다.

    선혜가 돌아보며 말리듯 경애를 불렀다.

    “엄마.”

    “왜 말을 안 해, 이 기지배야!”

    경애가 버럭 소리쳤다.

    “말을 해야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애 아빠인데!”

    “엄마, 좀.”

    “수호 생각은 안 해?”

    그 말에 선혜의 입이 꾹 다물려졌다.

    “너는 네 자식보다 네 자존심이 그렇게 중요하니?”

    “자존심?”

    선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목소리도 마찬가지.

    “나, 내 자존심 때문에 이러는 거 아니야.”

    “아니면! 아니면 애 아빠한테 말 안 하는 이유가 뭔데?”

    선혜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윤선혜, 너!”

    그 모습을 보고 답답함에 경애가 언성을 높이려는 찰나.

    “겨우 하룻밤이었어!”

    평정심을 완전히 잃어버린 선혜가 버럭 소리쳤다. 선혜의 두 눈시울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뭐?”

    “겨우 하룻밤 보낸 남자일 뿐이었다고. 아는 건 이름뿐이었고, 어디 사는지, 무얼 하는지 심지어 나이는 몇 살인지 알지도 못했어!”

    충격으로 할 말을 잃은 경애에게 선혜는 계속 소리쳤다.

    “다시 만난 지도 얼마 안 됐어. 나, 아직 그 사람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해. 나한테 호감 있다는 거 빼고 좋은 사람인지 어떤지, 아무것도 몰라. 확신이 안 선다고. 근데, 그런 남자 붙들고 다짜고짜 수호 내보이면서 얘가 당신 아들이라고 해야 해? 자기 자식인지 의심조차 못 하는 남자한테?”

    “선혜야.”

    “책임에 부담 느끼고 돌아설지 어떻게 알아, 아버지처럼!”

    일순 경애의 눈이 흔들렸다.

    날 선 침묵이 두 모녀 사이로 찾아들었다.

    침묵을 깬 건 경애였다.

    “너, 그래서 끝까지 얘기 안 할 거니? 그 남자한테도, 수호한테도?”

    경애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선혜가 낮아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중에.”

    선혜가 호소하듯 말했다.

    “지금은 아냐.”

    선혜가 말을 마치자 경애가 손목을 놓아주었다. 선혜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재촉하며 현관을 나섰다.

    닫힌 현관문 앞에서 경애는 망연한 얼굴로 서 있었다. 손을 들어 뜨끈히 열이 오른 이마를 짚던 경애가 한숨을 쏟아냈다.

    *

    아침부터 매미 소리가 무더위의 시작을 알리듯이 요란했다.

    [올해 더위는 조금 더 일찍 찾아온 감이 있는데요, 초복인 오늘 몸보신 단단히 하셔야겠습니다.]

    선혜는 택시에서 나오는 아침 라디오를 들으며 차창 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너, 그럼 끝까지 얘기 안 할 거니? 그 남자한테도, 수호한테도?’

    경애의 말이 떠올랐다.

    말 안 할 거냐고.

    그 말을 가만히 곱씹고 있던 선혜는 문득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렸다.

    빨간불에 택시가 정차되어 있는 동안 백미러를 통해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기사와 눈이 마주쳤다.

    선혜의 무심한 표정에 퍼뜩 눈을 돌리며 헛기침을 하지만 간간이 그녀를 백미러로 힐끔거리는 택시기사였다.

    택시를 탈 때마다 이런 시선을 받는 건 익숙하다. 아니, 굳이 택시기사뿐 아니라 그녀에게 호감을 보이는 남자들을 보는 건 일상처럼 자리 잡은 지 오래였다.

    외면하고 모르는 척하는데 도가 텄을 뿐.

    태준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 또한, 굳이 그에게 고백을 받거나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런 남자들은 사실 많았으니까. 태준만큼이나 자기를 끈질기게 쫓아다니는 남자 또한 적지 않았고.

    그래서 쉽게 확신이 서지 않았다. 이 남자다, 하는 확신.

    확신이 들지 않는 데에는 태준이 수호를 제 아들인지 못 알아보는 것도 한몫했다.

    바보같이.

    선혜는 뒤늦게 알았다. 태준이 수호를 못 알아보는 데서 오는 원망이 마음속 깊은 곳에 존재한다는 걸.

    그리고 그에 대해 원망이 생기는 이유는, 자신의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라는 걸.

    태준이 수호를 자신의 자식이라고 알아봐 줬으면 좋겠다고 내심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그리고 그 이유는 아마도…….

    차창에 머리를 기대고 있던 선혜는 가방 속 핸드폰이 진동해 꺼내 들었다.

    발신자는 태준.

    선혜는 화면에 떠오르는 태준의 이름 세 글자를 보다 곧 통화 버튼을 눌렀다.

    — 어? 전화 받네요?

    전화를 받자마자 아침부터 활기찬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침부터 웬 전화에요?”

    — 아아. 메시지 하려다가 그냥 전화로 했어요. 답장 잘 안 하니까.

    그 말에 대꾸할 말이 없어 선혜는 입을 꾹 다물었다.

    — 출근하면 잠깐 지하 주차장 내 차로 올래요? 줄 게 있어서.

    “뭔데요?”

    — 보면 알아요. 너무 기대는 하지 말고. 운전 중이라 이만 끊습니다.

    그러더니 정말 전화를 끊었다.

    허무함에 한참 동안 통화기록을 쳐다보다가 어젯밤 태준의 이름이 찍힌 일 분 남짓한 통화기록을 발견했다.

    통화만 했나 싶어 메시지 창을 켰다.

    아니나 다를까, 가장 최근에 태준과 메시지를 주고받은 기록이 있었다. 선혜의 손끝이 메시지창을 누르자 어젯밤 태준과 주고받은 메시지 내용이 주르륵 떴다.

    알 수 없는 알파벳의 조화를 해석하고자 쳐다보고 있자니 어젯밤 기억이 어렴풋하게 되살아났다.

    깜빡 졸던 차 울리던 핸드폰. 술에 취해 멋대로 움직이던 손가락은 막을 길이 없었다.

    통화 내용도 기억이 드문드문 나기 시작했다.

    통화를 마치고 얼마 안 가 태준이 데리러 오고, 그의 차에 올라탄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뒤로 끊긴 필름은 아무리 머릿속을 헤집어 봐도 도통 찾을 수가 없었다.

    나, 그 사람한테 실수한 건 없겠지.

    술에 취해 그와 사고 친 이력이 있기에 불안한 마음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

    태준은 지하 주차장의 가장 구석진 곳에 차를 주차한 뒤 안에서 선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태준의 손에는 편의점 로고가 새겨진 비닐봉지 하나가 들려 있었다. 그 안에는 숙취해소제 한 병, 헛개수 음료 한 병 그리고 생수 한 병이 담겨 있었다. 전날 과음한 선혜를 위해 태준이 준비한 것이었다.

    언제쯤 오려나.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하고 차창 너머를 쳐다보는데 때마침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선혜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주위를 연신 살피며 조심조심 걸어온 그녀가 운전석 창문 앞에 섰다.

    똑똑 두드리는 그녀에게 옆에 앉으라고 턱짓했다. 내키지 않은 얼굴이었지만 시간을 끌어봤자 사람들 눈에 띌 위험만 커진다 생각했는지 이내 조수석 문을 열고 올라탄다.

    “오늘은 머리 풀었네요?”

    태준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씩 웃었다. 선혜는 그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요점부터 꺼냈다.

    “나한테 줄 게 뭐예요?”

    “아, 이거.”

    태준이 손에 들린 봉투를 건네자 선혜가 천천히 받아들었다. 살짝 열어 내용물을 확인한 선혜가 고개를 들어 태준을 보았다.

    “숙취해소제예요. 갈증 날까 봐 헛개수랑 물도 좀 샀어요.”

    그의 배려심 깊은 행동에 선혜는 잠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웃음 띤 그의 얼굴을 오래 볼 수 없어 고개를 숙이는데 선혜의 얼굴을 세세히 들여다보고 있던 태준이 물었다.

    “어제 일, 기억은 나요?”

    “엄마한테 들었어요. 태준 씨가 나 집에 데려다줬다고.”

    선혜가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나…… 어제 그쪽한테 실수한 거 없죠?”

    태준은 잠시 고민했다. 수호라 착각하고 저에게 입을 맞춘 것을 말을 할까 말까.

    하지만 그렇게 하면 민망해하면서 자신을 피해 다닐 게 뻔했다.

    “아뇨, 없어요.”

    태준의 말에 선혜는 다행이다 싶은 얼굴로 나지막하게 숨을 내쉬었다.

    몸을 돌려 나가려는 그녀를 잠자코 쳐다보고 있는데 문득 선혜가 다시금 태준을 쳐다보았다.

    “고마워요. 여러모로.”

    선혜의 인사가 다소 낯설어 태준이 눈을 깜박였다. 힐끔 눈만 들어 그런 태준을 본 선혜가 머리칼을 쓸어 올리고는 다시 몸을 돌렸다. 차에서 나가기 위해 문손잡이를 잡는 그때였다.

    찰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이 잠기는 소리.

    인상을 찌푸리며 뒤를 돌아보는데 태준이 짓궂게 웃고 있었다.

    불안하다 싶은 찰나.

    “나 어제 선혜 씨 때문에 고생 많이 했는데.”

    선혜는 뒤늦게 아차 싶었다.

    잊고 있었다.

    그는 늘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말로만요?”

    그리고 자신이 지금 틈을 내보였다는 것도.

    선혜의 목구멍으로 마른침이 소리 없이 넘어갔다.

    위험하게 빛나는 다갈색 눈동자를 보며 선혜는 비닐봉지 손잡이를 자기도 모르게 꽉 움켜잡았다.

    *

    늘 아침부터 오픈 준비로 분주한 카페이지만 오늘은 일이 더욱 많았다. 본사에서 커피와 온갖 디저트 재료들이 배달되어 오는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원두를 비롯하여 본사에서 보낸 온갖 재료들이 박스에 포장되어 매장에 쌓여 있었고 고은을 비롯한 카페 직원들은 박스 내용물을 꺼내 정리하느라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곧 물건들이 정리되며 빈 박스가 쌓였다. 테이프를 떼어내고 착착 정리한 박스를 카트에 올린 고은을 향해 매니저가 말했다.

    “고은 씨. 지하 주차장 구석에 가면 박스 버리는 데 있거든? 그거 좀 버리고 와.”

    “네.”

    대답을 마친 고은은 박스를 버리기 위해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화물용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은 고은은 슬쩍 핸드폰을 꺼내더니 한참 들여다보았다. 이내 입 밖으로 긴 한숨이 새어 나온다.

    통화와 문자 기록을 아무리 봐도 달라지는 게 없는데 계속 반복 중이다.

    어제 나름 용기를 내어 연락처를 건네주었는데 신태준이라는 남자에게서는 연락이 한 통도 없었다. 분명 커피 홀더에 적은 번호를 못 보진 않았을 텐데.

    괜히 시무룩해져서 고은의 표정이 음울해졌다. 그래도 작은 희망을 걸었다.

    그래. 이제 겨우 처음 봤는데 부담스러웠겠지. 커피 사러 올 때마다 서비스로 쿠키를 준다든가 해서 호감을 조금씩 사야겠다. 굴하지 않는 얼굴로 마음을 다잡는 고은이었다.

    엘리베이터가 지하 주차장에 도착하고 고은은 카트를 끌고 내렸다.

    박스 버리는 데가 어디쯤이지. 주위를 둘러보며 카트를 끌고 가는 때였다. 주차장에 주차된 멋스러운 외제 차 한 대가 눈에 들어왔다.

    줄지어 선 다른 차들 보다 확연히 눈에 띈다. 누가 저렇게 멋있는 차를 끌고 다니나 싶어 호기심에 쳐다보는데 운전석 문이 열렸다. 차에서 내리는 태준을 보고 고은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와. 잘생겼는데 부자이기까지. 어쩐지 부내가 난다 싶었다.

    ‘내가 남자 보는 눈이 있다니까.’

    괜히 저가 흐뭇하여 미소를 짓는 때였다.

    조수석이 열리고 누군가 내린 것은.

    걸어가던 고은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굳어 있던 입술이 달싹거렸다.

    “……윤선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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