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만난 애 아빠-8화 (8/109)
  • #8. 지독했던 첫사랑

    선혜는 이마를 손끝으로 짚은 채 잠시 신음을 삼키다가 버릇처럼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한두 살도 아니고 세 살 연하. 그렇다면 그때 태준은 스물한 살이었단 소리다.

    그렇게 어린 애랑 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

    죄책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라, 자리를 지키는 게 아까보다 열 배쯤은 힘이 들었다. 좌불안석이 따로 없었다.

    하지만 그런 선혜와는 다르게 태준은 웃고 있었다. 의외라는 얼굴로 선혜의 얼굴을 뚫어지라 쳐다보면서.

    선혜가 나이가 더 많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동갑이거나 아니면 한 살은 어릴 거라는 생각에 물은 거였는데.

    세 살 연상이라.

    예쁘기만 한 줄 알았더니 동안이기까지.

    “누나라고는 안 부를게요. 선혜 씨, 이 호칭이 더 편하니까.”

    몰랐던 사실 하나를 알았더니 괜히 기분이 들뜬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피식, 피식 웃음이 새어나갔다.

    그 실없는 웃음소리에 고개를 든 선혜가 태준의 얼굴을 보더니 인상을 썼다.

    뭐 저런 바보 같은 표정을 짓고 있어 저 남자는.

    ……난 심각해 죽겠는데.

    선혜는 괜히 그런 태준을 노려보다가 말했다.

    “미안한데.”

    선혜가 단호한 음성으로 쐐기를 박았다.

    “저는 그쪽 만날 생각 없어요.”

    이런 반응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태준은 등을 의자에 느긋하게 기댈 뿐이다.

    “보다시피 애가 있어서 연애할 상황이 못 되거든요.”

    “그럼 결혼을 전제로 해서 만나는 건요?”

    “이봐요.”

    선혜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결혼이 장난인 줄 알아요? 그렇게 쉽게 얘기하게? 하룻밤 불장난이었던 그런 가벼운 감정 가지고 운운할 게 아니…….”

    “……가벼워?”

    순간 선혜의 말을 끊은 태준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가셨다.

    냉소적으로 말을 뱉어내던 선혜의 입이 서늘한 느낌에 절로 다물어졌다.

    바보같이 웃던 얼굴과 대조되는 제법 딱딱한 무표정에 심장이 철렁했다.

    “이봐요 윤선혜 씨.”

    낮아진 목소리로 선혜를 부른 그가 입을 열었다.

    “윤선혜 씨가 그렇게 나 버리고 간 날 이후에, 나 미친놈처럼 당신 찾아다녔어요.”

    과거를 회상하는 그의 눈동자가 떨리고 있었다.

    “버림받고 배신당한 느낌에 기분 뭣 같기도 했는데 그러면서도 정신 차리면 보고 싶다는 생각만 하고 있고,”

    태준이 눈을 느리게 들어 선혜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게다가 나, 당신 만나고 나서 다른 여자 만난 적 없습니다. 단 한 번도.”

    오랜 순정을 고백하는 말에 선혜는 눈을 크게 떴다.

    “근데 가볍다고? 어린 애 소꿉장난 같은 감정이었으면 벌써 다 잊고 알아서 잘 살았겠죠. 이렇게 등신같이 매달릴 필요도 없고.”

    짧게 나온 비속어에 거부감이 들기보다는 오히려 깊은 감정이 느껴졌다. 정색한 얼굴은 무서우리만치 진지했다.

    머리가 멍했다.

    어떻게 이럴 수 있나 싶다.

    6년이라는 시간이 짧은 시간도 아니고. 그 시간 동안 자신을 못 잊었다니.

    저 잘난 외모를 해서는 자신을 만난 이후로는 여자를 한 번도 안 만났다니.

    거짓말인가 싶은 생각이 들긴 했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진중한 눈빛을 보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그동안 다가오는 남자들은 많았지만 이런 묵직한 느낌은 또 처음이었다.

    가벼우면 먼지 털듯이 털어내면 그만이건만, 이건 가벼이 털어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는 게 피부에 와 닿았다.

    자괴감이 가득 피어올랐다. 설마 이렇게 자신에게 미련이 생길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다른 남자들은 그녀에게 외면당하고도 다른 여자 찾아서 잘만 떠나던데.

    외모에 홀려 생긴 감정과 호기심은 그런 식으로 금방 식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왜 이 남자는 그러질 못했는지.

    미안한 마음에 선혜는 버릇처럼 입술을 말아 물며 고개를 숙였다. 긴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그녀의 얼굴을 가렸다.

    그 모습을 잠자코 보고 있던 태준이 물었다.

    “생각할 시간, 필요해요?”

    너무 몰아붙였다고 생각했는지 조금 누그러진 투였다.

    선혜는 입안 여린 살을 잠시 깨물며 생각에 잠겼다.

    받아들여야 할까.

    다른 사람도 아닌 수호의 친부인 사람이다.

    내키지 않지만 수호를 생각해서라도…….

    그런데 그 순간 번개처럼 머릿속을 스치는 과거의 기억이 있었다.

    ‘서, 선혜가 내 딸이라고?’

    일곱 살 때 처음 본 친아빠 석주의 당황하던 모습.

    집안의 반대로 헤어진 전연인과 재회한 석주는 느닷없이 안 친딸의 존재에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그래. 내가, 책임을…….’

    책임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던 아버지는 말을 끝내 마치지 못했다.

    그때 그의 나이. 겨우 스물 일곱.

    지금의 태준과 똑같은 나이였다.

    아버지의 집안은 발칵 뒤집혔다.

    일찍이 과부가 되어 하나뿐인 외아들을 애지중지 키워왔던 할머니는 펄펄 뛰다 몸져눕기에 이르렀다. 하필이면 상대가 연애조차 반대했던 경애라 더욱 그러했다.

    한참 실랑이를 벌인 뒤에 결론이 나왔다. 선혜만 받아들이기로. 적어도 윤 씨네 피가 섞였으니 사생아로 둘 수는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렇게 선혜와 경애는 생이별을 해야 했다.

    다섯 살의 초봄. 꽃이 피기도 전이었던 시린 계절의 이별은 선혜의 기억 속에서도 여전히 생생하기만 했다.

    떠나던 엄마의 비참했던 뒷모습 위로 자신의 모습이 겹쳐지자 마음이 굳어졌다. 똑같은 상처를 두 번 받고 싶지 않았다. 더구나 어릴 적 자신이 받았던 그 상처를 수호가 경험하게 하고 싶지도 않았고.

    “아뇨.”

    선혜는 고개를 들어 태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미안하지만, 거절할게요.”

    선혜는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준은 앉은 채로 고개를 들어 그런 선혜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선혜가 입을 열었다.

    “신태준 씨 아직 젊고 창창하잖아요. 나 같은 애 엄마 말고 다른 사람 만나세요.”

    말을 마치고 돌아서려다 멈칫했다. 너무 늦었지만, 이 말은 하고 싶었다.

    “그땐…… 여러모로 미안했어요.”

    미안하다는 말을.

    선혜는 마침내 태준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멀어졌다.

    자꾸만 뒤를 돌아볼 것만 같은 고개를 앞으로 고정시키느라, 애를 써야만 했다.

    *

    태준은 자리에 앉은 채 통유리창 너머로 멀어지는 선혜의 뒷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선혜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뒤에도 한참 동안 그녀가 남긴 흔적을 더듬듯 바깥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태준의 가슴이 크게 오르고 내렸다. 고개를 숙이고 입 밖으로 탁한 숨을 길게 내쉰 그가 피식 웃었다.

    “쉽지 않네.”

    여전히, 너무 어렵기만 한 여자다.

    변하지 않은 여전한 모습이 반가우면서도 저를 대하는 태도 또한 여전하여 씁쓸하기도 했다.

    다시 고개를 들어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멀어지던 뒷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때 나를 홀로 남겨둔 채 돌아설 때도 그랬을까. 그때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렇게 갔을까.

    ‘그땐…… 여러모로 미안했어요.’

    당신은 나에게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나 보다.

    그때나, 지금이나.

    *

    6년 전 니스. 호텔 방.

    “…….”

    느지막이 일어난 태준은 침대에 걸터앉아 망연한 얼굴로 선혜가 남긴 쪽지를 쳐다보고 있었다.

    번호라도 적혀 있을 줄 알았건만.

    [미안해요.]

    쪽지에는 미안하다는 말이 전부였다.

    의미심장한 그 말에 괜히 가슴이 불안하게 뛰었다.

    태준은 쪽지를 협탁 위에 내려놓고 일어나 서둘러 옷을 챙겨 입었다. 그리고 밖으로 뛰쳐나가 선혜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혜교 씨!”

    그녀가 알려준 가짜 이름을 불러대며 골목 골목을 뛰어다녔다. 지나가는 외국인을 붙들고 선혜의 생김새를 묻기도 했다. 그러다 작은 수확을 얻었다.

    삼십 분쯤 전에 동양인 남자한테 얻어맞는 아름다운 외모의 동양인 여자를 보았다고.

    맞았다는 말에 태준은 눈이 시뻘게져서 더욱 다급히 선혜를 찾아다녔다. 하지만 계속 허탕이었다.

    주위의 전경이 가장 잘 보이는 마세나 광장 한복판에 도착한 태준은 무릎에 손을 짚고 밭은 숨을 내뱉다가 허리를 들었다. 주위를 둘러보고 또 둘러보았다.

    하지만 보이지 않았다.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한눈에 들어왔던 사람이었는데.

    연기처럼, 그렇게 사라져 버렸다.

    하룻밤의 꿈처럼 아스라하게.

    “혜교 씨…….”

    그런 태준의 뒤로는 비행기 한 대가 날아오르고 있었다. 태준은 고개를 들어 허망한 얼굴로 점점 작아지는 비행기를 쳐다보며 서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의 눈빛이 비장하게 변했다.

    곧장 호텔로 돌아간 그는 한국행 비행기를 최대한 빠른 시간대로 예약한 뒤 짐을 챙겨 호텔을 떠났다.

    *

    태준은 곧장 집으로 돌아가 형인 태석을 찾아갔다.

    “뭐?”

    가회동 본가 서재. 경영 잡지를 보고 있던 태석이 쓰고 있던 안경을 거칠게 벗어 내렸다.

    “뭘 해달라고?”

    그가 앉은 책상 너머에 서 있던 태준이 단단한 음성으로 말했다.

    “사람 하나 찾아달라고.”

    “사람을 찾아달라고?”

    태준의 표정이 하도 비장하여 태석이 농담처럼 덧붙였다.

    “누가 프랑스에서 네 뒤통수 치고 달아나기라도 했냐?”

    뒤통수. 태준은 그 단어를 곱씹다가 입을 열었다.

    “그건 아니고.”

    “그럼 뭔데. 설마 여자냐?”

    태준이 입을 다물자 태석이 허, 하고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두 눈에 흥미가 가득 찼다.

    “위안 삼아 갔다 오랬더니 여자를 만들어 오냐?”

    니스 여행은 사고로 인해 체대 입시가 좌절된 자신을 위해 태석이 마련해준 여행이었다.

    “태연이 통해서 너 만나고 싶다고 했던 여자 연예인들 다 마다하더니. 대체 누구야?”

    두 눈에 이채를 띄고 묻는 형의 모습에 태준은 껄끄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애초부터 이런 거 가족들한테 말하고 싶지 않았는데. 그래서 혼자 해보려 했지만 한계에 부딪혀서 형인 태석을 찾은 것이었다.

    “혜교라고, 나 프랑스로 출국할 때 같이 출국했던 여자야. 나이는 내 또래고.”

    “예쁘냐?”

    “엄청.”

    망설임 없는 태준의 대답에 태석이 허탈하다는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살다 살다 신태준이 여자에 눈이 뒤집힌 꼴도 다 보고. 별일이다, 정말.”

    “형. 어려운 거 아는데 부탁 좀 할게. 응? 나 진짜 그 여자 찾아야 해.”

    “얼씨구. 빠져도 홀딱 빠졌나 보네.”

    태준을 보던 태석의 눈이 가늘어졌다.

    “잤냐?”

    “아, 진짜. 그게 중요해?”

    태준이 언성을 높이자 태석이 얼굴에서 웃음기를 거두었다.

    “이 새끼가 형한테.”

    태석의 위압적인 눈빛에 주눅이 들 만도 하건만 태준은 꺾이지 않았다.

    “찾아줘. 안 찾아주면 삼촌이랑 포커 치다가 져서 강남 건물 하나 넘긴 거 아버지한테 다 불어버린다.”

    “하!”

    웃어젖히면서도 태석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걸 태준은 놓치지 않았다.

    떨떠름한 얼굴로 태준을 쳐다보던 태석이 마지못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너, 회사가 일반인 개인정보 털었다고 말 나오면 네 탓인 줄 알아.”

    “그럼 부탁 좀 할게, 형.”

    태준은 그렇게 말하고는 서재를 나왔다.

    금방 찾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이틀 뒤.

    태준은 씩씩거리며 태석이 있는 서재의 문을 벌컥 열었다.

    “아, 깜짝이야.”

    “제대로 찾은 거 맞아? 없잖아!”

    태준이 손에 들린 종이 뭉치를 휘두르며 빽 소리치자 태석이 눈살을 찌푸렸다.

    “혹시 몰라서 그날 출국한 혜교는 다 찾아본 거야, 인마.”

    “근데 왜 없어?”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네가 이름 제대로 못 들은 거 아니야?”

    “아냐, 분명 혜교라고……!”

    순간, 태준이 말을 미처 마치지 못하고 손을 툭 떨구었다. 그의 손에 잡혀 있던 서류가 우수수 바닥으로 떨어졌다.

    ‘혜교’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들의 사진과 이름이 기재된 서류였지만 그 어디에도 그녀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순간 가슴께가 싸해졌다.

    설마.

    속인 건가.

    그 사실이 뒤통수를 후려쳤다. 헛웃음이 절로 새어 나왔다.

    찾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 이름이었는데.

    그게 거짓이라니.

    “태준아. 너 괜찮냐?”

    “…….”

    “신태준?”

    태준은 떨리는 숨을 몰아쉬며 스스로를 진정시키려 애썼다. 배신감에 몸을 떨면서도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이 짓밟히자 아이러니하게도 보고싶다는 생각이 더욱 해일처럼 밀려왔다.

    미워하고 싶은데, 원망하고 싶은데, 그러지 못했다.

    ‘저기요, 신태준 씨.’

    차갑게 자신을 보던 얼굴과.

    사연을 품고 있던 서글픈 얼굴.

    ‘니스로 돌아가면 밥 한 끼 같이할래요?’

    그리고 그에게 마음을 열며 웃었던 얼굴이 차례로 떠올랐다.

    보고 싶은데 볼 수 없다니.

    찾을 수 없다니.

    설마 다 거짓이었나. 모두, 다?

    [미안해요.]

    미안하다고 할 거면.

    미안할 짓을 하지를 말지.

    이렇게 속이고 사라질 거였으면 웃어주지 말지. 그렇게 안기지도 말지.

    “태준아. 너 진짜 괜찮냐?”

    어느새 태석이 다가와 태준의 어깨를 붙들고 있었다. 태준은 태석의 손을 밀어내고 서재를 뛰쳐나왔다.

    그 뒤로 태준은 깊은 좌절감에 빠져 한동안 헤어나오지 못했다.

    지독한 첫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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