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만난 애 아빠-7화 (7/109)
  • #7. 알고 보니

    유치원 앞. 태준은 이제 학부모들 사이에서 제법 익숙한 얼굴이었다.

    외삼촌이 조카 돌보는 데 열심이라며 다들 태준을 기특히 여기곤 했다.

    쪽. 태준의 뺨에 세빈이 애교스럽게 입을 맞췄다.

    “외삼촌, 다녀올게.”

    “그래.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사고 치지 말고.”

    세빈은 태준의 당부에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고는 유치원 건물을 향해 뛰어갔다. 뒤를 잠시 돌아보는 세빈에게 손짓을 해준 태준은 세빈이 모습을 감추자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늘도 도우미를 대동해서 아이를 보내려나.

    태준은 커다란 나무에 기대어 서서 수호를 기다렸다.

    세빈을 데려다주고 수호가 등원하는 것을 보고 가는 게 요즘 들어 새로 생긴 그의 아침 일과였다.

    태준의 눈에는 수호가 선혜의 아들이라는 인식 탓에 선혜와 닮은 점만이 눈에 들어왔다.

    아이치고 무심한 눈이라든가 간간이 찡그리는 미간이라든가. 눈이 마주치면 도도하게 고개를 돌리는 것까지.

    보다 보면 선혜가 생각이 났다. 그래서 자꾸만 보게 되었다.

    그녀를 보고 싶은 마음을 달래는, 나름의 대리만족이랄까.

    감히 유부녀를 탐내고자 하는 생각 따윈 없었다. 어차피 곧 회사에 들어가니 이런 보모 노릇도 길게 하지 못했다.

    그냥 며칠 안 되는 그 시간 동안 눈에 담기만 해도 족했다.

    물론 그 남편이 알면 노발대발하겠지만. 말도 안 걸고 그냥 멀리서 바라보기만 할 셈이었다. 가끔 도움이 필요하면 도와주겠지만.

    그 정도는 괜찮지 않나. 그렇게 합리화하며 자위하는 때였다.

    본 적 있는 차량이 태준의 옆을 스쳐 지나가 유치원 앞에 섰다. 태준은 기대고 있던 등허리를 떼고 허리를 바로 세웠다.

    차 문이 열리고 선혜가 내렸다. 버릇처럼 긴 머리를 쓸어올리는 모습이 느릿하게 시야에 담겼다. 주위 사람들이 일제히 그녀를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하늘에서 내려온 햇빛이 그녀에게는 스포트라이트처럼 작용했다.

    ‘하여간. 쓸데없이 예뻐서.’

    태준은 속으로 혀를 짧게 찼다.

    선혜는 수호를 차에서 내리고 그 뺨에 짧게 뽀뽀를 하며 인사를 했다. 수호는 귀찮다는 듯이 선혜의 입술이 닿은 제 뺨을 손으로 슬쩍 문질렀다.

    그 모습을 보던 태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자식이, 복에 겨운 줄도 모르고.

    괜스레 수호가 얄미워 태준의 눈에 힘이 들어가는 때였다.

    허리를 세워 몸을 돌리던 선혜와 눈이 마주친 것은.

    “……!”

    태준을 본 선혜는 적잖이 당황한 눈치였다. 습관처럼 입술을 말아 물어 입술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거칠게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그녀가 눈을 피하고는 몸을 돌렸다. 인사할 틈조차 주지 않는 매정한 처사였다.

    태준은 따라가고 싶어 자꾸만 움칠대는 다리를 진정시키느라 애를 써야 했다.

    그런데 막 선혜가 차에 오르려는 때였다.

    “자기! 수호 엄마!”

    어떤 아줌마가 선혜를 다급히 붙드는 게 태준의 눈에 들어왔다.

    대번에 선혜가 그녀를 달가워하지 않는 게 눈에 들어왔다.

    도와줘야 하나. 하지만 어떻게? 태준이 궁리하고 있는 때였다.

    “자기, 남자 소개받아라.”

    연지가 뱉은 그 말이 선명하게 태준의 귀에 내리꽂혔다.

    “……남자 소개?”

    의아하게 중얼거린 태준은 이어지는 두 여자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

    태준을 보고 당황한 선혜는 다가온 연지를 보며 표정 관리가 잘되지 않았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더니 저 남자를 또 마주쳐 버렸고, 또 설마가 사람 잡는다더니 설마설마하며 바라본 연지의 입에서 뻔한 말이 튀어나왔다.

    “자기, 남자 소개받아라.”

    또다, 또. 정말 질리지도 않는지. 그만 좀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예민해진 머리 한구석에서 치고 올라왔다.

    “민희 어머―”

    “저번에 자기 보고 넋 놓다가 자빠진 자전거! 그 남자 기억 나? 응?”

    연지가 선혜의 두 팔을 부여잡고 발을 동동 구르다가 박수를 짝 쳤다.

    “세상에 그 남자가 안 그래도 자기 엄마한테 자기 소개해달라고 한 사람이래. 자기 어머니한테 못 들었어? 임 변이라고!”

    그 사람이 그 사람이라니. 우연 한번 지독하기도 하지.

    선혜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임 변 알고 보니까 우리 남편이랑 같은 로펌 다니더라고. 이거, 우연도 보통 우연이 아니야. 어때, 한번 만나볼래? 응? 남편 얘기 들어보니까 사람 무지 괜찮다더라. 여자들한테 인기도 많대. 집안도 빵빵하고!”

    “민희 어머니.”

    “그 나이에 그 능력에, 그 외모에. 그런 사람 흔치 않다, 응? 딱 한 번만 만나 봐. 그럼 생각이 달라질 테니까.”

    민희의 말을 들을수록 선혜의 얼굴에 질린 기색이 점점 진해졌다.

    전날 경애와 싸웠던 게 생각나 감정 조절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래도 참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꾹꾹 억눌렀다.

    하지만 노력이 무색하게도 잘되지 않았다. 밤샘 작업을 해서 부족한 수면과 떨어진 체력 탓에 이성의 끈이 닳아있었다. 팽팽하게 당겨진 게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했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기 시작했다. 선혜가 손으로 이마를 짚고 씨근덕거리는 걸 숨기느라 이를 악물었다.

    “자기?”

    이상한 낌새를 느낀 연지가 고개를 기울이고 그런 선혜를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수호 엄마?”

    “…….”

    “……선혜 씨, 왜 그래?”

    연지가 눈치 없이 물은 그 순간에, 결국 선혜의 머릿속에서 끈이 뚝 끊어졌다. 선혜가 이마를 짚었던 손을 툭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전에는 본 적 없던 차갑고 날카로운 눈빛에 연지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런 연지에게 선혜가 뭐라 하기 위해 입을 여는 찰나였다.

    “수호 어머니.”

    나직한 중저음의 목소리가 두 사람 사이를 갈랐다.

    선혜와 연지가 동시에 목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았다.

    언제 이만큼이나 다가온 건지. 태준이 두 사람의 옆에 서 있었다.

    태준을 본 연지는 귀 뒤로 잔머리를 애교스럽게 쓸어 넘기며 눈웃음쳤다.

    “어머, 세빈이 외삼촌 아니세요. 안녕하세요.”

    그런 연지와는 다르게 선혜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태준은 그런 선혜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제가 애들 관련해서 드릴 말씀이 있어서 그런데요.”

    선혜는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을 보고 알았다.

    “잠깐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으십니까.”

    방금 연지와의 대화를 이 남자가 다 들었다는 사실을.

    “아주, 잠깐이면 되는데.”

    심장이 한 길 아래로 쿵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

    오전의 카페는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커다란 통창 너머로는 햇살이 은은하게 드리워지고 있었고 팝송과 커피 향이 잔잔하게 퍼졌다.

    선혜는 사약이라도 받은 심정으로 앞에 놓인 커피를 바라보고 있었다.

    들어온 지 십 분이라는 시간이 지났는데 줄곧 한마디 말도 없었다. 고개조차 들 수 없었다.

    고개를 들면 태준과 눈이 바로 마주칠 테니까.

    “고개 좀 들죠.”

    꿈쩍도 하지 않는 선혜를 보며 태준이 장난을 섞어 말했다.

    “무슨 죄지었어요?”

    뱉어놓고 뭔가 생각났는지 태준이 덧붙였다.

    “뭐, 잘못한 게 아예 없진 않지만.”

    나른한 목소리로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그가 물끄러미 선혜를 바라보았다.

    “이름이 선혜인가 봐요.”

    선혜의 어깨가 움칠거렸다.

    “혜교, 라더니.”

    당황한 선혜의 얼굴을 보고 있던 태준이 느긋한 어조로 놀리듯 말했다.

    “기왕 속여먹고 그렇게 날라버릴 거였으면 뭐라도 훔쳐 가지 그랬어요? 가져갈 거, 많았을 것 같은데.”

    비아냥거리는 말에 그제야 선혜가 고개를 들었다. 입을 꾹 다문 고집스러운 표정 위로 못마땅한 기색이 어려 있었다.

    태준은 그 얼굴을 뚫어지라 쳐다보았다.

    “그랬으면 실컷 욕이라도 하면서 잊었을 거 아닙니까. 찾아 헤매는 대신에.”

    찾아 헤매다니. 그 말에 선혜가 눈을 살짝 크게 떴다.

    “날…… 왜요?”

    “왜긴 왜예요.”

    선혜가 한참 동안 말이 없자 태준이 덧붙여 물었다.

    “진짜 몰라서 물어요?”

    선혜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구태여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그가 자신을 왜 찾아다녔는지. 자신에게 올곧게 향한 눈동자만 봐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선혜는 다시 고개를 숙여 커피잔을 들여다보았다. 잔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었다.

    차가운 걸로 시킬걸. 그랬다면 마시면서 자꾸만 달뜨는 속을 달랠 수도 있었을 텐데.

    “선혜.”

    태준이 혀를 굴려 선혜의 이름을 중얼거리다 물었다.

    “성은 뭐예요?”

    “……윤이요.”

    “윤선혜. 예쁘네, 이름.”

    혜교보다 훨씬 더. 그렇게 말하며 태준이 웃었다.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는 손에 땀이 찼다. 자꾸만 초조해지는 마음이 심장을 닦달하여 뛰게 했다. 선혜는 이 자리가 불편하고 또 불편했다.

    남자의 눈길은 피부 위로 느껴질 정도로 노골적이었고 스킨을 들이부은 건지, 그녀의 코가 예민한 건지 자꾸만 그의 체향이 코를 간질이는 것도 고역이었다.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할 말 있으면 빨리하세요.”

    한숨 쉬며 말한 선혜는,

    “만나죠, 우리.”

    다음 순간 나온 태준의 말에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뭐라고요?”

    잘못 들은 줄 알았는데.

    “만나자고요. 사귀자고.”

    아니었다.

    선혜의 얼굴 한쪽이 꿈틀거렸다. 그녀가 뒤틀린 미소를 지었다.

    “저, 애 엄마예요.”

    “그래서요?”

    태준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아까 들어보니까 혼자인 것 같던데. 그 아줌마가 선혜 씨한테 남자 소개 운운하던 거 다 들었거든요.”

    선혜가 얼이 빠진 얼굴로 태준을 보았다. 태준은 그 얼굴을 보고 느리게 입술을 말아 올리며 웃었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잡으려는 그의 눈빛은 마치 먹잇감을 발견한 맹수와도 같았다. 그만큼 형형했다.

    마른침이 꿀꺽 넘어갔다. 선혜는 답지 않게 당황하며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요. 몇 번 만나지도 않았는데, 무슨.”

    “만난 횟수가 중요한가요.”

    태준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은근하게 선혜를 훑어내렸다.

    “갈 데까지 간 지가 언젠데, 왜 새삼스럽게 내외하고 그래요.”

    귀엽게. 그가 작게 덧붙인 말에 선혜의 얼굴에서 얼이 빠졌다.

    하, 하……. 선혜의 입 밖으로 헛웃음이 끊기며 흘러나왔다. 즐겁다는 듯이 선혜를 지켜보던 태준이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물었다.

    “내 이름은 기억나요?”

    선혜가 고개를 느리게 끄덕이자 태준이 기분 좋은 얼굴로 웃었다.

    그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태준 씨라고 불러요. 뭐, 오빠라고 불러도 좋고 편할 대로.”

    그러다 순간 뭔가 놓친 얼굴로 아, 하더니 입을 여는 태준이다.

    “근데…… 선혜 씨는 몇 살이에요?”

    참 빨리도 물어본다 싶었다.

    숨기려다가, 이제 와 뭘 숨기나 싶은 마음이 들어 선혜는 솔직하게 말했다.

    “서른이요.”

    그런데 선혜의 대답을 듣는 순간 태준의 얼굴에 당황의 빛이 스쳤다. 오빠라고 부르라며 턱을 슬쩍 올릴 때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선혜는 설마 했다.

    “뭐야.”

    태준이 피식 웃었다.

    “……난 스물일곱인데.”

    머리를 단단한 걸로 얻어맞은 느낌에 순간 멍해졌다.

    맙소사. 연하라니.

    그것도 세 살.

    설마가 사람을 제대로 잡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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