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만난 애 아빠-2화 (2/109)
  • #2. 엄마는 그 아저씨가 싫어?

    태준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물었지만 선혜는 고개조차 끄덕이지 않았다. 입술을 말아 문 채 굳은 듯 서 있을 뿐이었다.

    태준이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이고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 물었다.

    “많이 취했나? 얼굴이 좀 빨간 것 같은데.”

    “……상관 말죠.”

    선혜가 냉소적으로 대꾸했으나 태준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상관을 어떻게 안 합니까, 내가.”

    태준의 말에 선혜가 버릇처럼 잔머리를 귀 뒤로 쓸어 넘기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를 묶은 선혜를 느긋하게 훑어보던 태준이 말했다.

    “머리는 왜 묶고 다녀요? 일할 때 불편해서?”

    상관 말라는 말에도 청개구리처럼 이것저것 참견하는 태준이었다.

    “그냥 풀면 안 되나.”

    묶은 게 더 예쁜 것 같은데. 덧붙여지는 나지막한 중얼거림에 선혜가 결국 삐딱하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보아하니 쉽게 보내줄 것 같지는 않고.

    다행히도 주위에 아는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신태준 씨. 제가 분명 말했죠. 회사에서 서로 모르는 척하자고.”

    그 말에 태준이 가소롭다는 듯이 픽 웃었다.

    “그때 내 요구도 안 들어줬으면서 뭘 그렇게 당당히 요구하는지 모르겠네요?”

    순간 비상구에서의 기억이 떠올라 선혜가 얼굴을 굳혔다.

    ‘한 번만 해 주면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 줄게요.’

    선혜가 입을 꾹 다물고 힘주어 쳐다보자 태준이 약을 올리듯 빙긋 웃었다.

    “기브 앤 테이크. 몰라요? 오는 게 있어야 가는 게 있죠.”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뭐.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지만.”

    하. 선혜는 기가 찬다는 듯이 웃으며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잠시 입술을 짓씹던 그녀가 짤막하게 숨을 내뱉고는 고개를 들어 태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때도 말했지만 나, 회사 조용히 다니고 싶어요.”

    안 그래도 외모와 스펙 때문에 원치 않게 주목받는 중인데 거기에 태준까지 더해지면 곤란했다.

    그와 스캔들이 터져봤자 피해 보는 건 자신뿐일 게 분명했다.

    “태준 씨는 몰라도 나는 그쪽이랑 엮여서 좋을 것 하나 없으니까 이런 식으로 아는 척하는 거, 그만해 줬으면 좋겠어요.”

    선혜의 말을 들은 태준이 한쪽 눈매를 찌푸리며 목덜미를 느리게 문질렀다.

    “이거 어쩌죠.”

    그가 손을 내리더니 고개를 들었다.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싫은데.”

    선혜가 눈썹을 휙 추어올리고 그를 노려보았다. 선혜의 두 주먹이 굳게 말아쥐어져 있었다.

    잔뜩 경계하는 살쾡이 같은 모습을 지켜보던 태준이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만 집에 가죠. 데려다줄게요.”

    “그럴 필요 없어요.”

    차갑게 말한 선혜가 태준의 옆을 지나치려 했으나 팔이 덥석 붙잡히고 말았다.

    선혜의 팔을 놓아준 그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보여주었다.

    순간 화면을 본 선혜의 눈이 커다래졌다.

    [울 엄마 잘 부탁해요, 아저씨.]

    커다랗게 떠오른 메시지창.

    발신인란에 적힌 수호의 이름을 본 선혜가 입술을 잘게 떨었다. 혹시 몰라 번호를 확인했으나 수호의 번호가 맞았다.

    선혜의 반응을 지켜보던 태준이 승리자처럼 느리게 미소 짓더니 허리를 살짝 숙였다.

    옅은 담배 냄새와 그 특유의 스킨 향이 섞여 코로 훅 밀려들었다.

    그가 비밀 이야기라도 하듯 속삭였다.

    “수호가 손수 이런 문자까지 보내서 모른 척할 수가 없는데 어쩌죠.”

    “어떻게 수호랑…….”

    “수호가 얘기 안 했나 봐요? 우리 같은 수영장 다니는데.”

    바들바들 떠는 선혜를 보며 태준이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우리, 나름 절친이라서.”

    태준이 느른한 어조로 속삭였다.

    “수영장에서도 자주 볼 것 같은데.”

    그가 피식거렸다.

    “거긴 회사가 아니니까 아는 척해도 되겠네요?”

    선혜는 가까이 다가온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

    입을 꾹 다물고 그를 노려보던 선혜는 몸을 돌려 호프집 문 앞에 섰다.

    심호흡을 하고 표정 관리를 한 그녀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거나하게 취한 동료들이 그녀를 반겨주었다. 그러다 그녀가 짐을 챙기자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아니, 우리 윤선혜 씨 어디 가!”

    한기주가 빽 소리쳤다. 선혜는 곤란한 척 웃으며 말했다.

    “애가 절 찾는대서요. 먼저 가보겠습니다.”

    “아…… 애가? 아휴. 그럼 얼른 가야지!”

    회식 때 직원들을 붙들고 끝까지 술을 먹이기로 유명한 한기주도 그 한마디에는 쉽게 꼬리를 내렸다.

    “먼저 가서 죄송합니다. 다음 주에 뵐게요.”

    허리를 연신 숙여 보인 선혜는 거칠게 문을 열고 호프집을 나섰다.

    근처에 있는 도로변으로 몸을 트는데 택시에 기대어 서 있는 태준과 눈이 마주쳤다.

    그가 뒷좌석 문을 열어주고 타라는 듯 턱짓했다.

    순간 멈칫하며 다른 택시가 없나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애석하게도 남아 있는 택시가 없었다.

    언제 오냐고 보채던 수호의 목소리가 귓가에 선했다.

    선혜는 별수 없이 태준이 서 있는 택시로 빠르게 다가갔다. 혹시 누가 볼까 싶어 주위를 빠르게 둘러보면서.

    그리고 보란 듯이 태준을 무시하고 앞 좌석에 올라탔다.

    태준은 선혜의 행동에 피식 웃고는 차 문을 닫고 조수석 창문을 툭툭 두드렸다.

    선혜가 막을 새도 없이 기사가 창문을 열어주자 그가 손으로 창턱을 붙들고 허리를 숙였다.

    “기사님. 안전운전 부탁합니다.”

    그가 선혜에게 싱긋이 웃었다.

    “내일 봐요, 우리.”

    감미롭게 속삭인 그가 허리를 들었다. 뒤늦게 손이 떨어지자 선혜는 황급히 차창을 올려 닫았다.

    곧 택시가 출발했다. 선혜는 굳은 얼굴로 태준의 모습이 점점 작아지는 사이드미러를 쳐다보다가 차창에 머리를 기댔다.

    “하아…….”

    그녀의 입 밖으로 나온 한숨에 차창에 부옇게 김이 서렸다.

    좀처럼 진정되지 않는 가슴 위에 손을 올려놓고 꾹 누르는 선혜였다.

    *

    수호는 외할머니인 경애와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다가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에 쪼르르 현관으로 달려 나왔다.

    문이 열리고 다소 지친 얼굴을 한 선혜가 발을 들이다 수호를 보고 생긋 웃어 보였다.

    수호가 다가오자 선혜가 눈을 맞추고 앉았다.

    “할머니랑 잘 놀고 있었어?”

    “응. 엄마 기다리고 있었어.”

    선혜는 그 말을 듣고는 수호를 끌어안고 뺨에 입을 가볍게 맞췄다. 싫다고 질색하는 얼굴을 하면서도 밀어내지 않는 아들이 사랑스럽기만 한 선혜다.

    뒤늦게 경애가 현관으로 나오며 물었다.

    “술 많이 마셨어?”

    “조금.”

    “고생했네. 얼른 씻고 자.”

    “늦었는데 자고 갈래, 엄마?”

    늘어지게 하품을 한 경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겠다. 내일 너 해장국도 좀 끓여줄 겸.”

    선혜는 경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수호와 손을 붙잡고 집안으로 발을 들였다.

    .

    .

    .

    많이 피곤했는지 경애는 곧 안방으로 들어가 잠이 들었다. 선혜는 씻고 나와 수호의 방 침대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

    이불 위로 어깨를 도닥거리며 재워주려는 의도가 무색하게 은은한 침상 등 아래 수호의 눈은 말똥말똥했다.

    “술 냄새 별로 안 난다, 엄마.”

    수호의 말에 선혜는 엷게 웃었다.

    “근데, 그 아저씨 냄새나.”

    그러나 수호의 그 말에 선혜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수호가 말하는 ‘그 아저씨’가 태준이라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선혜가 팔을 고쳐 베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수호 너, 그 아저씨 수영장에서 만났었어?”

    “응. 그 아저씨 수영 잘해. 이것저것 많이 가르쳐줘.”

    하긴. 한때 수영 선수를 하려고 했었다고 했다. 부상 때문에 접었다고 했지만.

    어쩌다 알게 된 그의 사연을 떠올리고 마음이 약해졌지만 선혜는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도 그렇지, 핸드폰 번호를 함부로 알려주면 어떡해. 엄마가 낯선 사람은 조심하라고 했잖아.”

    조곤조곤한 타박에 수호가 샐쭉하게 입을 내밀었다.

    선혜는 그런 수호에게 뭐라고 잔소리를 하는 대신에 손을 들어 머리칼을 어루만졌다.

    태준과 너무 가깝게 지내지 말라고 말하려다가 말았다.

    피는 못 속인다더니. 어쩔 수 없이 서로에게 끌리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며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지어졌다.

    “엄마.”

    수호가 선혜의 눈치를 보다 물었다.

    “엄마는 그 아저씨 싫어?”

    “…….”

    “엄마가 싫다고 하면 같이 안 놀게.”

    이미 태준이 마음에 든 모양인데도 이렇게 말하는 수호가 기특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다른 의미로 말문이 막혔다.

    싫냐고.

    그 순수한 질문에 대답이 선뜻 나오지 않았다. 아들 앞에서 거짓말이 쉽게 나올 리 없었다.

    “……아니야. 안 싫어해.”

    “그러면? 좋아?”

    선혜는 입을 다물었다.

    좋냐, 고.

    “그냥…….”

    선혜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대답했다.

    “모르겠어.”

    “뭐야. 어른인데 왜 자기 마음도 몰라?”

    “그러게. 엄마 바보 같다. 그치.”

    “어.”

    선혜가 콧잔등을 찡그리며 수호를 살짝 간지럽혔다. 하지마아! 짧은 비명이 작게 울리고 키득거리는 소리가 침대 위로 내려앉았다.

    .

    .

    .

    수호가 잠든 후에도 선혜는 수호의 옆에 누워 있었다.

    가만가만 수호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흘러내린 머리칼을 조심스레 쓸어넘기는데 침대 옆 작은 협탁 위 핸드폰이 작게 진동했다.

    수호가 깰까 싶어 얼른 핸드폰을 가져가 확인하자 메시지가 와 있었다. 태준이 보낸 것이었다.

    [잘 자요.]

    음성지원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들리는 듯했다.

    선혜는 답장을 하려다가 말고 핸드폰 전원을 끈 뒤 협탁 위에 올려놓았다.

    핸드폰을 등진 채로 누워 수호의 얼굴을 세세히 들여다보던 그녀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닮아도 너무 닮았다니까…….”

    이런 수호를 자기 아들인 줄 알아보지 못하는 태준이 새삼 우스웠다.

    하여간, 안 그럴 것 같은데 은근 허당기가 있는 남자였다.

    “……바보같이.”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선혜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이를 만든 건 둘이었지만 낳아 기르기로 한 건 순전히 선혜 혼자만의 의지였다.

    태준은 하룻밤 불장난으로 아이가 생겼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의 아들임을 알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문득 궁금해하다가 생각을 접었다.

    아무리 좋아하는 여자라도 자신의 아이를 몰래 낳아 기르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 분명 놀랄 것이다. 그리고 무척이나 곤란해하겠지.

    ‘얘가…… 얘가, 내 딸이라고?’

    자신의 아버지가 그러했던 것처럼.

    마지못해 받아들여진 것은 외면당하기 쉽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자신의 엄마와 자신의 뼈아픈 경험에 기반해 알게 된 사실이었다.

    그런 경험을 한 건 자신만으로도 충분했다. 사랑하는 아들 수호에게 그런 경험은 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태준이 저에게 보이는 관심도 언젠가는 꺼져버릴 불씨와도 같은 것일 테다. 아버지가 엄마한테 그랬던 것처럼.

    ‘나, 당신 만나고 나서 다른 여자 만난 적 없습니다.’

    오랜 시간 잊지 못했다는 말을 하던 눈빛이 생각났지만 선혜는 눈을 감고 외면해 버렸다.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어쩌다 이런 식으로 다시 만나게 되었는지.

    ‘나 알죠.’

    몇 달 전 우연히 마주했던 때가 떠올랐다.

    그땐 미처 몰랐다.

    ‘나 알잖아.’

    그 재회가 또 다른 인연의 시작이었다는 것을.

    선혜의 기억이 몇 달 전으로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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