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만난 애 아빠-1화 (1/109)
  • #1. 미혼모입니다

    금요일 저녁. 불금을 맞이하여 술집이 즐비한 거리는 불야성이 따로 없었다.

    주말을 앞둔 직장인들의 흥분과 쾌재가 거리 위에 고스란히 느껴졌다.

    술을 파는 식당과 호프집은 사람들로 가득 차 발 디딜 틈조차 없었고 시끌벅적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국내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고 알려진 현성 출판사에서 뻗어 나온 웹소설 지부.

    일명 레어미디어의 디자인팀의 회식도 그중 한 호프집에서 막 시작한 참이었다.

    “근데 기획부도 여기서 회식하는 모양이네요?”

    이 호프집을 회식 장소로 정한 게 비단 디자인팀뿐만은 아니었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커다란 테이블에 기획팀 직원들이 회식을 하고 있었다. 디자인 팀보다 먼저 왔는지 벌써 다들 술을 한 잔씩 비워내고 있었다.

    김지민 주임이 선혜에게 눈을 빛내며 속살거렸다. 선혜는 그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 보네요.”

    “와. 이따가 분위기 좋으면 합석이라도 하자고 할까요? 응?”

    “그럴까. 저쪽도 그러고 싶은 눈치긴 한데.”

    김지민 주임과 임민영 대리가 눈을 빛내며 키득거렸다.

    임민영 대리의 말마따나 기획부 직원들의 시선도 이쪽으로 힐끔힐끔 향하고 있었다.

    남자 비율이 높은 기획부와 여자 비율이 높은 디자인팀. 합석을 하면 성비가 그럭저럭 맞아 재미있을 것 같긴 했다.

    선혜는 그런 두 여자의 대화를 들으며 살짝 웃고는 물잔을 기울였다.

    모두가 기획부와의 합석을 은근히 원하는 것과는 다르게 선혜는 그 합석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아니, 사실 그녀가 피하고 싶은 건 합석 자체가 아니라 기획부 테이블에 앉아 있는 한 남자였다.

    “근데 어쩜…… 신 주임님은 술 마시는 것도 저렇게 근사할까요?”

    김지민 주임이 살짝 흥분한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그녀의 반짝이는 눈빛이 향하는 곳에는 한 남자가 앉아 맥주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남자의 이름은 신태준. 선혜보다 몇 달 일찍 입사했다던 기획부의 주임이었다.

    말이 주임이고 신입사원이지 그를 그렇게 취급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지금은 주임이었지만 태준은 곧 있으면 상무나 전무로 고속승진을 하여 이 레어미디어를 이끄는 후계가 될 인물이었다.

    태준은 레어미디어의 모기업인 현성 출판사 회장의 막내아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화려한 외모로도 사내에서 유명한 인물이었다.

    살짝 파마기가 도는 검은 머리칼은 왁스로 흐트러지지 않게 정돈되어 있었다.

    요즘 최신 유행인 포마드 스타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에게 유행 따윈 의미가 없었다.

    그가 입사하고 남자 직원들이 죄다 포마드 스타일을 버리고 파마를 했다는 풍문이 일 정도다.

    검은 머리칼과 대비되는 하얀 피부는 티 하나 없이 깨끗했고 그의 젊은 나이를 과시하듯 매끄러웠다.

    3분의 2 지점에서 살짝 꺾인 눈썹은 독특했으나 그 아래 자리한 홑꺼풀이지만 시원스러운 눈매와 적절히 조화를 이루어 시선을 한 번에 잡아끌었다. 머리도 까맣고 눈썹도 까만 데 반해 눈동자는 옅은 갈색이었다.

    오뚝한 콧날에 도톰한 입술. 가끔 웃을 때면 살짝 패는 왼뺨의 보조개까지. 완벽하다 못해 감탄이 절로 나오는 외모였다.

    “신은 공평하다더니 다 헛말이야.”

    “그러게요.”

    선혜가 임민영 대리의 말에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임민영 대리가 그녀의 어깨를 팔꿈치로 툭 치며 눈을 애교스럽게 찡그렸다.

    “에이, 자기가 그렇게 말하면 섭하지.”

    임민영 대리의 말에 선혜는 그저 웃었다.

    선혜의 얼굴은 같은 여자가 보기에도 참 예쁜 얼굴이었다. 그녀가 웃을 때면 본능적으로 피어오르던 질투심도 감탄에 사라지곤 했다.

    예쁘다는 소리는 어렸을 때부터 질리도록 들어온 터라, 민영의 말에 선혜는 딱히 감흥이 없었지만 쑥스러운 척 웃어 보였다.

    민영의 말마따나 선혜도 외모로는 태준 못지않게 회사에서 유명한 인물이었다.

    서른이라는 나이가 무색한 백옥같이 흰 피부에 단정하게 묶은 다갈색 머리카락과 짙게 쌍꺼풀진 커다란 눈이 이국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그 속에 담긴 검은 눈동자는 맑고 깨끗했다.

    도도한 성격을 대변하는 듯한 오뚝하고 섬세한 콧대. 선명한 인중과 그 아래 붉은 기가 맴도는 붉은 입술.

    마른 체구이지만 그에 비해 글래머러스한 몸매는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또 다른 요소였다.

    하지만 선혜가 주목받는 이유는 외모뿐만이 아니었다.

    입사하기 전 그녀는 ‘앤틱’이라는 예명으로 웹소설과 e-book의 표지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했다.

    ‘앤틱’이라는 이름을 모르면 웹소설 계에서는 간첩 취급을 받을 정도로 대세라 취급받는 인물이었다.

    그녀는 남녀 캐릭터 일러스트, 기하학적인 디자인, 타이포까지 모두 작업이 가능했고, 손이 빠른 데다 감각적이면서도 높은 퀄리티로 업계 사람들의 주목을 단숨에 받았다.

    때문에 다들 선혜에게 외주를 넣지 못해서 안달이었다.

    능력이면 능력, 외모면 외모, 무엇 하나 빠질 것 없는 그녀라 한동안 연예인 취급을 받기도 했다.

    돈을 쓸어 모아도 한참 쓸어모았을 텐데 갑자기 왜 레어미디어라는 회사의 신입사원으로 들어왔는지는 의문이었지만 갓 입사한 데에다가 워낙 말을 아끼는 인물이라 다들 그 이유는 알지 못했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자 안주가 나오기 시작했다.

    먹음직스럽게 튀겨진 치킨이 줄줄이 나오고 직원들의 잔이 소주와 맥주, 혹은 소맥으로 가득 찼을 무렵.

    “자! 건배를 하기에 앞서, 신입사원 소개가 있겠습니다.”

    디자인팀 팀장인 한기주가 경쾌한 목소리로 운을 틔웠다.

    그러자 모든 이의 시선이 선혜에게 쏠렸다. 디자인팀뿐만 아니라 멀리 다른 테이블에 자리한 기획부 직원들의 시선도 마찬가지였다.

    주목을 받는 상황이 내키지 않았지만 한기주가 손짓하자 선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살짝 흘러내린 앞머리를 단정히 귀 뒤로 쓸어넘긴 선혜가 살짝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이번에 디자인팀에 새로 입사한 윤선혜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짧게 인사하고 마치려고 했는데.

    “남자친구 있나요!”

    기획부의 한 남자 직원이 손나팔로 소리치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당황한 선혜는 무심결에 그쪽을 돌아보았다가 그 남자 옆에 앉은 태준과 눈이 마주쳤다.

    태준은 느리게 잔을 기울이며 잔 너머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소리친 기획부 남자 직원은 옆에 앉은 상사한테 꿀밤을 맞았다.

    그 모습을 본 디자인팀 직원들이 키득거리고 레어미디어에 속하지 않는 다른 손님들도 재미있다며 웃었다.

    그러면서도 호기심 어린 시선을 그녀에게 보내고 있었다. 다들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뇨.”

    선혜가 한 말에 멀리 앉아 있던 기획부의 미혼남들이 동시에 선혜를 휙 돌아보았다. 다른 테이블에 앉은 남자들도 마찬가지.

    희망 어린 분위기가 남자들 사이로 얕게 솟아오르는 그때였다.

    “남자친구는 없는데…….”

    선혜가 빙긋 웃었다.

    “아들은 하나 있어요.”

    순간 호프집 전체가 조용해졌다. 흥분이 고조된 순간, 누가 찬물을 확 끼얹은 듯했다.

    툭.

    디자인팀 팀장 한기주의 손에서 맥없이 새우칩이 떨어지는 소리가 유일한 소음이었다. 한기주뿐만 아니라 모두들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입을 반쯤 벌린 얼빠진 모습이었다.

    넋 나간 모두를 돌아보며 선혜가 입을 열었다.

    “저, 애 엄마예요.”

    멀리서 누군가 나직하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게 누군지 알았지만 선혜는 모르는 척 충격 먹은 사람들을 돌아보고는 생긋 미소 지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

    .

    .

    사람들이 선혜가 미혼모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까지는 그다지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입사 초에 그녀가 미혼이라는 사실은 다들 익히 알고 있었으므로.

    미혼모.

    그 타이틀이 주는 효과는 꽤 컸다. 선혜를 향한 남자들의 관심을 단숨에 잠재웠으니 말이다.

    다들 궁금한 게 많은 모양이었지만 눈동자만 굴리며 대범하게 물어오진 않았다. 수군거리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지만 선혜는 신경을 끄기 위해 노력했다.

    혹시 회식 자리 분위기를 망쳤나 걱정했지만 싸했던 분위기도 잠시뿐.

    다행히도 회식 자리는 여느 때처럼 다시 활기차졌다.

    “선혜 씨, 취했어?”

    민영이 해롱거리며 묻는 말에 선혜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대답했다.

    “네, 조금요.”

    집에서 일할 때 종종 맥주를 혼자 마시곤 했을 뿐, 소주는 오랜만이었다. 뿐이랴. 말아주는 소맥까지 넙죽넙죽 받아먹었더니 취기가 금방 오르는 게 느껴졌다.

    몽롱해지려는 정신을 다잡기 위해 냉수를 들이켜는데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한 선혜는 주위에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호프집을 나왔다.

    선혜는 호프집에서 그다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골목벽에 기대어 서서 전화를 받았다.

    “어, 수호야.”

    발신자는 다름 아닌 아들, 수호였다.

    - 엄마. 언제 와?

    “음…… 조금 더 늦을지도 모르겠는데 어쩌지. 미안해, 수호야.”

    - 아니야. 괜찮아 엄마. 나, 할머니랑 잘 기다리고 있을게.

    조숙한 수호의 말에 코끝이 괜히 찡해졌다.

    고작 일곱 살밖에 안 된 수호는 선혜가 달래주기 전에 오히려 괜찮다는 말로 선혜를 안심시키곤 했다.

    “응.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할머니랑 먼저 자. 알았지?”

    - 알았어, 엄마.

    “우리 수호,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거 알지?”

    - 나도, 엄마.

    부끄러운 듯 대답하는 수호의 목소리에 절로 미소가 피어올랐다.

    “엄마 이제 끊어야겠다.”

    - 응. 끊어, 엄마.

    “응.”

    통화를 마친 선혜의 입 밖으로 길게 한숨이 새어나갔다.

    “보고 싶네.”

    전에는 늘 재택근무만 했기에 이렇게 밖에 오래 나와 있는 건 처음이었다.

    엄마인 경애에게 수호를 맡겨두긴 했지만 그래도 이 늦은 밤까지 애를 두고 나와 있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회식 잦으려나.

    다음번 회식은 수호 핑계를 대서라도 빠져야겠다고 생각하며 벽에 기대어져 있던 등을 떼어냈다.

    자꾸만 술기운이 올라 어질거리는 시야를 다잡으며 담벼락을 잡고 천천히 골목을 걸어 나온 그때였다.

    “후.”

    긴 숨소리와 함께 회색빛 담배 연기가 눈앞을 흐렸다.

    인상을 한껏 찌푸리며 선혜가 손을 휘이 내젓자 담배를 태우고 있던 흡연자가 미련 없이 담배를 지져 껐다. 거의 장초나 다름없는 새 담배가 구둣발 아래 짓밟혔다.

    높게 솟은 가로등 아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선혜의 위를 덮었다.

    불어오는 바람 속에 담배 냄새가 흩어지고, 그 뒤를 이어 자극적인 향이 밀려와 선혜는 자기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문득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자신이 애 엄마라는 사실을 밝힐 때 뒤에서 들려왔던 그 웃음소리.

    “어디 갔나 했더니. 여기 있었어요?”

    신태준.

    절대 마주하고 싶지 않은 남자.

    그의 등장에 술기운이 순식간에 달아나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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