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6. 어머니에게서 어머니로
페렌트 왕도 릭센에 또 한 번의 가을이 찾아왔다. 아리아드네가 왕도에서 보내는 가을도 이것으로 여섯 번째였다.
“리스벨 공작께선 언제쯤 돌아오세요? 예정대로라면 지난 달쯤 귀환하셔야 했잖아요.”
서류를 뒤적이던 달로아가 멈칫하더니 고개를 들었다. 리스벨 공작이 된 캐롤린 리스벨이 순시를 이유로 국경으로 떠난 지도 벌써 반년째였다. 돌아오는 대로 왕도 경비대 개편을 논의하려 했는데 어째 귀환한다는 소식이 없었다.
달로아의 물음에 느긋하게 햇볕을 쬐던 아리아드네가 고개를 틀었다.
“두어 달은 더 걸릴 것 같다나 봐. 국경 수비가 해이해졌다고 단단히 벼르고 가더니.”
아리아드네의 대답에 달로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조금 전까지 보던 서류를 한쪽으로 치웠다.
‘이건 그럼 리스벨 공작이 돌아올 때까지 보류.’
흐음, 낮게 허밍을 하며 남은 서류를 분류하는데 위쪽에서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분 좋은가 봐?”
“나쁠 일이 하나도 없으니까요. 요즘만 같으면 소원이 없겠어요.”
아리아드네가 페렌트 국왕으로 즉위한 것도 만으로 5년이 지났다. 국정은 안정되었으며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은 것처럼 원활히 돌아갔다.
리뮈르는 그들이 누렸어야 할 마땅한 자리를 되찾았고 달로아의 입지도 안정적이었다. 새로이 리카서스의 주인이 된 리에트 또한 빠르게 남서부를 장악해 나가고 있으니, 요즘처럼 충만한 나날이 없었다.
“뭐, 그렇다면 다행이고.”
아리아드네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걸렸다. 조형적으로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저 미소에 달로아의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기분이었다.
“혹시, 저 모르게 또 계획 중인 일이라도 있으신지…….”
“있다고 하기도 그렇고, 없다고 하기도 그런데…….”
더듬더듬 묻는 말에 아리아드네가 손가락 하나를 입술에 붙인 채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 반응에 달로아의 등에서 식은땀이 쭉 흘러내렸다.
“그게 있다는 말이잖아요! 또 무슨 일이신데요!”
다급히 물으면서도 그 답이 듣고 싶지 않았다.
‘왜, 우리 왕께선 내가 행복한 꼴을 못 보는 거지?’
달로아가 초조하게 아리아드네의 답을 기다리던 그때였다.
“아직은 말하기가…….”
무언가를 망설이듯 아리아드네가 난감한 얼굴로 말을 끄는 중에 콰앙! 벼락같은 소리가 왕의 내실에 울려 퍼졌다.
어느 미친놈이 이따위 행패를……. 애타게 기다리던 대답이 끊겨 예민해진 달로아가 고개를 돌려 소음의 근원지를 살폈다.
아, 하긴. 왕의 내실에 누가 저렇게 들이닥치겠어. 소음의 원인을 마주한 달로아가 고개를 주억였다. 문가에 서 있는 사람은 당연히 유진이었다.
“아리아드네.”
전력 질주라도 한 듯 숨을 몰아쉬며 다가온 그가 아리아드네를 부르더니 고장 난 인형처럼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런데 왕후께선 가을 사냥에 가지 않으셨어요?”
가을 사냥은 수확을 앞두고 왕의 배우자가 풍요를 기원하는 의미로 행하는 의식이었다. 평소 왕후라는 위치에 별로 매이지 않는 유진이 그나마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유일한 행사이기도 했다.
가을 사냥이라는 행사에 어떤 의미를 부여해서라기보다는 자신이 잡아 온 사냥감을 아리아드네에게 선물하는 것이 마냥 좋아서인 듯했지만.
어쨌든 한 번 나가면 족히 보름은 걸리는 일정인데 오늘은 그가 가을 사냥을 떠난 지 불과 사흘째였다.
“일찍 왔네?”
한쪽 손을 든 아리아드네가 손가락을 물결치듯 접으며 인사를 건넸다. 그제야 집 나간 영혼이 되돌아온 듯 서서히 정신이 든 유진이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게,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야?”
한여름에도 서늘한 체온을 유지하는 사람이 땀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을 한 그가 한쪽 손에 도르르 말린 종이를 쥐고 있었다.
“거기 적힌 그대로야.”
“그러니까, 그러니까 지금…….”
갈피를 못 잡고 흔들리던 유진의 시선이 아리아드네의 얼굴에서 가슴쯤으로, 그리고 다시 내려가 편편한 배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아리아드네가 자신의 배를 힐끗 내려다보았다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맞아. 나 임신했대. 나도 아직은 실감 안 나지만.”
그 말과 동시에 유진의 얼굴에 그나마 남아 있던 표정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는 선 채로 기절한 사람처럼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네?”
가장 먼저 반응한 이는 옆에 있던 달로아였다.
“그렇게 됐어. 그래도 가족한테 말하는 게 우선일 것 같아서.”
“……감축, 감축드립니다, 폐하!”
놀란 듯 잠시 눈을 깜박이던 달로아가 서둘러 축하 인사를 건네고는 주섬주섬 서류를 챙기기 시작했다. 여기 남아서 무슨 꼴을 더 보려고. 국왕 부부의 애정행각이라면 더는 목격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 전 이만.”
서류를 끌어안은 달로아는 유진을 피해 부리나케 내실을 빠져나갔다.
탕,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고도 한참을 그렇게 서 있던 그가 몇 차례 심호흡을 하더니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몸은?”
목이라도 졸린 듯 꽉 잠긴 목소리였다. 다가온 그가 습관처럼 아리아드네의 어깨를 쥐려다 주저하며 허공만 움켜쥐었다.
오늘따라 그녀가 더 가냘파 보여 차마 손을 댈 수가 없었다. 설탕으로 만든 공예품처럼 손이 닿았다간 와르르 부서질 것만 같았다.
그가 주저하는 것을 알아챈 아리아드네가 허공을 맴도는 유진의 손을 낚아채 손가락을 얽었다. 아리아드네가 꽉 맞물린 손을 잡아당겼다. 순순히 끌려간 유진이 바닥에 주저앉아 아리아드네를 올려다보았다.
“괜찮아, 좀 졸린 것만 빼면.”
아리아드네가 남은 손으로 그의 젖은 머리카락을 넘겨주며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당신은 별로 안 기쁜가 봐. 난 좋은데.”
그러자 그가 어리광이라도 부리는 것처럼 아리아드네의 허벅지에 머리를 기대었다.
“……내겐 가능하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어. 그렇잖아. 내가 어떻게 그런 걸 바랄 수 있었겠어.”
유진은 자신에게 후손을 남길 능력이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페루스의 심장과 불사의 천형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그에게는 여전히 카푸트와 페루스의 권능이 남아 있었으니까.
권속과 인간의 경계, 그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버티는 상식 밖의 존재. 그런 존재가 보통 사람처럼 자식을 가질 수 있을 리 없다. 그렇게만 생각했다.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던 아리아드네의 손길이 뚝 멎더니, 그녀의 입에서 황당하다는 듯 바람 빠지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고개를 들자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린 아리아드네가 어이없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사람을 밤낮으로 그렇게 괴롭혀 놓고 이럴 줄 몰랐단 말이야?”
임신 확률은 횟수에 비례하기 마련이다. 그가 행한 횟수에 비하면 늦어도 한참 늦은 건데. 당황한 그의 얼굴이 서서히 붉어지기 시작했다.
“와, 그렇게 안 봤는데 양심 없는 사람이었네.”
아리아드네가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놀리는 것을 멈추지 않자, 당황한 유진이 누가 들을세라 서둘러 공간을 분리했다.
고위 귀족으로 태어나 자라서일까. 아리아드네는 시중인들의 눈과 귀를 좀처럼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가 지금처럼 은밀한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툭툭 던질 때마다 화들짝 놀라 눈치를 살피는 것은 언제나 그의 몫이었다.
황금빛이 희미하게 떠다니는 공간에 온전히 둘만 남고서야 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들썩이는 가슴을 겨우 진정시킨 그가 고개를 들어 아리아드네와 눈을 마주했다.
“정말, 기뻐?”
그렇게 묻는 그의 얼굴엔 처분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초조하고 불안한 기색이 묻어 있었다. 적지 않은 시간을 함께하고도 그는 때때로 그녀의 애정을 불안해했다. 이 모든 것이 깨어나면 사라질 꿈만 같다고 했다.
“당연하지. 이건 내가 바라던 일이니까.”
그리고 그녀는 바닥이 없는 항아리에 물을 붓는 일이 지겹지 않았다. 매 순간 차오르는 애정을 어딘가 쏟아 내지 않으면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으니까.
“우리를 반씩 닮은 아이에게 내 모든 것을 물려주는 건.”
아리아드네가 가진 것들은 그녀 혼자서 이룩한 것이 아니었다. 메르디에스의 이름을 가진 선조들이 그녀에게 물려준 것이었고, 그녀는 또 다음 메르디에스에게 이것을 물려줘야 했다.
더 커지고 더 부유해진 메르디에스를 오래도록 유지하는 것. 그것은 메르디에스의 피를 이은 아리아드네의 의무이자 그녀가 행할 수 있는 가장 큰 권리였다.
“나는 차마 바라지도 못했던 일이야.”
누군가에겐 그토록 당연한 것이 그에게는 감히 바라지 못할 탐욕이었다. 그에게 가족이란 마주해야 하는 죄악이자 짊어져야 하는 죄책감이었고, 이제는 흉터로 남은 무언가였다. 혼자만 행복한 것도 죄스러운데 날마다 그 위로 더한 행복이 쌓였다.
“그런데 염치도 없이 기뻐서.”
그는 나무뿌리처럼 단단히 얽힌 그녀의 손등에 입술을 내렸다. 그녀와 부부라는 이름으로 엮인 것도 넘치는 행복인데 탄생의 순간부터 함께할 수 있는 가족이 생기다니.
“고마워.”
그는 손등에 입술을 붙인 채로 몇 번이고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리고?”
아리아드네는 그것만으로 부족하다는 듯 그를 채근하며 팔을 벌렸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그가 닿으면 사라질 거품을 만지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그녀를 껴안았다.
“사랑해.”
수백, 수천 번 반복한 말을 또 하면서도 그는 처음 사랑을 고백하는 사람처럼 떨고 있었다. 맞닿은 피부로 그의 불안과 감격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나도.”
아무렇지 않은 듯 웃고 있었지만 두렵기는 아리아드네도 마찬가지였다. 가 보지 않은 길이, 겪어 보지 않은 미래가 무섭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나도 사랑해.”
다만 그 모든 것을 함께할 누군가가 있어 외롭지 않을 뿐.
“아이는 메르디에스에서 낳을 거야. 집에 가고 싶어.”
“모든 것은 당신 뜻대로.”
허공을 떠도는 따스한 빛이 두 사람을 포근히 감싸 안았다.
* * *
피부에 맞닿는 공기의 감촉만으로도 메르디에스에 가까워진 것이 실감 났다. 늦가을, 대지는 무르익어 울긋불긋하게 물들어 있었다.
겨울이 되기 전에 메르디에스에 올 수 있어 다행이었다. 즉위 이후로 메르디에스에 머무른 적이 없는 것도 아닌데 괜스레 마음이 설렜다.
마차의 속도가 점점 늦어지더니 이윽고 멈추었다. 당연하다는 듯 유진이 아리아드네를 안아 들기 위해 팔을 뻗었다.
평소에도 신발이 불편하다거나 조금만 많이 걸었다 싶으면 여지없이 뻗어 오던 팔이었지만 근래는 그 정도가 심해도 너무 심했다. 요즘 그는 아리아드네의 발이 땅에 닿으면 큰일이라도 나는 사람처럼 극성스럽게 굴었다.
“됐네요.”
아리아드네가 검지로 그의 이마를 꾹 밀어냈다.
“피곤하지 않겠어?”
밀어내는 대로 밀려나면서도 그의 시선은 아리아드네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좀이 쑤셔 죽을 지경이야. 멀쩡한 발 두고 왜 걷지도 못하게 해.”
“……그래. 피곤하면 말하고.”
끝끝내 미련을 버리지 못한 그가 낮은 한숨을 흘렸다. 아리아드네는 유진이 옷매무새를 정리해 주길 기다렸다 그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마차 앞에 도열한 채로 그녀가 나오길 기다리던 사람 중에 가장 앞줄에 서 있던 여자가 입을 열었다.
“폐하, 먼 길 오느라 피곤하시지요.”
“이블린, 지내기는 괜찮아? 불편한 건 없고?”
이블린이었다. 글레나가 왕궁의 내정을 담당하는 궁내부장이 되며 공석이 된 메르디에스 본성의 내정을 이블린이 맡게 되었다.
“네, 좋아요. 어서 안으로 드세요. 다들 기다리고 있어요.”
“정말, 내가 끝까지 내 곁에 두겠다고 우겼어야 했는데…….”
아리아드네가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다. 처음 이블린의 거취를 두고 아리아드네와 글레나 사이에 이견이 있었다. 아리아드네는 이블린을 왕궁에 두고 싶어 했으나 글레나는 이블린을 자신의 후임으로 삼고 싶어 했다.
메르디에스 본성에서 내정을 익히는 대로 왕궁으로 불러들이겠다는 말에 아리아드네는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아리아드네는 글레나의 말이라면 여전히 꼼짝할 수가 없었다.
“폐하 곁으로 갈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어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아리아드네의 투덜거림이 기쁜 듯 이블린이 수줍게 웃으며 답했다.
“조금만이야.”
“네.”
“그런데 아버지는?”
이블린과 걸음을 옮기려다 문득 이상한 점을 느낀 아리아드네가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언제 도착하냐며 재촉하던 아버지가 보이질 않았다. 아버지께 제가 도착한 걸 알고도 기다릴 만한 인내심이 있을 리 없는데.
“아, 계속 기다리시다가 호흡 곤란으로 잠깐…….”
“어디 편찮으셔?”
호흡 곤란이라는 말에 놀란 아리아드네가 초조하게 대답을 기다리던 그때였다.
“아리아드네!”
레너드가 괴성을 지르며 구르듯이 달려왔다. 흙먼지를 일으키며 도착한 그가 아리아드네의 두 손을 덥석 잡더니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너, 너 몸도 성치 않은 애가 이렇게 서 있으면!”
아, 그래. 왜 이걸 생각 못 했을까. 아버지가 유진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할 분이 아닌데.
“아버지, 저 아픈 거 아니고…….”
아리아드네가 근 두 달간 유진을 붙잡고 지겹도록 반복한 이야기의 서두를 꺼내는 중에, 별안간 손등 위로 미지근한 물방울이 후드득 떨어졌다.
“흐, 흐읍…….”
억눌린 듯한 소리는 덤이었다. 설마 하며 고개를 든 아리아드네는 눈물을 줄줄 흘리는 레너드를 발견했다.
“아, 버지? 왜…….”
레너드가 아무리 아리아드네 일에 팔불출처럼 군다지만 자식 앞에서 눈물을 보인 건 처음이었다. 아니, 사실 레너드는 운으로 모든 고난을 피해 가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에게 눈물샘은 흔적 기관이나 마찬가지였다.
“혹, 제 임신 말고 다른 일 때문에 이러세요?”
아리아드네는 너무 어이가 없어 그렇게 묻고 말았다.
“이게, 이게 무슨 일이냐! 애가 어떻게 애를 낳아!”
하지만 레너드에게서 그런 대답이 돌아왔을 땐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하늘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누가 애라는 거예요, 대체.’
첫 출산치고 이른 나이도 아니거니와 아리아드네는 ‘애’라는 말과는 여러모로 동떨어진 사람이었다. 하지만 굳이 그 말을 하진 않았다. 지금 당장은 제 손을 붙잡은 채로 엉엉 우는 아버지가 더 아이 같아서.
* * *
“진정 좀 하셨어요?”
자리에 앉은 아리아드네가 작게 웃으며 물었다. 메르디에스에 오자마자 한 일이 아버지를 달래는 것일 줄이야.
“아니, 내가 주책이구나. 좋은 일에…….”
좀 그치는가 싶더니 다시 감정이 복받쳤는지 레너드가 흐윽, 하고 억지로 울음을 눌러 삼켰다. 아리아드네는 손수건의 마른 면을 찾아 건네면서도 어이가 없었다.
“그러니까요. 제가 지금 아버지 위로해 드려야 해요?”
심신의 안정을 취해야 하는 건 임신을 한 자신이 아닌가. 어째 임신하고 주위 사람들을 달랠 일이 느는 기분이었다.
“그래, 그건 아니지. 그렇지만 말이다.”
레너드가 얼굴을 쓸어내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리아드네는 아버지가 끝내 말하지 못하는 걱정이 무엇인지 알았다.
임신과 출산은 인간이 완전히 정복하지 못한 영역이었고, 그런 것에는 각종 미신과 낭설이 난무하기 마련이었다.
“뭘 그렇게 걱정하세요. 코라가 봐 주기로 했잖아요.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아리아드네가 잘게 떨리는 레너드의 두 손을 꼭 잡으며 안심하라는 듯 말했다. 소르체 공국에서는 아리아드네의 임신 소식을 들은 코라가 부리나케 떠났으니 부디 잘 써먹으라는 서신을 전해 왔다.
소르체 백자의 진료라니, 이만한 호사도 없다 싶었는데. 오늘따라 레너드의 주름이 부쩍 깊어 보였다.
“그래, 그렇겠지. 늙으니 괜히 걱정만 늘어서…….”
레너드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불안을 떨칠 수가 없었다. 불안은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리아드네의 입술 사이로 평온하고 담담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버지, 혈통을 잇는 건 메르디에스의 성을 단 제 의무이기도 해요. 제 아이에게 우리가 쌓아 올린 모든 것을 물려주는 건 제가 행할 수 있는 가장 큰 권한이기도 하고요.”
참전하는 기사가 다칠 것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듯, 아리아드네가 자신의 권한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다소의 위험은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일상의 작은 부분들을 포기하고 왕위를 선택한 것처럼, 그녀의 모든 것을 물려받아 마땅한 아이는 사소한 위험을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그것이 사랑하는 사람과의 아이라면 더욱더.
“의무니 책임이니, 그런 것들이 다 무슨 소용이냐! 그런 것은 네 건강에 비하면 아무, 아무 의미도 없는데…….”
애끓는 마음을 터트리듯 소리를 지른 레너드의 말이 점점 작아지다 종내는 바람 빠진 공처럼 쪼그라들었다.
평생을 메르디에스의 수장으로 살아온 레너드였다. 가벼운 듯 굴지만 아버지는 결코 제 책임에서 눈을 돌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아버지가 자신을 대할 때면 한결같이 말했다. 언제 어느 때고 가장 중요한 건 네 행복이라고.
그 사랑이 아리아드네의 세상을 만들었다. 흔들리지 않는 애정이 그녀를 단단히 받쳐 주었기에 두려워하지 않고, 위축되지 않고, 물러서지 않을 수 있었다.
“네가, 아프면, 그러면 난 어떻게 해야,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늘 태산처럼 든든한 아버지였는데, 레너드는 양손에 얼굴을 묻은 채로 고개를 숙였다. 출산에 관한 낭설 중 레너드를 불안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그 사람처럼 아프기라도 하면, 난…….”
제가 태어난 대로 자식을 낳는다. 모계의 출산 경험이 유전된다는 믿음은 항간에선 진리처럼 통용되곤 했다.
아리아드네의 임신 소식을 들은 레너드는 고목처럼 죽어 가던 파시파에를 떠올렸다.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이렇게 무서운 일일 줄……. 매일 같이 벌어지는 일인데, 다들 어떻게 그 공포를 견디는지…….”
레너드에게 아는 사람들의 출산은 언제나 축하할 일이었다. 가끔 그 과정에서 안타까운 일이 생기더라도 그것은 불운한 사고일 뿐이었다. 하지만 딸의 임신 소식을 알았을 때는 기쁨을 느낄 새도 없이 덜컥 두려워졌다.
그는 출산이라는 것이 인간의 정신과 육체를 얼마나 좀먹을 수 있는지 알고 있었다. 아니, 이제야 그것을 실감했다. 파시파에가 죽은 지 십수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임신과 출산은 정말 신의 선물이고 축복인가? 아니, 그것은 차라리 흉포한 악몽이었다. 살아 있는 생명을 담보로 새 생명을 얻는 것이 어떻게 축복일 수 있단 말인가.
“내가, 내가 그 사람에게 못 할 짓을 했다……. 그래서는 안 됐어. 그러면 안 됐던 건데…….”
공포는 필연적으로 후회를 불러왔다. 그는 십수 년 전 자신이 했던 결정과 말들을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메르디에스 수장으로는 옳은 결정이었을지 몰라도, 남편이 자신의 아이를 낳다 병을 얻은 부인에게 할 법한 처사는 아니었다.
제 딸이 행여나 그 비슷한 일을 당한다고 생각하면 상상만으로도 열이 뻗쳤다. 제 손톱 밑의 가시가 제일 아픈 법이라더니. 어째서 그때는 몰랐을까. 무지는 부메랑처럼 돌아와 그를 할퀴었다.
그런 레너드의 머리 위로 피식 바람이 빠지는 것 같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 몇 번을 말해요. 저 죽을병 걸린 거 아니라니까요.”
아리아드네는 지루하다는 얼굴이었다. 어째 좀 졸린 것 같기도 하고. 레너드는 태연하다 못해 심드렁한 딸아이의 얼굴을 보니 혼자 유난을 떤 것 같아 조금 머쓱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머니는 원래 몸이 약하셨잖아요. 전 잔병치레조차 드문 편이고요.”
그건 그렇지. 아리아드네가 건강하긴 하지. 환절기마다 감기에 걸려 고생하는 건 제 쪽이었다. 아리아드네는 ‘그러게 건강 관리하시라니까요.’ 하면서 잔소리하는 쪽이었고.
“애 낳는 건 난데 왜 아버지가 야단이에요.”
그것도 맞는 말이었다. 정작 출산을 하는 것도, 위험을 감당하는 것도 전부 아리아드네인데, 당사자 앞에서 확실치도 않은 제 불안을 토로하는 건 여러모로 어른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쟨 어떻게 매번 맞는 말만 하지?’
정말 이렇게까지 현명할 수가 있을까. 옳은 말로 조목조목 얻어맞아 할 말이 사라진 레너드가 두 눈만 끔벅였다.
“그리고 그건 저도 그래요. 저도 요즘 종종 어머니 생각을 해요. 임신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도 사실 어머니 생각이 제일 먼저 났어요.”
“하아, 미안하구나……. 역시 이런 일엔 어머니가 있어야…….”
레너드는 또다시 기가 죽어 어깨를 수그렸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좋은 음식, 좋은 환경을 갖다 바치는 것으론 부족했다.
초산인 아리아드네에게 무엇보다 절실할 경험에서 비롯된 조언이나 공감은 남자인 그가 도저히 해 줄 수 없는 일이었다.
“외롭거나 불안해서가 아니에요. 그리워서도 아니고. 그저, 제게 어머니는 평생 미안한 사람이었는데…….”
아리아드네가 파시파에에게 가진 가장 강렬한 감정은 언제나 죄책감이었다.
“요즘은 안됐다는 생각을 해요.”
그런데 아이를 가진 것을 알게 된 뒤로는 파시파에를 향한 감정의 결이 변했다. 연민이라 이름 붙일 만한 것으로.
“아버지, 그거 아세요? 어머니가 절 낳았을 때가 지금 저보다도 어리다는 거.”
그 말에는 레너드도 조금 놀랐다. 그의 기억 속 파시파에는 바늘 들어갈 틈 하나 없는 꼿꼿한 사람이었고, 아리아드네는 쥐면 꺼질까 불면 날아갈까 전전긍긍 길러 낸 딸이었으니까.
“제게 어머니는 평생 어렵고 범접할 수 없는 어른이었는데……. 스물여섯에 저를 낳으셨다고 생각하니 안쓰러워서요.”
스물여덟의 아리아드네는 스물여섯의 파시파에를 상상했다.
“어머니께 출산은 계약의 필수적 이행이었잖아요. 두렵다고 피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선택의 문제도 아니었죠.”
스물넷의 파시파에가 어떤 마음으로 결혼을 제안하고, 그 자리에 섰을지.
“디아즈는 어머니의 출산이 잘못되기를 바랐을 테고, 메르디에스에서는 후계가 우선이었을 텐데…….”
스물다섯의 파시파에는 메르디에스 공작의 아이를 임신했다.
친정에서는 그녀가 잘못되어 디아즈 후계의 권리가 되돌아오기를 바랐고, 메르디에스에서는 배 속의 아이가 더 소중했다. 그녀는 어디에서도 첫 번째가 되지 못했다.
“그런 일을 겪기에 스물여섯은 너무 어린 나이 같아서, 어떻게 그걸 혼자서 견디셨을까. 그래서 아프셨나 보다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아이를 가지니 자신을 가진 그 시절 파시파에의 심경을 헤아리게 되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당신은 참 외로웠겠다고.
“아리아드네…….”
자책과 후회, 또 희미한 그리움 같은 것들로 뒤섞인 눈을 한 레너드가 아리아드네를 불렀다.
“하지만 전 혼자가 아니잖아요. 평생을 지켜 온 가문보다도, 어떤 명예나 의무보다도 제가 제일 중요하다고, 그렇게 말해 주는 아버지가 계시니까.”
돌고 돌아 다시 제자리였다. 몸이 좀 불편해지는 것도, 때때로 치솟는 불안함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아버지. 우리는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그것을 감당하는 건 혼자가 아니었으니까.
“아리, 아리아드네…….”
무엇부터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어 레너드는 딸아이의 이름만 연거푸 불렀다.
“그럼, 아무 일도 없을 게다. 아버지가 지켜 주마. 너는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두서없이 주절대는 말에도 아리아드네는 세상에서 가장 어여쁜 얼굴로 웃어 주었다.
“알아요. 제겐 아버지만 계시면 아무 일도 없을 거라는 거.”
그제야 레너드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 이딴 약해 빠진 소리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나가서 금이라도 주워 와 아리아드네에게 보탬이 되어야지.
“저도 제 아이에게 아버지 같은 부모가 되어 주고 싶어요. 그럴 수 있겠죠?”
조금은 불안하고, 또 조금은 기대가 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아리아드네는 믿었다. 제 두 발은 단단한 땅을 딛고 섰으니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라고.
* * *
타닥타닥, 벽난로에서 장작이 타며 불티가 튀어 올랐다. 실내에는 적당한 훈기가 감돌았다. 원래도 따뜻한 메르디에스였지만 올겨울은 유난히도 포근했다.
온기에 온몸의 근육이 느슨하게 풀렸다. 눈꺼풀에는 무거운 추라도 달린 것 같았다.
유진에게 비스듬히 안긴 채로 책장을 넘기던 아리아드네가 머리에 힘을 줘 그의 가슴팍을 꾹꾹 눌렀다. 그러면 사각사각, 꽁꽁 언 얼음을 티스푼으로 긁어내는 소리가 들렸다.
입을 벌리면 과즙과 시럽을 섞어 꽁꽁 얼렸다가 방금 갈아 낸 얼음 알갱이들이 혀 위에서 녹아내렸다. 간 얼음이나 눈에 과즙을 섞어서 만드는 일반적인 셔벗과는 식감이 달랐다.
꽁꽁 언 얼음을 그때그때 갉아 먹는 것은 훨씬 더 번거로운 일이지만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다. 그렇게 먹는 게 더 맛있었으니까.
임신 초기, 아리아드네는 세상에 그렇게 많은 냄새가 존재한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생선의 비린내, 고기의 누린내, 곡물의 군내, 온갖 냄새들로 속이 울렁거려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없었다. 차나 과일, 비스킷이 그녀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의 전부였다.
그것조차도 몇 입 먹고 나면 달아서 물린다며 치우는 통에 얼음에 섞어 먹기 시작한 것이 아리아드네 전용 디저트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제는 입덧도 가라앉아 식사를 거르는 일도 없는데, 그는 여전히 식사와 식사 사이의 어중간한 시간에 방금 긁어낸 얼음을 그녀의 입에 넣어 주곤 했다.
그의 품에 안긴 채로 입만 벌려 아기 주먹만 한 얼음 하나를 해치우자 읽던 책도 끝이 났다. 반쯤 졸면서 읽었더니 무슨 내용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중간쯤에 남자 주인공이 죽지 않았던가? 왜 갑자기 살아나서 여자 주인공이랑 끌어안고 있지?’
그렇다고 다시 볼 만큼 궁금한 건 아니었기에 아리아드네는 그대로 책을 덮었다.
그의 품을 벗어난 아리아드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목이며 어깨가 굳은 것 같아 슬쩍 돌리자 온몸이 삐거덕거렸다. 손가락이 좀 부었나?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날마다 달라지는 몸이 신기하고 때론 두렵기도 했다.
“왜, 뭐 필요한 거 있어?”
유진이 냉큼 따라 일어나더니 허리를 숙여 시선을 맞춘 채 아리아드네의 표정을 살폈다.
“다 읽었어. 새 책 좀 고를까 하고.”
아리아드네가 손에 든 책을 흔들며 발을 뻗었다. 열 걸음 앞에 있는 책장이 그녀의 목적지였다.
“뭐 하는 거야?”
아리아드네가 제 허리를 감싸 안은 채 팔을 잡고 조심조심 걸음을 옮기는 그를 황당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의 유난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레너드와 유진이 한자리에 있을 때면 유난에 유난이 더해져 웬만해선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 아리아드네조차 낯부끄러울 지경이었다.
모처럼 의견 일치를 본 두 사람이었으나, 그들의 등쌀은 얼마 가지 못하고 막을 내렸다. 적당한 운동은 임산부에게 필수이니 아리아드네가 움직이는 것을 방해하지 말라는 코라의 엄명 덕분이었다.
내내 아리아드네를 한쪽 팔로 안고 다니다가 그것을 못 하게 되니, 이제는 반쯤 끌어안고 다니는 게 습관이었다.
“당신은 지치지도 않나 봐.”
아리아드네가 웃으며 유진의 팔을 밀어내자 그가 불쌍한 척 눈꼬리를 늘어트렸다.
“내가 뭘 했다고 지쳐. 힘든 건 당신 혼자 다 견디고 있는데…….”
아리아드네와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는 자신의 약한 척이 그녀에게 잘 먹힌다는 걸 깨달았다.
아예 대놓고 불쌍한 척하는 그가 어이없다는 듯 눈을 흘긴 아리아드네가 유진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 쥐고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렇게 아무 말 없이 그의 얼굴을 구경하자 안타깝다는 듯 내려간 눈꼬리가 제자리를 찾더니, 유진의 미간에 작은 주름이 생겼다.
“아리아드네, 어디가 불편해?”
최근 아리아드네의 가장 큰 즐거움은 제법 다채로워진 그의 표정을 구경하는 일이었다.
“아니, 태교 중이야.”
그녀의 대답에 그가 뜻을 헤아리느라 골몰했는지 미간의 주름이 깊어졌다.
“코라가 그랬잖아. 좋은 거 많이 보라고. 좋아하는 거 보는 중이야.”
그의 얼굴을 감싼 양손에 힘을 주어 잡아당긴 아리아드네가 얼굴 곳곳에 입을 맞추었다. 그녀의 입술이 닿은 자리마다 부드럽게 풀어지며 그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짙어진 미소만큼이나 행복한 일상이었다.
그때였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에 아리아드네가 그의 얼굴을 감싸고 있던 손을 내렸다.
“들어와.”
“리아!”
함박웃음을 띤 얼굴로 아리아드네를 부른 건 캐롤린이었다.
한 달 전, 국경 순시를 끝낸 캐롤린은 메르디에스로 돌아왔다. 메르디에스 기사단의 기사였다가 이제는 리스벨 공작의 부관이자 부군이 된 알버트도 함께였다.
“어서 와, 캐롤린.”
가볍게 포옹한 두 사람이 서로의 뺨에 키스를 하고 떨어졌다.
“그건 뭐야?”
아리아드네가 캐롤린의 손에 들린 상자를 가리키며 물었다.
“나 출산할 때 썼던 것들. 물론 더 좋은 것들이 많겠지만 내 마음이야. 갖고만 있어.”
캐롤린이 웃으며 탁자 위에 상자를 내려놓았다. 무사히 출산한 임산부가 썼던 물건을 갖고 있으면 불운을 막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일부러 챙겨 준 마음이 고맙지 않을 리 없었다.
“무슨 말이야. 세상에 이보다 더 좋은 게 어딨어. 네 마음이 담긴 거잖아. 잘 쓸게. 고마워, 캐롤린.”
“그렇게 생각해 주면 고맙고. 그러고 보니 우리 애들은 또 두 살 차이구나.”
캐롤린은 지난해 늦봄 아이를 낳았다. 캐롤린과 알버트의 첫 아이는 건강한 아들이었다. 아리아드네의 예정일은 내년 초여름이었으니 아이들끼리는 또 두 살 차이였다. 그녀들과 마찬가지로.
“그러게. 또 그렇게 됐네.”
웃으며 긍정한 아리아드네가 이번에는 알버트가 들고 있는 바구니를 가리키며 물었다.
“알버트 경이 들고 있는 것도 내 선물이야?”
“그게…….”
어딘가 곤란한 얼굴을 한 알버트가 주저하며 도와 달라는 듯 캐롤린을 돌아보았다.
“네가 그만 먹겠다고 다 물렸다면서 다들 문 앞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던데?”
알버트로부터 바구니를 건네받은 캐롤린이 그 속에 차곡차곡 쌓인 음식들을 탁자 위에 늘어놓았다.
오렌지 필을 넣고 구운 쿠키, 차게 만든 청귤 차, 보는 것만으로 침이 고일 듯한 새콤한 유자 스프레드를 듬뿍 바른 파이까지. 아리아드네가 최근 먹은 것 중에서 그나마 입에 맞았던 디저트들이 줄줄이 딸려 나왔다.
“그래서 이걸 선물인 척하라면서 알버트 경에게 들려 보냈단 말이야?”
“와, 맛있겠다. 리아, 맛이라도 좀 볼래?”
캐롤린은 묻는 말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 막 구운 듯 따뜻한 쿠키를 하나 건넸다.
“너한테도 시켰어? 나 좀 먹이라고?”
“아니, 그렇게 말한 건 아닌데……. 요새 네가 잘 안 먹어서 걱정된다고 하니까…….”
“잘 안 먹어? 내가?”
“아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묻는 캐롤린의 모습에 아리아드네는 끝내 앓는 듯한 한숨 소리를 냈다.
“아니야. 저 사람들은 그냥 내가 얼마를 먹든 만족 못 할 사람들이야.”
입덧에서 벗어난 지가 언젠데 메르디에스 사람들의 시간만 멈춘 듯했다.
“먹을 수 있겠어?”
유진이 쿠키를 반으로 갈라 아리아드네 입가에 대 주며 물었다. 아, 그건 이 사람도 마찬가지였나.
아리아드네가 입덧으로 식사를 하지 못하던 시기에 그는 심리적인 문제로 음식물을 넘기지 못했다. 평소 다른 사람의 배는 먹는 사람이 거의 굶다시피 하니 걱정이 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안 먹는 게 아니야. 뭘 먹든 모래알 같아서 도무지 넘어 가지가 않아.
결국 그가 다시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된 건 아리아드네의 입덧이 끝난 직후였다. 그리고 메르디에스 성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때때로 그는 아리아드네가 입덧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잊은 사람처럼 굴었다.
“이거 먹을 테니까 당신도 좀 쉬어. 알버트 경도 지인들 좀 만나고 와요. 오랜만에 성에 온 건데.”
아리아드네가 쿠키를 먹으며 말하자 유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필요하면 불러.”
“그럼 두 분, 말씀 나누십시오.”
유진이 휘적휘적 걸어 방을 가로지르자 알버트도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뒤따라 나갔다. 캐롤린과 둘만 남자 아리아드네가 음식을 밀어내며 고개를 저었다.
“먹고 돌아서면 또 음식이 들어와. 이건 학대야. 유사 고문 수준이라고.”
전전긍긍하는 사람들을 생각해 억지로 먹어 주는 것도 한두 번이지. 아리아드네가 진저리를 치자 캐롤린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긴, 나도 그랬어. 살이 안 붙으니까 주위에선 걱정되나 봐.”
“아직 한참 남았잖아. 이제 5개월인데, 뭐.”
초산이라 그런지 개월 수에 비해 배도 많이 나오지 않은 편이었다. 문제없이 잘 자라고 있는 건가 걱정이 되다가도 한 번씩 태동이 느껴지면 그제야 배 속에 아이가 있다는 실감이 났다.
“달로아랑은 연락했어? 애타게 너만 기다리던데?”
왕도 경비대 개편으로 오매불망 캐롤린만 기다리던 달로아였다. 그런데 아리아드네가 메르디에스로 내려오는 통에 캐롤린의 왕도 복귀가 더 늦어졌으니, 달로아의 목이 한 뼘은 더 길어졌을지도 몰랐다.
“했어. 그렇지 않아도 곧 올라가 보려고. 우리 재상님께 잘 보여야지.”
캐롤린이 장난스레 눈을 휘며 말했다. 아리아드네는 내심 캐롤린과 달로아가 서로 데면데면할 거라 생각했다.
공적인 관계에서야 크게 부딪히지 않겠지만, 사적으로 친해지기에 둘은 너무 달랐다. 무엇보다 겉으로는 툴툴 대지만 속정이 깊은 달로아가 겉으로만 상냥하고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는 캐롤린을 꺼릴 것 같았다.
그런데 아리아드네가 우려한 것과는 달리 달로아 쪽에서 캐롤린을 졸졸 쫓아다니더니 어느 순간 둘은 제법 친해져 있었다.
“간 김에 좀 도와주고 와. 일이란 일은 혼자 죄다 끌어안고 죽을까 봐 걱정이야.”
달로아는 유능한 만큼 걱정이 많았다. 다른 사람이 끝마친 일도 자신이 일일이 검수를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미라 늘 일에 파묻혀 있었다.
아리아드네가 자리를 비우면 그런 경향이 더 심해졌다. 아마도 최종 결정권자가 자신이라는 것에 부담을 느끼는 듯했다.
결국 달로아가 사람을 부리는 데 익숙해지는 수밖에 없었다. 적당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조금씩 더 익숙해지도록 업무량을 조정하고 있지만, 유능한 신하가 괴로워하는 모습은 아무래도 보기가 힘들었다.
“재상이 정말 기다리는 건 내가 아닐 텐데?”
그것을 아는 캐롤린이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저런, 그런 거라면 한참 기다려야 할 텐데…….”
아리아드네가 안타깝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정확한 건 출산 이후 상황을 봐야 하겠지만 한동안은 좀 느긋하게 쉴 생각이었다.
“천천히 복귀할 거라 그랬지?”
“별일 없으면. 코라가 페렌트 문화에 불만이 많더라고. 산후 관리가 너무 방만하대.”
아리아드네는 느릿하게 말을 잇다 픽 웃고 말았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훨씬 더 많이 남았는데, 그렇게 몸을 막 쓰면 안 된다고.”
왕이라는 위치가 아니라도 아리아드네는 제 몸을 막 쓰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데 코라 앞에만 서면 조심성 없고 무신경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아리아드네의 한시적 주치의는 뛰어난 능력만큼이나 무척 깐깐했다.
―출산이 신체에 얼마나 큰 부담을 주는데! 무식한 페렌트 사람들은 이게 몸살인 줄 안다니까. 한 번 삐끗하면 절대로 돌이킬 수 없는 게 건강이에요. 아시겠어요?
소르체가 페렌트에서 독립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페렌트 사람을 운운하는지……. 어색한 공대만큼이나 황당한 소리였다.
“쉴 수만 있으면 푹 쉬는 게 좋지. 그동안은 좀 무리했잖아.”
“괜찮아도 좀 쉬려고. 내가 일 년쯤 쉬면 다른 사람들도 반년은 쉬겠지.”
아리아드네가 의자에 몸을 깊게 묻으며 중얼거렸다. 코라는 이참에 페렌트 사람들의 버릇을 고쳐 놓겠다고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아리아드네는 기꺼이 그녀의 계획에 어울려 줄 마음이 있었고.
“넌 뭐가 그렇게 급했어?”
잠시 딴생각에 잠겼던 아리아드네가 테이블 위의 음식을 고르고 있는 캐롤린에게 물었다.
“나야 회복이 빠르기도 했고…….”
유자 파이를 집어 한입 베어 문 캐롤린이 입가에 묻은 파이 부스러기를 털어 내며 대답했다.
“산실에 들어가기 전에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서 몇 가지 조율을 하잖아.”
가문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으나 만일의 사태에서 산모와 아이 중 누구를 우선시할 것인지, 작위를 가진 산모가 사망하고 태어난 갓난아이가 작위를 승계해야 할 경우 후견인으로 누구를 지정할 것인지에 대한 것들이었다.
캐롤린 또한 출산을 앞두고 산더미 같은 서류에 서명을 남겼다. 어쩌면 이 서류들이 정말 효력을 발휘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무섭더라. 이젠 무서운 일 같은 건 없을 줄 알았는데…….”
그것이 제 유언이 될까 봐 두려웠고.
“그런데 있잖아. 무서운 것보다 내가 겁먹었다는 걸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는 게 더 싫었어.”
두려움은 제 약점이 될까 봐 숨겼다. 태연한 얼굴로 서류를 넘길 때마다 이전의 삶에서 한 걸음씩 멀어지는 기분이었다.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거란 생각에 불안했지.”
그때 느꼈던 공포가 캐롤린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그 상태에서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어.”
캐롤린은 아이를 낳은 지 한 달 만에 공작의 업무를 재개했고, 일 년도 되지 않아 국경으로 떠났다. 사람들에게 제 건재함을 확인시켜 주고 싶었다. 캐롤린 리스벨이란 존재가 대체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다.
“내 아이가 너무 사랑스럽고 좋은 것과는 별개로 내가 나로 있을 수 있는 장소가 절실했어. 그래서였을 거야.”
캐롤린은 이제는 모두 지나간 일이라는 양 담담한 얼굴로 말을 마쳤다.
이상하지, 아리아드네는 친구의 낯선 얼굴을 한참이고 들여다보았다. 언제나 함께였는데 캐롤린은 혼자서만 훌쩍 자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지금은? 지금도 불안해?”
“아니, 행복해.”
아리아드네의 물음에 캐롤린이 빙긋 웃으며 스푼으로 청귤 차가 담긴 유리잔을 휘저었다. 잔에 담긴 얼음들이 부딪히며 달그락 소리를 냈다.
“너도 알잖아. 내 세계가 좀 협소했던 거.”
소중한 것은 드물기에 의미가 있었다. 캐롤린에게 의미 있는 것은 그렇게 고르고 고른 끝에 남은 것들이었다. 아무리 골라도 도저히 버릴 수 없는 것들.
“난 그게 좋았어. 나한테 의미 없는 사람들에게 날 낭비하기 싫었거든.”
그 외의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런데 난 아이를 낳은 것뿐인데 세상이 넓어졌어. 내 우물은 너무 작아서 포용할 수 있는 사람이 정해져 있다고 생각했는데, 퍼내고 또 퍼내도 마르지 않는 샘이 생긴 기분이야.”
그녀가 아는 사랑이란 얼마 되지 않는 제 우물의 물을 나눠 줘도 아깝지 않은 것이었다. 그런데 아이를 낳고야 알게 되었다. 퍼내면 퍼낼수록 불어나는 사랑도 있다는 것을.
“아이가 자는 걸 가만히 보고 있으면 이유도 없이 울고 싶어져. 너무 애틋하고 좋아서.”
보드랍고 연약한 아이가 온전히 제게 안겨 올 때면, 말로 하지 못할 충족감이 차올랐다.
“어쩌면 내겐 사랑을 쏟을 대상이 필요했나 봐.”
아무리 넘치는 사랑을 쏟아부어도 그것이 부족하다는 양 칭얼대는 어린 생명. 무조건적인 사랑과 헌신적인 애정만이 귀한 것이 아니다.
정말로 귀한 것은 그것을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존재였다. 무한한 애정을 퍼부어도 그것을 재지도, 의심하지도 않고 오롯이 받아들이는 무지하고 순수한 존재.
캐롤린은 때론 이런 자신이 낯설 만큼 제가 낳은 아이를 온 마음으로 사랑했다.
“뭐, 캐롤린, 네가 행복하다면 됐어.”
아리아드네는 시원스레 웃으며 손을 뻗어 유리잔을 쥐었다. 반쯤 녹은 얼음을 하나 건져 입 안에 넣고 굴렸다.
다행이었다. 아리아드네는 출산 직전, 제가 낳은 아이를 사랑하지 못하면 어쩌나 걱정했던 캐롤린을 기억했다.
―리아, 내가 레이놀즈 백작 부인 같은 사람이면 어쩌지? 그 사람처럼 나쁜 엄마가 될까 봐 두려워.
생모에게 외면당한 것이 캐롤린의 잘못도 아닌데, 아이를 낳을 때조차 그런 걱정을 해야 한다니. 인생이란 것은 어쩌면 이렇게도 가혹하고 흉포한지.
“리아.”
응? 아리아드네가 얼음을 문 채로 입만 벙긋하여 소리 없이 대답했다.
“내 행복의 시작은 너였어. 아니, 내 모든 것의 시작에 네가 있었어.”
모든 것을 공유하는 단 한 명의 친구, 그것은 사랑하는 가족이나 연인과는 다른 영역이었다. 아리아드네는 어린 캐롤린이 솔직해질 수 있는 유일한 상대였다.
아버지는 언제나 미안해하는 눈으로 자신을 보았고, 알버트 앞에서는 제 마음을 숨기기 급급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불안을 아리아드네에게는 말할 수 있었다.
아리아드네가 있었기에, 지금의 캐롤린 리스벨이 존재했다.
“리아, 아이를 낳게 되면 그 전으론 돌아갈 수 없어. 무엇이 달라질지도 알 수 없지.”
그렇기에 캐롤린은 아리아드네가 제 불안을 속속들이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캐롤린 역시 지나온 길이었으니까.
살다 보면 도저히 이전의 상태로 돌이킬 수 없는 일들이 존재한다. 평탄하게 이어지던 길이 뚝 잘린 것처럼, 등 뒤에 있던 문이 쿵 하고 닫힌 것처럼,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되는 순간이.
그 시절, 막연한 불안에 시달리던 캐롤린을 지탱한 것은…….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도 있어.”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은 변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었다. 아버지의 애정, 알버트의 사랑, 아리아드네의 신뢰. 캐롤린이 지키고 싶은 것들은 그것이면 족했다.
“넌 모를 거야. 요즘 내 하루하루가 얼마나 충만하지.”
꿈꾸던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 그녀의 왕은 페렌트의 왕이 되었고, 그녀는 여전히 페렌트 왕에게 가장 신뢰받는 신하였다.
“내가 왜 몰라. 네가 그렇게 좋아 죽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데…….”
아리아드네가 피식 웃으며 얼음을 하나 더 삼키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나자. 어머니께 들를 거지?”
아리아드네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캐롤린이 멈칫 굳었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알고, 알고 있었어? 언제부터?”
캐롤린은 당황하여 두서없는 질문을 쏟아 냈다.
“너 바보야? 어떻게 몰라. 갑자기 파시파에 님이 어쩌고 하면서 울고불고하는데.”
아리아드네가 도리어 황당하다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리아, 이제는 내가 지켜 줄게. 파시파에 님 대신 내가 지켜 줄게.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 말을 듣고도 어떻게 아무것도 몰랐을 거라 생각하는지.
“아, 그랬지.”
그제야 그것을 깨달았는지 캐롤린이 붉어진 얼굴로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리아드네는 캐롤린을 기다리며 와그작, 입 안에 든 얼음을 씹어 먹었다.
“리아, 너 빈혈이 있거나 하진 않아?”
캐롤린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임산부가 갑작스레 얼음을 많이 먹는 것은 철분 결핍 때문일 수도 있었다.
“코라가 문제없대. 한창 입덧할 때 얼음을 달고 살았더니 버릇이 됐나 봐.”
“그래, 문제없다니 다행이야.”
두 사람이 방을 나서려 문을 연 그때였다. 문가에 검은 그림자가 지는 것 같더니 유진이 귀신같이 그 자리에 나타났다.
“어디 가게. 피곤하진 않아?”
그가 잡으라는 듯 제 손을 내밀었다.
“적당히 해.”
아리아드네가 핀잔을 주듯 한마디를 내뱉고는 그가 내민 손을 잡았다.
방에 들어서기 전, 하녀에게 맡겼던 물건이 있었는지 캐롤린이 커다란 바구니 하나를 받아 들었다. 아리아드네와 시선을 마주친 그가 바구니를 힐긋 보며 물었다.
“내가 들까?”
“캐롤린, 무겁지 않아?”
“크기만 이렇지, 가벼운 거야. 내가 들게.”
캐롤린이 바구니를 어깨높이로 가뿐히 들어 올리며 대답했다.
“그렇대.”
어깨를 으쓱한 아리아드네가 유진의 손을 붙잡고 건물을 벗어났다. 겨울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포근한 날씨였다. 성벽을 따라 원뿔 모양의 정원수가 줄지어 서 있었다.
메르디에스는 겨울조차 푸른 곳이었다. 여름의 푸르름처럼 약동하진 않아도, 겨울의 녹음은 건조한 대신 꼿꼿한 기세가 있었다.
세 사람은 익숙한 후원을 지나 뾰족하게 선 탑을 뒤로하고 걸었다. 어딘가 익숙한 탑의 모습에 유진의 걸음이 멈추었다.
“여긴…….”
그의 시선이 아리아드네를 지나 캐롤린에게 닿았다가, 다시 아리아드네에게로 돌아왔다.
여기에서 좀 더 들어가면 메르디에스 성을 탈환했던 그때, 캐롤린 리스벨이 케이루스 세작의 칼에 찔려 끝내 목숨을 잃었던 바로 그곳이었다.
멈춰 선 유진을 돌아본 아리아드네가 알 듯 말 듯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잡아당겼다. 비쭉 솟은 동쪽 탑을 지나 우거진 숲을 헤치고 나아가자 외진 곳에 자리한 건물이 드러났다.
“그때도 말하지 않았어? 여기는 어머니께서 생전에 쓰시던 곳이라고.”
오래도록 주인을 잃고 비워진 건물은 한낮에도 스산한 기운이 맴돌았다.
“내일이 어머니 기일이야.”
유진은 아무 말 없이 아리아드네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사랑하지도, 사랑받지도 못했지만, 그녀에게 상실의 아픔을 알려 준 사람. 아리아드네는 언젠가 제 어머니를 그렇게 말했다.
가져온 바구니에서 붉은 장미를 꺼내 든 캐롤린이 정원 구석에 그것을 내려놓았다. 무심코 굴린 공을 따라왔다가 처음 파시파에를 만났던 그 자리였다. 사라지기 직전에 가장 맹렬히 불타오르는 노을 같았던 사람.
아리아드네는 파시파에의 죽음을 애도하는 캐롤린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자신을 낳아 준 사람이지만 언제나 낯선 타인처럼 어렵기만 했던 사람. 미안했다가, 또 불쌍했다가, 요즘은 가끔 제 어머니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궁금해지곤 했다.
그때, 마른 나뭇가지가 밟히는 바스락 소리와 함께 뒤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 장식이 없는 단출한 옷에 무표정한 얼굴을 한 여자가 담담히 서 있었다. 부러 인기척을 낸 모양인지 아리아드네와 마주한 여자가 깊게 절하며 인사했다.
“미천한 종이 국왕 폐하께 인사 올립니다.”
도무지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예법이었다. 누구지? 여자를 가만히 바라보던 아리아드네가 무심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여긴 아무나 출입할 수 있는 곳이 아닌데.”
“선대 공작님께 출입을 허가받았습니다.”
추궁하는 듯한 어조에도 여자는 시종 담담했다. 제 앞에 선 이가 페렌트의 지고한 주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아버지께서? 그대가 누구이길래.”
아리아드네가 여자에게 다가서려던 순간, 뒤쪽에서 놀란 듯 헛숨을 들이켜는 캐롤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라 님?”
캐롤린이 존칭을 쓸 만한 사람 중에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있던가.
“캐롤린, 아는 사람이야?”
“왜, 파시파에 님 측근 시녀였던…….”
아, 그 말을 듣고 보니 얼굴이 낯익었다. 어머니 곁에 늘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던 사람이 있었다. 친정에서부터 데려와 내내 곁에 두었고, 유일하게 어머니의 임종을 지켰다던.
어머니의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메르디에스를 떠났다고 했던가.
“아, 오랜만이에요. 내가 그대를 어떻게 불러야 하나요?”
어머니의 측근 시녀로 대우해 줄 테니 신분을 드러내라는 함의가 담긴 물음이었다.
“사라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폐하.”
여자는 다시 깊게 절하며 제 이름만을 밝혔다. 공비의 최측근 시녀라면 결코 아무나 오를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밝히고 싶지 않을 걸까, 밝힐 수 없는 걸까. 아리아드네는 잠시 궁금증이 일었으나 이내 그것을 덮었다. 밝히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을 굳이 캐물을 만큼 중요한 일이 아니라는 판단에서였다.
“그래요, 사라. 어머니를 잊지 않고 찾아 줘서 고마워요.”
“주인을 기리는 것은 종의 도리이니, 누군가에게 칭찬받을 일이 아닙니다.”
단정한 어투는 명백히 선을 긋고 있었다. 어머니께서 저 여자를 중히 쓴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태도가 죽은 파시파에와 판박이였다.
여전히 공손한 태도로 고개를 숙인 사라가 아리아드네를 지나쳐 정원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캐롤린이 놓아둔 장미꽃을 발견했는지 여자가 그것을 집어 들었다. 장미꽃을 조심스럽게 쓰다듬는 여자의 얼굴은 좀 전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언제부터인가 꽃이 없어서 잊으신 줄 알았습니다.”
그것이 저를 향한 말인 줄 뒤늦게 알아차린 캐롤린이 대답했다.
“아, 요 몇 년 좀 멀리 있어서 찾아뵐 수가 없었어요.”
임신과 출산, 또 국경 순시까지 연이어 닥친 일들 때문에 최근 몇 년간 캐롤린은 파시파에의 기일에 맞춰 메르디에스 성을 찾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을 안다는 건 캐롤린이 없었던 해에도 사라는 꾸준히 이곳을 찾았단 뜻이었다.
“한 송이만 빌려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요.”
캐롤린의 허락에 여자는 챙겨 온 짐 꾸러미를 끌렀다. 여자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디아즈 후작가의 문장인 황소를 수놓은 큰 천으로 장미를 감쌌다.
적당한 곳에 그것을 놓은 뒤, 탁탁 부싯돌을 부딪쳐 불을 붙였다. 빳빳한 천은 미리 기름을 먹여 왔는지 곧 매캐한 연기를 내며 불타올랐다.
사라는 연기가 맵지도 않은지 그 자리에 서서 불타는 천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황소를 수놓은 천이 거의 탔을 무렵, 그녀는 흙을 덮어 불을 끄고는 탁탁 발로 밟아 잔불을 정리했다. 천천히 주위를 둘러본 사라는 미리 준비해 온 유리병에 타고 남은 재를 모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눈가의 주름 하나, 눈썹의 움직임 하나, 입매의 끄트머리 하나 움직이지 않는 저 무표정한 얼굴에서 감정이 읽힌다는 것이.
여자가 재를 모은 유리병을 챙기고는 몸을 일으켰다.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아리아드네에게 인사를 한 사라는 처음 나타났을 때처럼 조용히 돌아 나갔다. 그녀의 뒷모습이 무성한 풀숲 사이로 막 사라지려던 순간이었다.
“내일 어머니의 추도식에 참석할 의사가 있다면 오늘은 성에서 묵는 게 어때요?”
파시파에의 추도식은 본성의 지하 석실에서 직계 혈족들만 참석해 이루어지는 자리였다. 직계 혈족이라 해 봤자 레너드와 아리아드네가 전부였지만.
“그곳은 저처럼 천한 몸이 갈 수 있는 자리가 아닌 것으로 압니다.”
추도식에 참석해도 좋다는 말을 듣고도 사라의 낯은 변함이 없었다.
“적어도 어머니께선 나보다 그대를 더 보고 싶어 하지 않을까.”
“파시파에 님이라면 추도식 자체를 반기지 않으실 겁니다.”
아, 그건 그렇지. 아리아드네는 저도 모르게 동의의 감탄사를 흘렸다. 고개를 주억이는 아리아드네의 모습에 사라 또한 옛 기억을 떠올렸는지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지금 제가 이러는 것도 파시파에 님을 위한 일은 아니지요. 그저 남은 자의 자기 위안일 뿐.”
죽은 자에게 이 모든 것이 어떤 의미가 있단 말인가. 죽은 사람에게는 어떤 말도 닿지 못할 텐데. 그것을 알면서도 그만두지 못하는 것은 제 마음에 남은 미련을 버리지 못해서였다.
“그 정도 위로는 있어야 마음이 버티지.”
아리아드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탄식했다. 추모와 애도, 그것은 남은 자가 무너지지 않고 삶을 이어 가기 위한 생존 방식이었다. 아리아드네 또한 그렇게 살아남았던 순간들이 있었다.
“내년에는 정말 오지 않을 겁니다.”
그것은 여자가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 같은 말이었다.
“그래, 그렇게 해요. 사라, 무거운 짐은 여기 내려놓고 좋은 기억만 가지고 가요.”
아리아드네는 사라가 안쓰러웠다. 그 오랜 시간 동안 캐롤린이 놓고 간 장미꽃에 의지하며 홀로 버텨 왔을 마음이 짐작되어 더 그랬다.
그 말에 사라가 고개를 들어 아리아드네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녀는 묵묵한 눈으로 아리아드네를 한참이고 바라보았다.
“해마다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다짐하면서도 매번 지키지 못했는데, 이제야 그 다짐을 지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라는 여몄던 짐 꾸러미를 다시 끌러 가죽으로 엮은 책 하나를 건넸다.
“파시파에 님의 유품입니다.”
붉은 가죽으로 겉을 감싼 이 책은 아마도 죽은 파시파에의 일기장인 듯했다.
“내게 줘도 후회하지 않겠어요?”
아리아드네의 물음에 사라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공손히 일기장을 내밀었다.
“애초에 제가 가지고 있을 물건이 아니었습니다. 때를 놓쳐 짊어지고 있었을 뿐이니,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러죠.”
아리아드네가 일기장을 받아 들자 사라는 한결 홀가분해진 짐 꾸러미를 다시 여몄다.
“사라, 부디 그대가 평온한 일상을 보내길 바라요.”
제 평온을 빌어 주는 페렌트 왕의 위로에 사라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녀에게도 하루하루가 벅차오르는 희망으로 가득했던 날들이 있었다. 헤매고 헤맨 끝에 겨우 찾았던 한 줄기 빛이 작은 세상을 가득 밝혔던 그런 순간이.
하지만 그 빛은 너무 일찍 사라졌다. 빛이 꺼진 뒤에야 알았다. 진짜 절망은 아무 희망도 발견하지 못했을 때가 아니라, 겨우 찾은 희망이 사라진 뒤에야 찾아온다는 것을.
“……영원토록.”
희망을 이루는 것은 왜 누구에게나 허락되지 않는가. 제 희망은 왜 이토록 무력하게 스러졌어야 했나.
“바래지 않는.”
당신의 승리가 부러워 견딜 수가 없다. 가슴을 저미는 듯한 질투가 일었다. 당신이 다스릴 세상이, 당신이 보여 줄 세상이 보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어떤 낙원이라 할지라도.
“영광을 누리소서.”
이루지 못한 희망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하더라도, 패배로 남은 싸움이라 할지라도 자신만은 기억해야 했다. 그것만이 사라에게 남은 유일한 유산이었다.
사라는 굽혔던 몸을 펴 그곳을 떠났다. 쏴아아아, 여자가 떠난 자리에 겨울바람이 불었다.
“이만 들어가는 게 어때?”
유진이 아리아드네의 몸에 방한용 로브를 둘러 주며 물었다.
“아직 괜찮아. 오늘은 날씨도 따뜻하잖아.”
아리아드네는 정원 중앙 대리석 정자에 앉아 사라가 주고 간 파시파에의 일기장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첫 페이지에 남긴 그녀의 서명을 손가락을 쓸어 보았다. ‘파시파에 디아즈.’ 디아즈의 적통 후계자이자 메르디에스 공비였던 그녀가 죽을 때까지 지고 싶었던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그곳에 적혀 있었다.
한 장을 더 넘기자 평소의 단정한 필체와는 다른 흘려 쓴 글씨가 보였다.
‘미몽.’
헛된 꿈, 죽기 직전의 그녀는 이 모든 것을 그렇게 말했다. 이루지 못한 미혹한 꿈일 뿐이라고.
아리아드네는 천천히 종이를 넘겼다. 페이지를 가득 채운 단어들은 그 자체로 날카로운 칼과 다름없었다.
파시파에의 통찰력은 분명 남다른 데가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써 내려간 제안들은 도무지 수용할 수 없을 만큼 급진적인 데다가, 기저에 깔린 사상 또한 지나치게 염세적이었다.
그녀는 인간을 조금도 믿지 않았으며, 언제나 최악의 상황만을 상정했다. 비관과 절망으로 써 내려간 모든 것들에 대한 분노.
아리아드네는 비로소 파시파에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 단면을 본 느낌이었다. 그리고 알 수 있었다. 불에 뛰어드는 부나방처럼, 맹목적으로 파시파에를 따랐던 사람들이 그녀에게서 무엇을 보았는지.
그녀에게는 소외된 사람들을 이끄는 힘이 있었다. 파시파에의 가장 큰 힘은 제 분노가 어디에서 기인했는지 그 시작을 명명백백히 밝히는 통찰력에 있었다. 그녀는 소외당하고 버려진 이들의 대변자였다.
아리아드네가 귀족들의 정점에 선 ‘왕’이라는 것을 생각했을 때, 둘은 존재만으로 대척점에 선 사람들이었다.
명문 귀족가의 혈족으로 태어나 통치 가문의 안주인으로 살았던 파시파에가 비천한 이들의 대변자가 된 이유는 그녀의 삶에 있었다.
고등 교육을 받았으나 주류 세력으로 편입될 수 없었고, 스스로의 투쟁으로 권력자가 될 기회를 얻었으나, 운명의 농간으로 눈앞에서 그 기회를 끝내 놓쳐 버리고 만 그녀의 절망이 ‘미몽’의 근간에 있었다.
십 대의 그녀에게는 희망이 있었고, 이십 대의 그녀에게는 목표가 있었으나, 삼십 대의 그녀에게는 오로지 분노만이 남았다. 파시파에의 투쟁은 허락되지 않은 것을 얻기 위한 싸움이었다.
그것조차 아리아드네와는 정반대였다. 아리아드네의 투쟁은 제게 주어진 권리를 마땅히 회복하기 위한 것이었으니까.
알고 있었다. 자신의 승리가 혼자만의 힘이 아니라는 것을. 마찬가지였다. 파시파에의 패배는 그녀의 능력이 모자라서가 아니었다.
그리고 또한 알고 있었다. 승자와 패자의 위치는 언제든 뒤바뀔 수 있다는 것을.
탁, 일기의 마지막 장을 읽은 아리아드네가 가죽 덮개를 닫았다. 아리아드네는 말없이 붉은 가죽 위를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몇 군데만 삭제하고 책으로 낼까 봐.”
사생활이라 할 만한 몇몇 구절만 삭제하면 파시파에의 일기는 크게 손볼 곳 없는 훌륭한 원고였다.
“……정, 정말?”
아리아드네의 결정에 크게 당황했는지 캐롤린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그, 내가 직접 읽어 본 건 아니지만 책으로 내기엔 좀 그렇지 않아? 파시파에 님의 생각이 좀, 아니, 많이 과격하시고…….”
캐롤린은 단편적으로나마 파시파에의 급진적인 사상을 아는 사람이었다. 어느 때건 체제에 반기를 드는 글이란 통치자에게 반갑지 않은 것이었다.
캐롤린의 걱정을 들은 아리아드네가 픽 웃음을 터트렸다.
“캐롤린, 내 기반이 그렇게 형편없어? 겨우 글 몇 줄에 흔들릴 만큼?”
아리아드네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한 권력을 지닌 왕이었다. 그렇기에 이것을 포용할 수 있었다. 작은 진동으로는 자신이 이룬 것들을 무너트릴 수 없기에.
“이런 걸로 무너진다면 그 정도밖에 안 된다는 이야기야. 내 왕국은 그렇게 약하지 않아.”
쉬운 길을 선택한 기억은 없다. 어려운 길이라고 피한 적도 없었다.
아리아드네는 단단한 반석 위에 올려진 페렌트를 원했고, 파시파에의 일기가 자신의 왕국을 더 단단하게 만들어 줄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물은 고여 있으면 안 돼. 흘러야지. 사람도, 생각도, 통치도 마찬가지야. 지킬 생각만 하면 반드시 잃게 돼.”
페렌트는 넓은 땅이었다. 언제고 파시파에 같은 인물은 또 나올 것이다. 시기의 문제일 뿐.
“작은 불평이, 적당한 저항이 우리의 페렌트를 더 건강하게 만들 거야. 그 소리들이 우리에게 고장 난 곳을 알려 줄 테니까.”
나태와 안주는 성장의 가장 큰 적이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언제나 불평불만에 가득 찬 목소리였다.
“왜, 내가 질 것 같아?”
자리에서 일어난 아리아드네가 싱긋 웃으며 물었다. 캐롤린이 못 말리겠다는 듯 웃어 버리고, 유진은 아리아드네의 손을 붙잡아 그녀의 손등에 입술을 눌렀다.
“아니, 당신은 항상 옳아. 마지막에 승리하는 건 언제나 당신이 될 거야.”
유진의 목소리는 언제나 그렇듯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그것은 아리아드네를 향한 신뢰일까, 그의 권능이 보여 준 예언일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물론, 그렇게 될 거야.”
자신은 결코 지지 않을 테니까. 아리아드네는 망설임 없이 파시파에의 처소를 벗어났다.
한때는 그녀를 사랑해 보려고 노력했던 적도 있었다. 그것이 저를 낳고 죽어 간 어머니에 대한 마땅한 도리 같아서.
하지만 일평생 저를 미워하지 않기 위해 노력한 그녀의 일기장을 보며 생각했다. 우리는 평생 만날 수 없는 평행선에 선 사람들이라고.
세상에는 이런 관계도 있는 것이다. 사랑하려 노력해도 사랑할 수 없고, 미워하지 않으려 노력해도 미워할 수밖에 없는.
이제야 인정할 수 있었다. 어떻게 해도 낳아 준 어머니를 사랑할 수 없는 자신을.
우리는 평행선 위에서 각자의 삶을 살다 가는 타인에 불과하다.
그러니, 나는 당신의 삶을 부정하지 않는다. 당신의 투쟁을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세상에서 지우지도 않을 것이다.
당신이 지닌 가장 날카로운 칼로 나를 찔러라. 그것은 나를 조금도 해하지 못할 테니.
『후기 페렌트의 가장 파격적인 저술로 평가받는 ‘미몽’의 저자 파시파에 디아즈가 메르디에스 왕조의 창업 군주 아리아드네 메르디에스의 생모라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파시파에 사후 이십 년 만에 출간된 그녀의 유일한 저서 ‘미몽’은 발간 당시에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랬던 ‘미몽’이 사회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각종 직업 길드의 활성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도제식 교육의 장에 불과했던 길드는 운송 길드가 급속히 확장하며 기술 직업인들의 권리 조직으로 성장하게 된다.
길드의 성장으로 기술 직업인들의 교육 수준과 생활 수준이 크게 향상되자, 자신들의 입장을 대변해 줄 사상이 필요했던 그들은 ‘미몽’을 찾아내 이를 적극적으로 퍼트렸다.
불온한 사상을 품고 있다는 이유로 여러 귀족들이 이를 금서로 지정하기를 원했으나, 당시의 국왕이었던 아리아드네는 아래와 같은 말로 이 요구를 묵살했다.
‘깊이가 없는 사상이라면 금서로 지정하지 않아도 아무도 읽지 않을 것이고, 그 책이 말하는 바가 의미 있다면 금서로 지정한다 해도 세상에서 지울 수 없을 것이다.’
이를 두고 아리아드네가 ‘미몽’을 금서로 지정하지 않은 것이 ‘어머니’의 저서이기 때문이라 주장하는 이들도 있으나 필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미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아리아드네와 그 생모 파시파에는 관계가 순탄치 않았다.
파시파에의 성품이 몹시 냉정하고 신경질적이었다는 다수의 기록과 아리아드네가 직접 남긴 기록물 어디에서도 파시파에에 관한 언급이 없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아리아드네가 부친인 레너드를 왕으로 추존하면서 모친인 파시파에는 의도적으로 누락했다는 것 또한 둘의 관계를 짐작하게 한다.
그렇다면 아리아드네의 판단은 사적인 감정을 철저히 배제한 통치자로서의 결정이라 보아야 옳을 것이다.
아리아드네의 집권기 후반, 다양한 사상이 꽃피우며 사회적 경제적 발전을 이끌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 판단이 적확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후기 페렌트의 급격한 발전은 ‘미몽’과 같은 파격적인 사상조차 받아들일 수 있는 유연한 사회였다는 데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한 사회적 근간을 마련한 것이 아리아드네의 가장 큰 업적이다.
-발트 저, 아리아드네의 생애와 업적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