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5. 황소를 사랑한 여자
탐내서는 안 될 욕망이 있다.
‘개 같은 소리.’
바늘이 천이 아니라 살을 꿰뚫고 지나간 열세 번 만에 파시파에 디아즈의 실낱같은 인내심이 끊어졌다.
파시파에는 수틀에 팽팽하게 꿰인 천을 바라보다 이내 가위를 들었다. 그녀의 거침없는 가위질에 디아즈 후작가의 문장인 황소가 마구잡이로 잘려 나갔다.
“아, 가씨! 바로 사흘 뒤가 추도식인데, 어떻게 하시려고요!”
맞은편에 앉아 수를 놓던 유모가 엉망이 된 천을 보며 새된 소리를 질렀다. 파시파에는 유모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조금 전까지 수를 놓던 천으로 피가 나는 손가락을 감쌌다. 얇고 부드러운 흰 천은 피 몇 방울에도 금세 붉게 물들었다.
“사라, 침방에 침모가 부족하던가?”
언제나 한 몸처럼 파시파에 곁을 지키는 측근 시녀 사라가 무릎을 반쯤 굽힌 채로 고했다.
“아닙니다, 파시파에 님. 침방에 기별을 넣으면 오늘 밤에라도 이 방 전체를 덮고도 남을 수를 완성할 수 있습니다.”
“그래, 그렇다는군.”
파시파에는 수틀을 반쯤 내던지다시피 탁자 위에 내려 두었다. 유모는 미련을 버리지 못했는지 가위질과 피로 엉망이 된 천을 안타깝다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크리스 도련님께서 추도식에는 꼭 아가씨께서 직접 수놓은 장식물을 가져야겠다고…….”
파시파에보다 다섯 살 어린 동생은 그녀를 귀찮게 하는 일에 언제나 진심이었다. 마치 제집을 빼앗긴 개새끼처럼.
“개가 짖는다고 사람이 그 투정을 전부 받아 줘서야 쓰나. 그러다 버릇 나빠지면 어쩌려고.”
멍청한 주제에 욕심만 많아서는.
달칵, 파시파에가 수틀을 풀자 잘린 천이 후드득 바닥으로 떨어졌다. 붉은 실로 수놓은 황소의 몸통이며, 다리, 머리 따위가 조각조각 나 바닥을 나뒹굴었다. 파시파에는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다 눈가를 쓸어내렸다.
“익숙지 않은 일을 했더니 피로하여 이만 쉬어야겠다.”
파시파에의 손짓 한 번에 방에는 그녀와 사라만이 남았다. 피로한 듯 팔을 들어 눈을 가린 파시파에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리뮈르 기사단에 백 년 만에 외부인 부대장이 나타났다는군. 출신지 불명. 알려진 것은 니케라는 이름뿐.”
리뮈르에 출입하는 상인이 일주일 전 가져온 소식이었다. 니케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파시파에는 온몸의 전율이 일었다.
―안녕, 파시파에. 마지막 인사를 하러 왔어. 내 미래는 이곳에 있지 않아.
―경비가 오기 전에 어서 떠나, 피오나.
―난 이젠 라이덴이 아니야. 그러니 피오나도 아니지.
―그렇다면 새 이름이 필요하겠군.
―네가 지어 줘.
―……니케, 니케가 좋겠어.
그것은 라이덴을 떠나는 피오나에게 파시파에가 지어 준 이름이었으니까.
파시파에는 라이덴을 떠난 친구의 성공에 기뻐했으나, 동시에 제 처지를 다시금 자각했다. 피오나가 라이덴을 떠난 8년 동안 자신은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었다.
“사라, 너도 내가 바라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디아즈를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니케가 되어 새 삶을 찾은 피오나처럼, 자신도 디아즈를 박차고 나간다면 지긋지긋한 굴레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내가 바라는 것이 권력이나 재물, 혹은 명성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내가 바라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하늘을 가를 듯이 높게 치켜든 양 뿔, 앞만 보고 돌진하는 무모하고 멍청한 성품, 울타리에 갇히고도 야만성을 버리지 못한 가장 위협적인 가축, 대대로 인간의 섬김을 받았던 한때의 우상.
파시파에 디아즈는 황소를 사랑했다. 하지만 그녀에게 그것은 결코 가져서는 안 될 그릇된 욕망이었다.
그녀는 가문을 이을 후계가 아니라 가문을 위해 팔려 갈 재물이었으니까. 경매장에 전시될 물건이 감정을 가지는 것은 주제넘은 짓이었다.
그녀에게 디아즈란 성을 준 아비라는 작자도, 그녀보다 다섯 살 어리고 열 살은 뒤떨어진 듯한 멍청한 동생도, 그녀만큼 디아즈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디아즈란 성을 단 사람 중에 그녀만이 디아즈를 사랑할 권리를 박탈당했다. 그녀가 ‘그녀’이기 때문에.
“사라, 선왕의 추도식에 디아즈로 참석하는 건 내가 되어야겠다.”
어찌해도 이 사랑을 놓을 수 없으니 어떻게든 그것을 차지하는 수밖에.
“파시파에 님께서 그것을 원하시면 그렇게 될 것입니다.”
사라는 깊게 절하고는 파시파에의 방에서 물러났다.
디아즈 후작과 그 아들은 명실상부 디아즈의 주인으로 군림했다. 그들은 디아즈의 모든 것을 제 손아귀에 넣었으나 이 저택만은 파시파에의 것이었다. 파시파에의 사람들은 저택 어디에나 있었고, 그들은 파시파에의 눈이자 귀인 동시에 손과 발이었다.
추도식을 위해 왕도로 떠나야 하는 날 아침, 크리스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복통으로 앓아누웠다. 갑작스레 일어난 일이라 친척 아이 중 누군가를 불러들일 여유도 없었다.
대런 디아즈는 어쩔 수 없이 파시파에와 함께 길을 떠났다. 짙은 남색 눈동자가 오랜만에 마주한 딸을 품평하듯 훑고 지나갔다.
“네 같잖은 수작질에 응해 주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다.”
저토록 냉철한 사내가 어째서 디아즈 후계를 결정하는 일에서만큼은 그토록 어리석게 구는지 모를 일이었다.
“명심하겠습니다, 후작님.”
파시파에는 제 부친을 부르는 일에 결코 실수하는 법이 없었다. 대런 디아즈는 파시파에의 후작 위를 잠시 맡아 둔 사람에 불과했으니까.
“혼인을 하면 알게 되겠지. 네 탐욕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이었는지.”
스물넷, 칼날이 목 아래까지 바짝 붙어 왔다. 그녀는 대런 디아즈의 의사에 따라 내일 당장이라도 누군가의 부인이 될 수 있는 나이였다.
선왕 크리스티안의 추도식에서 가장 사람들의 시선을 끈 것은 왕인 다그마르도, 왕후인 칼도 아닌 메르디에스 공작 레너드였다.
성문까지 닫아걸고는 일체의 외부 활동을 하지 않던 그가 왕도까지 걸음 했으니 사람들이 술렁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무리 그렇지만…….’
파시파에는 검은 베일 사이로 레너드를 바라보다 저도 모르게 눈가를 찌푸렸다. 색이 옅은 금색 머리카락, 가을 하늘처럼 청명한 눈동자.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눈이 가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수려한 미인이 수심에 차 있기까지 하니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듣던 대로, 아니, 이건 듣던 것보다……. 예상은 했지만 지나치게 시끄러운 얼굴이군.’
볼만한 외모라는 것은 들어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마주한 남자의 얼굴은 그녀가 각오한 것 이상이었다. 추도식이 끝나자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레너드 주위로 모여들었다.
레너드가 한마디를 흘릴 때마다 사람들이 일제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빛으로 빚은 사람 같았다. 존재만으로도 사람들을 홀리는. 시원시원한 미소와 거침없는 언사는 한 줄기 바람처럼 사람들을 휘감았다.
그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은 채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람들을 상대하고 있었지만, 파시파에는 그의 얼굴에 떠오른 피로함을 놓치지 않았다.
파시파에는 추도식 직전 주위를 둘러보며 점찍은 몇 곳의 장소 가운데 하나를 골라 소리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디아즈 후작이 왕후와 대화를 나누느라 정신이 없는 지금이 기회였다. 저 얼빠진 것 같은 공작도 더는 버티기 힘들어 보이고.
파시파에가 그곳에서 기다린 지 채 십 분이나 되었을까, 기다리던 남자가 나타났다.
파시파에는 동업자로 저 남자를 선택한 것이 퍽 괜찮은 결정이었다고 다시금 생각했다. 그녀를 발견한 레너드가 지긋지긋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까.
“선객이 있었군요. 그럼…….”
묵례하듯 짧게 고개를 끄덕인 그가 돌아서 그곳을 떠나려던 그때였다.
“선객이 아닙니다.”
파시파에가 얼굴을 가린 베일을 걷어 냈다. 파리한 낯에 심해처럼 어두운 남색 눈동자. 레너드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깡마르고 연약한 여자가 내뿜는 꼿꼿한 기세에 흥미를 느껴 그 자리를 지켰다.
“혹, 성주께서는 세간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패트리샤 왕녀를 마음에 두기라도 하셨습니까?”
오늘 처음 만난 사이라는 것을 굳이 상기하지 않더라도 대단히 무례한 질문이었다. 그 대상이 남부의 지배자 메르디에스 공작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더.
“그것이…….”
레너드가 파시파에를 빤히 바라보다 뒷말을 잠시 멈췄다. 파시파에는 레너드가 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말했다.
“디아즈 후작가의 장녀 파시파에입니다.”
아, 파시파에의 소개를 들은 레너드가 알 만하다는 듯 감탄사를 흘렸다. 디아즈 후작에게 제 나이만 한 딸이 하나 있다더니. 남부 귀족이니 한두 번쯤 얼굴을 보았을 법도 한데, 사교계엔 영 흥미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것은 디아즈 영애께서 함부로 입에 올릴 이야기가 아닙니다.”
자신이 입을 다물수록 호사가들의 입이 바빠지는 걸 알면서도 레너드는 차마 다른 말은 할 수 없었다. 사람들이 레너드의 침묵을 어떻게 받아들이든, 그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꺾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아쉽군요. 그랬다면 이야기가 더 쉬웠을 텐데…….”
파시파에의 대꾸에 레너드는 눈앞의 여자가 제 침묵을 오해하지 않았음에 한 번, 그것을 아쉬워했음에 두 번 놀랐다. 레너드가 놀라움을 채 갈무리하기도 전에 여자가 품에서 밀봉한 서신을 꺼내 들었다.
“청혼서입니다. 제 제안에 동의하시면 내달 보름 디아즈 후작저로 출입하는 메르디에스 상단을 통해 회신하여 주십시오.”
저 건조한 말투가 제안하는 것이 청혼인 것도 놀랍고, 그것을 메르디에스 상단을 통해 알리라는 통보는 더 놀라웠다.
“신시아가 저와 끈이 있으니 이왕이면 그 아이를 보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메르디에스 상단에 끈을 만들어 두셨단 말입니까?”
하, 레너드는 이젠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신시아라면 레너드가 내심 차기 상단주로 염두에 둔 버넷 남작의 약혼녀였다.
그리고 신시아의 정말 대단한 점은 차기 상단주의 약혼녀라는 지위가 아니었다. 무섭도록 영민한 머리와 놀라울 정도로 담대한 배짱이었지.
더 기가 막힌 건 신시아가 저 여자에게서 어떤 가능성을 보았는지 레너드 역시 모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세작을 심진 못하였으니 그리 염려하실 것은 없습니다.”
파시파에는 고개를 까딱 움직여 인사하고는 그 자리를 떠났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했으니 남은 것은 하늘의 뜻에 달렸다.
하지만 그녀는 걱정하지 않았다. 메르디에스의 주인이라는 저 남자는 제 동생처럼 우둔하지 않았고, 제 아비처럼 편협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니 자신의 가치를 몰라볼 리 없었다.
왕궁의 후원에 혼자 남겨진 레너드는 손 안의 서신을 열어 볼 생각도 하지 못했다. 파시파에가 떠나고 난 뒤에야 그녀가 자신을 향해 마땅한 예를 한 번도 올리지 않았음을 깨달은 탓이었다.
떠나는 순간마저 짧게 묵례한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레너드는 그것을 책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파시파에 디아즈, 그녀는 타인 위에서 군림할 운명을 타고난 사람 같았다.
홀로 우뚝하게 선 왕. 그 순간, 뜬금없이 떠오른 말에 레너드는 헛웃음을 흘리며 손 안의 편지를 꽉 움켜쥐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레너드에게 혼인은 메르디에스의 새 안주인을 들이는 일이었으니, 그 자리에 파시파에 디아즈보다 나은 여자는 없었다.
* * *
세월은 파시파에에게 제 아비마저 발아래 둘 수 있는 권력을 주었다. 하지만 세월은 무정하여 그녀가 무언가를 가지게 된 것만큼 무언가를 빼앗아 갔다. 그녀는 누구에게도 고개 숙이지 않아도 되는 권력을 얻은 대신 수명을 잃었다.
스산한 바람이 창문을 세차게 두드렸다. 바람 소리만으로도 온몸에 한기가 스며들었다. 결국, 죽을 때까지 이 한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군. 파시파에는 뜨거운 찻물로 속을 데웠다. 말라붙은 입술이 그제야 떨어졌다.
“글레나의 승낙이 있었다고? 다행이군.”
글레나라면 믿을 만했다. 남편과 사별하고 상심했을 글레나에게도 나쁜 제안은 아니고.
담담한 파시파에의 대꾸에 레너드는 말없이 제 미간을 문질렀다. 무르고 심약한 사내였다. 타고난 운이 좋아 다행이지.
“더 이를 것은 없나?”
“떠날 사람이 이것저것 일러서 무엇 하나. 남은 사람에게 짐이 될 뿐인데. 구질구질한 건 딱 질색이야.”
큰 족적(足跡)을 남기지 못할 거라면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지는 게 나았다.
“어차피 내겐 전부 이루지 못할 헛된 미련일 뿐이니.”
희망이 미래를 바꿀 거라 믿었던 어리석음은 미련일 뿐이었다. 이 미련은 얼마가 걸려야 모두 버릴 수 있을는지.
“파시파에…….”
자신을 부르는 남자의 침통한 목소리에는 끝내 떨치지 못한 죄책감이 묻어 있었다.
“레너드, 그대를 고른 내 선택을 후회하게 만들 셈인가? 죽는 날까지 날 동정하지 않겠다 약속하지 않았나?”
레너드는 제법 괜찮은 동업자였다. 하잘것없는 감정을 앞세워 신실한 계약을 파탄으로 이끄는 우매한 자가 아니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했다.
그와 자신 사이에는 신의와 성실, 존중만 있으면 충분했다. 동정이나 죄책감은 계약의 불순물에 지나지 않았다.
“내 결정이 틀렸나?”
하지만 둘 사이에 쌓인 세월만큼 이해의 깊이 또한 깊어졌다. 파시파에는 레너드를 오래도록 괴롭힌 죄책감의 이유를 알았다.
“아니, 옳았지.”
그러니 이것은 위로가 아니었다. 사실 관계의 판단일 뿐.
“출산 직후 정신을 놓거나 기이한 열망에 사로잡히는 여자는 언제든 있어 왔고, 미친 어미로부터 자식을 보호하는 것은 아비의 마땅한 책임이지.”
사람들은 파시파에가 아리아드네의 목을 졸랐다고 했지만, 그녀는 그 일을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것이 없는 일이 될 수는 없었다.
“그 혈통이 공작가의 유일한 후계쯤 되면 날 죽이지 않은 것만으로 자비로운 처사라고 생각하고 있어.”
유폐에 가까운 생활을 받아들인 것은 레너드의 처분 때문만은 아니었다. 자비로운 처사라는 말도 진심이었다. 그는 평생 파시파에의 병증을 숨겨 주었고, 그녀에게서 어떠한 권리도 박탈하지 않았다.
“그러니 나를 동정할 것 없어. 애초에 나는 그 동정이 그리 달갑지 않으니까.”
그녀가 잃은 것 중 그 무엇도 레너드의 책임이 아니니 그는 죄책감을 가질 이유가 없었다.
“지난달 당신을 진료했던 소르체의 치료사를 기억하겠지?”
레너드의 말에 파시파에는 갈색 머리를 질끈 동여맨, 막 성년이 되었을 법한 여자를 떠올렸다.
―공비께서는 제 약으로 치료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고통을 조금 줄여 드릴 순 있겠지만……. 제 약이 삶을 연장하지는 못할 겁니다.
앳된 얼굴과는 다르게 갈색 눈동자는 삶의 굴곡을 넘나든 자 특유의 현기를 품고 있었다.
“실력은 좋은 것 같더군.”
무슨 사정으로 어린 행세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실력만큼은 확실했다. 지금 이렇게 앉아 있는 것도 그 치료사가 지은 약을 먹은 덕택이었으니까.
“코라가 그러더군. 내 결정이 당신 병을 악화시킨 거라고.”
―공비 저하를 진료한 의원으로서 말씀드리자면 제 견해는 그래요.
파시파에의 치료를 위해 그녀의 병증과 상태를 들은 코라는 그렇게 말했다.
―우울감, 식욕 장애, 불면증, 피로, 운동 및 판단 능력 저하, 아이에 대한 과도한 불안감, 거부, 폭력적인 행동, 자살 혹은…….
코라의 입에서 쏟아지는 단어들이 불쾌한 독처럼 느껴졌다. 레너드가 그것을 외면하고 싶다고 생각한 순간, 코라의 입에서 마지막 단어가 떨어졌다.
―영아 살해 충동.
코라는 딱딱하게 굳은 레너드의 얼굴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열한 것들은 산후 후유증을 겪는 이들이 토로하는 증상이에요. 팔을 다친 이가 느끼는 고통을 잘못되었다 할 수 없듯이 산후 후유증에 시달리는 산모가 느끼는 불안감이나 충동은 죄가 아닙니다. 치료해야 할 병이지.
산후 후유증이라니. 들어 본 적도 없는 병명이었다. 모계 사회인 소르체에서나 통용되는 개념이 분명했다.
하지만 레너드는 그 단어를 듣는 동시에 깨달았다. 명명하지 않았다 뿐이지, 그것은 레너드 주위에도 분명 존재하는 일이었으니까.
―적절한 시기에 치료받지 못하고 아이와는 분리되었으니, 연금된 공비께서 되새길 것이란 자신이 미쳤다는 자괴뿐이었겠죠. 병증은 나날이 심해지고 아이와 애착을 형성할 기회조차 박탈당한 겁니다.
코라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십 년 동안 레너드를 괴롭혀 온 죄책감과 정확히 맞닿아 있었다.
―출산은 모성애 발현의 충분조건이 아닙니다. 공비께 아이를 사랑할 기회를 주긴 하셨나요?
아리아드네와 보내는 하루만큼 레너드는 그 아이를 더 사랑하게 되었다. 십 년의 세월 동안 제 몸을 산 채로 뜯어 줘도 아깝지 않을 애정이 쌓였다.
그제야 레너드는 파시파에에게도 시간이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자신이 파시파에와 아리아드네가 서로를 마주할 기회조차 빼앗은 것은 아닐까 후회가 되었다.
코라의 말은 그가 내내 품어 온 의심을 폭발시키는 계기에 불과했다.
“신선한 시각이로군. 의원의 눈에는 죄인이 없겠어. 어떤 죄인을 봐도 고쳐야 할 병증이 먼저 보일 테니.”
파시파에는 코라의 말을 이해는 하지만 동의할 순 없었다.
“내가 그 아이를 죽였다면 그래도 나는 환자일 뿐인가? 미친 왕이 마음에 병이 들어 수만 명을 학살했다면 그것 또한 죄가 아닌가?”
세상을 가르는 잣대는 하나가 아니다. 의원의 눈에는 파시파에가 죄인이 아닌 환자라 할지라도 그녀는 자신을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다.
“권리는 그만큼의 무게를 지는 일이고, 그래서 자리에는 언제나 자격이 필요하지.”
파시파에는 메르디에스의 안주인이자 후계의 생모였다. 그녀는 죄는 그 자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미 나가 버린 내 정신머리를 치료하는 것보다야 후계의 안전을 도모하는 것이 비할 수 없이 중요한 일 아닌가?”
의원의 판단과 메르디에스의 수장인 레너드의 판단이 같을 수는 없었다.
“이 정도 생각을 스스로 하지 못해 내게 물은 것은 아닐 테고. 내 입으로 이 말을 하게 하는 건 죽을 사람에게 티끌만 한 죄책감마저 덜어 달라 하고 싶었나?”
그리고 판단에는 책임이 따른다. 레너드가 메르디에스를 지키기 위해서 그런 판단을 한 것은 합당한 일이었으나, 그 책임 또한 그의 몫이었다.
“아니, 아니지. 그건 내가 져야 할 몫이지.”
“그것이 아니라면 날 연민하는 건 그만둬. 불쾌해질 뿐이니.”
파시파에 또한 그녀가 져야 할 몫의 책임을 지는 것뿐이었다. 그것은 동정받을 일이 아니었다.
“사과하지.”
“그댄 날 디아즈의 적통 후계자로 죽을 수 있게 해 주지 않았나. 그거면 당신 할 도리는 전부 한 셈이지.”
디아즈를 가지기 위해 한 혼인이었다. 대런 디아즈보다 그녀의 죽음이 이른 탓에 디아즈의 주인이 되지 못했으나, 그 또한 그녀가 선택한 길이었다.
이루지 못한 희망이 불이 되어 파시파에를 삼켰으나, 그것은 그녀의 사랑이 만든 결과였다.
“이쯤 하지. 내 임종을 지키는 것은 사라 한 명이면 충분하니. 사라, 이만 공작을 배웅해 드려라.”
파시파에의 손길에 디아즈에서 따라온 그녀의 측근 시녀 사라가 레너드를 배웅하기 위해 일어섰다.
“날 너무 박대하는군. 아무리 내가 무정한 남편이었다지만.”
레너드는 파시파에의 임종을 지킬 생각이었지만 제 뜻을 꺾을 수밖에 없었다.
“고단함은 모두 잊고 편히 쉬게.”
문가에 선 그가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문 하나로 각자가 선 세상이 달라졌다. 망자의 경계에 선 파시파에가 무언가를 예감한 사람처럼 말했다.
“날씨가 꼭 눈이라도 올 것 같군.”
끼이익, 불길한 소리를 내며 문이 닫혔다. 고요한 방에는 장작이 타는 소리와 창문을 두드리는 바람 소리만이 돌림 노래처럼 맴돌았다.
“파시파에 님, 찻물을 바꿔 드릴까요?”
말을 하는 것조차 힘에 부칠까 먼저 말을 거는 법이 드문 사람이었다. 치미는 불안함을 이기지 못한 탓이리라. 파시파에는 간신히 고개를 저었다.
“사라, 내가 죽으면 성을 떠나거라. 네 살길은 마련해 두었으니.”
이곳은 파시파에의 무덤이나 다를 것이 없으니, 사라의 여생을 보내기엔 적당한 곳이 아니었다.
“미안하구나. 네가 나를 통해 보고자 한 세상이 이런 것은 아니었을 텐데.”
사라는 대런 디아즈에게 원한을 가진 이였다. 파시파에의 패배는 곧 수많은 사라의 패배였다.
“아닙니다. 저는 이미 새로운 세상을 보았습니다.”
“그래, 오래오래 살아 대런 디아즈의 끝도, 네가 꿈꾸던 새로운 세상도, 내가 보고 싶었던 세상도 봐 주렴.”
방금 데운 돌을 만지는데도 손끝이 깨질 것처럼 차가웠다. 이젠 정말로 죽음이 멀지 않은 듯했다.
“공작은 내게서 아이를 사랑할 기회를 뺏은 것이 아닐까 두려워했지만……. 글쎄, 난 잘 모르겠구나.”
레너드는 이미 메르디에스보다 그 아이를 더 사랑해 버린 모양이었다. 자신처럼 모자란 어미조차 그 아이에게서 빼앗은 것이 아닐까 두려워하는 걸 보면.
“어쩌면 나는 아이를 낳으면 안 되는 사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도무지 내가 낳은 아이조차 나보다 더 사랑할 순 없어서…….”
출산으로 그녀의 삶이 좀먹지 않았다 해도, 온전한 정신으로 그 아이를 사랑했다 해도, 디아즈를 향한 열망만큼, ‘파시파에’로 살고자 하는 욕심만큼, 그 아이를 보듬을 순 없을 것 같았다.
그녀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녀의 아버지처럼, 또 다른 누군가의 아버지처럼.
“이상하지. 자격 없는 부모인 건 대런 디아즈나 나나 마찬가지일 텐데, 그가 제 뜻을 펼치는 데 그것이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대런 디아즈는 그럭저럭 명망 있는 인사였으나, 좋은 아버지라고는 도무지 말할 수 없는 인간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앞날에 아무런 흠이 되지 못했다.
대런 디아즈만이 아니었다. 저명한 인사들이 그들의 아내와 아이들에게, 혹은 연인에게 얼마나 개 같은 인간이었는지, 사람들은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것은 사생활에 불과했고, 그들이 이룩한 대단한 업적에 비하면 티끌만 한 흠도 되지 못했다.
“내 흠결은 나를 전장에 서지 못하게 만들었는데, 그들은 여전히 그것과는 무관한 세상에 살고 있으니. 이토록 불합리한 세상을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 너무도 이상하구나.”
파시파에가 디아즈의 정식 후계자가 되고도 원하는 일을 도모하지 못한 것은 그녀의 건강 때문만은 아니었다. 디아즈에서 자녀를 양육하지 못하는 여자는 금치산자나 마찬가지였다.
무언가를 남길 수 있는 여자는 누군가의 어머니뿐이었다. 그녀들은 오로지 자식의 성취로만 기억되었다. 그곳에서 여자는 훌륭한 어머니이거나 매정한 어미, 두 부류로만 존재했다.
그리고 훌륭한 양육자라는 것을 인정받은 여자만이 무언가를 욕심낼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파시파에는 애초에 전장에 설 자격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었다.
“내 세상이 내게 허락한 자리가 누군가의 어미일 뿐이라면, 나는 모난 돌처럼 그것만으론 도무지 만족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파시파에 디아즈는 그녀가 태어난 가문의 주인이고 싶었다. 파시파에의 욕망은 그녀의 죽음으로 이어졌다. 허락되지 않은 욕망을 탐한 대가였다.
“사랑이 마치 사고처럼 제 의지와 무관하게 닥치는 것이라면, 내겐 디아즈가 그랬다. 그 사랑이 너무 커 다른 건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었던 게지.”
처음 황소를 길들일 생각을 한 인간은 누구였을까. 그녀처럼 한눈에 사랑에 빠진 사람이었을까.
창밖으로 희끗희끗한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눈이 올 것 같더라니. 부슬비처럼 내리기 시작한 눈은 어느새 폭설이 되어 세상을 온통 하얗게 뒤덮었다.
하얗게 물들어 가는 세상은 경이롭기까지 했다. 진눈깨비는 본 적 있었지만 이렇게 굵고 탐스러운 눈은 처음이었다. 남부에서 나고 자란 그녀가 한 번도 보지 못한 세상이었다.
“나는 어리석은 인간이라 마지막까지 미련을 버릴 수가 없구나.”
파시파에는 디아즈를 사랑했다. 죽는 날까지 그녀에게 그것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