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권 - 74화 (74/148)
  • 4. Quintus

    하얀 눈송이가 아리아드네의 기다란 속눈썹 위로 나풀나풀 떨어졌다. 유진이 눈송이가 내려앉은 그녀의 눈가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쓸었다. 간질간질한 촉감에 아리아드네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간지러워.”

    새하얀 눈이 그녀의 금빛 머리카락 위에도, 젖은 어깨 위에도 조금씩 쌓이기 시작했다. 유진은 조심스러운 손길로 아리아드네의 머리와 어깨에 쌓인 눈을 털어 냈다.

    얌전히 그의 손길을 받아 내던 아리아드네가 물었다.

    “괜찮아?”

    그 말에 고개를 든 그가 말없이 아리아드네를 응시했다. 잠시 멈췄던 그의 손이 다시금 움직였다.

    어깨와 머리카락을 오가던 손이 그녀의 눈썹을 슬며시 쓸었다. 하얗게 변한 눈썹에도, 차갑게 얼어붙은 뺨에도 그의 다정한 손길이 차례로 닿았다.

    “그래.”

    엷은 미소를 띤 그가 담담하게 말했다. 웃는 것이 드문 남자의 새까만 머리 위에도 하얀 눈송이가 켜켜이 내려앉았다.

    아리아드네는 홀린 듯한 기분으로 유진을 바라보았다. 온통 새하얀 세상에서 그만이 달랐다. 온 세상이 하얀 눈으로 뒤덮인다 해도 그만은 알아볼 수 있었다.

    그를 둘러싼 것은 공기마저도 달랐으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이질적인 존재.

    손에 닿으면 물이 되어 녹아 버리는 눈처럼, 이대로 눈을 감으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는데……. 아리아드네는 손을 들어 유진의 얼굴을 감쌌다. 물에 젖은 뺨의 감촉이 선명했다. 떠돌아다니던 영혼이 마침내 몸을 입은 것처럼.

    엷은 미소를 띤 얼굴 또한 마찬가지였다. 마치 조각상에 신의 숨결을 불어 넣는 순간을 마주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아리아드네의 손이 그의 뺨을 지나 어깨를 쓸어내렸다. 천천히 아래로 향하던 손이 피로 얼룩진 그의 가슴팍에서 멈추었다.

    그의 머리카락만큼이나 까만 옷은 그가 얼마나 다쳤는지 상처를 가늠하기 어렵게 했다.

    “진짜 괜찮은 거 맞아?”

    “괜찮아. 그냥 스친 거야.”

    담담하게 대답한 유진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손을 뻗었다. 아리아드네가 자신을 향해 내민 손을 쳐다만 보고 있자 그가 일으켜 줄 것처럼 성큼 다가왔다.

    아리아드네는 그의 손이 제 몸에 닿기 전에 바닥에서 냉큼 일어났다.

    “부상자는 간호 대상이야.”

    아리아드네가 멀뚱히 서 있던 유진의 손을 낚아챘다.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는 사람에게 제 무게까지 감당하게 할 순 없었다.

    “……괜찮대도.”

    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이상한데…….’

    아리아드네가 멀뚱히 그를 바라보자 그가 제 얼굴을 쓸어내리며 물었다.

    “왜?”

    그를 짓누르던 무언가가 사라지기라도 한 걸까. 연못에 한번 빠졌다 살아나니 심경의 변화라도 생겼나.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웃는 얼굴은 무척이나 후련해 보였다.

    아리아드네는 그런 유진의 얼굴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잘생겨서?”

    “…….”

    그가 못 들을 말을 들었다는 얼굴로 아리아드네를 바라보았다.

    “거울 안 봐?”

    아리아드네는 당신이야말로 왜 그런 반응이냐는 듯 되물었다. 위험한 남자에는 흥미 없다고 외면하던 시절에도 인정했던 외모였다.

    그가 살던 곳은 정말 미의식이 다르기라도 한 걸까? 저 얼굴로 잘생겼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리가 없는데…….

    “놀고들 있네.”

    두 사람이 대화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달로아가 정말 더는 못 참겠다는 듯이 끼어들었다.

    “안 죽어서 서운한 거 아니면 젖은 옷이라도 갈아입고 와. 몸도 좀 녹이고.”

    달로아가 고개를 까딱이자 시녀와 시종들이 우르르 달려와 유진과 아리아드네를 공저 안쪽으로 이끌었다.

    “천천히 다녀와.”

    가볍게 손을 흔든 달로아가 빙글 몸을 돌리며 덧붙였다.

    “이쪽은 이쪽대로 치울 쓰레기가 남아서.”

    돌아선 달로아가 웃음기를 싹 지운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달로아는 달리케의 손에 마구잡이로 잘려 산발이 된 달리오스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달리오스의 회색 눈동자가 핏발이 잔뜩 선 채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적의로 가득 찬 눈동자와 마주한 달로아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흘렸다.

    “넌, 머리가 나빠서 지금 일이 왜 이렇게 됐는지도 모르지?”

    달로아의 말 그대로였다. 달리오스는 완벽했던 계획이 어디에서부터 틀어졌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진짜 머리 나쁘다.”

    혼란스러워하는 달리오스를 보며 달로아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리카르도 경을 잡은 게 네 운인 줄 알았어?”

    꽁꽁 묶인 밧줄에서 막 풀려난 리카르도가 뻐근한 사지를 털어 대다 이쪽을 쳐다보았다.

    “네놈 잡으려고 이쪽에서 흘린 미끼라는 생각은 안 들던?”

    달리오스의 회색 눈동자가 경악에 차 크게 벌어졌다.

    “이걸 말해 줘야 알아? 멍청하긴…….”

    달로아가 잔뜩 찡그린 얼굴로 달리오스를 내려다보았다. 달리오스가 디움 경계소에서 리뮈르 공저로 귀환한 어제만 해도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다.

    ―리오스도 오겠네.

    ―고생하고 돌아온 녀석에게 박하게 굴지 마라.

    달헤임은 그렇게 말했지만 달로아는 언젠가부터 달리오스가 그다지 내키지 않았다. 달로아 남매는 어려서 부모를 잃은 달리오스와 친동기처럼 자랐다.

    같이 지내다 보면 짜증 날 때도 있었지만, 진심으로 달리오스를 싫어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달리오스는 달미에르가 시력을 잃은 날을 기점으로 서서히 변해 갔다.

    달리오스가 은근슬쩍 달미에르를 견제하고 달로아에게 추근대는 일이 잦아졌지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달리오스는 자신들이 내팽개친 가문의 의무를 대신 짊어진 사람이었으니까.

    ―대주님, 디움 경계소의 달리오스 귀환했습니다.

    말에서 훌쩍 뛰어내린 달리오스가 투구를 벗었다. 투구 속에 감춰져 있던 잘 관리된 은발이 흘러내렸다. 언제 봐도 제 머리카락을 가꾸는 데 참 지극정성이었다.

    ―어서 오너라. 고생 많았다. 이번 교대는 예정보다 이르게 진행되었구나.

    ―동쪽 경계 일부에서 낯선 마물을 발견했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그쪽을 살펴볼까 하여 예정보다 이르게 귀환하였습니다.

    낯선 마물이라면 1왕자의 공작일 가능성이 컸다. 달헤임도 달로아와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낯선 마물이라면…….

    ―에취!

    달헤임이 무엇이라 말을 하려던 찰나, 요란한 재채기 소리가 이를 방해했다. 뒤를 돌아보자 아리아드네가 부끄러운 듯 붉어진 얼굴로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제야 아리아드네를 발견했다는 듯 달리오스가 물었다.

    ―아, 이분은 누구십니까?

    달리오스의 질문에 사람들이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사뿐사뿐 걸어 나온 아리아드네가 잔뜩 들뜬 얼굴로 말했다.

    ―경께서 디움의 경계를 지키신다고요? 그런 기사님을 뵙게 되다니 기뻐요.

    아리아드네가 제 손을 뻗으며 빙긋 웃음을 지었다. 그러자 달리오스가 자연스럽게 몸을 숙여 아리아드네가 내민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아리따운 레이디를 뵙게 되어 저 또한 기쁩니다. 저는 리뮈르에서도 최전방인 디움 경계소를 지키는 달리오스라고 합니다. 레이디의 성함을 알려 주시겠습니까?

    ―메르디에스의 아리아드네입니다, 달리오스 경.

    아리아드네의 얼굴에서는 활짝 핀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저 얼굴을 작정하고 사용하면 저렇게 되는구나.’

    달로아는 미모 장인을 보는 심정으로 방긋방긋 웃는 아리아드네를 구경했다. 달리오스는 제 얼굴이 헤벌쭉 풀어진 것도 모르고 반쯤 얼이 빠져 아리아드네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 메르디에스 공녀셨군요. 그런데 리뮈르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리뮈르의 겨울이 그림처럼 아름답다고 해서요. 제가 예쁜 걸 좀 좋아하거든요.

    아리아드네가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태연하게 말했다.

    ‘저건 또 무슨 헛소리래? 누가 이 겨울에 리뮈르에 경치 구경을 와?’

    황당해하는 건 달로아만이 아니었다. 리뮈르 기사들 몇몇이 아리아드네의 발언에 불쾌한 듯 낯을 구겼다. 아리아드네는 자신 때문에 얼어붙은 분위기는 아랑곳하지도 않고 해맑게 웃었다.

    ―저녁이나 함께하자꾸나, 리오스. 네게 할 이야기도 있고.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쉰 달헤임이 그렇게 말하자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경, 그럼 저녁 식사 때 뵈어요.

    아리아드네는 끝까지 웃는 얼굴로 멀어지는 달리오스를 향해 팔랑팔랑 손을 흔들었다. 달리오스가 멀어지자 아리아드네의 얼굴에서는 부러 꾸민 미소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아무래도 달리오스 경께서는 날 알고 있었나 봐요.

    ―뭐래? 누구냐고 묻는 거 못 들었어?

    달로아의 대꾸에 아리아드네가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조금 전까지 꽃 같이 웃던 얼굴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싸늘한 표정이었다.

    ―못 봤어? 내 손등에 키스할 때 몸을 굽히는 거.

    손을 내민 사람의 직위가 더 높다면 정중히 몸을 굽히고, 그렇지 않다면 손을 끌어당겨 고개만 살짝 숙이는 것이 일반적인 예법이었다.

    달리오스는 기사 작위를 받은 몸이었다. 그가 아리아드네를 평범한 귀족 영애로만 생각했다면 그토록 정중히 몸을 숙일 이유가 없었다.

    ―네 사촌이 날 작위를 승계한 귀족이나 백작가 이상의 후계라고 생각했단 건데…….

    페렌트의 작위 귀족이나 백작가 이상의 후계 중 백금발과 푸른 눈을 가진 20대 초반 여성은 아리아드네뿐이었다.

    ―그런데 왜 모르는 척했대?

    ―그러니까 말이야. 디움 경계소에 있던 달리오스 경께서 내가 이곳에 온 건 어떻게 알았고, 날 알고 있으면서도 왜 모르는 척했을까.

    잠자코 둘의 대화를 지켜보던 달헤임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공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겐가?

    ―이 일에서 달리오스 경을 배제하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리아드네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달리오스는 가장 위험한 곳에서 이 땅을 지키는 사람이네. 지금 나더러 그 아이를 의심하라는 말인가?

    ―네. 가장 위험한 곳에서 이 땅을 지키는 달리오스 경도, 갑자기 나타나 뜻 모를 말을 해 대는 저도, 모든 일이 끝날 때까지 의심하고 또 의심하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대주님의 역할이니까요.

    달헤임은 잠시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가 제 자식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너희도 같은 생각이냐?

    ―…….

    달로아 남매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달헤임은 그것을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우선은 공녀 말대로 하지. 부디 우리가 지켜 온 페렌트가 이번에는 우리를 지켜 주기를 바라네.

    달헤임은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달헤임에게 달리오스는 자신을 원망하며 죽은 동생이 남긴 유일한 혈육이자 자식처럼 키운 조카였으며, 제 자식들의 의무를 대신 짊어진 아픈 손가락이었다.

    그 무거움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이가 달리케였다. 달리케가 염려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공녀, 1왕자가 리뮈르를 노릴지도 모르니 조심하라는 말과 1왕자가 리뮈르의 누군가와 결탁했다는 말은 그 무게가 달라요. 만약 공녀의 말이 사실과 다르다면…….

    달리케는 뒷말을 아꼈지만 무슨 말을 하려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만약 아리아드네의 염려와 달리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전자는 호의나 염려 때문이었다고 어찌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후자는 가문의 일원을 모함한 것이니 양 가문 사이의 갈등으로 번지고도 남을 만한 일이었다.

    ―그만한 각오도 없이 이 겨울에 리뮈르를 찾은 것이 아닙니다.

    ―뭐, 경치를 보러 왔단 말보단 낫네요.

    달리케가 피식 웃으며 덧붙였다. 아리아드네의 말이 인상적이었던 건 달로아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달리오스 경이 예정보다 이르게 귀환한 것이 아무래도 이상해요. 가까운 시일 내에 마물의 습격이 있을 겁니다.

    아리아드네의 말에 바닥을 두어 번 가볍게 찬 달리케가 고개를 까딱이며 덧붙였다.

    ―개기월식으로 사람들의 이목이 쏠린 내일이라던가.

    상대가 개기월식을 노리고 있을 거란 달리케의 추측에 아리아드네도 동의한다는 듯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만한 적기를 놓칠 리가 없었다.

    ―내일 어떤 식으로든 결판이 나는 거라면야 오히려 잘됐네. 진짜 지겨웠는데…….

    ―공녀의 짐작대로 달리오스가 1왕자와 결탁한 거라면 조금 전 동쪽 경계 이야기를 꺼낸 것도 우연은 아니겠군요.

    달로아가 진저리가 난다는 듯 부르르 몸을 떨며 중얼거리자, 내내 조용히 듣고 있던 달미에르도 의견을 보탰다.

    ―아마도 그것을 핑계로 자리를 비우겠죠.

    ―나라면 공저의 병력 일부도 함께 빼돌리겠어. 힘은 상대적인 거니까 상대가 약할수록 좋지.

    ―마물을 상대하느라 지칠 대로 지친 순간, 아군인 줄 알았던 적이 나타난다는 건가. 쥐방울 같은 새끼가 약은 수를 쓰는구나.

    ―초반 전투에서 크게 밀리지 않는다면 아버지는 지켜보시라고 하는 게 낫겠군요. 달리오스가 나타났을 때 다들 지쳐 있으면 곤란하니까.

    아리아드네, 달로아, 달리케, 달미에르가 차례대로 의견을 주고받았다. 마치 여러 번 손발을 맞춰 본 것처럼 합이 딱딱 맞았다.

    ―마물이 너무 쉽게 제압되면 달리오스가 이번은 포기하고 다음 기회를 노릴지도 모르니 덫을 하나 더 놨으면 좋겠는데…….

    ―내 짐작대로 달리오스가 정말 1왕자와 내통한 것이라면, 마물이 습격한 밤에 리뮈르를 빠져나가는 사람을 그냥 두고 보지는 않겠지?

    아리아드네가 기다렸다는 듯이 달로아의 말을 받았다. 그 건에 대해서는 아리아드네도 생각해 둔 바가 있었다. 성기사단의 부단장이라는 직함은 달리오스로서도 쉽게 무시할 수 없을 터였다.

    대강의 이야기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남은 것은 시간 내에 각자가 맡은 일을 마무리하는 것이었다. 내내 네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유진이 걱정스럽다는 얼굴로 말했다.

    ―내일 내가 필요하진 않아?

    그대로 자리를 벗어나려던 달로아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라는 거야. 얘 생각이 틀렸으면 아무 일도 없을 거고, 얘 생각이 맞으면 그쪽 패는 다 읽힌 거나 마찬가진데. 상대 패를 보고도 못 이기면 판 접어야지, 뭐.

    ―심연의 눈은 까다로워서 아무 때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리뮈르의 일은 리뮈르가 해결할 겁니다.

    남매가 나란히 단호한 반응을 보였다.

    ―맞아. 당신은 내일 리뮈르의 성물을 볼 생각만 해.

    아리아드네도 거들었지만 유진의 염려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아, 그러고 보니 당신, 엘바에서 시몬이 사육한 마물들을 상대했었지. 어떤 마물이 나타날지 짐작할 수 있으면 큰 도움이 될 거야.

    아리아드네가 달래듯이 물어본 다음에야 그의 얼굴이 풀어졌다. 유진이 들려준 엘바에서의 경험담은 리뮈르의 전력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렇게 모든 것은 예상에서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진행되었지만, 그것을 지켜본 리뮈르 일가의 기분은 몹시도 더러웠다.

    “진짜, 어떻게 상상한 것들 중 최악만 보여 주냐.”

    달리오스는 그들이 상상한 것 중에서도 최악의 선택지만을 골랐다.

    공작 위를 차지하려던 것이 개인적인 탐욕 때문만은 아니었다면, 이곳에 마물을 불러들이는 것이 아니라 검으로 승부를 보려 했다면, 그랬더라면 이렇게까지 비참하지는 않았을 텐데…….

    “너 하나 때문에 리뮈르의 긍지가 더럽혀졌어. 우리가 그걸 어떻게 지켜 왔는데!”

    이곳을 지키는 동안 차가운 눈 위에 뿌려진 뜨거운 피가 얼마던가. 달로아가 제 손아귀에 틀어쥔 달리오스의 머리채를 내팽개치며 소리를 질렀다.

    “그런데 감히 이 땅에 마물을 끌어들여?”

    “그러는 넌 뭘 했어? 내가 사선에서 죽어라 고생하는 동안 네가 대체 뭘 했어!”

    달리오스의 말에 달로아의 목이 꽉 막혔다.

    달로아는 리뮈르가 싫었다. 일 년의 절반은 눈으로 뒤덮인 이 땅이,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어디로도 도망갈 수 없는 이 땅이, 달미에르의 눈을 앗아간 성물을 품은 이 땅이 싫었다. 그리고 자신들을 이곳으로 몰아낸 산 너머 사람들을 증오했다.

    “마물이 사람을 통째로 씹을 때 무슨 소리가 나는지 알아?”

    달리오스가 킬킬대며 웃었다.

    “그래서 기다렸어? 마물이 우리를 먹어 치우는 순간을?”

    하지만 싫어하는 것보다 더 많이 사랑했다. 리뮈르는 달로아의 전부였으니까. 그녀를 사랑하는 사람들도, 그녀가 사랑한 사람들도 모두 리뮈르에서 태어나 살아가고 또 죽어 갔다.

    달리오스조차도 달로아가 사랑한 리뮈르의 일부였다. 가끔 헛소리하는 사촌을 진심으로 싫어한 적은 없었다.

    “너한테 나는, 우리는, 리뮈르는 정말 아무 의미도 없었어?”

    달로아의 물음에 핏발이 벌겋게 선 눈을 한 달리오스가 악을 쓰며 외쳤다.

    “너야말로 나를 개무시했잖아! 내가 어떤 눈으로 널 봤는지 뻔히 알고 있었으면서!”

    “그래서 내가 네 그 더러운 욕망에 어울려 주기라도 했어야 한단 거야?”

    “내가, 리뮈르를 위해서 목숨을 걸고 싸운 내가, 그런 내가 더럽다고?”

    눈밭에 얼굴을 묻은 채 킬킬대던 달리오스가 눈을 희번덕 굴리며 고개를 쳐들었다.

    “네가 안락한 공저에서 희희낙락 밤나들이나 쏘다닐 때, 나는 목숨을 걸고 마물을 죽였어.”

    광기에 찬 달리오스의 눈동자가 기이한 열기를 품고 이글거렸다.

    “내가 죽인 마물이 원래 무엇이었는지 넌 상상도 못 할걸? 달로아, 마물이 어떻게 생겨나는지 알려 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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