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3화 (73/148)
  • * * *

    타앙― 탕탕!

    마치 고막이 터질 듯한 굉음이었다. 달로아는 귀를 막았던 손을 내렸다. 타우루스가 공중에 떠오른 채로 멈춰 있었다.

    어? 또 그 능력인가? 달로아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파삭 하는 소리와 함께 눈앞의 타우루스가 산산이 조각났다.

    팟, 팟, 파바박!

    그것을 시작으로 주위를 새까맣게 메운 타우루스가 차례로 터져 나갔다. 끔찍한 광경에 달로아는 구역질이 절로 치밀어 올랐다.

    새까만 딱정벌레들이 날개를 비비며 다가오는 것과 저 많은 타우루스가 순식간에 터져 나가는 것 중에 무엇이 더 끔찍한지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였다.

    ‘저것들이랑 엮일 때부터 이럴 것 같더라니.’

    달로아 앞을 가린 새까만 타우루스 떼가 사방으로 터져 나가자 그 속에 우뚝 솟은 인영이 보였다.

    새까만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했다. 그의 손에는 늘씬하게 빠진 검은 물체가 들려 있었다. 조금 전 타우루스를 날려 버린 그 물건인 듯했다.

    다행히도 유진이 정신을 차린 모양이었다. 달로아가 바닥에 널브러진 타우루스의 잔해를 밟으며 멍하게 서 있는 유진을 향해 걸어갔다. 빠각, 툭툭, 조각난 껍데기가 불쾌한 소리를 내며 발밑에서 부스러졌다.

    달로아가 멍하니 서 있는 유진을 잡아당겼다.

    “뭐 해, 빨리―”

    천천히 고개를 돌린 그가 멍한 눈동자로 달로아를 응시했다. 달로아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그녀를 보는 유진의 눈동자가 도무지 사람 같지가 않았다.

    “정신 차려. 언제까지 정신 놓고 있을 거야!”

    달로아는 부러 더 큰 소리를 냈다.

    “달이 다시 차오르면―”

    스스스스― 몹시도 불길한 소리였다. 달로아가 천천히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미친, 이럴 줄 알았어!”

    스스스슥, 스스스스스슥― 조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새까만 타우루스 떼들이 사방에서 몰려들고 있었다. 달로아는 여전히 정신을 빼놓고 서 있는 유진과 함께 덩굴장미 문을 향해 몸을 날렸다.

    다행히도 이번에는 저택 밖으로 떨어졌다. 어느새 하늘에서는 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리뮈르에도 눈이 오겠네.”

    달로아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눈이야 리뮈르에서 태어난 달로아에겐 공기나 다름없는 것이었지만 지금만큼은 시야를 가리는 눈이 반갑지 않았다.

    달의 길에 눈이 오는 것은 리뮈르의 피를 이은 그녀가 이곳에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리뮈르의 피를 이은 그녀가 리뮈르와 달의 길을 연결하고 있었다.

    딱, 따닥, 딱딱딱― 뒤쪽에서 타우루스가 집게발을 딱딱거리며 그들을 쫓아왔다.

    “가, 간다고! 재촉하지 마.”

    달로아는 타우루스를 피해 정신없이 달렸다.

    타앙, 탕! 탕! 그 무시무시한 소리와 함께 또다시 한 무리의 타우루스가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정신을 놓고 있어도 반사 신경은 살아 있다는 건가.’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빛의 길 위에서 떨어진 타우루스는 그대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다시 차오르기 시작한 달은 벌써 반을 훌쩍 넘긴 상태였다. 월식이 끝나기 전에 길의 시작점에 도착하지 못한다면 알 수 없는 공간을 헤매는 미아가 될지도 몰랐다.

    달로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미친 듯이 달렸다.

    스스슥, 딱딱, 파드득. 타우루스가 날개를 비비는 소리, 집게발을 부딪치는 소리,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는 소리, 그런 것들이 점점 가까워졌다.

    그때였다. 누군가 달로아의 옷을 끌어당겼다. 달로아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미친.”

    새까만 딱정벌레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타우루스의 날카로운 집게발이 달로아의 옷깃을 꿰뚫고 비죽 솟아 나와 있었다. 타우루스의 반대쪽 집게발이 달로아의 얼굴을 후려갈기려던 순간이었다.

    까앙! 달로아의 옷깃을 꿰뚫었던 타우루스의 집게발이 반쯤 부러진 채로 덜렁덜렁 흔들렸다.

    유진이었다. 그가 타우루스의 집게발을 후려갈긴 검은 물체를 손에 든 채 한 발로 타우루스를 걷어찼다.

    “달려.”

    낮고 서늘한 목소리는 더없이 냉정하고 침착했다.

    “어, 당신 정신이 돌아―”

    정신을 차린 남자가 반가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뒤돌아보지 말고 달려!”

    그가 달로아의 등을 떠밀며 돌아섰다.

    탕! 탕탕탕! 조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속도였다. 그가 정신을 차리자 마물 따위는 그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끝이 없군.”

    아무리 죽여도 끝없이 몰려드는 타우루스는 재앙이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을 맴도는 알 수 없는 기억보다는 차라리 그 정체가 확실한 재앙이 나았다.

    ‘우리의 주인은 네가 아니다. 우리가 널 섬겨야 할 의무는 없다.’

    황금빛 청년 카푸트를 마주한 사람들은 벌벌 떨면서도 해묵은 증오를 숨기지 않았다. 그들을 바라보는 카푸트 역시 제 속의 멸시를 가감 없이 내보였다.

    ‘버러지들의 섬김 따위는 내 알 바가 아니다. 그것은 본디 내 일부였던 것. 오늘 나는 나를 돌려받을 것이다.’

    카푸트에게 별의 그릇은 대체 무엇이었기에.

    끼에에에엑― 귀가 찢어질 듯한 괴성과 함께 타우루스의 목이 잘렸다. 유진의 팔이 다시금 원을 그리며 풀멘을 휘둘렀다. 그의 팔이 지나간 궤적을 따라 타우루스의 사체가 후두둑 바닥으로 떨어졌다.

    자신의 일부를 돌려받겠다던 카푸트는 머리가 잘린 채 성 상티모니아 대신전에 갇혔고, 그것은 유진을 선택했다. 성 상티모니아 유일의 성녀 베아트리스의 예언대로.

    유진은 자신을 칭칭 휘감은 진득한 수렁이 견딜 수 없이 답답했다. 알지 못하는 기억,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 알 수 없는 열망과 분노. 그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파라라라락, 얇은 날개가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그의 주위를 가득 채웠다. 새까만 타우루스 떼가 그를 에워쌌다.

    달로아를 따라 움직이는 달그림자는 일그러진 한 귀퉁이만을 남겨 두고 있었다.

    “이대로…….”

    유진은 낮은 한숨을 토해 냈다. 하늘하늘 떨어지는 눈은 리뮈르의 땅에도, 달그림자가 만들어 낸 빛의 길 위에도 공평하게 내려앉았다.

    달로아는 눈이 쏟아지는 달의 길을 쉼 없이 달렸다. 그녀는 유진의 엄호에 힘입어 어둠 속을 밝히는 빛이 점점 희미해지는 길의 끝에 다다랐다.

    “허억, 헉헉…….”

    폐가 찢어질 것만 같았다. 달로아는 벅찬 숨을 몰아쉬며 흐르는 땀을 닦았다. 그녀는 서둘러 달그림자의 상태를 확인했다. 리뮈르의 연못에 비친 달그림자는 벌써 만월에 가까운 형태였다.

    ‘십 분쯤 남았을까? 아슬아슬하게…….’

    달로아가 달의 길에서 막 내려오려던 순간이었다. 어떤 생각이 그녀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끼에에엑, 끄, 끄윽― 타우루스의 괴성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었다.

    달로아가 리뮈르의 땅에 발을 딛는 순간, 두 공간을 가른 경계가 일순 사라진다. 그렇게 되면 자신을 따라온 저 마물들에게도 리뮈르로 가는 길이 열린다.

    오늘, 리뮈르에는 1왕자가 불러낸 마물이 들이닥칠 거라 했다. 하지만 달의 길 끝에 있는 저택에서도 마물이 쏟아질 것은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싸움에는 균형과 기세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팽팽하게 이어지던 균형이 달로아가 끌어들인 타우루스로 깨어질지도 모른다.

    달의 길 너머 리뮈르의 상황을 알지 못하니 쉽사리 결정할 수가 없었다. 망설이는 사이 달은 조금 더 만월에 가까운 형태가 되었다.

    달로아가 욕설을 뇌까리며 눈을 질끈 감은 그때, 불쑥 나타난 손이 그녀를 확 잡아당겼다.

    “미쳤어? 너 대체 뭐 하는 거야.”

    그녀의 눈에 비친 것은 눈이 내려도 쌓이지 않는 달의 길과는 달리 하늘에서 쏟아진 눈이 세상을 온통 새하얗게 뒤덮은 곳이었다.

    얼음과 눈의 땅 리뮈르. 눈물이 나도록 익숙한 풍경이었다. 달로아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미에르.”

    그녀를 끌어당긴 손은 하나의 영혼을 나눠 가진 제 쌍둥이 동생 달미에르의 것이었다.

    “왜 그러고 있었던 거야?”

    달미에르는 하얗게 빛나는 달의 길 끝에 달로아가 도달했음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녀가 좀처럼 길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망설이는 것도.

    “타우루스가……”

    달로아는 문득 하던 말을 멈추고 제가 온 길을 돌아보았다.

    “타우루스?”

    달미에르가 되묻는 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사방이 온통 정적에 잠겨 있었다. 정적이 주는 위화감에 달로아는 오싹해졌다.

    달의 길에서 리뮈르로 떨어진 건 달로아뿐이었다. 마물 타우루스도…….

    “유진은? 그 사람은 어디 있어!”

    이계의 방문자 유진도 없었다.

    달로아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다급하게 내지르는 아리아드네와 마주했다. 달로아는 손을 들어 달의 길을 가리키며 말했다.

    “분명 같이 왔는데…….”

    귀퉁이가 살짝 이지러진 달은 얼마 남지 않은 어둠을 몰아내고 있었다. 시간이 없었다. 달이 완전히 차오르기 전까지 달의 길에서 내려와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유진은 영원토록 어둠 속에서 헤맬 수밖에 없었다.

    어제의 달과 오늘의 달이 다르듯 수면에 비친 달그림자가 만들어 내는 길은 매번 달라진다. 사라진 달이 마저 차오르면 달그림자가 만들어 낸 길은 영영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다음 월식이 되어 달그림자가 다시 길을 만들어 낸다 해도 한 번 사라진 길은 다시는 찾을 수 없었다.

    “내가 찾아올 거야.”

    아리아드네가 거침없이 빛나는 길 위로 발을 뻗었다. 리뮈르의 기사들이 그녀를 막아섰다.

    “이거 놔!”

    몸은 얼음장처럼 차가운데 머리만은 곤죽이 되어 들끓었다. 달이 점점 차오를수록 유진을 기다리는 것이 고통스러워졌다.

    ―그만 들어가. 추워.

    ―잘 다녀와, 기다릴게.

    그것이 그와의 마지막 대화가 될까 봐 초조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겨우겨우 버티고 버틴 끝에 달로아가 도착한 것을 보고 안심한 것도 잠시, 그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달이 마침내 어둠을 모두 몰아내고 제 모습을 완전히 되찾을 때까지도 유진은 나타나지 않았다.

    달그림자로부터 시작된 빛의 길이 서서히 흐려지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아리아드네가 울부짖는 것처럼 소리쳤다.

    “이대로 도망가지 마. 약속했잖아.”

    하얗게 부서지는 달빛과 펑펑 쏟아지는 눈이 그녀 위로 차곡차곡 쌓였다.

    “당신이 어디에 있든 찾아갈 거야.”

    그녀의 새파란 눈동자가 수정처럼 빛났다. 사랑하는 남자를 찾아 땅끝까지 헤매고 다녔다는 호수의 정령처럼, 그를 제 앞에 데려다 놓을 수만 있다면 하지 못할 것이 없었다.

    “아무 데도 못 가. 어디에도 안 보낼 거야.”

    아리아드네는 자신을 붙드는 리뮈르의 기사들을 뿌리치고 점점 흐려지는 달의 길 위로 몸을 날렸다.

    파앗, 눈부신 황금빛이 그녀를 감쌌다.

    빛으로 하얗게 물들었던 시야가 차츰 돌아오자 그녀는 자신이 달의 길 위에 서 있음을 깨달았다. 달의 마법사가 허락한 사람이 아니면 오를 수 없다고 한 그 길에.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는지는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어서 유진과 함께 이곳을 빠져나가야 했다.

    빛나는 길 위에 새까만 마물들에게 둘러싸인 유진이 있었다. 자신을 발견한 그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벌어졌다.

    “위험해!”

    타우루스의 집게발이 그의 가슴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새롭게 나타난 인기척에 마물들이 아리아드네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마물들은 아리아드네에게 손끝 하나 대지 못했다.

    반으로 뚝 잘린 타우루스가 후두둑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머지 반쪽은 어둠 속으로 사라져 알 수 없는 공간을 떠돌았다.

    그의 손이 닿을 필요도 없었다. 그저 그의 의지만으로 그곳에 존재하는 모든 마물이 생명을 잃었다.

    달의 마법사는 모라의 권능이 닿은 사제, 달의 마법사가 만든 공간은 그를 넘어설 수 없었다.

    “당신이…….”

    유진이 비틀거리며 아리아드네를 향해 다가왔다. 섬광이 터지며 주위가 온통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눈을 뜨기도 어려운 빛의 홍수 속에서 그가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당신이 있었어.”

    그의 몸이 천천히 무너지는 것과 동시에 빛이 점점 잦아들었다.

    “메르디에스 공녀님!”

    “야! 너 진짜―”

    웅성웅성 몰려드는 사람들이 와글와글 소음을 만들어 냈다. 마지막까지 아리아드네를 붙들었던 리뮈르 기사의 안심한 듯한 부름과 한숨을 푹푹 내쉬는 달로아까지, 온갖 목소리들이 뒤섞였다.

    “유진은?”

    벌떡 일어난 아리아드네가 주위를 살폈다. 무언가에 홀린 듯이 걸어간 그녀가 연못가에 멈춰 섰다.

    새까만 밤하늘 사이로 까만 머리, 까만 옷을 입은 그가 있었다. 새하얀 눈과 함께 천천히 떨어진 그가 이윽고 어두운 연못 속으로 잠겨 사라졌다.

    풍덩! 연못 표면에 유진이 부딪히는 소리가 때늦게 귓가를 때렸다. 아리아드네는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치렁치렁하고 무거운 겉옷을 집어 던졌다.

    “미쳤어? 이 겨울에 얼어 죽고 싶어서 그래? 얕아 보인다고 만만하게 보지 말라고 했잖아! 무슨 마법이 걸려 있을지 모르는 곳이야. 연못의 끝이 어디일지, 그 끝이 있기는 할지 아무도 모른다고!”

    달로아가 연못에 뛰어들려는 아리아드네를 막아서며 말했다.

    “내가 아니면 그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있고?”

    아리아드네가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건장하고 용맹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리뮈르의 기사들이 우물쭈물하며 좀처럼 나서지 못했다.

    “이곳 사람들이 물에 약한 건 나도 알아.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순 없잖아.”

    디움 산맥을 끼고 사는 사람들은 유독 물에 약했다. 이곳 리뮈르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를 구하는 건 내 몫이야.”

    아리아드네는 언젠가 렉사가 주었던 구슬을 한 손에 쥐고는 연못에 뛰어들었다.

    물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온몸은 얼음으로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프고 머리는 조각조각 깨질 것만 같았다. 숨을 내쉴 때마다 온몸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진짜 이러다 죽겠구나 싶은 순간이었다. 그때, 렉사가 준 구슬이 하얗게 빛나기 시작했다.

    구슬에서 터져 나온 하얗게 빛나는 물줄기 사이로 검푸른 연기가 새어 나왔다.

    ‘숨을 쉴 수 있어.’

    그뿐만이 아니었다. 밑에서 발을 잡아당기는 것처럼 무거웠던 몸이 가벼워졌다. 물속에서도 앞이 선명하게 보였다.

    ―가지거라. 그게 있으면 물에 빠져도 한 번은 살 수 있겠지.

    마치 엷은 막이 아리아드네 주위를 감싸 주는 것만 같았다. 차디찬 물이 자신의 피부처럼 느껴졌다.

    ‘고마워, 렉사.’

    아리아드네는 점점 멀어지는 유진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새까만 머리카락이 어두운 물속에서 하늘하늘 흔들렸다.

    호수에 빠진 남자를 구한 정령이 이런 마음이었을까. 눈앞의 그는 너무도 위태롭고 지독히도 아름다워서 도무지 외면할 수가 없었다. 그를 구하는 대가로 무엇을 잃게 되더라도 기꺼이 감수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정신을 반쯤 놓은 것처럼 흐릿한 회색 눈동자는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몽롱했다. 자신을 발견한 그가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작게 벌린 입 사이로 공기 방울이 흩어졌다. 아리아드네는 그가 하려던 말을 알아차렸다.

    ‘꿈을 꾸나 봐.’

    ‘꿈 아닌데.’

    아리아드네의 소리 없는 대답에 그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아니야?’

    ‘아니야.’

    붉고 탐스러운 그녀의 입술이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대답을 했다. 이것까지도 모두 환상인 걸까.

    그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손끝에 차가운 감촉이 닿았다. 환상 속에서는 결코 닿지 않았던 부드러운 뺨이, 물거품처럼 사라지지 않고 그의 손끝에 닿았다.

    ‘그’의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알 수 없는 기억은 제 몸을 점령한 카푸트의 것이었고, 이 몸 또한 사막에서 죽어 가던 남자의 것이었다. 본디부터 제 것이었던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가슴을 칭칭 휘감는 이 답답함도, 치솟는 분노와 끓어오르는 열망도 제 것이되 제 것이 아니었다. 시작을 알 수 없는 답답함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멀어지는 달로아를 보며 발을 움직이지 못했던 것은 주위를 둘러싼 타우루스 때문이 아니라 그를 휘감은 수렁 때문이었다.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어둠 속으로 녹아들어 영원토록 잠들고 싶었다. 무엇이 있을지도 모를 과거의 기억 따위 외면하고 싶었다.

    그렇게 그는 달로아를 달의 길에서 내보내고 홀로 남았다. 그런데…….

    ―당신이 어디에 있든 찾아갈 거야.

    새파랗게 빛나는 눈동자가 도망가려는 그를 꽁꽁 묶어 두었다.

    ―아무 데도 못 가. 어디에도 안 보낼 거야.

    그녀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자신을 향해 발을 뻗었다. 그는 마치 그 모든 순간을 제 눈으로 보는 것처럼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그 순간만큼은 그녀와 자신이 하나가 된 듯한 느낌이었다.

    제 손끝에서 터져 나온 황금빛이 그녀를 감싸더니 그녀를 위해 달의 길을 열었다.

    그가 홀로 남은 길 위에 그녀가 서 있었다.

    아, 그녀가…… 그녀가 있었다. 진짜 ‘그’가 가진 유일한 것.

    황금으로 빛나는 카푸트도, 심장에 총을 맞은 채 죽어 가던 이 몸의 원래 주인도 아닌, 진짜 ‘그’가 가진 것.

    아리아드네를 향한 제 마음이야말로 진짜 ‘그’의 것이었다.

    ‘당신을 찾으러 왔어.’

    붉은 입술 사이로 물방울이 포르르 새어 나왔다. 땅의 끝에서 자신을 구해 준 얼음 호수의 정령을 만난 남자의 심정이 이러했을까.

    ‘그것도 당신이었을까.’

    ‘전부 나야. 당신이 바라는 건 전부 나여야 해.’

    아리아드네의 새파란 눈이 진득한 빛을 내며 타올랐다. 그의 손이 그녀의 눈가를 가볍게 쓸었다.

    방주의 분수에 빠졌던 유진을 향해 다가왔던 성화 속의 여자. 옅은 금발과 호수처럼 푸른 눈을 가진, 하얀 꽃을 품에 안고 자신을 구원해 줄 것처럼 손을 내밀던 그 여자.

    끝내 손을 잡을 수 없었던 그때와 달리 아리아드네의 손은 자신을 단단히 틀어쥐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을 끌어안은 채로 힘겹게 수면 위를 향해 헤엄쳐 갔다. 점점 가까워지는 수면 위로 밝은 달빛이 비치고 있었다.

    부서지는 별빛처럼 밝은 금발이 검푸른 물속에서 물풀처럼 잘게 흔들렸다. 자신을 돌아보는 눈동자는 여전히 호수처럼 푸른색이었고, 그녀의 온몸은 새하얀 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오래도록 숨을 쉬지 못한 탓인지 눈앞의 그녀가 점점 흐려졌다.

    그리고 숨이 넘어가려는 순간이 되어서야, 언젠가 그의 머릿속을 헤집었던 그 소리의 의미를 깨달았다.

    ‘사랑과 죽음이 함께 오나니 사랑도 죽음도 피할 수 없으리라.’

    케이루스의 성물 별의 그릇이 그에게 내린 죽음의 예언은 바로 그것이었다.

    케이루스의 직계에게만 내린다는 축복이자 저주가 왜 그에게도 발동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그는 제 끝이 그 예언대로 되리라고 직감했다.

    타우루스의 집게발이 스치고 지나간 가슴에서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평소라면 아무것도 아닌 상처가 좀처럼 낫지 않았다.

    죽지 않는 괴물이 죽는 순간이 사랑을 자각하는 때라니. 세상은 그에게 지독할 정도로 잔인했다.

    그가 제 죽음을 예감하며 천천히 눈을 감은 그 순간, 칼날 같은 바람이 그의 피부를 찢어발길 듯이 불어왔다.

    유진을 마침내 수면 위로 끌어 올린 아리아드네가 격하게 숨을 내쉬었다. 물속에서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었던 건 전부 렉사의 구슬 덕이었다.

    아리아드네는 축 늘어진 유진을 호숫가로 끌어내고서야 바닥에 드러누웠다. 아무리 렉사의 구슬이 있었다 해도 저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남자를 끌고 나오는 건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다.

    아리아드네와 유진 위로 마른 수건이며 두꺼운 로브와 옷가지 같은 것들이 떨어졌다.

    “진짜,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내 인생이 순탄치 않게 흘러갈 것 같더라니.”

    한숨을 푹 내쉰 달로아가 아리아드네의 젖은 몸을 꼼꼼하게 닦아 주며 말했다.

    “……고마워.”

    달달 떠는 아리아드네를 본 달로아가 그녀를 일으켰다.

    “메르디에스 공녀를 안으로 모셔.”

    달로아의 명에 리뮈르 기사가 아리아드네에게 다가온 그때였다.

    “여기, 의원! 의원을―”

    유진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이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아리아드네는 정신없이 유진에게로 다가갔다. 하얗게 질린 얼굴이 더없이 불길했다. 유진에게 다가간 아리아드네가 그를 흔들었다.

    “물은? 토했어?”

    아리아드네는 렉사의 구슬을 입에 문 채로 그에게 숨을 불어 넣었다.

    ‘제발, 제발, 한 번만 더 도와줘.’

    차갑게 얼어붙은 입술이 누구의 것인지 구별도 되지 않았다. 그의 가슴을 짚은 아리아드네의 손바닥에 미끌미끌한 액체가 묻어났다.

    제 손바닥을 확인한 아리아드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손바닥을 새빨갛게 물들인 액체는 그의 가슴을 흠뻑 적신 피였다.

    “죽지 마. 제발 죽지 마.”

    아리아드네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다시금 얼어붙은 그의 입술에 숨을 불어 넣었다. 그녀의 눈물이 그의 얼굴 위로 떨어졌다.

    유진의 손끝이 움찔 움직였다. 이어 울컥, 차가운 물을 토해 낸 그가 천천히 눈을 떴다. 눈을 뜬 유진이 마주한 건 피범벅이 된 아리아드네가 눈물을 뚝뚝 흘리는 광경이었다.

    놀란 그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가슴은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웠고, 온몸은 조각난 것처럼 아팠다. 그가 고통에 인상을 찡그리자 아리아드네의 푸른 눈에서 다시금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무슨 일이야? 이 피는 다 뭐고.”

    유진이 아리아드네의 눈에서 솟아나는 눈물을 닦으며 물었다.

    “당신 피야! 당신 거라고!”

    아리아드네의 얼굴에 묻은 피가 자신의 것임을 알아차린 유진은 그제야 안심한 얼굴을 했다.

    “난 안 죽어.”

    그는 태연한 어조로 말했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이 온다는 그때가 언제인지 아직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상처가 생각보다 깊어서 회복이 더딘 것뿐일지도 몰랐다.

    그가 덜덜 떠는 아리아드네의 몸에 손을 올렸다가 얼음장처럼 차가운 몸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얼굴이며 입술도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무엇보다도 홑겹의 드레스는 속이 모조리 비칠 정도로 물에 흠뻑 젖어 있었다.

    유진은 그제야 조금 전 아리아드네가 자신을 구하기 위해 연못에 뛰어들었던 일이 현실임을 깨달았다.

    환상의 경계에서 몽롱하던 정신이 마치 얼음물을 맞은 것처럼 깨어났다.

    “무슨 짓이야! 죽으려고 작정했어?”

    유진이 고함을 질렀다.

    “다시 같은 상황이 일어난다고 해도 난 또다시 뛰어들 거야. 그 순간 당신을 살릴 사람은 나뿐이었으니까.”

    아리아드네가 조금도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일순간 할 말을 잃은 유진이 제 입술을 짓씹었다. 아리아드네가 유진을 노려보며 말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럼 우선 살려 줘서 고맙다고 해.”

    “다시는, 그런 위험한 짓 하지 마.”

    할 말을 잃은 유진에게 해야 할 말을 알려 줬지만 그에게선 다른 대답이 흘러나왔다. 그가 아리아드네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가 차마 만지지 못하고 천천히 손을 내렸다.

    “지키는 건 내 몫이야. 나를 제발 비참하게 만들지 마.”

    고개를 숙인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왜 당신이 나 때문에…….”

    그녀는 세상의 모든 부를 좌지우지한다는 메르디에스의 유일한 딸이었다. 한겨울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에서 생사를 넘나드는 일 따위 자신만 아니라면……. 평생 그런 일은 경험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차갑게 얼어붙은 손가락이 그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하얗게 쏟아지는 달빛을 받은 그녀가 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사랑한다고 해. 그 말이 하고 싶은 거잖아.”

    어떻게……. 유진은 파랗게 질린 그녀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이런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겠어. 그와 동시에 유진이 아리아드네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시끄럽던 주위가 아득하게 멀어지더니 펑펑 쏟아지던 눈이 허공에 그대로 멈추었다. 시간이 멈춘 세상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은 서로만이 유일했다.

    차갑게 얼어붙은 두 개의 입술이 맞닿았다. 이토록 차가운데 어째서 이렇게 뜨겁게 느껴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머리카락 사이를 파고들었다. 아리아드네의 손이 화답하듯 그의 뒷머리를 감싸 안았다.

    조금의 틈도 없이 맞물린 입술 사이로 서로의 숨을 삼켰다. 벌려진 사이로 서로의 숨과 혀가 넘나들었다. 부드러운 혀가 입 안을 쓸고 지나갈 때마다 그가 간신히 붙잡고 있던 무언가가 뚝 끊어지는 기분이었다.

    맞닿았던 입술이 떨어지고 아리아드네의 푸른 눈동자가 드러나자 잠시 멈추었던 눈이 다시 흩날리기 시작했다.

    새하얗게 물든 세상, 뜨거운 숨결, 그를 바라보는 푸른 눈동자, 거세게 뛰는 심장.

    진짜 ‘그’가 가진 것들은 이것이면 충분했다. 어떤 고귀한 성물보다, 어떤 위대한 힘보다, 어떤 비밀스러운 기억보다도.

    E Halidoms : 세 개의 성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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