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0화 (70/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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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까만 하늘에는 만월(滿月)이 걸렸다. 개기월식이 예정된 달은 오늘따라 유난히도 커다랬다.

    하늘에 걸린 달만큼이나 환한 등이 리뮈르 공저를 대낮처럼 밝혔다. 눈이 닿는 곳에는 온통 달처럼 생긴 노란 등이 걸려 있었다.

    바람이 불자 물에 비친 노란 달이 물결에 흔들렸다. 아리아드네는 물결을 따라 흔들리는 달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뭘 그렇게 봐? 위험하게. 얕아 보인다고 방심하면 안 돼. 겉보기랑 달라서 여기 빠지면 죽어.”

    아리아드네는 몸을 일으키며 뒤를 돌아보았다. 말을 건 사람은 달로아였다.

    리뮈르 공저의 뒤편, 못이라기엔 좀 크고 호수라기엔 작은 물웅덩이가 있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이 연못은 아무리 추워도 얼지 않는다고 했다.

    이곳이 바로 달의 마법사가 열어 준 달의 길이 시작되는 곳이었다.

    “그만 들어가. 추워.”

    다가온 유진이 제 외투를 벗어 덮어 주려는 걸 아리아드네가 거절했다.

    “무거워서 더는 못 입어. 됐어.”

    그녀의 거절에 유진이 잠시 멈칫하더니 제 외투를 다시 몸에 걸쳤다.

    “그래.”

    그의 까만 머리카락이 밤하늘에 녹아들 듯 나풀거렸다. 아리아드네는 눈을 가린 그의 머리카락을 치워 줄까 생각했다가 이내 털어 버렸다.

    “나 기분이 이상해.”

    희미한 불안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이 불안이 그가 위험할까 걱정되어선지, 아니면 그가 멀어질까 두려워서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당신이 원하는 무언가를 찾았으면 간절히 바라다가도, 정말 찾으면 그다음은 어떻게 되는 거지 문득 무서워져.”

    하지만 자신이 무엇을 찾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다며 고통스러워하던 그를 생각하면 이런 제 욕심이 미안해진다.

    “…….”

    “그래도 당신이 바라는 그 무언가가 이곳에 있었으면 좋겠어. 같이 찾아 주기로 약속했으니까.”

    무엇을 준다 해도 그가 제게 준 것에 비할 순 없을 테니까. 아리아드네는 유진의 모습을 제 눈에 새겼다. 세상을 뒤덮은 눈이 곳곳에 걸린 등불의 빛을 반사해 하얗게 빛나는 밤이었다.

    “시작됐어.”

    달로아의 말에 아리아드네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누가 성큼 베어 물기라도 한 것처럼 달 아래가 까만 그림자에 덮여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곧 달의 길이 열릴 거야.”

    달로아의 손가락이 연못을 가리켰다. 연못에 비친 달의 그림자는 하늘에 걸린 달처럼 일부가 사라진 상태였다. 일부가 사라진 달의 그림자가 물결에 따라 일렁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천천히 노란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러자 하얀 눈 위에 빛으로 만든 길이 생겨났다. 그 빛나는 길 끝에는 새까만 어둠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이 길에 오를 수 있는 건 이 사람뿐이야.”

    달로아가 유진을 가리키며 말했다. 달의 길에 오를 수 있는 것은, 리뮈르의 피를 이은 자와 리뮈르 혈족의 안내를 받는 겨울 늑대의 눈을 가진 사람뿐이었다.

    “알아.”

    고개를 끄덕인 아리아드네가 유진에게서 한 걸음 멀어지며 손을 흔들었다.

    “잘 다녀와, 기다릴게.”

    빛이 인도하는 길 위에 먼저 오른 달로아가 그를 재촉했다. 그는 아리아드네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유진이 달로아를 따라 빛나는 길 위에 발을 딛자 그들의 모습이 한 겹 막을 씌운 것처럼 희미해졌다. 이대로 그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아리아드네는 저도 모르게 유진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런 그녀를 붙드는 손이 있었다.

    “리뮈르 공자?”

    아리아드네를 붙든 건 달미에르였다. 느슨하게 묶은 그의 머리카락이 유난히도 붉었다. 눈이 불편한 달미에르 뒤에는 시종이 함께였다.

    “로아는 달로아인데 저는 왜 공자입니까?”

    그가 녹을 것처럼 부드러운 얼굴로 물었다.

    “이 손부터 놓아주시겠어요?”

    아리아드네의 요청에 달미에르가 난감하다는 얼굴로 웃었다.

    “달의 길에 서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시면요.”

    아리아드네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죠.”

    그가 아리아드네를 붙들고 있던 손을 조심스럽게 놓아주며 덧붙였다.

    “달의 마법사가 허락한 사람이 아니라면 달의 길에 오를 수 없습니다. 저 길을 걷고 싶으신가요?”

    달그림자가 만들어 낸 달의 길은 저토록 환하게 빛나고 있는데, 그 위에서 걷고 있을 유진과 달로아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눈에 보인다고 아무나 걸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아리아드네는 고개를 저었다.

    “너무 아름다워서 저도 모르게 홀렸나 봐요.”

    그의 중요한 일을 망칠 뻔했다. 밤하늘의 달은 그새 한 입 더 사라졌다. 제가 할 일은 그를 붙들어 두는 것이 아니었다.

    달미에르는 아무 말 없이 아리아드네 곁에 서 있었다. 아리아드네가 염려스럽다는 어조로 말했다.

    “이런 날 처소에 계시지 않고요.”

    “공녀께서도 나와 계셨잖습니까.”

    “특별한 날이니까요.”

    그렇게 대답한 아리아드네는 제 머리보다 조금 높이 달린 노란 등을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렸다.

    하늘에 걸린 달은 점차 그림자에 먹혀 사라지는데, 지상에 걸린 수백 개의 달은 보란 듯이 어둠을 몰아내고 있었다.

    “공저 내부에 월식을 볼만한 장소가 있는데 안내해 드릴까요?”

    부드럽고 정중한 권유였다. 며칠 전만 해도 자신을 경계하던 달미에르였다. 아리아드네는 갑자기 변한 그의 태도가 의아했다.

    “아니요. 저는 여기가 좋아요.”

    “정말 이 장소가 좋아서 그러시는 것 같진 않고……. 그를 기다리시는 겁니까?”

    “그 사람과 약속했으니까요.”

    어딘가 불편한 질문에 아리아드네는 여지를 남기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대답을 들은 달미에르가 작은 미소를 머금었다.

    “로아는 리뮈르 바깥세상을 늘 궁금해했지만, 저는 한 번도 리뮈르 바깥이 알고 싶지 않았는데…….”

    잠시 말을 멈춘 그의 희끄무레한 눈동자가 아리아드네를 찾는 것처럼 작게 흔들렸다.

    “일 년 내내 푸르다는 메르디에스는 과연 어떤 곳일지 조금 궁금해졌습니다.”

    작은 정적이 둘 사이에 맴돌았다.

    “……공자께서 관심이 생겼다는 메르디에스에 저도 포함인가요?”

    아리아드네는 담담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조금도 놀라지 않고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짐작하신 대로.”

    갑작스레 변한 그의 태도에 어느 정도 짐작했으나 이렇듯 선선히 인정할 줄은 몰랐다.

    “감사한 일이네요. 두 공가의 교류를 원하는 저로서는 메르디에스에 관심이 생겼다는 공자님의 말씀이 반갑기도 하고요.”

    아리아드네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제 왼손을 들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지금 제 네 번째 손가락이 다른 곳에 매여 있어서요.”

    영혼과 사랑을 품고 있는 네 번째 손가락이 다른 곳에 매여 있다는 말은 정인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를 기다리시는 겁니까?

    달미에르는 조금 전 그렇게 물었다. 이미 제 마음이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이었다. 아리아드네는 싱긋 웃으며 덧붙였다.

    “공자께서도 짐작하고 계시겠지만.”

    “그 또한 짐작하신 대로.”

    달미에르는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였다.

    “곧 눈이 올 것 같군요.”

    허공을 향해 손을 내민 그가 속삭이듯 말했다. 아리아드네도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휘이잉, 거센 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머리카락을 흩트려 놓았다. 눈을 가린 머리카락을 치우려 손을 뻗은 그때였다.

    사락, 부드럽고 가벼운 무언가가 그녀의 손등에 내려앉았다. 새까만 하늘에서는 하얀 눈송이가 나풀나풀 내려오고 있었다.

    달미에르의 손바닥 위로도 하얀 눈송이가 내려앉았다가 이내 물이 되어 녹아 버렸다.

    마음이란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다. 그 밤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달미에르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 왜 그렇게 되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틀 전 달로아와 달 축제를 보러 리뮈르 시내에 나갔던 그 밤, 축제의 클라이맥스에서 춤을 추겠다며 광장으로 뛰쳐나갔던 달로아가 슬그머니 돌아와 달미에르의 손을 잡았다.

    ―왜 벌써 와? 메르디에스 공녀는 어쩌고.

    ―좀 더 놀고 싶다나 봐. 나중에 약속 장소로 오기로 했어.

    ―로아, 너 또 어디를 가려고…….

    ―좋은 데! 미에르, 너도 이럴 줄 알고 온 거 아니야?

    신이 난 달로아는 그의 손을 끌고 군중 사이를 헤치고 나가더니 어딘가로 숨어들었다. 시끌벅적한 소음과 가게 안 가득한 음식 냄새로 달미에르는 그곳이 뒷골목 주점임을 쉽게 알아차렸다.

    ―오늘은 이 누나가 다 살게. 우리 동생 먹고 싶은 거 다 골라.

    ―진짜, 저게…….

    ―먹기 싫음 마라. 내 마음대로 시켜야지.

    그렇게 달로아와 옥신각신하던 중에 아리아드네가 들이닥쳤다. 여자에게서는 비 내린 뒤 숲속에서나 날 법한 싱그러운 냄새가 났다.

    ―뭐야, 왜 벌써 왔어? 시간 더 끌어 주기로 했잖아.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됐어. 대신 여기서 그만큼 시간 보내면 되잖아.

    미리 약속한 것과 뭐가 달라졌는지 달로아가 연신 투덜거렸지만 여자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받아쳤다.

    둘의 대화로 미뤄 짐작해 보자면 아마도 아리아드네가 약속한 만큼 시간을 끌어 주지 않은 모양이었다.

    ―흐음, 그 잘난 놈은 어디에 버리고 왔어?

    달로아가 의아하다는 어조로 물었다. 그러고 보니 달미에르에게도 유진이라는 그자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공기처럼 존재하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할 때가 있는가 하면, 아무 말 없이 서 있는 것만으로 모든 것을 압도하는 기이한 존재감을 가진 사내.

    ―곧, 올 거야.

    그 말을 하는 아리아드네의 목소리에서 달미에르는 기묘한 고양감을 느꼈다.

    ―그래? 잘됐네.

    시끄러운 장소 탓인지, 아니면 오랜만의 외출에 잔뜩 들뜬 탓인지 달로아는 아무것도 짐작하지 못하는 목소리였다.

    ―그럼 내가 주문하고 올게.

    자리에서 일어난 달로아는 그가 말릴 새도 없이 멀어졌다. 시끌벅적한 소음 사이로 주문을 하는 듯한 달로아의 익숙한 목소리가 드문드문 이어지다 끼이익, 하는 마찰음이 들렸다.

    ‘뒷문으로 도망갔군.’

    이 정돈 그도 예상했던 일이었다.

    ―지금 막 우리 테이블 주문을 마친 달로아가 뒷문으로 빠져나갔어요.

    맞은편에 앉은 여자가 그 사실을 제게 알려 줄 줄은 몰랐지만.

    ―그럴 것 같았습니다.

    그의 말에 여자가 소리 내어 웃었다.

    곧 달로아가 주문한 술과 요리가 나왔다. 아리아드네는 그에게 요리의 생김새를 설명하며 테이블 위에 요리를 차례대로 올려 두었다.

    ―술은 즐기시나요?

    쪼르륵 소리와 함께 여자가 물었다. 잔에 술을 채우는 소리였다.

    ―그다지.

    달미에르는 제 앞에 놓인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는 리뮈르 사람치곤 술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단지 익숙할 뿐.

    ―그런가요? 전 좋아해요. 마시는 것도 이용하는 것도.

    작게 맞장구를 친 여자가 잔을 드는가 싶더니 이내 알코올 냄새가 그의 코를 찔렀다.

    ―……술을, 쏟으셨습니까?

    ―네, 어쩌다 보니.

    지나치리만큼 태연한 목소리였다. 여자는 실수로 술을 쏟은 사람의 태도가 아니었다.

    그녀는 이후로도 종종 그의 빈 잔을 채워 줄 뿐 제 잔에는 술을 따르지 않았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술은 한 잔도 하지 않은 그녀에게서 술 냄새가 진동했다.

    ―어떤 걸 드시고 싶으세요?

    그녀는 그의 접시 위에 한입에 먹을 수 있도록 작게 자른 음식을 놓아 주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대화를 할 때도 눈이 보이지 않는 자신을 배려하는 것이 느껴졌다. 적당한 화제를 자연스럽게 꺼내는 것은 물론 표정을 대신할 감탄사를 자연스럽게 흘렸다.

    가까운 사람 중에 맹인이 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번거로우실 텐데 괜찮습니다.

    ―아, 사실 제가 조금 긴장되는 일이 있는데 손을 움직이는 게 마음이 편해서요.

    이상한 여자였다.

    셈이 빠르기론 둘째가라면 서러울 메르디에스의 후계면서 빠른 길을 두고 둘러 가는 길을 택하는 여자. 술은 한 잔도 입에 대지 않으면서 제 몸에 술을 쏟는 기행을 일삼는 여자.

    그의 손끝에서부터 무언가가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것 같았다. 익숙한 감각이었다.

    눈이 보이지 않게 된 열 살 이후로 그는 낯선 것을 마주할 때마다 두려움을 느꼈다. 그리고 그것에 지고 싶지 않다는 호승심으로 내내 버텨 왔다.

    그는 온 신경을 집중해 여자를 관찰했다. 예민해진 신경이 팽팽히 당겨진 그때, 멀리서 끼이익 하는 마찰음이 들렸다.

    그와 동시에 풀썩, 테이블 위로 무언가가 떨어졌다. 조금 전까지 멀쩡하게 그와 대화하던 여자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공녀?

    ―쉿!

    당황한 그가 여자를 부르자 바람이 섞인 대답이 다급하게 되돌아왔다.

    그리고 온 세상이 묵직하게 내려앉는 것 같은 감각과 함께 모든 소리가 멎었다. 공기만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 남자였다. 이계의 방문자 유진.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하나도 빼놓지 말고 말해.

    초조하고 다급한 유진의 목소리가 그를 다그쳤다. 애타는 남자의 목소리에는 미처 숨기지 못한 감정들이 덕지덕지 묻어났다.

    아아, 알 수 없었던 여자를 이해하는 순간이었다. 오래도록 잡고 있던 난제를 풀어낸 것처럼 손끝이 짜릿하게 달아올랐다.

    그녀가 제 앞에서 했던 종잡을 수 없던 행동들이 사랑을 갈취하려 판 함정이었다니. 어이없고 황당하고 존경스럽기도 하고 더없이 사랑스러웠다.

    그렇게 사랑에 빠진 여자를 이해한 순간이 그에게는 사랑에 빠진 순간이 되었다.

    사랑은 이해를 동반했다. 가리고 있던 것들이 사라지자 여자의 말과 행동에 담긴 진심이 보였다.

    ―나는 그 소개장을 빌미로 리뮈르의 누구에게든 어떠한 것도 요구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더는 상처 주고 싶지 않아서요.

    ―메르디에스가 이룩한 부와 권력을 이어받았으니 그 뒤에 있는 그림자 또한 마땅히 제 몫입니다.

    아리아드네는 유진의 품에 안긴 채로 사라졌다.

    그녀가 사라진 자리에서는 여전히 비 내린 뒤의 숲 냄새가 났다. 젖은 풀과 나무, 꽃이 뿜어내는 싱그러운 생명의 냄새. 황폐하고 쓸쓸한 이 땅의 사람들이 그토록 갈구한 풍요와 생명의 냄새.

    ―바람은 밖에서 불어오는 거야. 바람이 불어오면 거기에 휘말리는 사람은 도리가 없는 거지.

    이미 이곳은 바람의 한복판이었다.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느라 저도 모르게 옅은 웃음을 머금은 달미에르가 손을 뻗어 바람을 느꼈다.

    바람에는 찬 기운이 섞여 있었다. 눈이었다. 그의 손에 내려앉은 눈은 그대로 물이 되어 뚝뚝 떨어졌다. 이루지 못할 제 마음처럼.

    그렇다고 그것이 서럽거나 슬프지는 않았다. 자신이 무엇을 바라고 이러는지도 알 수 없었다. 사랑에 빠진 모습을 사랑하게 되다니.

    “정말 눈, 이 오네요.”

    그녀의 목소리였다. 눈 내리는 광경을 자주 접하지 못했을 테니 신기할 법도 하건만, 평소보다도 낮은 목소리는 침중한 구석이 있었다.

    “혹시 처음이신가요?”

    “아니요, 어렸을 때 한 번 메르디에스에 눈이 내린 적이 있었어요.”

    파시파에가 세상을 떠났던 그날도 이렇게 눈이 펑펑 내렸다. 아리아드네에게 눈은 이별의 다른 이름이었다.

    눈이 내리자 주위가 온통 적막에 잠겼다. 날리는 눈이 달 등의 노란빛을 반사하며 사방으로 흩날렸다.

    ‘오늘도 누군가가 내 곁을 떠나는 걸까.’

    어쩐지 그런 생각이 아리아드네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때, 하얗게 쌓인 눈 위로 큰 그림자가 졌다. 커다란 두 쌍의 큰 날개가 하얀 눈 위에서 펄럭였다.

    “위를 보시면 안 됩니다.”

    주위에 숨어 있던 무장한 리뮈르 기사들이 아리아드네와 달미에르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

    그림자의 형태로 보아 마물의 정체는 아마도 거대한 잠자리의 형상을 한 네우라인 듯했다. 네우라의 날개에서 떨어지는 가루를 맞으면 실명할 위험이 있었다.

    “바람을 등지고 네우라에게서 최대한 멀리 떨어지십시오.”

    기사들이 계속해서 주의해야 할 점을 알려 주었다. 네우라의 눈동자가 소리가 나는 아래쪽으로 향했다.

    아래는 곳곳에 걸린 등불로 대낮처럼 밝았다. 갑자기 밝은 빛을 본 탓인지 네우라의 주황색 동공이 가늘어져 있다. 수많은 겹눈이 있어야 할 자리엔 하나의 눈동자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마치 인간의 눈처럼.

    네우라와 눈이 마주친 그 순간, 뿌우우― 마치 트럼펫을 부는 것 같은 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사람의 얼굴과 사자의 몸을 가진 식인 마물 마르티코라스의 등장이었다.

    “여기가 사막이야? 이젠 별것들이 다 설치네.”

    리뮈르 기사들은 아무것도 아닌 척 태연하게 중얼거렸지만 상황이 좋진 않았다.

    네우라 가루로 몸을 사려야 하는 이때, 식인 마물인 마르티코라스를 상대하는 것이 쉬울 리 없었다.

    마르티코라스가 강철 같은 꼬리를 휘두를 때마다 윙윙, 바람을 가르는 거센 소리가 났다.

    “불화살을 쏴라.”

    지휘관의 명령에 네우라를 향해 불화살이 날아들었다. 눈동자에 불화살이 박힌 네우라가 속속 지상으로 떨어졌다.

    뿌우우우우― 불화살이 스친 마르티코라스 한 마리가 고막이 터질 것처럼 울어 대며 지휘관을 향해 거세게 달려들었다.

    앞발을 치켜든 마르티코라스가 지휘관을 목을 물어뜯으려 입을 벌렸다. 세 겹으로 난 마르티코라스의 이빨이 하얗게 빛났다.

    그리고, 마르티코라스의 목에서 붉은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사자의 형상을 한 마물의 피부가 새빨간 피로 뒤덮였다.

    “대형을 지켜라!”

    높고 선이 얇은 목소리가 외쳤다. 새하얀 눈이 펑펑 내리는 가운데, 불처럼 붉은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이윽고 새하얀 눈 위로 마르티코라스가 쓰러졌다. 마르티코라스가 흘린 피로 흰 눈이 붉게 물들었다.

    달이 그림자에 모두 먹힌 새까만 밤, 하지만 지상에 걸린 수백 개의 달이 그 빛을 대신하고 있었다.

    펄펄 날리는 흰 눈이 붉은 머리카락 위로 떨어졌다. 온통 붉은 옷을 입고 나타나 대번에 마르티코라스의 숨통을 끊은 그 사람의 얼굴을 확인한 리뮈르의 기사가 중얼거렸다.

    “……승리의 니케가 돌아오셨다.”

    기사의 중얼거림에 그녀가 제 얼굴에 튄 마르티코라스의 붉은 피를 닦아 내며 웃었다.

    “싸움에는 빠질 수 없지.”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리뮈르의 공비, 달리케의 등장이었다.

    라이덴의 장녀였던 피오나가 파시파에에게 받은 ‘니케’라는 이름은 승리를 관장하는 신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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