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0화 (60/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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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 둘! 하나! 둘!”

    아리아드네는 밖에서 들려오는 구령 소리에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다.

    어슴푸레한 새벽, 하얀 눈으로 뒤덮인 세상 속에서 건장한 사람들이 부지런히 몸을 단련하고 있었다.

    쿵쿵, 구령과 함께 일정한 간격으로 땅이 울렸다. 땅을 밟는 발소리에 심장이 같이 뛰었다. 생명이 살아 숨 쉬는 소리였다.

    아리아드네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북부의 매서운 바람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마치 희망이 제 손끝에 잡힐 듯이 맴도는 것만 같았다.

    차가운 공기에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해 바늘로 쑤시는 것 같았던 머리도, 악몽으로 흠뻑 젖었던 몸도 잠잠해졌다.

    “뭐 해?”

    갑자기 걸음을 멈춘 아리아드네가 의아한 듯, 앞서가던 여자가 뒤를 돌아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아침 안 먹을 거야? 벌써 늦었어.”

    불이 타오르는 것 같은 선명한 주황색 머리를 가진 여자가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달로아 리뮈르.”

    [뭐야, 눈앞의 주인이 무슨 마음인지도 모르는 멍청한 사냥개가 여기도 있었네.]

    울컥 피를 토하며 죽어 가던 달로아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했다.

    “왜 불러? 바쁜 아침에 쓸데없이.”

    달로아는 어서 용건을 말하라는 듯 고개를 까딱 움직였다.

    “…….”

    하지만 아리아드네는 가슴을 짓누르는 무게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심판의 리뮈르, 페렌트의 다섯 기둥 중 하나, 성물 심연의 눈을 가진 공가, 북쪽 국경을 지키는 페렌트의 장벽. 리뮈르의 마지막 생존자였던 달로아가 죽은 건 바로 아리아드네 자신 때문이었으니까.

    과거의 잘못을 잊지 말라는 듯이 리뮈르에 도착한 날부터 달로아가 죽었던 그날의 꿈을 꾸었다.

    [좀 더 일찍, 우리, 가 서로를…… 알았더라면…….]

    검붉은 핏덩이를 뚝뚝 흘리며 죽어 가던 달로아가 어떤 마음으로 아리아드네를 향해 손을 뻗었는지, 죽어 가며 힘겹게 내뱉었던 그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아리아드네는 소중한 것을 모조리 잃은 뒤에야 알 수 있었다.

    카이엔의 욕심에 희생당한 것은 메르디에스의 사람들만이 아니었다. 이 땅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지켜야 할 건 메르디에스만이 아니었다.

    “잠이 덜 깼나? 먹기 싫으면 말고.”

    말이 없는 아리아드네를 오해했는지 달로아가 어깨를 으쓱하더니 몸을 돌렸다.

    “아니, 먹을 거야. 그렇게 고대하던 리뮈르의 아침인걸.”

    아리아드네가 마음의 짐을 털어 내려는 듯 싱긋 웃으며 달로아 뒤를 쫓았다.

    이전 삶에서는 전혀 몰랐던 세계가 이곳에 존재하고 있었다. 자신이 기억하는 일은 전부 없었던 일인 세계가. 아리아드네는 낯선 공기를 움켜쥘 듯이 주먹을 쥐었다.

    하지만 낯선 세계는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았다. 리뮈르의 차가운 공기가 온몸을 감싸는 데도 손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침이면 사라지는 제 악몽처럼.

    그 모든 건 꿈이지만 동시에 분명 존재했던 과거였다. 이미 경험한 과거이자 언젠가의 미래가 될지도 모르는 일.

    하지만 그 모든 일은 꿈으로 끝나야 했다. 눈앞의 달로아도, 리뮈르의 사람들도, 무고한 이들이 희생당하는 일은 한 번으로 족했다.

    “잘 생각했어. 아까도 말했지만 우리 아버진 아침이 아니면 보기 힘들거든.”

    뒤를 힐끗 돌아본 달로아가 바쁘게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해가 뜨기도 전에 자신을 찾아온 달로아는 그렇게 말했다. 아버지를 보고 싶으면 지금뿐이라고.

    “이러다 늦겠다.”

    달로아의 재촉에 아리아드네는 웃으며 다이닝 홀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 한걸음에 리뮈르의 평화로운 일상이 걸려 있었다.

    “늦었군.”

    그것이 리뮈르 공작 달헤임이 다이닝 홀에 도착한 아리아드네에게 처음으로 건넨 말이었다. 리뮈르의 겨울바람만큼이나 차가운 인사였다.

    첫인사라기엔 지나치게 간결했지만 그 속에 어떤 책망이 들어 있는 것 같진 않았다. 어떤 감정을 담은 말이 아니니 그것에 기분 나빠할 이유도 없었다.

    “제가 아침 식사 시간을 몰라 결례를 범했습니다.”

    아리아드네가 상석에 앉은 중년 남성을 향해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공녀야 모르는 것이 당연하니 결례랄 것도 없지.”

    예의상 건넨 사과에는 칼로 자른 것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달헤임의 시선은 제 딸인 달로아에게 닿아 있었다.

    시선을 받은 달로아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죄송해요. 손님을 데려오느라 좀 늦었어요.”

    고개를 짧게 끄덕인 달헤임이 그제야 식기를 들었다.

    “그럼 들지.”

    그 말과 함께 아침 식사가 시작되었다. 적막한 홀에는 달그락, 식기가 움직이는 소리만이 간간이 들렸다. 말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배를 채우려는 게 아니었는데.’

    아리아드네는 눅진하게 끓여 낸 고기가 듬뿍 들어간 크림수프를 한 숟갈 뜨긴 했지만 도저히 넘어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평소라면 한밤중일 시각이었다. 더군다나 음식은 죄다 기름진 것뿐이라 빈속에 넣는 것이 고역이었다.

    ‘결례가 되지 않을 정도로만 먹으면 되겠지.’

    아리아드네는 작게 자른 음식을 조금씩 씹어 삼키며 초조한 마음을 달랬다.

    당장 무엇을 해야 한다는 조급함에 쫓겨 일을 그르치고 싶지는 않았다. 리뮈르의 마음을 얻어야 하는 일이었다. 처음부터 쉬울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저들에게 자신은 불청객에 불과하다는 것을 끊임없이 되새기며 조심스럽게 주위를 관찰했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저택의 규모에 비해 장식이나 꾸밈이 단출하다는 것이었다.

    모든 공간은 동선을 최우선으로 하여 배치되어 있었고, 불필요한 장식은 조금도 용납하지 않았다. 꼭 주인 같은 집이었다.

    아리아드네는 상석에 앉아 임무를 해치우는 것처럼 식사를 수행하는 달헤임을 살폈다.

    눈처럼 새하얀 머리는 짧게 잘라 깔끔하게 넘겼고, 눈동자는 달로아처럼 회색빛이었다. 떡 벌어진 어깨와 건장한 체격은 도무지 쉰에 가까운 나이로는 보이지 않았다.

    바늘 하나 들어갈 틈 없는 꼿꼿한 자세와 무표정한 얼굴은 어제 본 그대로였다.

    사라진 달로아를 찾겠다고 수색대라도 꾸린 건 아닐까 걱정했지만 우려했던 일은 없었다. 다만 밤나들이 나간 딸을 기다리는 아버지가 있었을 뿐이다.

    대검을 땅에 꽂은 채 대문을 지키고 선 달헤임의 모습은 흡사 저승문을 지키는 문지기 같았다. 도박장에서는 제 세상을 만난 듯 활개를 치던 달로아도 달헤임 앞에서는 순식간에 데친 야채처럼 숨이 죽었다.

    ‘부녀가 참 다르기도 하지.’

    아리아드네가 그런 생각을 하며 샐러드를 집은 그때였다.

    “키이익, 캐, 캐캑캑.”

    하급 마물이 꽉 막힌 목구멍 사이로 숨을 토해 내는 것 같은 해괴한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려 보니 얼굴이 시뻘게진 리카르도가 제 가슴을 마구잡이로 두드리고 있었다. 불편한 분위기에 사레라도 들린 모양이었다.

    벌컥벌컥 물을 마신 리카르도가 한숨 돌렸다는 듯이 숨을 내쉬었다. 물잔을 식탁에 놓다가 자신을 향한 시선을 느꼈는지 리카르도가 눈을 굴려 주위를 살폈다.

    “죄, 죄송합니다.”

    “혹시 못 먹는 음식이 있다면 애쓰지 않아도 되네.”

    “그런 건 아닙니다. 좀 긴장하는 바람에…….”

    그렇게 말하는 리카르도의 양손에는 포크와 나이프가 들려 있었다. 포크와 나이프를 어찌나 비장하게 들고 있는지 흡사 전투를 앞둔 기사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편히―”

    편히 들게나, 그렇게 말하려던 달헤임은 하던 말을 멈추고 리카르도를 빤히 바라보았다.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시선이 불편해 리카르도는 안절부절못하며 눈동자를 굴려 댔다.

    “자네 나이프를 특이하게 잡는군. 검을 배웠나?”

    달헤임이 나이프를 쥔 리카르도의 손을 가리키며 물었다.

    리카르도는 나이프의 손잡이 부분을 검을 잡듯 감싸 쥐고 있었다. 손가락의 위치와 힘을 준 정도까지 오랜 시간 검을 제 수족처럼 다룬 이의 것이 확실했다.

    달헤임의 지적에 제 손을 내려다본 리카르도가 슬그머니 손을 내리며 쑥스러운 듯이 말했다.

    “네? 네. 성 상티모니아의 성기사단 소속 리카르도라고 합니다.”

    “리카르도? 성기사단의 부단장 이름도 리카르도라고 들었는데.”

    “……부족하지만 그런 직책을 맡고 있습니다.”

    리카르도의 대답에 내내 표정 없던 달헤임의 얼굴에 놀라운 기색이 번졌다.

    달헤임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불쑥 손을 내밀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눈을 끔벅거리던 리카르도가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맞잡았다.

    “동명이인이겠거니 생각했지 본인일 줄은 몰랐네. 성기사단의 부단장이 이렇게 젊을 줄이야. 놀라운 일이군.”

    달헤임은 맞잡은 손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젊은 친구가 대단해. 자네만 괜찮다면 여기 머무르는 동안 우리 기사들에게 지도 대련을 부탁해도 되겠는가?”

    리카르도는 갑자기 쏟아지는 칭찬에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어물어물 더듬거렸다.

    “마물을 상대한 실전 경험이라면 우리 기사들도 적지 않으니 자네에게도 나쁜 일은 아닐 걸세.”

    “제가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열심히 하겠습니다.”

    붉게 상기된 얼굴로 꾸벅 인사를 한 리카르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혹시 제가 연무장을 사용해도 괜찮겠습니까?”

    “그런 정도야 얼마든지, 원하는 대로 사용하게.”

    무표정한 얼굴로 불필요한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달헤임이 마치 새 장난감을 얻은 아이처럼 눈을 빛내고 있었다.

    그는 성기사단의 훈련 방식이나 주로 사용하는 검술, 조직 체계 같은 것들을 지치지도 않고 물었다.

    답하는 리카르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상기된 얼굴에는 뿌듯함과 환희, 기쁨, 설렘 같은 것들이 가득했다.

    그도 그럴 것이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북쪽 땅, 그곳에서 대륙을 지키는 페렌트 최강의 리뮈르 기사단은 기사들의 기사였다. 그런 존재에게 인정받았으니 리카르도의 흥분도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께서 이걸 알면 억울하시려나.’

    아리아드네는 틈만 나면 쓰지도 못할 검을 손질하는 레너드의 얼굴을 떠올렸다.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이지만 재능과 이상이 일치하지 않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메르디에스 성주 레너드의 이상은 검에 있었지만 그의 재능은 돈에 있었다. 그는 두 발로 선 순간부터 검에 영혼을 뺏겨 기사가 되기를 꿈꿨다.

    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스승을 모셔와 밤낮으로 노력해도 그의 검술 실력은 조금도 늘지 않았다. 더군다나 레너드 옆에는 보기 드문 재능의 소유자가 있었다.

    커티스 리스벨, 메르디에스 기사단장인 커티스와 함께 자란 레너드는 재능의 차이를 실감하고 자연스럽게 검을 놓았다.

    이제는 검을 수집하는 것으로 오랜 꿈을 달래곤 하지만, 이름을 떨치며 활약하는 기사들의 이야기에는 아직도 귀를 쫑긋거리며 관심을 보였다.

    ‘그중에서도 리뮈르 대주를 참 좋아하셨지.’

    마주치는 일이 많지 않고 가문 간의 이해관계도 있으니 드러내 놓고 표현한 적은 없지만 아리아드네만은 알았다.

    레너드는 잠투정하는 딸에게 동화책을 읽어 주기보다는 기사들의 영웅담을 들려주는 아버지였으니까.

    그중에서도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땅에서 외롭게 싸우는 기사들의 이야기를 해 줄 때면 저도 모르게 소리가 커지던 그런 아버지였다.

    “혹시 대주님의 검술을 견식할 수 있다면 더없는 영광으로 생각하겠습니다.”

    리카르도가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달헤임은 디움 산맥 최전선에서 프레모 대륙을 지키는 리뮈르 기사단의 주인이었다. 그는 이름뿐인 주인이 아니었다.

    달헤임의 무위는 대단한 수준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리뮈르가 워낙 폐쇄적이라 그 검술을 직접 확인한 자는 드물었다.

    리카르도의 얼굴은 평소 존경했던 무인의 검술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로 가득했다. 달헤임은 주름진 눈이 가득 접히도록 흐뭇하게 웃었다.

    “이미 무뎌진 칼을 봐서 무엇하겠나. 늙은이가 제 한 몸 지키는 재주일 뿐인데.”

    껄껄 웃으며 하는 말에 리카르도는 두 손을 휘저어가며 말했다.

    “겸손이 지나치십니다. 리뮈르 기사단은 디움으로부터 프레모 대륙을 지키는 방벽이 아닙니까? 대주님께서는 그 방벽의 수호자이시고요.”

    젊은 기사의 찬양에도 달헤임은 조금도 뻐기는 기색 없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이네.”

    “그 누군가가 반드시 우리일 필요는 없잖아요?”

    심드렁한 얼굴로 음식을 헤집던 달로아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로아.”

    달헤임이 서늘한 목소리로 제 딸을 불렀다. 하지만 달로아는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녀가 맞은편에 앉은 아리아드네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메르디에스 공녀께선 어떻게 생각하나요?”

    달로아의 서늘한 시선에 아리아드네는 가슴 한편이 아려 왔다. 자신의 잘못은 리뮈르의 비극에 일조했던 과거의 일만이 아니었다.

    “리뮈르 공녀의 말씀대로 그것이 리뮈르의 몫일 필요는 없지요.”

    아리아드네는 입가를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리뮈르가 이 땅을 지켜 준 것에 감사드립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아리아드네가 리뮈르의 대주 달헤임 앞에 몸을 숙였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가?”

    리뮈르의 바람처럼 차갑고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하지만 아리아드네를 일으키는 손짓만은 더없이 정중했다.

    “네, 물론입니다.”

    아리아드네의 대답에 리카르도를 만나 풀어진 달헤임의 낯이 다시 굳었다. 달헤임은 무표정한 얼굴로 먼 곳에서 온 손님을 바라보았다.

    “사방이 산으로 막힌 곳에 있다지만 귀까지 먼 것은 아니지. 1왕자와의 관계가 원만치 않다는 소식은 들었네만 리뮈르를 자리싸움에 끌어들이려는 거라면 잘못 찾아왔네.”

    바위처럼 굳건하고 단단한 어조가 아리아드네를 밀어냈다. 달헤임은 카이엔과 틀어진 아리아드네가 리뮈르의 힘을 빌리기 위해 이곳에 온 거라 짐작하고 있었다.

    “리뮈르의 힘은 이 땅을 지키기 위한 것이지 무언가를 얻기 위함이 아니야.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조금도 움직일 생각이 없어.”

    이런 오해를 예상하지 못한 것도 아니면서 아리아드네는 태산을 마주한 것처럼 가슴이 무거웠다.

    “대주님, 저는 자리다툼 때문에 험난한 길을 넘어 이곳까지 온 것이 아닙니다.”

    달헤임은 이런 대화가 피로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포장해도 결국은 마찬가지지. 왕좌에서 멀어진 왕자를 왕으로 만들려다 그 관계가 파탄 나니 이제는 거꾸러뜨리고 싶은가?”

    “저는 정말 1왕자와 2왕자 중 누구를 차기 왕으로 지지하느냐, 그런 문제로 리뮈르를 찾은 것이 아닙니다.”

    아리아드네의 시선이 이 자리가 불편한 듯 눈알을 굴리고 있는 리카르도에게 힐끗 닿았다가 떨어졌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엘바의 사후 처리 과정에서 메르디에스는 마물의 변이와 관련된 사항을 1년간 함구하는 것에 동의했다.

    그것을 반드시 지킬 생각은 없지만 리카르도가 있는 자리에서 보란 듯이 말할 순 없었다. 카이엔의 음모와 별의 그릇이 가진 권능 또한 마찬가지였다.

    성 상티모니아의 내심을 알지 못하는 이상 리카르도는 인질에 불과했다. 인질이 있는 자리에서 중요한 정보를 떠벌릴 순 없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저 또한 이 땅을 지키려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아리아드네는 리뮈르의 비극에 책임이 있었다. 이번에는 반드시 그 비극을 막아야 했다.

    하지만 이곳에 그녀의 진심을 믿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꽁꽁 얼어붙은 빙하처럼 굳게 닫힌 마음을 열 수 있을까.

    “공녀가 무엇으로 이 땅을 지키겠단 말인가? 메르디에스의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것이 이따금 존재하지.”

    그걸 자신이 모를까. 아리아드네는 돈의 위력과 무력함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메르디에스가 가진 금력은 카이엔의 세력을 키울 순 있었으나, 카이엔이 메르디에스에게 칼을 겨눴을 때 그들을 지켜 주지는 못했다.

    “대주님, 메르디에스의 딸로 태어나 자란 제가 어찌하여 그것을 모르겠습니까? 저는 리뮈르의 마음을 돈으로 어찌해 보려는 것이 아닙니다.”

    “리뮈르가 이 땅의 파수꾼을 자처한 신념을 얕보지 말게.”

    달헤임의 날카로운 눈빛에서는 오래된 상처가 느껴졌다. 아리아드네는 제 속을 도려내는 듯한 눈을 마주하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제가 누리는 일상이 리뮈르의 희생 위에 지어진 것임을 모르지 않습니다.”

    닿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진심을 건넸다.

    “그거 너무 겉으로만 번지르르한 말 아냐?”

    그때, 달로아가 불이 붙은 것처럼 선명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다시 한번 끼어들었다.

    “로아.”

    “아버지, 전 지금 화를 내는 게 아니라 그냥 할 말을 하는 것뿐인데요.”

    달헤임이 만류하려 들자 달로아는 오히려 억울하다는 얼굴을 했다.

    “여기가 우리 땅이라지만 우리가 이 속에서 웅크리고 산 것까지 우리 선택이었던 건 아니잖아요.”

    달로아가 이번에는 내내 자리만 지키고 있던 유진을 향해 고개를 쭉 내밀었다.

    “그쪽, 심연의 눈을 보러 온 거지?”

    이번에도 달로아의 말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달헤임이었다. 그가 낮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로아, 예를 갖춰라.”

    성 상티모니아의 영향력이 페렌트 내에서 어떠한가는 차치하더라도, 성 상티모니아의 교황은 한 나라의 수장과 동등한 대우를 받는다.

    유진은 성 상티모니아 내에서 교황 그 이상의 지위를 인정받고 있었다. 그러니 관례상 페렌트의 네 공작이라 하더라도 그에게 말을 낮출 순 없었다.

    “저 이분이랑 어제부터 말 텄는데요.”

    달로아의 대꾸에 달헤임의 한숨이 깊어졌다. 저 눈가의 주름 중 상당수가 달로아 때문일 듯싶었다.

    “원하시면 높여 드리고요.”

    “됐어.”

    유진의 대답에 달로아가 그것 보라는 듯 고갯짓을 했다. 달헤임은 이런 딸이 익숙한 듯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들었어? 심연의 눈이 어떤 성물인지?”

    “마음을 보는 성물이라더군.”

    리뮈르가 가진 성물 ‘심연의 눈’은 마음을 보는 권능을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맞아, 그렇다 하더라고. 심연의 눈을 부릴 수 있는 자는 타인의 마음을 볼 수 있대.”

    달로아는 마치 흥미로운 가십을 전하는 것처럼 가벼운 태도였다. 씨익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은 달로아가 아래를 손짓하며 덧붙였다.

    “그게 우리가 이곳에 갇힌 이유야. 천문을 읽고, 황금을 쏟아 내고, 바다를 다스리고, 죽음을 피하게 하는 그런 대단한 성물을 가진 자들도 제 마음을 들키긴 싫었던 거지.”

    달로아의 설명대로였다. 사람들은 심연의 눈이 가진 권능을 불편해했다.

    “모두가 우리를 두려워하고 미워했어.”

    심연의 눈을 두려워한 사람들은 합심하여 리뮈르를 몰아냈고, 그렇게 쫓겨난 그들은 미련 없이 권력을 버렸다.

    리뮈르는 권력을 다투기에는 지나치게 강직한 성품이었다. 권력에서 멀어지고도 그들은 굳건히 제 자리를 지켰다.

    자신을 몰아낸 자들을 위해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땅에서 외로운 싸움을 이어 가는 사람들. 리뮈르가 기사들의 기사로 불리는 진짜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심연의 눈을 부릴 수 있는 리뮈르의 혈통은 이미 끊긴 지 오래인데도 말이야.”

    심연의 눈은 성물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었다. 리뮈르의 피를 이은 자 중에 성물의 권능을 발휘할 수 있는 자가 나타날 때만 그 의미가 있었다.

    심연의 눈은 본디부터 그리 자주 발현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리뮈르를 쫓아낸 것이 무색하게 심연의 눈은 오래도록 소식이 없었다.

    “뭐, 그렇다는 거야.”

    달로아가 한쪽 눈을 살짝 찌푸렸다.

    “그렇게 쫓아낼 땐 언제고 희생이니, 감사니 말로만 하고 입을 씻기엔 좀 염치없지 않아?”

    내내 유진을 보며 설명하던 달로아가 고개를 돌려 아리아드네를 바라보았다. 아리아드네는 고개를 돌려 달로아의 눈을 피하고 싶은 것을 꾹 참아 냈다.

    리뮈르가 그렇게 쫓겨난 것은 제가 태어나기도 전의 일이니 제 탓이 아니다, 그렇게 외면할 수는 없었다. 자신은 이제껏 리뮈르의 처지가 불합리하다는 것을 알고도 그것을 바로 잡으려 하지 않았다.

    페렌트의 다섯 기둥이라는 자리는 가진 권리만큼이나 지고 있는 책임이 무거워야 했다. 리뮈르의 현재는 명백한 메르디에스의 과오였다. 그것을 알기에 리뮈르와 마주하는 것이 두려웠다.

    하지만 두렵다고 피해서 될 문제던가. 그러니 더욱더 리뮈르의 비극을 막는 데 앞장서야 했다.

    “달로아.”

    달헤임이 제 딸을 불렀다. 이제까지보다 한층 무겁고 낮은 부름이었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그대로 다이닝 홀을 나가 버렸다. 딸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달헤임이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공녀를 내 집에 들인 것은 딸아이의 손님이기 때문이네. 나는 공녀에게 원하는 것이 없어. 그러니 공녀가 내게서 얻을 것도 없을 걸세.”

    달헤임의 지친 눈이 이번에는 유진에게 닿았다.

    “심연의 눈은 아무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 때나 볼 수 있는 것도 아니지요. 리뮈르의 성물을 보시려거든 때를 기다리셔야 할 겁니다.”

    그 말을 끝으로 달헤임마저 다이닝 홀을 떠났다. 채 비우지 못한 음식들이 차갑게 식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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