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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롤린이 탄 마차는 메르디에스에 점점 가까워졌다. 굳이 커튼을 들어 창밖의 풍경을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익숙한 느낌에 캐롤린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모든 것이 왕도와는 달랐다. 내리쬐는 햇볕은 적당히 따뜻했고, 공기는 포근하고 가벼웠다. 오가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활기가 넘치겠지.
그들이 쏟아 낸 에너지로 가득한 이 땅은 약동하는 생명력을 뽐내듯 자랑하고 있을 테고. 눈을 감고도 이 모든 것이 머릿속에 생생하게 그려졌다.
캐롤린은 이곳의 공기를 함빡 들이마셨다. 가슴이 뛰었다. 오래 떠나 있었던 것도 아닌데 어쩐지 눈가가 시큰거렸다.
빠르게 달리던 마차가 천천히 속도를 줄이더니 기사가 마차 옆으로 말을 붙여 왔다.
“곧 도착합니다. 리스벨 백작저로 모실까요?”
기사의 물음에 캐롤린은 천천히 감은 눈을 떴다. 고향에 도착한 제 감상은 잠시 뒤로 미뤄 두고 마음을 다잡았다. 준비해 둔 답이 지체 없이 흘러나왔다.
“아니, 본성으로 가요.”
한시가 급했다. 카이엔이 벌이고 있는 일도, 아리아드네가 리뮈르로 떠난 이유도, 그리고 메르디에스로 돌아오는 동안 있었던 일도. 마음에 걸리는 일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자신만을 오매불망 기다렸을 사람들에게 어두운 얼굴을 보여 줄 순 없었다. 마음을 가다듬은 캐롤린은 그린 듯한 미소를 띠며 마차에서 내렸다.
“리스벨 영애.”
메르디에스 본성에 도착한 캐롤린을 맞은 것은 글레나였다. 담담한 얼굴이었지만 평소보다 두 발짝 앞선 글레나의 자리가 그녀의 초조함을 알려 주었다.
“린즈 부인.”
캐롤린은 생긋 웃으며 글레나의 손을 맞잡았다.
“이미 소식을 받으셨을 줄로 압니다만.”
잠시 말을 멈춘 캐롤린이 글레나 뒤로 줄줄이 서서 귀를 쫑긋거리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좀 더 명료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리아드네의 약혼은 원만히 파기되었습니다.”
마치 최후의 판결을 기다리는 것처럼 초조했던 낯빛들이 순식간에 풀어졌다.
“이얍!”
정체불명의 감탄사를 흘린 건 아리아드네의 시녀 중 한 명인 줄리였다. 줄리는 꽉 움켜쥔 주먹을 작게 휘두르다 주위를 살피고는 슬그머니 주먹을 내렸다. 평소 엄격한 글레나도 오늘만큼은 너그러웠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사람들이 두리번거리더니 슬금슬금 캐롤린 주위로 몰려들었다. 아리아드네의 파혼이 성사되었다는 소식은 이미 전해 들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조금 더 내밀한 정보에 목마른 사람들은 이제나저제나 아리아드네의 귀환만 기다렸다. 하지만 아리아드네의 귀환조차 시기를 알 수 없게 된 지금, 이야기를 들을 데라고는 캐롤린이 유일했다.
곁을 주지 않는 성격이라 평소 캐롤린을 어려워하던 사람들마저 슬그머니 발을 내밀었다. 캐롤린 역시 그 마음을 모르지 않았다. 이들이 사랑하는 아리아드네는 캐롤린에게도 더없이 소중한 사람이었으니까.
캐롤린은 초조했던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듯이 천천히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캐롤린이 하는 별것 아닌 이야기에도 사람들은 저마다 귀를 기울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은 공기마저 온기를 품고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다.
“리스벨 영애, 성주님께서 기다리십니다.”
그때, 총관 폴이 다가와 캐롤린을 레너드에게 인도했다. 레너드도 적잖이 캐롤린을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캐롤린은 재개 발을 놀렸다. 하지만 캐롤린이 마주한 레너드는 제 예상과는 좀 달랐다.
“성주님.”
“아, 캐롤린.”
깊은 생각에 잠긴 듯 관자놀이를 두 손가락으로 지탱하고 있던 레너드가 고개를 들었다. 마른 얼굴을 쓸어내린 레너드가 의자를 가리켰다.
“거기 앉으려무나. 피곤할 텐데 쉬지도 못하고.”
레너드가 미안하다는 듯 눈가를 가늘게 접으며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희미한 웃음에도 숨길 수 없는 피곤이 묻어 있었다.
‘아리아드네를 염려하신 탓인가.’
캐롤린은 그렇게 생각하며 레너드의 말을 기다렸다.
“그래, 아리아드네는 리뮈르에 갔다고? 자세한 이야기는 네게 들으라 하던데.”
레너드가 손바닥만 한 종이를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로 물었다. 아리아드네가 틸레를 통해 보낸 서신인 듯했다.
캐롤린은 아리아드네가 리뮈르로 떠나며 제게 했던 이야기들을 레너드에게 전했다.
케이루스의 성물인 별의 그릇이 지닌 능력과 카이엔의 음모, 반 호수에서 메로우가 나타난 이유와 아리아드네가 왜 리뮈르로 떠났는지까지.
이야기를 모두 들은 레너드가 한숨을 내쉬었다.
“마물을 부리는 놈이 가장 유력한 왕위 후계자라니. 정말 어디까지 가려는지…….”
찌푸린 미간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던 레너드가 메르디에스 영지 전체를 그린 지도를 보며 말했다.
“반 호수 인근에 사는 주민은 모두 성 내로 이주시키고, 호수 주위에는 출입을 금하자꾸나. 호수 주변에 경계도 세워야 할 테고.”
별일이야 있으려고, 그렇게 덧붙인 레너드는 캐롤린을 안심시키려는 듯 따뜻한 차를 손에 쥐여 주었다.
캐롤린이 차를 한 모금 삼키자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레너드가 물었다.
“오는 길에 다른 일은 없었고?”
달칵, 찻잔을 내려놓은 캐롤린이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
“왕도를 막 벗어났을 때, 카이엔 전하께서 보내신 사람이 전할 물건이 있다고 쫓아왔습니다. 막무가내로 아리아드네를 봐야겠다고 우기는 것을 말리다 대역을 맡은 시녀의 가발이 벗겨지는 소동이 있었습니다.”
그때를 생각하면 캐롤린은 지금도 제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후회보다는 수습이 먼저였다.
“리아의 행선지까지 들킨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리아가 메르디에스로 향하지 않은 것은 알고 있을 겁니다.”
잠자코 캐롤린의 말을 듣던 레너드가 한숨처럼 말했다.
“이걸 노렸군.”
“네?”
캐롤린의 반문에도 레너드는 좀처럼 입을 떼지 못했다. 한참 후에야 캐롤린은 그다음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다그마르 폐하께서 승하하셨다.”
좀처럼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서둘러 오느라 주위에 신경을 쓰지 못했다지만, 그만큼 중대한 사건이 터졌다면 아무것도 듣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그런 소식은 전혀 듣지 못, 했습니다.”
레너드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이틀 전에야 신시아를 통해서 들었다. 릭센의 사자는 아직 도착하지도 않았고.”
덧붙인 말을 들은 뒤에야 캐롤린은 납득했다.
“카이엔, 그놈이 어지간히 숨긴 모양이야. 신시아도 왕궁에 조기가 올라오고 나서야 알았다더구나.”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되면 왕궁에 남은 메르디에스 사람들이 가장 먼저 위험해진다. 왕궁에 남은 메르디에스 사람들을 빼낸 때와 다그마르의 죽음이 맞물려 소식을 듣는 것이 늦었다.
하지만 왕궁에 남은 세작들마저 모두 철수한 것도 아닌데 이토록 완벽하게 숨기다니. 아무래도 카이엔이 왕궁을 단단히 틀어쥔 모양이었다.
“이토록 갑작스럽게……. 케이루스와 리카서스의 싸움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겠군요.”
캐롤린은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이성적인 판단을 하려 애썼다.
다음 왕위 계승자가 정해지지 않은 상황이었다. 카이엔을 앞세운 케이루스와 루안을 앞세운 리카서스, 둘 중 누구도 포기하지 않을 터였다.
메르디에스가 카이엔을 선택할 리 없으니 누구를 선택하느냐는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우리가 케이루스에게서 등을 돌린 이상 1왕자께서 왕좌에 앉으실 일은 없겠지만요.”
레너드는 말을 마친 캐롤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직 모르는 건가. 메르디에스에게 이 싸움은 누구를 왕으로 지지하느냐가 아니라는 것을.
어차피 길을 걷다 보면 자연히 알게 될 일이었다. 시선을 내린 레너드가 탁자를 손가락으로 두들기며 말을 이었다.
“정상적인 왕위 계승이라면 네 공작의 승인이 필요하니 그 과정에서 시간을 끌어 볼 수도 있겠지.”
다그마르의 죽음이 작은 일은 아니나, 종일 레너드의 골치를 썩인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오늘 신시아가 추가 서신을 보냈는데…….”
톡톡, 탁자를 두들기던 소리가 멎었다.
“2왕자 루안이 괴한으로부터 습격을 당해 목숨을 잃었다는구나. 1왕자 카이엔도 크게 다쳤고.”
캐롤린은 카이엔이 다쳤다는 소식이 조금도 기쁘지 않고 불길했다. 불길한 그림자가 등 뒤에서 스멀스멀 다가오는 것 같았다.
“케이루스에서는 이것이 이계의 방문자가 한 짓이라고 공표했다. 정당한 왕위 후계자가 모두 피습당한 긴급 상황이 되는 거지.”
불길한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었다.
아, 캐롤린에게서 탄식이 절로 흘러나왔다. 범인으로 지목당한 유진은 지금…….
“그래, 범인으로 지목당한 이계의 방문자는 메르디에스 후계와 함께 사라졌고. 우리는 그 행방을 의도적으로 교란한 셈이 되는 거지.”
릭센을 벗어난 캐롤린 일행을 뒤쫓아와 소동을 벌인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캐롤린은 제 무지에 머리끝까지 열이 올랐다.
카이엔이 노린 것은 아리아드네의 부재를 확인하는 것. 바로 그것이었다. 그래야 유진과 아리아드네를 한데 묶을 수 있을 테니까.
“아주 협잡을 부리는 데는 도가 튼 놈이야. 어디서 이런 돼먹지 못한 수작을. 어린놈이 부리는 간계가 보통이 아니야.”
레너드는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자신이 그따위 협잡에 당할 사람이던가. 이렇게 나와 주니 오히려 고마웠다. 대놓고 싸우면 누가 질 줄 알고.
머릿속이 차츰 개운해지는 레너드와 달리 캐롤린의 머릿속은 엉망진창이었다.
아리아드네와 유진이 한데 묶일 이유가 하나 더 있지 않은가. 지금 그것을 레너드에게 말해야 하는 건 아닐까, 몹시 고민스러웠다.
‘아리아드네의 일인데 내 멋대로 말해도 좋을까. 그렇지만 이 상황에 중요한 정보일 수도 있는데…….’
캐롤린은 주저하다가 레너드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종일 고민하던 것을 머릿속에서 몰아내 상쾌해진 레너드가 무슨 일이냐는 듯 되물었다.
“응?”
“아, 그게 그러니까…….”
캐롤린은 땀으로 축축해진 손바닥을 맞잡았다. 메로우와 맞닥뜨렸을 때보다도 더 무서웠다.
“저, 리아가 아무래도 방문자님을 마음에 둔 것 같―”
“뭐!”
레너드가 내지른 노성에 캐롤린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그 하급 마물 같은 새끼가 감히 내 딸을 마음에 둬?”
마물은 뭐며, 그중에서도 하급 마물은 왜 튀어나왔는지 모르겠지만, 저 하급 마물이 가리키는 것은 유진이 틀림없었다.
캐롤린은 지금이라도 이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었지만 레너드의 오해를 풀어 줘야 했다. 그는 지금 심각한 오해를 하고 있었다.
“아니, 그러니까 방문자님이 아니라 리아가―”
상대를 마음에 둔 것은 유진이 아니라 아리아드네였다. 오해를 바로잡고자 하는 캐롤린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뭐? 그놈이 내 딸을 차?”
“아니, 그건 아니―”
캐롤린은 두 손을 내저으며 부인했지만 이번에도 그녀의 노력은 레너드에게 닿지 못했다.
“그놈 눈은 장식이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레너드가 길길이 날뛰었다.
“그놈! 그놈! 그으으놈!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다고!”
레너드는 흡사 입에서 불을 뿜어내는 것 같은 모습으로 괴성을 질렀다. 날개 달린 뱀 형상의 마물 자크루스가 인간의 껍데기를 뒤집어썼대도 믿을 형색이었다.
‘아, 괜한 말을 했나 봐.’
캐롤린의 후회 어린 탄식은 레너드의 괴성에 흔적도 없이 묻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