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화 (36/148)

* * *

“곧 도착합니다요.”

그렇게 말한 남자가 늘어진 살을 덜렁거리며 껄렁껄렁하게 숲속을 걸었다. 구불구불한 까만 머리카락을 보닛 안에 단단히 숨긴 캐롤린은 말없이 남자의 뒤를 따라 걸었다.

일레체의 소인이 찍힌 편지를 받은 즉시, 그녀는 소인이 찍힌 정확한 위치와 편지를 부친 사람의 인상착의를 조사했다.

소인을 찍은 우편국은 일레체의 중심가에서 북쪽으로 약간 비켜난 곳에 있었고, 편지를 부친 사람의 인상착의 또한 알버트와 정확히 일치했다.

‘알버트가 일레체에는 대체 왜…….’

그리고 알버트가 엘바의 수색대에 차출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원했다는 것, 수색대에서 이탈했을지도 모른다는 정보까지 연이어 캐롤린의 손에 들어왔다.

자연히 아리아드네가 알버트에게 남긴 편지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편지에는 고위 귀족이 썼음 직한 유려한 수사와 현학적인 표현들로 가득했지만 내용만큼은 참으로 간단했다.

그동안 마음을 다해 준 것은 고마우나 결혼을 앞둔 자신에게는 부담스러운 감정이니 멀리 떠나 주었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흔한 일이었다. 결혼을 앞두고 가볍게 만나던 이성을 정리하는 것은. 몇 번이나 다시 읽었지만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이건 마치…….’

캐롤린의 손에 들린 편지가 구겨졌다. 이 불안의 끝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을지 두렵고 무서웠다.

“이젠 다 왔습니다. 약속하신 돈은 틀림없이 주시는 거지요?”

비굴한 인상의 남자가 허리를 굽신거리며 탐욕스러운 눈동자를 빛냈다.

길렌이라고 제 이름을 밝힌 남자는 일레체에서 알버트로 보이는 남자가 지내는 곳을 안다고 했다.

그는 몸이 날랜 듯 무른 땅에서도 발자국을 남기지 않고 걸었다. 손바닥 안쪽이 단단하고 굳은살이 박인 것으로 보아 싸움도 제법 하는 뒷골목 인생이 분명했다.

호위 하나만을 대동한 캐롤린은 질 나쁜 자와 거래를 하게 된 것이 불안했다. 땅거미가 내려앉은 숲속은 당장이라도 뭐가 튀어나올 것처럼 불길했다.

“여기입니다.”

주위에 인가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사냥꾼들이 쉬어 가는 용도로 만들었음 직한 통나무집 앞에서 길렌은 두 손을 내밀었다.

“약속한 돈을 줘. 넌 여기서 기다리고.”

캐롤린은 남자는 쳐다도 보지 않은 채로 호위 기사에게 말했다. 길렌 같은 자는 상대도 하기 싫다는 티가 역력했다.

다른 이들을 뒤로한 캐롤린이 문고리에 손을 올렸다. 나무문을 밀고 들어가려는데 문고리에 찢어진 레이스 조각이 걸려 있었다.

‘이게 왜…….’

섬세한 문양과 고급스러운 촉감이 심상치 않은 물건이었다. 캐롤린은 고리에 걸린 레이스를 풀어내 손에 쥐었다.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이미 이곳을 찾은 사람들이 있었던 듯 여러 쌍의 시선들이 캐롤린을 향했다.

무장한 기사들 사이로 색이 옅은 금발의 여자가 보였다. 여자는 쓰러진 누군가를 품에 안고 있었다.

“리아?”

문고리에 걸린 레이스의 주인이 여기에 있었다.

“리, 아? 여기는 어떻게…….”

레이스를 쥔 캐롤린의 손이 마구잡이로 떨렸다. 캐롤린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을 리가 없는데 아리아드네는 고개를 숙인 채로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그 사람 알버트야?”

캐롤린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있을 리 없는 사람은 이곳에 있고, 이곳에 있어야 할 사람은 없었다. 마치 눈앞이 점멸하는 것처럼 흐려졌다.

‘알버트가 살아 있기만 하면, 그러면 아무래도 좋았는데……. 왜, 그것조차 과한 바람이었던 걸까.’

걸음을 딛는 발조차 제 뜻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어떻게 걸어야 하는지조차 잊어버린 사람처럼 알버트에게 가는 길이 멀기만 했다.

‘죽지 마, 제발 살아 있어 줘. 아직 늦지 않았다고…….’

캐롤린의 손이 쓰러진 알버트를 안고 있던 아리아드네의 어깨에 닿았다. 서서히 고개를 돌린 아리아드네가 캐롤린을 바라보았다.

‘어두워서 그런가? 머리색이 평소보다 좀 짙은…… 아, 눈동자도 좀 더……. 그러고 보니 얼굴도 좀 이상한 것 같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사람이 캐롤린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리스벨 영애?”

여자라기엔 지나치게 낮은 목소리에 움찔 놀란 캐롤린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끝났어! 이젠 난 자유야, 자유라고!”

아리아드네와 몹시 닮은꼴을 하고 있던 곱상한 남자가 제 어깨에 달린 여성용 로브를 바닥에 내팽개치며 방방 뛰었다.

그러곤 방방 뛰는 것도 모자라 진저리가 난다는 듯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조금 미친 사람 같았다.

“……리아가 아니야?”

‘그렇다면 혹시…….’

캐롤린은 서둘러 바닥에 쓰러진 사람에게로 다가갔다.

맞아서 엉망이 된 얼굴로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누워 있는 남자는 어떻게 봐도 모르는 얼굴이었다. 알버트의 얼굴이 아무리 많이 붓는다고 해도 저렇게 못생겨질 것 같진 않았다.

“알버트도 아니야?”

긴장이 풀린 몸이 그대로 바닥에 무너졌다. 어떻게 된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탕, 하는 소리와 함께 거칠게 문이 열리더니 바닥에 쓰러진 남자 위로 사람 하나가 내던져지듯이 더해졌다.

이번에는 캐롤린도 아는 얼굴이었다. 이곳까지 길잡이 노릇을 한 길렌이라는 그 살찐 남자였다.

‘이게 다 무슨 일이야.’

캐롤린이 채 고개를 들기도 전에 누군가 그녀를 불렀다.

“아, 가씨…….”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쏟아지는 눈물로 앞이 보이지 않았다. 캐롤린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그대로 고꾸라졌다.

‘아아, 살아 있어. 살았구나. 늦지 않았어.’

그것 중 아무것도 입으로 말하지 못했다. 하지만 캐롤린을 부른 사람은 말하지 않아도 안다는 듯이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울지 마세요, 제발.”

다정한 목소리에 캐롤린은 복받쳐 오르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오열했다.

“잘 찾아왔어, 캐롤린.”

이번에는 정말 아리아드네였다. 캐롤린은 알버트의 품에 안긴 채로 고개를 들었다.

그곳엔 엘바로 떠났던 아리아드네가 있었다. 어느새 어두워진 숲의 어둠을 배경으로 달빛 같은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서.

* * *

그날, 길렌은 몹시 기분이 좋았다. 이틀 후, 자신이 길바닥의 짐짝처럼 내던져질 줄은 조금도 예상하지 못해서 더 그랬다.

모처럼 좋은 패가 들어와 자꾸만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입꼬리를 아래로 잡아당기는데 늘어진 살들이 제멋대로 춤을 췄다.

“네놈은 카드 치려면 살부터 빼야겠다.”

맞은편에 앉은 사내가 그의 얼굴에 카드를 내던지며 비웃었다.

“젠장, 다 이긴 판이었는데.”

그때, 뒤틀린 나무문이 끼이익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열렸다. 평범한 사냥꾼처럼 덫과 도끼를 줄에 꿰어 어깨에 척 걸친 남자가 통나무집 안으로 들어왔다.

사냥꾼으로 위장한 남자의 현재 이름은 피터. 가끔은 찰스였다가 토마스가 되기도 했다. 뭐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지금은 일레체의 사냥꾼 피터였다. 아, 물론 잠시 뒤면 피가 터지도록 얻어터질 것을 알고 그런 가명을 고른 건 아니었다.

“우리 돈줄, 오늘 기분은 좀 어떠시냐.”

바닥에 아무렇게나 덫과 도끼를 내팽개친 피터가 손발이 묶여 침상에 나동그라진 남자를 보며 빈정거렸다.

피터의 빈정거림에도 남자는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빛을 잃은 갈색 눈동자로 아무것도 없는 허공만 바라볼 뿐이었다.

뒷골목 인생으로 살아오며 온갖 나쁜 짓은 다 해 본 그들이었지만 이번처럼 복잡한 일은 생전 처음이었다.

하지만 이 한탕만 끝내면 평생 써도 모자랄 돈이 떡하니 떨어질 예정이었다. 입이 떡 벌어질 만한 착수금을 손에 쥐었을 때부터 그들은 장밋빛 미래를 꿈꾸며 입맛을 다셨다.

“괜히 건드리지 마. 그 여자가 도착하기 전까지는 절대로 죽으면 안 되는 귀한 몸이시라고.”

카드를 내던지고 술을 벌컥 마시던 길렌이 텁석부리 수염을 득득 긁으며 낄낄거렸다. 일이 끝나고 제 손에 떨어질 돈 생각만 하면 자다가도 웃음이 터졌다.

그들이 처음으로 한 일은 엘바의 서쪽 숲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자루에 담긴 남자를 일레체로 운반하는 것이었다.

사람 하나 쥐도 새도 모르게 운반하는 것이야 늘 하던 일이라 새로울 건 없었지만, 이번 일은 쥐나 새가 꼭 알아야 한다고 했다.

적당히 흔적을 남기며 일레체까지 남자를 옮겼다. 이곳에 도착한 뒤로는 평소 하던 것처럼 남자를 꼭꼭 숨겼다.

일레체는 상업 도시라 들고 나는 사람이 많아 누구도 그들 일행을 수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지루할 정도로 쉬운 일이었다.

그나마 남자가 젊고 건장한 데다가 몸을 쓰는 것이 심상찮았지만, 뭐 제아무리 잘나 봤자 이제는 병신인걸.

피터는 잘난 놈들이 지옥에 떨어져 절망하는 걸 지켜보는 게 제일 좋았다. 나쁜 짓을 했는데 돈까지 들어오면 더 좋았다.

“이틀 뒤면 검은 머리 여자가 오지?”

의뢰인이 시킨 대로 적당히 꾸며 낸 편지를 지정된 주소로 보냈더니 얼마 되지 않아 편지를 보낸 사람을 찾는다는 의뢰가 도착했다.

편지를 받은 검은 머리 여자가 이곳에 도착하는 것은 이틀 뒤, 때맞춰 남자를 죽이고 떠나면 이 일도 끝이었다.

“그건 내가 맡기로 했어.”

검은 머리 여자가 의뢰한 금액까지 자신이 먹겠다며 길렌은 길잡이 역할을 자처했다. 피터는 거사를 앞두고 굳이 길렌과 싸우고 싶지는 않았다. 어차피 일이 다 끝나고 죽여도 되는 거고.

“많이 처먹어라. 이 돼지 새끼야.”

피터의 대꾸에 길렌이 상체를 좌우로 흔들었다. 늘어진 살들이 보기 싫게 덜렁거렸다. 살 오른 돼지 같은 길렌의 몸짓에 카드를 치던 놈들이 왁자지껄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나는 예쁜이나 보러 가 볼까.”

피터가 바닥에 던져둔 덫과 도끼를 둘러메고는 통나무집을 나왔다. 그가 맡은 역할은 찰랑이는 금발이 죽여주는 예쁜이 일행의 감시였다.

피터는 숲을 내려와서 일레체의 후미진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떠돌이 용병이나 행상으로 위장한 패거리들이 그에게 수신호로 예쁜이의 위치를 알렸다.

‘오늘은 펍이네. 우리 예쁜이는 뭐 하고 있으려나.’

피터는 매캐한 연기와 텁텁한 공기로 가득한 펍의 구석 자리에 앉아서 감자 요리와 맥주를 시켰다.

사흘 전, 일레체에 들어온 예쁜이는 오늘도 허탕을 친 듯 낙담한 얼굴로 맥주를 벌컥벌컥 마셨다. 예쁜이는 술을 참 호탕하게도 마셨다.

예쁜 얼굴이 취기에 올라 발갛게 물들었다. 그리고 예쁜이의 푸른 눈동자가 홱 자신을 앙칼지게 쏘아보았다.

‘아, 고것 참 예쁘다니까.’

많이 취했는지 예쁜이의 고개가 푹 떨어지는가 싶더니, 퍼억! 취기에 오른 예쁜이가 흥을 이기지 못하고 탁자를 걷어찼다. 두꺼운 나무로 만든 탁자가 예쁜이의 발길질에 쩍 하니 갈라졌다.

‘그러고 보면 얼굴은 참 예쁜데 떡 벌어진 어깨가 좀 아쉽단 말이야.’

옆에 있던 키만 멀대같이 크고 희미한 인상의 남자가 예쁜이를 말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터는 느긋하게 남은 맥주를 꿀꺽꿀꺽 들이켰다. 펍을 나가는 예쁜이와 우중충한 새끼는 다른 놈들이 지켜볼 테고. 피터는 예쁜이가 일찍 일어난 것을 아쉬워하며 맥주를 더 시켰다. 두툼한 뱃가죽이 술을 마시는 대로 늘어났다.

밤이 이슥하게 깊어지자 피터는 얼큰하게 취한 채로 펍을 나섰다. 어두컴컴한 거리는 음산하고 불길했다. 으스스한 느낌에 피터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저녁 공기가 제법 차가웠다.

피터는 미로처럼 얽힌 지름길로 뒷골목을 누볐다. 지나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피터에게 뒷골목은 어디나 제집과 다름없었다.

어두컴컴한 골목에 어스름한 형체가 길을 막아섰다.

“뭐야, 재수 없게.”

가래침을 뱉은 피터가 이를 쑤시며 건들거렸다. 퉤, 다시 침을 뱉은 피터가 입술을 모아 휘파람을 불었다. 곧 그의 동료들이 도착할 터였다.

어디나 주제도 모르고 설치는 놈들이 있었다. 끽해야 술 취한 취객이나 털어 보려는 놈들이겠지.

“안녕?”

하지만 피터의 예상과는 달리 로브를 벗으며 그에게 인사를 건넨 것은 젊은 여자였다. 그것도 지나치게 아름다운.

“이건, 또, 뭐…….”

구름이 걷히며 나타난 달빛에 비친 여자의 모습은 마치 인간이 아닌 것 같았다. 색이 옅은 금발은 달빛이 흐르는 것 같았고, 새파란 눈동자는 호수처럼 투명했다.

‘예쁘긴 무지하게 예쁘네. 그런데 어딘가 좀…….’

여자의 서늘한 외모와 마주한 순간 피터는 얼음을 우적우적 씹은 것처럼 속이 시렸다. 마치 옛날이야기에 등장하는 얼음 마녀 같았다. 얼굴에 홀려 따라가면 산 채로 꽁꽁 얼려 버린다는.

“지랄하지 말고 비켜. 그렇지 않으면 그 반반한 면상 다시는 자랑하지 못하게 만들어 줄 테니까.”

욕설이 절반이었어야 할 대꾸는 피터치고는 제법 온건한 편이었다. 하지만 여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입이 험하네, 재수 없게.”

발끈한 피터는 동료들이 도착하기도 전에 주먹을 들었지만 그 주먹은 허공조차 내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멈추어야 했다.

퍼억! 맥주를 양껏 마셔 늘어질 대로 늘어진 배를 어찌나 세게 얻어맞았는지 뱃가죽이 등가죽과 만나 뚫리는 줄 알았다. 뱃속이 모조리 진탕 나는 것 같은 고통에 피터는 숨이 턱 하니 막혔다.

“자랑할 만한 면상은 아닌 것 같지만 이것도 못 쓰게 만들어 줄까?”

어둠 속에서 키가 큰 새까만 남자 하나가 튀어나왔다.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힘이 모조리 빠져 버리는 압도적인 남자였다. 남자의 서늘한 눈빛에 목이 졸린 것처럼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아니, 당신이 그러지 않아도 될 것 같아.”

얼음처럼 차가운 푸른 눈을 한 여자가 말렸다.

그러고 보니 익숙한 조합이었다. 옅은 금발에 푸른 눈의 여자와 검은 머리의 장신 남자. 사흘 내내, 피터가 쫓아다닌 예쁜이와 우중충한 남자의 인상착의가 꼭 그랬다.

“설, 설마…….”

그때, 섬뜩한 느낌이 등골을 타고 쭈뼛 올라왔다. 어디선가 예리한 시선이 피터를 조각조각 내는 것 같았다.

“그 새끼는 제 몫입니다.”

낮고 거친 목소리가 피터를 향해 다가왔다. 낫을 든 사신이 제 몸뚱이를 반으로 갈라 버릴 것 같은 기세였다.

“쓰레기 같은 새끼. 어디서 그따위 더러운 시선으로 사람을 훑어.”

사흘 동안 그의 눈을 호강시킨 예쁜이가 맹수 같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새초롬한 눈매와 앙칼진 인상은 사흘 동안 본 그대로인데…….

“나, 남자?”

“어딜 봐서 내가 여자야!”

단단한 돌주먹이 그대로 피터의 머리를 후려치고 지나갔다. 피터는 사흘 동안 자신의 눈요기가 되어 준 상대에게서 피가 터지도록 얻어터졌다.

정신을 잃기 직전, 피터는 꽁꽁 묶여 눈물 콧물을 짜내고 있는 동료들의 얼굴을 본 것도 같았다.

“피터, 이젠 그만 일어나.”

누군가 피터를 깨웠다.

‘누구지?’

피터는 머리가 지끈거려서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몸이, 너무 무거워. 일, 어날…… 수가 없어.”

“그만 일어나는 게 좋을 거야.”

끄으윽, 피터는 괴상한 소리를 내며 몸을 뒤틀었다. 머리가 너무 아팠다.

나쁜 꿈을 꾼 것 같았다. 예쁜이가 누굴 그런 더러운 눈으로 보느냐며 쇠망치로 머리를 후려치는 그런 꿈…….

‘꿈? 그거 꿈이야?’

“꿈! 꿈이구나!”

정신을 차린 피터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으나 몸이 제 뜻대로 움직이질 않았다. 거기다 술을 마시고 대가리라도 깨 먹었는지 머리가 쪼개지는 것처럼 아팠다.

“잘 잤어?”

얼음 마녀처럼 요사스러운 인상의 여자가 피터를 보며 손가락을 흔들어 보였다.

“마, 마녀!”

“여전히 입이 험하네.”

여자는 생긋 웃으며 의자를 끌어와 의자 등받이에 고개를 괴었다.

“뭐, 좋아. 시간은 많으니까. 우리 대화를 좀 할까?”

정말이었다. 여자의 말대로 시간은 많았고 할 대화도 무궁무진했다. 피터는 하루하고도 반나절 동안 꼬박 몸의 대화를 나눠야만 했다.

눈두덩이 퉁퉁 부어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피터는 훌쩍 울음을 삼키며 감기지도 떠지지도 않는 눈을 깜박였다.

“그러니까 일레체에 도착한 내가 이 산장을 찾지 못하도록 교란하는 게 네 일이란 말이지. 날 감시하면서.”

“네네, 그렇습니다. 과연 영민하십니다.”

“너 같은 인간에게 칭찬 비슷한 말을 들으니까 기분이 좀, 그렇네. 그렇잖아. 네가 뭐라고, 나를.”

“죄, 죄송합니다. 실언을 했습니다.”

그의 간절한 사과에도 듣는 둥 마는 둥 심드렁히 반응한 여자가 이번에는 피터 옆에 꿇어앉은 지미를 가리켰다.

“그리고 너, 네가 할 일은 뭐라고?”

“길렌이 남자를 찾아 달라고 한 검은 머리 여자를 데리고 오는 사이에 저 돈줄― 아니, 돈님을 죽이고 이곳에서 철수하는 겁니다.”

그 말을 하는 지미의 어조는 흡사 바짝 군기가 든 막내 사병 같았다.

“그리고 철수할 때는 돈님을 죽였다는 표식을 남겨야 합니다. 표식은 문고리에 이 레이스를 다는 것입니다.”

하마터면 중요한 정보를 잊을 뻔했다는 듯이 지미는 서둘러 말을 덧붙이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럼 해야 할 일을 해야지.”

“네? 네! 그럼 어서 저 돈줄을 죽이고―”

퍼억! 헛소리의 대가는 장렬한 고통으로 되돌아왔다. 쯧, 혀를 찬 여자가 친절한 설명을 덧붙였다.

“왜 그렇게 말귀를 못 알아먹어. 표식만 남기라는 소리잖아.”

피터가 뒷골목 인생을 살며 배운 교훈 중 하나가 그것이었다. 날로 먹는 돈은 없다. 큰돈을 먹는 건일수록 탈이 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도 외면하기에는 너무 큰돈이었다.

잠시 뒤, 산 아래의 길렌에게서 검은 머리 여자가 도착했다는 신호가 왔다. 이쪽에서도 돈줄을 죽였다는 신호를 보냈다.

“그럼 이걸로 조건은 다 갖추어진 건가.”

“네! 그렇습니다!”

얌전히 무릎을 꿇은 피터 일행이 합창하듯 대답했다.

“그럼 아무 일도 없었다고 생각하고, 자연스럽게 행동해.”

“잘할 수 있습니다!”

피터의 즉답에 예쁜이로부터 돌주먹이 날아왔다.

“왜, 왜 그러십니까.”

“넌 왜 그랬냐.”

예쁜이가 무자비한 주먹질을 해 댔다. 곱상하게 생긴 외모와는 달리 참으로 매서운 주먹이었다. 나무 탁자를 한 번에 쪼갤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피터는 끝나지 않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이 시간이 어서 끝나기만을 바랐다.

“리카르도 경, 적당히 하세요.”

얼음 마녀의 말에 예쁜이의 주먹질이 뚝 멈추었다.

“지금은 죽어도 곤란하니까.”

마치 한겨울 한파가 들이닥친 것 같은 서늘함에 피터는 누운 채로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럼 우린 슬슬 나가 볼까?”

“그러지.”

얼음 마녀가 그렇게 말하자 새까만 남자가 뒤따라 나갔다.

‘나, 나도 좀…….’

피터가 자신을 데려가라는 듯 손을 뻗었지만 그 손마저도 예쁜이에게 무자비하게 밟혔다.

“끄으윽.”

피터가 괴상한 신음을 내며 몸을 말았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길잡이 길렌이 길바닥 위의 짐짝처럼 피가 터진 피터 위로 떨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