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화 (35/148)
  • * * *

    며칠째 캐롤린의 머릿속은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리멍덩하기만 했다. 캐롤린의 손에 들린 종이는 알버트가 그토록 소중히 여긴 아리아드네의 편지였다.

    하긴 생각해 보면 이상할 것도 없었다. 메르디에스 기사단의 기사 중 아리아드네를 한 번쯤 마음에 품지 않은 이가 오히려 드물었다.

    아리아드네는 찬란한 빛처럼 존재만으로도 저절로 눈이 가는 사람이었다. 바라보면 눈이 멀 것을 알면서도 눈에서 떼지 못한 이가 어디 한둘이었던가.

    지켜야 할 주인을 향한 충성심이 애정으로 변모하는 것은 드문 일도 아니다. 하물며 그 대상이 아리아드네여서야…….

    내심으론 알버트가 좋아하는 여자가 저보다 못할 거라고 단정 짓고 있었다.

    알버트를 좋아하는 마음을 내보이지 못해서 이루어지지 못한 것일 뿐, 언제고 마음만 먹으면 그의 마음만은 가질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자신했다.

    캐롤린은 제 자만이 모래 위에 아슬아슬하게 세운 누각이었음을 깨달았다. 바람이 스치기만 해도 툭 쓰러질 볼품없는 마음을 내내 품고는 그것이 비장의 무기라도 되는 양 꽁꽁 감추어 두었다.

    그런 자신이 부끄럽고, 수치스럽고, 창피하고, 허탈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견딜 수 없는 것은 자신과 알버트 사이의 장벽은 신분이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캐롤린은 알버트를 마음에 품고, 포기하고, 밀어내고, 묻어 둔 그 긴 시간 동안 두 사람의 신분만이 제 사랑의 장벽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캐롤린이 알버트를 사랑하는 마음에 그의 신분이 장벽이 되지 못했듯, 알버트가 리아를 사랑하는 것에 그녀의 신분은 장벽이 되지 못했다.

    알버트가 사랑한 것은 리아이고, 늘 곁에 있었던 자신은 한 번도 사랑한 적 없다는 사실이 못내 아프게 다가왔다.

    ‘뭐야, 짝사랑 같은 거나 하고. 바보 같은 게. 리아는 네가 누군지도 모를―’

    캐롤린은 문득 든 어떤 생각에 팔을 쓸어내렸다. 그녀는 제 손에 들린 아리아드네의 편지를 좀 더 유심히 살펴보았다.

    ―캐롤린! 너 설마…….

    ―아가씨, 전 갈 거예요. 그분께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러니까 저 보내 주세요.

    ―선물을 사서 나오는 길에 카이엔 전하와 마주쳤어. 네 선물을 사러 오셨다고…….

    ―캐롤린, 날 믿어 줘. 반드시 네 앞에 알버트를 데려올게. 그러니까 너도 내게 알버트를 데려와 줘.

    알고 있던 정보들이 뒤섞여 무엇이 진짜이고 거짓인지 알 수 없어졌다.

    지금 캐롤린에게 중요한 건 알버트가 좋아하는 여자가 누구인지 하는 것 따위가 아니었다. 알버트가 누구를 좋아하든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알버트는 사라졌고 아리아드네를 좋아한 남자들이 연달아 ‘자살’로 죽었다. 알버트를 살리고 아리아드네 주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밝혀야 했다.

    캐롤린은 제가 알고 있던 모든 정보를 다시 꺼내 놓고 조립하기 시작했다.

    ‘생각해. 분명 놓친 게 있을 거야.’

    하지만 마음이 초조하니 생각은 좀처럼 정리되지 않고 뒤엉키기만 했다. 캐롤린은 한자리에 가만있을 수 없어서 방 안을 어수선하게 돌아다녔다.

    “저, 아가씨.”

    “무슨 일이야?”

    시녀 하나가 손에 흰 종이를 들고 있었다.

    “아가씨께서 아무 대답이 없으셔서……. 죄송합니다.”

    날 선 캐롤린의 반응에 움찔한 시녀가 고개를 숙였다.

    “아가씨께 발신인이 없는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평소라면 집사나 시녀장 선에서 정리될 것이었지만, 캐롤린은 알버트의 실종 이후로는 제게 온 것이면 메모 하나도 모두 직접 확인했다.

    “두고 나가 봐.”

    캐롤린은 발신인이 없는 편지를 뜯었다.

    「그동안 살펴 주시고 아껴 주셔서 감사하고, 죄송했습니다.」

    편지에 적힌 것은 짧은 한 문장이 전부였지만 캐롤린이 몰라볼 수 없는 사람의 필체였다.

    ‘알버트…….’

    캐롤린은 무심히 넘긴 편지의 겉봉을 살펴보았다. 편지 겉봉에는 발신 지역의 소인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겉봉에 찍힌 소인은 케이루스의 상업 도시 일레체의 것이었다.

    * * *

    어둠 속을 유영하는 것처럼 떠돌아다니던 의식이 어느 풍경 속에서 점차 선명해졌다.

    어둠과 구별되지 않을 만큼 새까만 머리카락, 친분이 있다고 하기에는 어색한 거리감. 맞은편에 선 남자는 유진이었다.

    [내가 남 일에 훈수 두는 성격은 아닌데, 당신이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남자인지 잘 생각해 봐.]

    ‘아, 꿈이구나.’

    유진의 그 말을 듣는 순간, 아리아드네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음을 자각했다. 하지만 꿈속의 유진은 단순한 환상이 아니었다.

    자신의 기억에만 존재하는 과거의 유진이기도 했다.

    [당신 결혼식에 참석하라고?]

    아리아드네가 유진에게 카이엔과의 결혼식에 참석해 달라고 했을 때 그는 불쾌함을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메르디에스의 성물을 보여 준 성채로 요구한 것이었으니 그로서는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그 결혼식에서 유진은 목줄에 매여 끌려온 것처럼 내내 불쾌한 얼굴이었다.

    그랬던 사람이…….

    [신의 이름으로 무한한 축복과 영원한 행복을 기원합니다.]

    평소에는 그토록 꺼리던 ‘신의 이름’을 빌려 축하를 건네기도 했다.

    그때, 아리아드네는 곧 있을 리카서스와 메르디에스의 무력 충돌에서 유진을 이용할 마음을 먹은 터라.

    [이렇듯 과분한 축하를 받을 줄은 몰랐어요.]

    그만한 축하를 받고도 기쁘기보다 미안했다.

    유진과 나눴던 말들이 이렇게 많았나 놀랄 정도로 과거의 대화들이 끝없이 이어졌다. 그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던 일상적인 말들이 마치 설탕을 입힌 듯 달콤한 밀어로 둔갑했다.

    그리고 그 끝은…….

    [당신이 원한다면.]

    탑에 갇힌 아리아드네 앞에 나타났던 그림자가 그렇게 말하며 검은 로브를 벗는 것이었다.

    아무리 기억을 떠올리려 해도 마치 연기처럼 모호하기만 했던 윤곽이 검은 로브 아래에서 선명하게 드러났다.

    각진 턱을 따라 올라가면 굳게 다문 입술이 보였다. 그 위로 높고 곧게 쭉 뻗은 콧대가 자리하고 있었고, 그림처럼 선명한 눈썹 아래 감겨 있던 눈꺼풀이 천천히 열렸다.

    그러면, 새까만 어둠 속에서 비 오는 날의 먹구름처럼 금세라도 후두둑 제 속의 것을 모두 쏟아 낼 듯한 회색 눈동자가 그곳에 있었다.

    자신을 그 지옥에서 꺼내 주었던 그날의 그림자는 유진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검은 로브를 벗은 유진이 탑에 갇힌 자신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목이 졸린 사람처럼 새하얗게 질린 그가, 영혼이라고는 조금도 남지 않은 나무토막 같은 자신을, 어찌해 주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는 듯이.

    꿈이라는 걸 알면서도 가슴을 저미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이 아픔이 누구의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꿈속에서 자신을 저토록 아프게 바라보는 유진의 것인지, 아니면 꿈속의 자신이 느끼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과거의 누군가가 느꼈던 것인지도.

    “정신이 좀 들어?”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서늘한 감촉이 이마에 닿았다. 막 손을 씻은 듯 차가운 물기가 남은 손이 기분 좋았다.

    눈을 뜨자 유진이 젖은 머리카락에서 물을 뚝뚝 흘리며 아리아드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전부 꿈이었나. 해일처럼 밀려드는 감정의 파도에 아리아드네는 좀처럼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다.

    “나쁜 꿈이라도 꿨어?”

    그렇게 묻는 얼굴은 꿈속의 것처럼 애달프거나 안타깝지 않았다. 담담한 얼굴로 불편한 것이 없나 살펴 주는 평소의 유진이었다.

    “진짜 당신이야?”

    “그럼 가짜도 있어?”

    멍하니 자신을 보는 아리아드네가 이상한 듯 유진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나무에 등을 기댄 채로 잠들었던 아리아드네가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나, 얼마나 잔 거지?”

    “삼십 분?”

    유진이 잠시 쉬어 가자고 했던 것까지는 기억났다. 쉬지 않고 달리는 것이 이렇게 힘든 일인 줄 몰랐다. 아마도 말에서 내리자마자 기절한 모양이었다.

    “한 시간 거리에 마을이 있다니까 오늘은 그만 쉬는 게 좋겠어.”

    “그렇지만 어서 일레체에 도착하지 않으면…….”

    아리아드네를 내려다보던 유진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모두 떼어 버리고 당신과 둘만이라면 오늘 저녁이라도 도착할 수 있어. 그렇게 하기를 원해?”

    “아니.”

    그럴 수는 없었다. 카이엔이 무슨 짓을 꾸몄을지 모르니 부릴 사람이 필요했다.

    “그럼 축날 대로 축난 상태라도 하루 이틀 일찍 도착하는 게 낫겠어?”

    “아니.”

    아리아드네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유진의 말이 옳다는 것은 안다. 기사들은 그나마 나았지만 자신이나 다른 수행원들은 체력적으로 이미 한계를 넘어선 상태였다.

    하지만 알버트를 구하지 못하면 그 끔찍했던 일들이 되풀이될 것만 같았다. 초조하고 불안해서 사람들을 재촉했다.

    “오늘은 좀 편한 데서 느긋하게 쉬고 싶지 않아?”

    “……그러게.”

    유진이 손을 내밀었다. 아리아드네가 그 손을 붙잡자 그는 힘도 들이지 않고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서늘한 손과 맞닿자 초조하던 마음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그는 너무 손쉽게 자신을 움직인다. 제 가슴이 들끓는 것도, 들끓던 가슴이 진정하는 것도 모두.

    * * *

    “다들 잘 쉬었어?”

    아리아드네가 통째로 빌린 숙소의 1층으로 내려오자 와글와글 모인 일행들이 늦은 아침을 먹고 있었다. 느긋한 일정에 다들 웃음이 가득했다.

    처음부터 여비 따윈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지만 시간이 끼어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이동 경로에서 벗어나는 숙소는 잡을 수 없고, 쓸 수 있는 시간이 한정적이니 제대로 된 식사도 하지 못했다. 쫓기듯 자고 일어나는 통에 다들 예민해져 있었다.

    그러다 모처럼 찾아온 휴식이 기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아리아드네 또한 마찬가지였다.

    따뜻한 물을 받아 느긋하게 몸을 씻은 다음 향신료를 가득 넣어 구운 고기와 신선한 과일, 질 좋은 포도주도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천천히 먹었다.

    그러곤 보드라운 깃털을 가득 채운 침대에서 종일 뒹굴었더니 머릿속을 찬물에 씻은 것처럼 상쾌해졌다.

    그녀가 나타나기를 기다린 듯 기사 한 명이 다가왔다.

    “아리아드네 님, 카터의 서신입니다.”

    조사단의 수장을 맡은 카터와 서쪽 숲에서 살아남은 조셉은 남은 조사와 증언을 위해 엘바에 남았다. 카터의 서신은 엘바에서의 사후 처리와 관련된 것이었다.

    시몬은 랭스턴 공작 위에서 실각되었고 그 공백을 맡을 이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는 소식이었다. 모든 것을 알게 된 메르디에스에서 추가 인력을 보낼 거란 이야기도 함께였다.

    카터의 서신을 확인한 아리아드네는 구석 테이블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에는 길게 늘어뜨린 금발로 제 얼굴을 감춘 남자가 고개를 숙인 채 편지를 읽고 있었다.

    “푹 쉬었나요? 리카르도 경. 살리바에서는 뭐래요?”

    아리아드네의 인사에 리카르도의 고운 얼굴이 쩡 하니 얼어붙었다.

    ―그곳이 어디인가요?

    ―아마도 일레체가 아닌가 합니다.

    알버트가 일레체에 있을지 모른다는 정보를 전해 준 것은 리카르도였다.

    그의 말에 따르면 메르디에스에서 추가로 파견한 수색대가 엘바에 도착한 날 밤, 배 한 척이 사람들의 눈을 피해 은밀히 그곳을 떠났다고 했다.

    그리고 그 배에 있던 사람들이 도착한 곳이 바로 케이루스의 상업 도시 일레체였다고.

    ―그렇군요. 그럼 일레체로 떠날 준비 하세요.

    ―네? 제가 말입니까? 저는 엘바에 남아서 상황도 정리해야 하고, 성하께 보고도 드려야 하는데…….

    ―그러니까 같이 가셔야죠. 이번 일에 성 상티모니아의 책임을 조금이라도 덜고 싶으시다면 말이에요.

    그렇게 끌려오듯 동행하게 된 리카르도는 이후로도 몇 번이나 살리바로 돌아가고 싶다고 애원했다.

    ―그 이상은 정말 모릅니다. 살리바로 돌려만 보내 주시면 제가 정말 이번 일은 잘 해결하겠습니다.

    ―닥치고 따라오라면 얌전히 따라와.

    그것도 유진의 윽박에 더는 하지 못했지만.

    그동안 사람들의 싸늘한 눈빛과 차가운 대접에 시달렸는지 말끔하던 얼굴은 노숙이라도 한 것처럼 초췌해졌다.

    “뭐 반가운 얼굴이라고 마주 보고 있어?”

    유진이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움찔한 리카르도가 유진을 힐끗 보더니 시선을 피했다.

    기사라 그런가, 리카르도는 유진 앞에만 서면 유독 맥을 못 췄다. 아무래도 유진의 압도적인 무력을 목격한 탓인 듯했다.

    “잘 먹고 잘 자고 일어나서 생각해 봤더니 이상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니야.”

    아리아드네는 푹 쉬고 나서야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몰려 있었나를 깨달았다. 조금이라도 빨리 일레체에 도착해야 한다는 강박에 중요한 것들을 모조리 놓치고 있었다.

    “아마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알버트를 옮기려면 그럴 수 있었을 거야.”

    “마물을 옮겼듯이?”

    “그렇지. 그런데 메르디에스 상단원들의 실종으로 엘바를 주시하는 시선이 적지 않은 때에 배를 이용했다는 건 누구든 보라는 거지.”

    조금 멍청한 얼굴을 하고 있는 리카르도와 달리 유진은 아리아드네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미 알고 있었다.

    “맞아, 알버트는 미끼야. 알버트를 데려간 사람들은 처음부터 완벽히 숨길 생각이 없었던 거야. 미끼는 상대가 물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으니까.”

    알버트가 납치된 것은 아리아드네가 엘바행을 결정하기도 훨씬 전이었다.

    그러니 알버트의 이동 흔적을 남긴 것은 캐롤린을 끌어들이기 위한 것일 가능성이 컸다. 알버트의 행적을 찾는 캐롤린이 자연스럽게 일레체에 다다를 수 있도록.

    그것이 이번에는 자신을 불러들이는 미끼가 된 것이다.

    “처음부터 어떻게든 날 일레체로 불러들일 생각이었던 거야.”

    파혼을 미끼로 한 카이엔의 초청에 응하지 않았지만 결국은 일레체로 가게 되었듯이.

    카이엔의 목적이 아리아드네를 일레체로 불러들이는 것이라면 굳이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주연이 도착하기도 전에 막이 오르지는 않을 테니까.

    “그래서 일레체로 가지 않겠다고?”

    유진의 물음에 리카르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러면 저 이젠 살리바로 돌―”

    “아니, 가야지.”

    1초도 되지 않아 리카르도의 기대는 산산이 부서졌지만.

    “함정이라면 그곳에 가지 않는 게 가장 좋은 방법 아닌가?”

    “알버트가 있잖아. 그가 살아 있을지도 모르는데 이대로 포기할 순 없어.”

    아리아드네를 불러들이는 미끼가 알버트라면 기꺼이 그 함정에 발을 들여야 했다.

    “리카서스의 성물을 보여 주는 대가로 내가 약속한 건 엘바까지였는데…….”

    유진이 고민스럽다는 얼굴로 말했다.

    “리카서스의 성물을 보려면 왕도로 가야 해. 사람을 붙여 줄 테니 당신 먼저 가. 나도 일레체의 일이 끝나면 그곳으로 갈게.”

    왕도로 가는 길목에 일레체가 있긴 하지만 그가 동행해 줘야 할 의무는 없었다.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 없이 아무것도 못 하는 사람이 되고 싶진 않았다.

    “약속해, 위험한 일은 하지 않겠다고.”

    유진의 손이 아리아드네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아쥐었다.

    “약속할게.”

    아리아드네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만족스러운 얼굴을 한 유진이 말했다.

    “그럼 일레체에 함께 가 주지.”

    “먼저 떠나는 거 아니었어?”

    “약속했잖아. 위험한 일은 하지 않겠다고. 잘 지키는지 옆에서 감시해야지.”

    정말 겉으로만 냉랭하게 굴지 속은 조금도 그렇지 못하다니까. 겸연쩍어진 아리아드네가 귓불을 만지작거리며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그때였다. 덜컥, 나무가 끌리는 소리에 아리아드네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돌아보았다.

    두 사람이 대화하는 틈을 타 이 자리에서 도망치려던 리카르도가 반쯤 몸을 일으킨 채로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애매한 미소와 함께 남자의 결 좋은 금발이 스르르 흘러내렸다. 리카르도의 푸른 눈동자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데구르르 굴렀다.

    “리카르도 경, 이제 보니 금발에 푸른 눈이시네요. 저와 마찬가지로.”

    리카르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아리아드네가 대단한 발견을 했다는 듯 반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게, 갑자기 무슨…….”

    리카르도가 저도 모르게 주춤 물러서며 중얼거렸다. 자신이야 처음 만났을 때부터 금발에 푸른 눈이었는데, 갑자기 이러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대체 왜 그러시는지…….”

    리카르도의 의문 따위는 제 알 바 아니라는 듯, 홱 고개를 돌린 아리아드네가 유진에게 물었다.

    “우리가 이대로 일레체로 들어서면 1왕자가 붙인 눈이 따라붙겠지?”

    하지만 그것은 답을 구하는 질문이 아니라 제 생각을 확인하는 절차에 불과했다.

    “그렇게 해서는 카이엔이 파 놓은 함정에 끌려다닐 뿐이야.”

    “그럼?”

    유진이 고개를 까딱이며 되묻자 아리아드네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일레체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눈을 피해야지.”

    일레체에 들어서는 순간, 자신의 행적을 주시하고 있을 카이엔의 눈을 피할 방법은 없었다.

    “아까 그랬잖아. 당신과 나 둘만이라면 오늘 저녁이라도 도착할 수 있다고.”

    ―모두 떼어 버리고 당신과 둘만이라면 오늘 저녁이라도 도착할 수 있어. 그렇게 하기를 원해?

    하지만 유진과 함께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여기서 일레체까지는 닷새 거리. 카이엔의 눈을 피해 오늘 일레체에 도착한다면 최소한 나흘이라는 시간을 버는 셈이었다.

    “당신이 없으면 그쪽에서도 알아차리지 않을까?”

    일레체에 있을 카이엔이 심어 둔 눈이 찾는 것은 아리아드네, 일행 중 아리아드네가 사라진다면 저쪽에서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러니까 대역을 세워야지. 내 대역이 소득 없이 헛물만 켜면 그들도 방심할 거야. 그러다 방심한 그들이 알버트에 대한 흔적을 흘리기라도 하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고.”

    “지금 당신 대역을 할 만한 사람이…….”

    유진의 시선이 아리아드네를 따라 리카르도에게 닿았다. 호리호리한 체형에 곱상한 외모의 성기사는 얼핏 보면 여자로 오인할 만했다.

    “이만하면 나랑 키도 비슷하고.”

    아리아드네가 자신과 리카르도의 키를 재는 것처럼 정수리 근처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저, 저는…….”

    “저 부탁이 하나 있는데 들어줄 거죠?”

    리카르도는 그 자세 그대로 굳었다.

    마치 자신을 훑어 내리는 듯한 아리아드네의 눈빛이 말하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고생과는 비교도 안 되는 일이라고, 반드시 거절해야 한다고.

    “네? 네에…….”

    하지만 리카르도의 용기 없는 입은 제 예감을 배반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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